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
침묵만이 존재하는 깨끗한 병실.
그 안에 있는 새하얀 침대에는 한 소녀가 누워있었다.
삐이이....
가냘픈 손가락에 연결된 심전도 기계에서 일정한 기계음만 들려왔다.
대한고의 양호실.
세계 최고의 병원과 비슷한, 아니 그 이상의 수준을 가지고 있는 의료 시설임에도 주선아는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하아...”
희은은 쓰러져있는 자신의 친구를 보며 한숨을 쉬었다.
그녀의 시선은 베개에 가지런히 놓여있는 주선아의 머리카락에 쏠려있었다.
희미한 은빛을 띠는 윤기 나는 머리카락.
평범한 인간이라면 가질 수 없는 특이한 색을 보는 희은의 머릿속에서는 아까 전 양호 선생님과 나눈 대화를 떠올렸다.
‘이건 마력에 의한 머리카락이 아니야.’
‘네?’
안경을 치켜 쓴 양호 선생의 말을 들었을 때, 희은은 벙찐 한 마디밖에 뱉지 못했다.
전혀 생각해보지도 못한 문제였다.
‘원래 속성력이 강한 헌터들은 그에 맞춰서 머리 색이 변하는 현상. 너도 한 번쯤은 본 적 있지?’
‘네...’
양호 선생은 그녀의 대답을 들은 후 한숨을 한 차례 내쉬었다.
안경을 벗고 미간에 손을 올린 모습은 짜증보다는 걱정의 일환으로 보였다.
‘내가 알기로 선아는 속성 마력을 개화할 정도로 특수한 속성과 가깝지 않아. 그렇지 않니?’
‘네...’
‘그럼 다른 이유 때문인데...’
왜 몰랐을까.
조금만 생각해보면 쉽게 알 수 있었던 특징이었는데.
희은의 표정이 조금씩 안 좋아지기 시작했을 때, 양호 선생의 말이 이어졌다.
‘선아의 머리는 마치 물이 빠진 것처럼 보여. 마치 기력이 다 빠져나간 것처럼.’
희은은 그 말에 금방 대답할 수 없었다.
그녀의 머릿속에서는 어릴 적의 기억이 떠올렸다.
이제 천천히 말을 배우고 가문의 또래들과 대면했을 때.
‘안녕.’
그 많은 아이들 중에서 후계자인 그녀에게 다가온 사람은 주선아가 처음이었다.
희은은 새로운 친구가 생겼다는 반가운 마음에 그녀의 은빛 머리카락을 칭찬했었다.
‘머리카락 이쁘다!’
오버랩되는 그때의 기억들.
어린 날의 그녀가 했던 말은 친구가 느낀 고통을 알지 못하는 철없는 아이의 목소리였다.
지금 생각하면 너무나 부끄러웠지만.
‘...고마워.’
그때 주선아는 부끄럽다는 듯이 그 말에 대답해주었다.
이런 칭찬은 처음이었다는 것처럼 수줍은 미소와 함께 말이다.
아니, 잊으면 안 된다.
‘일단 정신을 차리면 헌터 병원 쪽으로 옮기는 게 좋을 거야.’
안쓰러운 눈빛으로 그들을 바라본 양호 선생이 나간 후부터 지금까지 희은의 시선은 주선아의 머리카락을 넘어 목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그녀의 목에는 흉터가 하나 존재했다.
마치 노예들이 쓸 것 같은 쇠사슬을 그대로 가져온 듯한 검은 흉터.
그녀가 종속의 저주를 거역하였기에 생겨난 흉한 상처였다.
스윽...
그 흉터를 보자마자 희은의 손이 자연스럽게 움직였다.
하지만 끝까지 움직이지는 못했다.
그녀는 주선아의 하얀 손을 잡으려다가 바로 앞에서 멈췄다.
자신이 저 손을 잡을 자격이나 있을까.
이런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미안해.”
이후 손을 거둔 희은의 입에서는 사과의 말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그 말을 주선아가 듣고 있을지 알 수는 없었다.
그녀의 눈은 여전히 닫혀있었으니까.
“내가 너를 못 믿었어...”
