129
129화
2학년과 함께 한 팀 훈련이 끝난 후, 며칠이란 시간이 지났다.
1년이 되어야 강산이 바뀌고, 반년이면 강이 변하는 세상에서 며칠이라는 시간은 변화가 일어나기엔 너무나 짧은 시간이다.
하지만 악사영이라는 세상에서 고작 일주일도 안 되는 시간은 수많은 것들이 바뀌기 충분한 시간이었다.
드르륵.
허나 그렇다 하더라도 학생이 수업을 가지 않는다는 것은 바뀌지 않았다.
현실이든 소설 속의 세계든 똑같은 학생의 고충.
매일 아침마다 그 점을 살짝 후회하는 선일은 교실 문을 열었다.
평소와 같이 가장 먼저 교실로 들어온 그는 쓰고 있던 알 없는 안경을 벗으며 걸음을 옮겼다.
“하아아암...”
이어서 자리에 가방을 내려둔 그는 진득하게 하품을 내쉬며 입맛을 다셨다.
그의 시선에는 아침임에도 달아오른 햇빛이 창문 안쪽으로 들어오는 교실이 보였다.
현실과 다른 악사영의 세계라 할지라도 이 시기쯤 여름이 오는 점은 똑같았다.
“...”
덜컹.
부족한 잠을 채우기 위해 잠시 눈을 붙이려던 선일이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났다.
갑자기 햇빛이 가장 강하게 들어오는 창문 쪽으로 걸음을 옮긴 그.
스윽.
터억.
마치 유리창에 몸을 누이듯 창문틀에 등을 기댄 선일은 편안한 자세로 햇빛을 받기 시작했다.
분명 다른 학생들이었다면 벌써부터 덥다며 서로 이야기를 나눴을 테지만, 그는 전혀 그런 느낌을 받지 못했다.
다루는 마력이 평범한 불꽃의 격을 뛰어넘은 태양이기 때문일까.
슬슬 한국의 더위가 시작되는 초여름의 열기는 그의 기분을 포근하게 만들었다.
“...맞다.”
띠링!
기분 좋은 뜨거운 열기를 등으로 만끽하던 선일은 무언가가 떠오른 듯 슬며시 눈을 떴다.
이어서 그는 귀로 들려오는 기계음을 들으며 인벤토리 안으로 손을 넣었다.
쓰윽.
아공간 안에서 작고 하얀 타원형의 물체를 꺼낸 선일은 자연스레 그 표면을 매만졌다.
매끄러워 보이는 표면과 다르게 까끌까끌한 촉감이 손에서 느껴져 기분이 좋았다.
덜그럭덜그럭!
인벤토리 안이 갑갑했는지 작은 알 안에 들어있는 신수는 기분 좋게 몸을 흔들었다.
그 모습이 은근히 귀여운 탓에 선일의 입가에는 더없이 진실하고 부드러운 미소가 지어졌다.
“잠깐 여기 있어라.”
신수의 알을 한참 동안 쓰다듬던 선일은 그것을 자신의 바로 옆쪽에 놓았다.
며칠 동안 시간을 같이 보내니 알게 된 사실이지만, 신수는 햇빛을 좋아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싱그러운 열기가 느껴지는 아침의 햇빛을 말이다.
주중에는 수업에 들어갈 준비를 해야 하기에 딱히 잘 챙겨주지 못했고, 주말에는 현실의 ‘강선일’이 가지고 있던 습관 때문에 매번 늦잠을 자다 보니 아침 시간엔 꺼내주지 못했다.
달그락~
달그락~
이 정체 모를 신수는 점점 뜨거워지는 아침 햇살이 기분 좋은지 몸을 바쁘게 흔들었다.
‘강선일’이었을 시절에는 부족한 삶의 여유 때문에 애완동물을 단 한 번도 키워 본 적 없었는데.
부드러운 미소로 알을 한 차례 바라본 선일은 그제서야 다시금 눈을 감고 따스한 아침을 맞을 수 있었다.
