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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으으으...
찢어진 양피지가 바닥에 떨어지며 빛났다.
그와 동시에 강귀수의 몸에서 마력이 느껴졌다.
불온한 마력.
던전을 클리어할 때의 사용했던 마법사의 정순한 마력이 아닌 이질적인 흑색이 감도는 부정한 힘이었다.
“강귀수 너...”
적이라는 사실을 더 이상 숨기려고도 하지 않는 강귀수의 모습을 본 희은의 입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두 가지 짙은 감정이 서려 있었다.
당혹감은 2년 동안 같이 지냈던 친구가 적의를, 아니 그보다 강렬한 살의를 가졌다는 사실에서 비롯된 것이고.
또 다른 감정인 분노는 그 살의를 가진 친구의 정체가 흑마술사라는 사실에서 시작된 것이었다.
‘흑마술사...’
흑마술.
마법에도 수많은 계파가 있는 것처럼 흑마술에도 많은 계파가 존재했다.
그 중 대표적인 떠오르는 것은 살육과 저주.
이름대로 살육은 말 그대로 살인에 특화된 흑마술이고, 저주는 다른 이에게 재앙이나 불행이 닥치기를 기원하는 흑마술이었다.
‘...타이밍이 이상해.’
희은은 분노를 최대한 억누르며 사고를 굴렸다.
최근 자신에게 걸려 있던 저주를 해제한 후 갑자기 강귀수가 흑마술사가 되어, 아니 흑마술사의 정체를 밝힌 타이밍이 이질적이다.
어긋났다거나 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너무나 딱 맞아서 그런 것이었다.
‘...누구지.’
희은은 이를 깨물었다.
그녀 또한 흑영궁의 직계인 만큼 자신의 가문이 수많은 집단과 제휴를 맺고 있다는 것은 안다.
그중 하나가 흑마술사의 집단인 것 또한 알고 있다.
“...어떻게 알았지?”
강귀수는 희은의 목소리를 무시하고 말했다.
말을 뱉는다기보다는 으르렁거린다는 표현이 잘 어울릴 정도로 그의 목소리에는 은은한 살의가 담겨있었다.
이렇게 정체를 드러낸 시점에서 그녀는 자신의 동기가 아닌 그저 암살 대상일 뿐이다.
지금 기척을 바꾼 강귀수가 살기를 내뿜고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선일이었다.
“기억 안 나?”
선일은 여유로운 웃음을 지었다.
그가 강귀수를 대하는 말투에는 어느새 존댓말이 사라져 있었다.
“첫날.”
이어서 선일은 검지 손가락을 들었다.
손가락을 들고 있는 선일을 노려보던 강귀수가 다시금 입을 열었다.
“그날이구나.”
잊을 수 없었다.
희은과 같이 이야기를 나누던 선일을 처음 만났을 때.
그는 악수를 하기 위해 선일에게 손을 건네며 체력을 빨리 소모되게 만드는 저주를 걸었었다.
딱히 큰 대가가 필요 없이 사용할 수 있는 가벼운 저주였지만, 어째서인지 금세 풀렸다는 것에 이질감을 느꼈는데...
이제야 이해가 간다.
화아아...
그렇게 선일과 강귀수가 기싸움을 하던 와중에 찢어진 스크롤은 조각이 아닌 가루나 먼지로 부를 만한 작은 입자로 변해 사라졌다.
아니, 사라졌다는 말이 맞는지 모르겠다.
강귀수의 반대편에 선 하윤과 희은, 그리고 주선아.
아직 스무 살도 되지 않은 소녀 셋의 시선으로 보기에 스크롤이 사용되는 광경은 마치 인챈트된 마법을 던전이 끌어드리는 것처럼 보였으니까.
“뭘 한 거야.”
스크롤이 흡수되는 이상한 광경을 보고 희은이 나지막하게 물었다.
그제서야 살짝 표정을 풀은 강귀수가 입가에 웃음을 띠었다.
명백한 조소.
그의 표정에서는 차가운 감정이 느껴졌다.
이어서 강귀수의 입이 열렸다.
“나도 몰라.”
““뭐?””
무책임한 말에 하윤은 눈살을 찌푸렸고, 희은과 주선아는 동시에 단문을 뱉었다.
유일하게 반응이 없는 것은 선일 혼자뿐.
“이선일, 너는 알고 있나 보네.”
“뭐...”
희은과 주선아가 뱉은 말과는 의미는 달랐다.
두 사람이 뱉은 말이 의문이라면, 선일의 목소리는 회피였다.
‘저건 좀 성가신데.’
선일은 당혹감을 느끼고 있었다.
물론 표정 숨기기로 감정을 감추고 있었기에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저 스크롤의 효과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하필 폭주냐...’
스크롤:폭주.
이름은 간단하지만, 그 효과는 절대 간단하지 않았다.
자그마치 던전을 강제적으로 폭주를 시키는 것이니까.
사용에 따라 수많은 전력을 상실시킬 수 있는 효과를 가졌기에 세계 연합에서 정식적으로 금지시킨 스크롤!
