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
스칵!
날카로운 적의가 팔을 스치고 지나간다.
피가 주륵 흘러나오며 쓰라린 통증이 그녀를 관통했다.
으득.
공격을 당한 희은은 입을 악물었다.
그러면서 그녀 또한 빠르게 단검을 휘두른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희은의 단검은 상대에게 닿지 않는다.
확실한 수준 차이.
“...빠르네.”
속삭이듯 들려오는 친구의 고운 목소리는 분명 감탄하는 어투였지만 희은의 귀에는 그렇게 들리지 않았다.
희은은 다시 한번 검을 휘두르며 말했다.
“...네가 진짜 배신자였어?”
그녀의 떨리는 목소리에서 일말의 희망이 느껴졌다.
우정과 신뢰라는 희망.
이전까지만 해도 실이 아닌 쇠사슬과도 같은 단단하고 끈끈한 유대였었으나 지금은 실처럼 가늘다.
하지만 주선아는 그 얇디얇은 실을 잡을 수가 없었다.
채앵!!
자신과 함께 자란 가족이 저런 차가운 표정을 짓는 것이 보기가 싫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지금이라도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네가 싫어하는 어두운 그림자 속에서 나만은 네 편이라고 말하고 싶다.
하지만 그건 나의 소망일 뿐이다.
화끈.
주선아는 목 위쪽으로 스멀스멀 기어오르는 불쾌한 기운을 느꼈다.
마치 숨통을 끊기 위해 목을 조이는 밧줄처럼 올라오는 역겨운 힘은 그녀의 행동을 강제하기 시작했다.
-죽여라.-
-죽여라.-
-죽여라.-
-네 주인을 위협할 적을 죽여라.-
수천수만 번의 목소리가 그녀의 머릿속을 가득 채운다.
그 안에 가득한 광기가 정신을 꿰뚫으며 불쾌감을 일으킨다.
이 숨 막히는 불쾌감의 정체가 자신을 억제하는 저주라는 것을 아는 주선아는 손에 쥔 단검에 힘을 주었다.
꾸욱.
“이 상황에 그건 중요하지 않아.”
‘안돼.’
그렇게 말을 하면서도 주선아는 앞에 있는 희은을 바라보았다.
실력 차이를 알면서도 그녀는 달려들고 있었다.
자신의 행동이 거짓이라고 말해주기를 바라면서.
하지만 주선아는 말할 수 없었다.
까앙!
아니.
“그래도 궁금해 보이니까 말해줄게.”
오히려 그녀는.
“응.”
친구가 믿기 싫어하는 거짓에 몸을 던졌다.
[내가 널 죽이러 왔어.]
덜컥.
“......”
희은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인지 능력이 떨어지고 머릿속이 어지러워진다.
단검을 단검으로 받아낸 주선아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차가운 목소리는 그정도로 거대한 충격을 가져왔다.
“됐어?”
욱씬.
친구와 이어져 있던 작은 실을 끊어내듯.
그녀의 목소리는 마치 서리와도 같아 너무나도 싸늘했다.
그렇기에 서리를 직격으로 맞은 심장 또한 아려온다.
하지만 이 말만은 해야 한다.
“...응.”
너는 이제 내 적이고.
나는 너를 죽일 거야.
서걱!
여러 의미가 함축된 말을 끝으로 희은은 더 이상 주선아에게 대화를 청하지 않았다.
이제 그녀의 심장에는 배신감이라는 조각난 감정만이 남아있었고, 그 감정은 손에 든 적의와 함께하는 새로운 비수로 변했다.
화아아...
단전의 마력이 그녀의 심장으로 올라온다.
신령과 만났을 때만 해도 희미했던 풀빛은 이제 완연한 초록빛이 되었다.
아마 저주가 풀리며 희은에게 존재했던 친화력이 개화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어째서일까.
만약 선일이 그녀의 마력을 본다면 어딘가 이질적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아니, 이미 알고 있을 수도 있다.
촤라락!
희은의 그림자가 발아래부터 터져 나오며 단검을 감싼다.
연약한 풀색과 진득한 검은색의 조화는 언뜻 보면 어울리지 않았으나, 한편으로는 너무나 그녀다웠다.
그 무엇보다 생명을 경시하는 암살자 가문에서 태어났음에도 동물을 좋아하고, 사람을 좋아하는 소녀.
지금은 그녀가 토해내는 감정을 다 받아들일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하아...
곧 있을 슬픈 미래를 생각에서 지운 주선아는 호흡을 내쉬었다.
지금 그녀의 시선에는 희은이 폭풍같이 단검을 내지르고 있었다.
사삭!
희은이 사용하는 기술은 흑영무.
다른 후계자들과 달리 후계자라면 필수적으로 배워야 하는 이 무술을 주선아가 모를 리 없었다.
‘빨라.’
언제나 다치지 않게끔 제압이 가능한 부위를 때리는 희은의 공격이라고는 믿기지 않았다.
