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
127화
맑은 날씨다.
째애애앵...
여름이 가까워지는 6월이라 그런지 꽤나 뜨거워진 햇살과 아직까지는 시원한 공기가 어우러진다.
자연스레 기분이 좋아지는 날씨에 소녀는 반사적으로 콧소리를 내었다.
“흐으음~.”
찰랑거리는 검은색의 생머리를 휘날리며 소녀는 뛰어다녔다.
그렇다고 해서 마구잡이로 뛰는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자신의 아버지를 기다리고 있었다.
탁탁탁탁!
체구가 작았던 소녀.
그녀의 가벼운 발걸음이 땅에 닿을 때마다 발목에 풀이 살랑거렸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도 소녀의 체력은 전혀 지치지 않았다.
오늘은 특별한 날이었으니 이 정도로 지칠 리가 없었다.
입가에 순수한 웃음만 머금은 소녀의 눈에 누군가의 실루엣이 천천히 들어왔다.
그 실루엣의 정체를 확인한 순간, 소녀의 입에서 순식간에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아빠!”
익숙한 목소리에 남성은 뒤를 돌아보았다.
그렇게 소녀를 발견한 남성의 입에 부드러운 미소가 넘실거렸다.
“우리 딸!”
눈에 넣어도 전혀 아프지 않을 나의 딸.
반가운 얼굴로 달려오는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소녀를 보며 남성은 곧바로 땅바닥에 무릎 한쪽을 꿇었다.
“...!”
아버지가 하는 행동이 무엇인지 깨달은 소녀의 얼굴에 꽃이 피었다.
화사한 라벤더를 닮은 딸의 미소에 남성 또한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폴짝!
와락!
소녀는 달려오던 속도 그대로 남성의 품에 안착했고, 그는 며칠만에 보는 소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왜 이제 왔어!!”
“미안해 우리 딸.”
이어서 귀여운 투정을 부리는 딸을 품에 폭 안은 채 머리를 쓰다듬은 남성이 말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진심으로 미안하다는 감정이 들어가 있었다.
“일이 너무 바빠서 그랬어...”
만약 그 말이 텍스트로 표현되었다면 마지막에 엄청난 수의 ㅠㅠ가 붙어있을 것이 분명하다.
그만큼 남성은 자신의 딸을 빨리 보러 오지 못한 점이 너무나 안타까웠다.
“괜차나!”
하지만 소녀는 그런 아버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힘차게 소리쳤다.
그 목소리가 얼마나 씩씩한지 순간 남성은 귀가 아팠지만, 결코 딸의 앞에서 내색하지 않았다.
허나 부드러운 미소를 유지하던 남성의 웃음이 변할 때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아빠는 영웅이자나!”
“...응?”
딸의 입에서 나온 영웅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남성의 미소가 얼어붙었다.
당연했다.
남성은 단 한 번도 자신이 하는 일을 단 한 번도 딸에게 말한 적이 없었다.
왜냐.
그가 하는 일은 잘못하면 목숨도 잃을 가능성이 있는 위험한 일이었으니까.
“우리 딸 어떻게 알았어?”
“집에 있는 텔레비전!”
“텔레비전?”
“웅! 삼촌이랑 같이 봤어!”
아아.
그는 그 말을 듣고서야 자신을 보고 영웅이라고 하는 아이의 말을 이해했다.
남성의 아내는 딸을 낳으면서 목숨을 잃었다.
그렇다 보니 혼자 남겨진 아이를 두고 일하기는 힘들었기에 그는 자신의 동생에게 딸을 맡긴 상태였다.
“으차...!”
남성은 자신에게 안기려 하던 딸을 품에 안아 든 이후 몸을 일으켰다.
아버지의 팔뚝에 자리 잡은 상태로 그의 목을 잡은 소녀.
그는 그런 소녀의 등을 부드럽게 쓸어내리며 쓴웃음을 지었다.
‘애한테 최대한 헌터랑 관련된 영상은 보여주지 말라니까...’