하지만 그럼에도 희은은 멈추지 않았다.
언뜻 들으면 신에게 뱉는 고해 같기도 했다.
그 정도로 희은의 목소리에는 죄책감이 묻어났다.
“나랑 같은 아픔이 있을 줄 몰랐어.”
처음 만난 것이 3살인가 4살이다.
이미 그때부터 머리카락이 은빛이었으니 그 전부터 저주에 걸려 있었다는 말이다.
또옥...
무릎 위에 올려놓은 손등에서 물방울 하나가 떨어졌다.
눈물이었다.
친구를 믿지 못해서.
가족을 생각하지 못해서.
철없는 나만 생각해줘서.
미안한 감정만이 담겨있는 눈물이었다.
그 순간.
“울...”
감은 눈 아래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희은은 희미한 목소리가 나온 곳을 바라보았다.
“선아야!”
직전까지만 해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죽은 사람처럼 누워있었던 주선아.
그녀의 눈이 떠졌다.
희은은 입을 여는 주선아의 목소리에 집중했다.
그리고 그녀의 말을 들었다.
“울지 마...”
울컥.
핏기 없는 표정과 고통으로 인해 잔뜩 쉬어버린 목소리.
그리고 목에 낙인처럼 박혀있는 흉터.
주선아의 상태는 더없이 안 좋았지만, 그녀는 희은을 위로하고 있었다.
그것도 평소에는 볼 수 없는 밝은 미소를 띠우면서 말이다.
“...선아야.”
환자임에도 후련한 웃음을 지은 주선아를 보며 희은은 그녀를 불렀다.
지금 그녀는 속에 있던 묵직한 마음을 덜어내고 싶었다.
“나 할 말 있어. 들어줄래?”
“응.”
주선아는 즉답했다.
직감한 것이었다.
자신이 비밀을 보여주었던 것처럼 희은 또한 꽁꽁 숨겨져 있는 생각을 털어내려 한다는 것을 말이다.
“...”
희은은 잠시 숨을 골랐다.
이제부터 할 이야기는 그만큼 어려운 이야기였다.
하지만 털어놓고 싶다.
아니, 털어놓을 것이다.
“선아야 나는.”
지금까지 숨기고 싶었던 속마음이지만.
자신의 친구를 믿지 못해 감추고 있었던 미래에 대한 말이지만.
이제는 아니다.
내 옆에 있는 선아는 단순히 친구란 말로 표현하기 부족하니까.
“흑영궁의 주인이 될 수 없어. 아니, 되지 않을 거야.”
“응.”
“난 이 빌어먹을 가문에서 나갈 거야.”
“그랬구나.”
희은의 결의가 느껴지는 목소리에 주선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야 가족의 진심을 들을 수 있었다.
그것만으로 주선아는 자신의 미래를 확정 지을 수 있었다.
투욱.
“으윽...!”
“선아야!”
“괘...괜찮아.”
몸을 일으키던 주선아의 입에서 고통에 찬 침음이 흘러나왔다.
그 모습을 본 희은이 곧바로 주선아의 몸을 다시 눕히려 했지만, 그녀는 말을 듣지 않았다.
이후 완전히 일어난 그녀는 몸을 곧게 한 채, 침대 옆에 있던 단검을 양손에 들었다.
하나는 손에 쥔 자루를 제외한 모든 부위가 완전히 부서졌고, 남은 하나는 검날이 두동강 나 사용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지금 주선아가 단검을 든 이유는 전투를 위한 것이 아니었다.
처억!
“지...금 맹세합니다...”
숨을 힘겹게 내쉬는 그녀의 목소리에서 불쾌한 쇳소리가 들려왔다.
그 고통은 18년이라는 세월 동안 몸을 잠식해낸 저주에 대한 반동이었지만, 참을 수 있었다.
지금 하려는 행동은 그녀에게는 너무나 신성한 것이었다.
터억.
그녀는 무릎을 꿇었다.
고통이 표정에서 적나라하게 보여졌지만, 희은은 막을 수 없었다.
주선아는 고통과 결심이 물든 얼굴로 입을 열었다.
“선언합니다.”
희은은 숨을 멈췄다.