지금 그녀는 주선아의 모든 급소를 향해 쏘아진다.
진심으로 자신을 죽이려는 손짓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어색해.’
분명 수도 없이 보았던 흑영무인데.
희은이 지금까지 펼쳤던 것 중에 가장 정석적이고 파괴적인 춤인데.
어째서 지금 나는 저 춤이 왜 이렇게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을 한 걸까.
알 수 없었다.
‘그래도.’
해야 한다.
자신이 없는 세상.
그런 세상에 남겨질 자신의 친구.
아니, 가족이라고 부를 수 있는 그녀에게 할 수 있는 마지막 선물은 바로 이 공방이다.
촤자자자자작-!!!!
주선아는 바로 앞에 닿기 직전인 공격을 보자마자 잡생각을 떨쳐냈다.
신속하게 단검을 휘두른 그녀의 공격은 너무나 날카로웠기에 공기가 베이는 소리가 심상치 않았다.
이내 공기를 베던 단검은 희은의 그림자와 맞붙었다.
그리고 맞붙은 결과는 너무나 당연하게도.
까가가각!!
희은의 패배였다.
“...치잇!”
희은은 뒤로 물러섰다.
분명 방금 전의 일격은 가문에서 배운 심상을 담았다.
일격에 상대를 죽이겠다는 의지, 상대를 죽이지 못한다면 내가 죽는다는 결의.
내 목숨 또한 빼앗아 갈 상대의 숨에 비하면 한낱 도구나 다름없다는 마음가짐으로 흑영무를 다룬 건데.
어째서일까.
너무나 어색하다.
마치 그녀의 몸이 아닌 것처럼 말이다.
까득.
단검과 단검이 마주했을 뿐인데 손목이 엄청나게 저려 왔다.
하지만 그보다 더욱 저리는 것은 자신의 태도였다.
상대방인 주선아가 느꼈던 만큼 희은 스스로도 자각할 수 있었다.
그 순간.
크허어어엉-!!!!!!
저 뒤쪽에서 거대한 포효가 그들의 귀에까지 울려 퍼졌다.
분명 히든 보스는 골렘이었을 텐데, 포효의 주인은 마치 맹수의 것과 같았다.
하지만 그보다 더 이상한 점이 있었다.
‘뭐지...?’
익숙한 느낌.
희은은 반사적으로 포효를 뱉은 존재로부터 반가움을 느꼈다.
그 순간.
“전투 도중에 한눈 팔면 안돼.”
주선아의 목소리가 귓가에 스며들었다.
잠시 틈을 보인 희은은 본능적으로 단검을 휘둘렀다.
하지만 그녀도 알고 있었다.
이 공격은 피하지 못할 것을 말이다.
‘...’
그 순간, 갑자기 주선아가 휘두른 단검의 궤도가 꺾였다.
인간의 급소인 목에서.
그나마 단단한 어깨 쪽으로.
촤악!
주르륵....
팔을 스쳤을 때와 똑같이 베인 부분에서는 피가 흘러나왔다.
하지만 얕았다.
암살 대상의 틈을 노린 살수의 일격이라고는 볼 수 없는 아주 애매한 공격이었다.
공격을 당한 순간, 곧바로 거리를 벌린 희은 또한 그 사실을 깨달았다.
“너...”
“으아악!!!!”
그녀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오려는 순간, 저 멀리 인간의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비명소리가 익숙한 사람의 음성이라는 것을 깨달은 희은과 주선아는 잠시 벌어진 틈을 타 동시에 그쪽을 바라보았다.
“...”
“...!”
비명소리가 울린 곳에서 일어나는 광경은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었다.
자신의 정체가 흑마술사임을 밝힌 강귀수는 꼴사납게 뒷걸음질 치며 흑마술을 쏘아냈고, 그 공격은 그들이 흑막임을 밝혀낸 선일이 손에 든 권총으로 하나도 빠짐없이 튕겨내고 있었다.
이 정도까지는 이해할 수 있다.
단둘이 갔던 던전에서 보았던 선일의 실력은 가히 압도적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들이 믿을 수 없는 광경은 그 뒤에서 일어나는 일이었다.
끼기기긱...
화르륵!!!!
선일과 함께 있던 1학년 소녀, 하윤은 던전의 히든 보스인 미스릴 골렘을 향해 불길한 불꽃을 쏘아내고 있었다.
그리고 골렘은 자신보다 몇 배는 작은 소녀의 불꽃을 받아내면서 점점 녹아내리고 있었다.
으릉!
마지막으로 이 공간 안에서 가장 강렬한 존재감을 내뿜는 존재.
갑자기 등장한 거대한 사자는 콧바람을 거칠게 내뿜으며 미스릴 골렘을 산산조각 내고 있었다.
저 괴물 사자가 바로 포효를 뱉은 존재라는 것을 깨달은 희은.