자신의 부탁을 무시한 동생에게 나중에 쓴소리를 뱉겠다고 결심한 남성.
그는 목에 팔을 감은 어린 딸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조용히 한숨을 뱉었다.
소녀가 남성이 한숨을 쉰 이유를 알지 못하고 고개를 살짝 흔들었다.
“하윤아.”
“웅?”
잠시 후 입을 연 남성은 곧바로 땅바닥에 딸을 내려두었다.
이어서 그는 아쉬운 표정을 지은 소녀의 머리를 살짝 쓰다듬으며 말을 이어갔다.
“하윤이가 말한 거랑 다르게 아빠는 영웅이 아니에요~”
“아니야!”
소녀는 아버지의 말을 듣자마자 곧장 단호하게 소리쳤다.
그러면서 고개를 홱홱 젓는 속도가 얼마나 빠른지, 휘날리는 소녀의 머리카락이 검은 폭풍처럼 보일 정도였다.
“하하...”
남성은 자신의 생각을 꺾지 않는 딸을 바라보며 웃음소리를 내었다.
그 웃음에는 살짝 곤란해 보이는 아버지의 면모가 담겨 있었다.
물론 얼굴에도 말이다.
“아빠는 영웅이야!”
소녀는 다시 한번 소리쳤다.
한 점의 티 없이 맑은 웃음을 짓는 그녀의 눈동자 속에는 한 남성이 들어있었다.
더없이 여리여리하고 유약해 보이는 인상.
딱 봐도 자신이 마법사라는 것을 그대로 표현하는 젊은 청년의 모습이었다.
“...하윤아.”
어느새 웃음이 씁쓸한 표정으로 변한 남성이 딸의 이름을 불렀다.
그는 소녀의 검은 눈동자 속에 비치는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그 안에 들어있는 자신의 모습은 그저 조금 위계가 높고 길드를 운영하는 평범한 마법사였건만...
딸의 생각은 전혀 달랐던 것 같다.
“아빠가 막막 나쁜 사람들하고 이따만한 괴물 혼내주는 모습 하윤이도 다 봤어! 삼촌도 말해줬어!”
소녀는 씩씩거리며 남성에게 소리쳤다.
텔레비전 속에 등장했던 그녀의 아빠는 이 세상을 지키는 영웅이었다.
아니.
등장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알 수 있었다.
늦은 밤에 소녀가 자려고 침대에 누웠을 때, 옆에서 자장가를 불러주던 삼촌은 노래하듯 그녀의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해줬으니까.
하루도 빠짐없이 말이다.
‘우리 형은, 아니 하윤이 아빠는 되게 멋있는 사람이야...’
만약 남성이 옆에 있었다면 헛소리하지 말라며 동생을 한 대 때렸을 것이다.
허나 그런 사실을 어린 나이의 소녀가 알지 못했다.
이어서 소녀는 애써 난처한 표정을 숨기는 남성을 향해 소리쳤다.
주먹에 꽉 힘이 들어갔지만, 소녀의 얼굴에서 떨어지지 않는 밝은 웃음이 어린아이의 순수함을 잘 나타내고 있었다.
“아빠가 맨날맨날 집에 안 와두 괜차나! 나쁜 사람들 막막 혼내주고 착한 사람들은 도와주자나!”
“우리 딸...”
삼촌의 입에서 나오는 말을 듣기 전까지 그저 바쁜 아버지인 줄 알고 실망을 많이 했었는데.
지금 보니 동화 속에 등장하는 백마 탄 왕자님도, 위인전에 등장하는 백성을 위하는 왕도 자신의 아버지와 비교하자면 전부 부족했다.
그들은 악당들을 물리치는 선명한 불꽃도, 자연스럽게 와 소리가 나오는 천사의 날개도 없었으니까.
“그러니까...”
소녀는 자신의 아버지에게 손을 뻗었다.
어린아이의 손은 너무나 작고 고왔다.
그 어떤 고생도 하지 않은 손.