지금 주선아가 하려는 맹세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선아야 너...!”
암살자의 맹세.
수많은 배신과 암습이 판치는 음지에서도 절대 배신하지 않고 섬길 것을 다짐하는 맹세였다.
자신의 목숨을 대가로 하는 맹세인 만큼 그녀의 마력이 스멀스멀 피어오르며 희은과 연결되었다.
“이살의 암살자 주선아.”
흑영궁 소속 암살자의 열 개의 등급 중 네 번째로 높은 이살(異殺).
그 정도로 강한 힘을 가진 주선아가 말하고 있었다.
자신은 이제.
“저의 주인을 뵙습니다.”
당신의 영원한 편이라고.
***
짜악!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어두컴컴한 고문실에서 날카로운 파열음이 울려 퍼졌다.
파열음의 정체는 한 여인의 손에서 비롯되었다.
“자기.”
“예.”
검은 남성의 뺨을 때린 여인, 안시은이 입을 열었다.
그 목소리에는 깊은 화가 실려있었다.
“자기가 한 저주가 둘 다 풀렸어. 게다가 자기 제자는 대한고에 잡혔고! 이걸 어쩔 거야?!”
“안타깝군요.”
하지만 검은 남성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안시은은 자신과는 다른 남성의 태연한 모습에 더욱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자기... 혹시 목숨이 아깝지 않은 거야?”
콰드드득!!!
촤아아아...!
안시은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진한 살기와 기세에 고문실이 잘게 진동했다.
광살 등급의 암살자라면 평범한 S급 헌터 이상의 실력자.
그런 실력자의 위협적인 분위기에도 남성의 태도는 똑같았다.
“목숨이 아깝다면 제가 이렇게 생명력으로 살아갈 이유가 있을까요.”
“장난치지 말고!!!!”
콰앙!!!!!!!
마력이 담긴 외침 한 방에 철문이 나가떨어졌다.
눈에 띄게 씩씩대는 안시은의 태도는 남성의 눈에는 어린아이와도 같았다.
당연했다.
남성은 백 년이 넘는 세월을 젊음을 유지한 채 살아온 어른이니까.
그리고 어른은 버릇 없는 아이의 행동을 고쳐줄 의무가 있는 존재이다.
“장난 같나?”
남성의 말에서 존댓말이 사라졌다.
그와 동시에 남성의 눈에서 흰자가 사라졌다.
싸아아...
“...어?”
안시은은 그의 눈빛을 보자마자 얼어붙었다.
실제로 몸이 얼었다는 것은 아니다.
저벅.
저벅.
남성은 천천히 걸어갔다.
그러면서 안시은의 눈동자에 눈을 떼지 않았다.
“조금 귀여워서 지켜보려 했는데.”
섬짓.
안시은은 특별한 향기를 느꼈다.
허나 특별하다고 해서 좋은 향기는 아니었다.
오히려 그녀에게 너무나 익숙한 것이었다.
불쾌하고 찝찝하며 또한 친근한 향기.
죽음이었다.
쿠웅.
한 걸음 한 걸음이 크게 들려왔다.
그와 동시에 죽음도 가까워졌다.
검은 남성, 흑마술의 왕 리치는 그런 죽음과 가까운 존재였다.
“내가 너에게 도움을 준 것은 대업을 위해서지만 계속 이렇게 나온다면.”
쓸모가 없어진 네년은 폐기해야겠지.
덜덜덜덜...
안시은의 몸이 떨렸다.
그녀도 직감한 것이었다.
지금 리치의 힘은 그녀로써는 감당할 수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죄... 죄송합니다.”
암살자에게도 목숨은 중요하다.
임무 중에는 목숨조차 도구지만 그렇지 않은 상황에는 일반적인 사람들보다 훨씬 목숨을 아끼는 족속들이 암살자다.
그런 암살자로써의 성질을 너무나 잘 아는 안시은으로써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자세를 굽히고 비는 것밖에 없었다.
스륵.
순식간에 태도를 바꾸는 안시은의 비굴한 모습에 리치는 뒤를 돌았다.
리치가 부서진 철문 밖으로 나갈 때까지 안시은은 일어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