그녀의 눈은 사자의 등에 위치한 익숙한 무늬를 볼 수 있었다.
마치 한 자루의 명검을 연상시키는 검은 줄무늬.
아니, 익숙한 것은 등의 무늬뿐이 아니었다.
조금 더 짙어지기는 했지만, 윤기 나는 갈색 털도.
신기하게 은은한 푸른색을 띠었던 얇은 수염도.
마지막으로 닿기만 해도 상처가 났던 거친 발톱도.
그 모든 것을 희은은 잊을 수 없었다.
“레오...?”
그렇게 말을 뱉은 순간 희은은 알 수 있었다.
겉모습이 조금 달라지기는 했지만.
저 사자는 분명 자신을 너무나 잘 따르는 고양이 레오라고.
흠칫.
잠깐 눈이 그쪽에 돌아간 희은은 한 차례 흠칫하더니 곧바로 앞에 있는 주선아를 바라보았다.
‘뭐야.’
직전까지만 해도 전투 중에 한눈 팔지 말라는 말을 했던 그녀인데.
주선아는 어떤 연유인지 움직이지 않았다.
단순히 움직이지 않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적의가 사라진 모습이었다.
“...뭔데.”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빈틈이다.
지금 공격하면 완전히 이길 수 있다.
자신을 노리던 적들에게 보여주듯 당당히 살아나갈 수 있고, 더 나아가 꼬리를 잡을 수도 있을 것이다.
분명 그랬을 터인데....
희은의 발은 움직이지 않는다.
멈칫.
그녀의 눈에는 보였다.
주선아의 입가에 담긴 희미한 미소.
그와 함께 슬픈 감정을 애써 숨기려 하는 눈동자.
주선아에게서 드러나는 모든 감정들이 전부 하나로 느껴졌다.
마치 더 이상 자신을 상처 입히기 싫다는 것처럼...
“끄으윽...”
강귀수가 실신하는 장면이 그대로 보였지만 희은은 그쪽에 눈이 가지 않았다.
그녀의 시선은 주선아가 보이는 이상한 태도에만 닿아 있었다.
사락...
“...왜 그러는데, 너. 나 죽이러 왔잖아. 그럼 지금이 기회잖아....”
입가를 가린 두건을 내린 희은이 의문을 가득 담은 목소리를 뱉었다.
이유가 궁금했다.
방금 전까지 자신을 죽이겠다고 선언한 주선아가 갑자기 희생을 자처하는 사람처럼 행동하는 이유가 말이다.
“근데 갑자기 그따위로 행동하는 이유가 뭐냐고!!!!”
스륵.
희은의 악에 받친 외침에도 주선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여전히 작은 미소만을 지을 뿐.
그러면서 주선아는 눈을 감았다.
시간이 되었다.
이제 이별해야 한다는 시간을.
하지만 안타깝지 않다.
‘희은아.’
죽자 살자 싸웠던 살수가 일부러 빈틈을 주었음에도 친구는 움직이지 않는다.
어쩌면 속임수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그렇다고 경계하는 모습은 아니다.
아니, 오히려 살수에게 묻는다.
왜 갑자기 그러냐고.
싱긋.
주선아의 입가에 감돌던 희미한 미소는 이제 의미가 바뀌었다.
이별을 예감한 슬픔이 아니다.
일부러 모질게 나왔음에도 여전히 자신을 걱정하는 친구의, 아니 가족의 착한 성정을 마지막으로 마주했다는 만족감이다.
스으으윽...
사람이 100년 이상을 살아가는 때, 그들이 살아온 18년이란 세월은 짧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가족이 되기에는 충분한 시간이다.
욱씬욱씬욱씬욱씬!!!!
직후 그녀의 목에 걸려있는 저주는 그런 주선아에게 모진 고통을 내밀기 시작한다.
마치 지금 그녀가 할 행동을 알고 미리 막는 것처럼.
하지만 고작 저주 따위는 그녀의 마음을 알지 못할 것이다.
끄그그그그...
모든 생각이 끝난 순간, 주선아는 천천히 손에 쥔 단검을 들었다.
주선아는 피가 묻어있는 날카로운 단검을 자신의 목에 가져다 대었다.
이제 저주의 힘은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강해졌지만.
그럼에도 그녀를 막을 수는 없었다.
“...너 뭐해.”
희은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분노가 아니다.
적의도 아니고, 배신감도 아니다.
지금 그녀의 얼굴은 슬픔으로 물들어져 있다.
욱씬....
항상 밝음을 연기했던 그녀가 그 역겨웠던 가문 속 유일했던 가족을 보며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주선아는 그런 희은의 표정이 보기 싫었다.
“희은아.”
그렇기에 나를 저주로 옭아맨 적은.
아니, 그 적뿐 아니라 내 가족을 위협하는 모든 적들은.
“미안.”
앞으로 나를 이용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걸로.
끝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