터벅.
터벅.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시각 하나를 차단하니 다른 감각이 더욱 예민해진 선일은 교실 밖에서 느껴지는 걸음 소리에 눈을 떴다.
그런 와중에도 신수의 알은 유리창 근처를 부드럽게 굴러다니며
드르륵.
인기척을 느낀 후 10초 정도 지났을 때, 선일이 들어왔던 교실 문이 열렸다.
안에 들어온 사람이 자신과 같은 학생임을 확인한 그는 가볍게 손을 든 채 인사했다.
“안녕.”
“...”
교실에 두 번째로 들어온 황신영은 그의 인사를 받지 않았다.
그저 무시하고 지나갈 뿐.
물론 선일도 그것을 알고 더 말을 걸지 않았다.
“으으...”
이어서 그는 가볍게 기지개를 켠 후 인벤토리를 활성화했다.
가장 좋아하는 햇빛을 제대로 만끽하지 못한 신수는 다시 인벤토리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싫어 보였지만, 저항할 힘은 없었기에 안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야.”
그가 자리에 앉은 순간, 저 앞에 있던 황신영이 입을 열었다.
갑자기 자신을 부르는 그녀에게 의문을 가진 선일은 즉시 대답했다.
“왜.”
“너...”
무슨 말을 하려는 걸까.
잠시 머뭇거리는 황신영을 차가운 얼굴로 쳐다보던 선일은 들려올 말을 미리 예상하고 있었다.
이윽고 소녀의 입이 다시금 열렸을 때 나오는 말은 그가 충분히 예상했던 질문 중 하나였다.
“...선월이 어디 갔는지 알아?”
“몰라.”
선일은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할지 고민하지 않았다.
물론 그는 요 며칠 동안 선월이 어디를 갔는지 알고 있었지만, 그것은 주인공의 행보를 알고 있는 작가의 입장일 뿐이었다.
애초에 1학년들은 그와 선월이 별로 친하지 않은 사이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에 만약 그가 있는 장소를 말했다면 점은 매우 아이러니하고 이상하게 보일 것이었다.
물론 그렇지 않는다 해도 황신영을 싫어하는 선일은 딱히 그녀에게 말해줄 이유가 없었다.
...쳇.
실망한 눈치로 고개를 돌린 황신영으로부터 작은 소리가 들려왔다.
분명 부탁한 것은 저쪽이었지만, 도리어 혀를 차는 소리에 선일은 어이가 없었다.
하지만 신경을 쓸 필요는 없었기에 그 또한 그녀를 무시하고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수군수군...
그렇게 몇 분간 조용히 잠에 빠져있던 선일은 교실 안이 북적거리는 것을 깨닫고 몸을 일으켰다.
어느새 꽤 많은 학생들이 들어온 교실은 평소처럼 시끄러웠다.
“야야, 그거 들었냐?”
아까 말한 몇 가지 변화점.
그 중 첫 번째는 학생들의 대화 주제나 관심사가 바뀌었다는 것이다..
“이번 중간고사 대박이던데?”
“왜? 뭐 들었어?”
이곳은 헌터의 세계다.
성적과 취업이 연관되는 현실이랑은 달리 웬만한 명가나 명문 길드 고위층의 자제들은 좋은 성적을 받지 못한다 해도 뒷배를 이용해 자신이 속한 집단에서 자리를 잡으면 된다.
특히 대한고는 대부분의 학생들이 그런 든든한 백을 가지고 있었으니...
어떻게 보면 그들에겐 중간고사가 그리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오히려 반대지.’
작가인 선일의 생각대로 학생들이 중간고사에 가지는 관심은 대학 입시에 목숨을 거는 현실의 고등학생만큼 거대했다.
왜냐.
대한고의 중간고사는, 아니 모든 시험은 성적순으로 보상을 부여했다.
“올해 보상이 대박이래!”
높은 성적을 얻는다면 그에 따른 보상이 주어진다.