“...”
남성은 소녀가 이런 손을 계속 가지고 있길 원했다.
그렇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말이다.
직후.
“나도 아빠처럼 영웅이 될 거야!!!”
남성의 딸, ‘신하윤’은 자신의 아버지를 향해 순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
“...몇 시지?”
슬며시 눈을 뜬 하윤은 몸을 일으키며 창문을 바라보았다.
커튼 사이로 흘러나오는 것이 밝은 빛이 아닌 어둠인 것으로 보아 아직 새벽인 듯 보였다.
쓰윽...
이어서 하윤은 부스스한 머리를 한 차례 쓰다듬은 후 얼굴을 매만졌다.
뺨에 손가락이 닿았을 때, 눈가가 이상하게 촉촉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촉촉한 물기의 정체가 자면서 흘린 눈물이라는 것을 깨달은 하윤은 거울을 돌아보았다.
“...”
거울에 비치는 자신의 모습은 방금 꿨던 자신의 어린 시절과는 많이 달라졌다.
잡티 하나 없이 하얗던 얼굴은 날카로운 것에 베인 듯한 긴 상처가 뺨에 생겨나 있었고, 길었던 머리 또한 단발로 변했다.
부드러웠던 손은 몇 년 새에 더없이 거칠어졌고, 피부는 푸석푸석해졌다.
그러나 가장 큰 차이점은 바로 표정이었다.
꿈에서 보았던 어린 신하윤은 하나의 걱정도 없이 웃고 있었으나 지금의 그녀는 거의 기계나 마찬가지였다.
감정 변화가 거의 없는 차가운 기계.
아무리 웃어보려 해도 얼굴 근육이 얼어붙은 것처럼 잘 움직이지 않는다.
“아빠...”
그 순간.
씨익.
거울 속에 있는 하윤이 웃었다.
그 모습을 본 진짜 하윤은 나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너... 왜 나왔어?”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한 존재가 악마의 씨앗이라는 것을 깨달은 하윤은 적의를 드러냈다.
허나 씨앗은 그런 본체를 보면서 피식거리는 소리와 함께 그녀를 비웃었다.
-어릴 때가 떠올라? 정확히 언제? 2년 전?
“꺼져.”
화륵!!
촤아아앙!!!
하윤은 자신의 속을 긁는 씨앗을 향해 욕설을 날리며 작은 마력을 날렸다.
요란한 소리와 함께 산산조각이 난 거울 조각들이 바닥으로 떨어졌으나 씨앗의 목소리는 사라지지 않았다.
-그리워해봤자 과거가 사라지지는 않지. 그렇다고 미래를 바꾸기에는 네 능력이 부족하고.
“조용히 해.”
-싫어.
악마의 씨악은 요즘 통 잠잠하다가도 가끔씩 이런 식으로 하윤의 신경을 건들었다.
특히 그녀가 어린 시절의 꿈을 꿀 때.
그럴 때마다 이 빌어먹을 씨앗은 매번 그녀의 상처에 소금을 뿌렸다.
-만약 네가 내 목소리를 듣기 싫다면 몸을 넘겨. 그럼 네 혈육의 억울함도 다 풀어줄게. 물론 너를 괴롭힌 자들도 전부 죽여주지.
씨앗의 목소리는 고혹적이고 유혹적이었다.
하지만 하윤은 넘어가지 않았다.
“네 말은 통하지 않아.”
만약 이 학교에 입학하기 전의 자신이었다면.
만약 입학한 후 심한 괴롭힘을 당할 것이라 생각했던 자신이었다면.
하윤 스스로도 악마의 유혹에 조금씩 혹하다 어느새 무너졌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었다.
“아빠의 억울함은 내 힘으로 풀 거야. 죽지도 않을 거고, 아무도 죽이지도 않을 거야.”
-...멍청한 X.
너무나 단단한 의지에 말을 잃은 걸까.
마지막 욕설을 남긴 채 악마는 한참 동안 그녀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