그것이 헌터를 육성하는 학교인 대한고의 방식이었다.
촤라라락!
선일은 들뜬 학생들의 목소리를 애써 무시하며 머릿속에 들어있는 악사영을 펼쳤다.
곧바로 1학년 중간고사가 적혀있는 장으로 페이지를 넘긴 그는 천천히 내용을 확인했다.
물론 가장 중요한 것은 아무래도 예정된 하윤의 폭주와 그 폭주를 일으키는 범인이 가장 중요하다.
하지만 선일은 그 중간에서 살아남기 위해 최대한 얻을 수 있는 것들은 얻을 생각이었다.
‘아 찾았다.’
“선일아.”
이어서 자신이 원하는 페이지를 찾은 선일이 머릿속에서 악사영을 읽기 시작했을 때, 누군가가 그를 뒤에서 불렀다.
조용히 고개를 든 선일은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돌아보았다.
그렇게 변한 시선에서는 덩치 큰 박대기가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선일은 언제나처럼 미소를 얼굴에 담은 뒤 입을 열었다.
“왜, 대기야?”
“네가 어제 알려줬던 자세가...”
그렇게 선일과 박대기가 아침부터 무투에 대해 대화를 나누는 동안 중간중간 학생들이 몰려들었다.
특히 그들의 중간에는 같은 B반이자 저번에 같이 던전에 들어갔던 이민채가 있었다.
“뭐야. 나도 알려줘!”
“하하...”
두 번째 변화.
그것은 학생들이 선일에게 조금씩 말을 걸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몰려드는 학생이라 해봤자 네다섯 명 정도밖에 되지 않았으나 며칠 전까지만 해도 선일과 대화를 나누는 사람이 B반에서 하윤 한 명이었다는 점을 떠올리면 매우 커다란 변화나 마찬가지였다.
‘던전에서 적당히 할 걸 그랬나...?’
분명 [강철 산성]의 난이도가 1학년들의 상대로 은근히 어려웠던 터라 조금 제대로 했을 뿐인데...
던전에서 나온 뒤 이틀 정도 지난 후부터 꽤나 주위가 시끌시끌해졌다.
물론 언젠가는 실력을 들킬 것을 그도 예상하고는 있었지만, 그 시기가 너무 빠른 데다가 주변에 이상한 소문도 돌고 있었다.
제대로 된 내용은 기억이 잘 나지 않지만 대충 주인공인 이선월과 관련된 말이었다.
‘에휴...’
이선월이 팀 훈련 이후 특별 임무를 받아 떠났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그 소문을 듣고 어떤 반응을 보일지 고화질 너튜브 영상처럼 생생하게 보였다.
[스킬:표정숨기기가 활성화됩니다.]
‘고맙네, 진짜...’
속으로 한숨을 내쉬던 선일은 타이밍 좋게 발동한 표정 숨기기를 보며 안심할 수 있었다.
이어서 그는 과도한 관심이 부담스러워진 점을 티내기 위해 살짝 난처한 미소를 지었다.
부드럽고 외모를 가진 선일이 그런 표정을 짓자 이민채를 포함한 몇몇 여자애들의 얼굴이 살짝 붉게 달아올랐다.
악사영의 주인공인 선월 만큼은 아니어도 그 역시 충분히 미청년에 속하는 인상이라 그런 것이었지만, 아쉽게도 설정창은 그들의 감정을 하나하나 말해주지 않았다.
치지직...
드르륵.
이후 위쪽에 있는 스피커에서 수업이 시작한다는 것을 알리는 잡음이 들려왔다.
그와 동시에 학생들이 주로 들어오는 교실 뒷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선일은 이번에 들어온 학생이 누구인지 깨닫고 천천히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왔...”
가장 마지막에 들어오는 학생이 하윤임을 알고 있는 선일이 고개를 돌렸을 때, 그는 바로 볼 수 있었다.
“...너 왜 그래?”
하윤의 얼굴에 짙게 묻어있는 피곤함과 고통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