아무리 세계의 흑마술사 중 가장 강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리치라도 함부로 사용할 수 없는 것이 바로 스크롤:폭주다.
‘게다가 지금 쓴 스크롤이 폭주라는 걸 모르는 걸 보니까 아마 버림말로 쓰려고 하는 것 같은데...’
도대체 안희은을 노리는 적이 누구길래 이런 것까지 쓴 걸까.
아니, 애초에 그녀가 후계자 중 한 명이기에 이렇게까지 하는 것일까.
여전히 희은의 목숨을 끊으려는 뒷공작의 정체가 감이 잡지 않았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흑영궁 소속의 직계. 그리고 흑영궁과 제휴를 맺은 리치와 직접적으로 얼굴을 맞대고 요구할 수 있는 자.’
확실히 이 정도면 충분히 범인의 범위를 줄일 수 있다.
‘나중에 여유로울 때 악사영의 설정을 뒤져보면 되겠지.’
물론 소설 속에 등장하지 않는 적이 있을 수도 있지만 선일은 생각을 끝냈다.
‘그건 이걸 끝나고 교관님이 해결할 거니까.’
어차피 현재의 이선일은 그닥 큰 영향을 가지고 있지 않다.
애초에 그는 고작 고등학생일 뿐이다.
학교 훈련 중에 일어난 불미스러운 일은 전부 교관이나 선생들이 처리할 것이다.
“...생각해보니까 조력자가 있다고 들었는데.”
날카로운 기세로 선일과 대치하고 있던 강귀수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는 흑마술사의 눈으로 천천히 앞을 노려보았다.
“아아...”
이윽고 그는 조용히 웃었다.
이전의 조소와는 다른 비열한 웃음이었다.
“생각해보면 가까이 있었네?”
강귀수가 말했다.
희은에게 말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서 선일이나 하윤에게 말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지금.
“너였구나?”
주선아.
학생들의 뒤에서 조용히 강귀수를 노려보고 있던 주선아를 향해 말을 걸고 있었다.
“...”
“...선아야?”
아무리 중얼거림이라고 해도 그들의 귀에는 충분히 들렸다.
희은은 충격받은 얼굴로 뒤에 있던 주선아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되돌아오는 것은.
“비켜.”
더없이 차가운 친구의 표정과.
복부를 향해 찔러오는 날카로운 검격이었다.
촤아악!!
공기를 베며 순식간에 나아가는 주선아의 단검은 희은의 배에 닿기 직전이었다.
하지만 희은은 반응하지 못했다.
아니, 반응하지 않았다고 하는 것이 맞으리라.
그 순간.
티딕.
까가가각-!!
불길과 함께 쏘아진 주먹이 단검을 막아냈다.
선일이었다.
“...!”
“이러시면 안 되죠, 선배님.”
부드러운 음성.
들으면 마음이 편해지는 음성이다.
하지만 단검의 주인인 주선아가 놀란 점은 다른 것이었다.
‘방금까지 뒤를 돌아보고 있었을 텐데.’
압도적인 반응속도.
고작 올해 입학한 신입생의 반응속도라기에는 너무나 압도적이었다.
어쩌면 미래를 예지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말이다.
살랑.
처음 일격이 막힌 순간, 주선아의 다음 행동은 빨랐다.
마치 손에 묻어있는 먼지를 털어내는 것처럼 가볍게 손목을 흔든 그녀의 소매 안에서 무언가가 흘러나왔다.
한 장의 양피지.
즉 스크롤이었다.
슈욱!
터억.
주선아는 망설임 없이 스크롤을 강귀수가 있는 곳을 향해 던졌다.
특별한 처리가 되어있었는지 도박에 사용하는 카드처럼 빡빡한 스크롤은 공기의 저항을 받지 않고 날아간 후 땅바닥에 박혔다.
직후.
후웅.
몸을 뒤로 빼낸 주선아의 발밑에서 그림자가 솟아오르며 몸을 가렸다.
그와 동시에 스크롤이 있는 곳에서도 비슷한 음영이 일어났다.
스르륵...
마치 동영상 역재생을 하는 것처럼 주선아의 그림자가 천천히 바닥으로 내려오고 있었다.
잠시 후 솟구친 그림자가 완전히 사라졌을 때, 그림자가 일어났던 자리에 주선아는 없었다.
그 대신 뻣뻣한 스크롤이 만들어낸 음영에서 익숙한 실루엣이 드러났다.
“좀 빨리 오지 그랬냐?”
“조용히 해.”
강귀수는 리치가 말했던 조력자가 자신의 옆에 서자 입을 열었다.
빈정거리는 말투에 주선아는 차갑게 대꾸했다.
직후 그들이 나가지 못한 던전 [강철산성]이 흔들렸다.
쿠구구구...
강한 진동이 느껴졌다.
처음 이곳에 골렘이 나타났을 때보다 훨씬 강렬한 진동에 선일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의 표정이 하나같이 심각하게 변했다.
그중에서도 특히 얼굴이 심하게 일그러진 인물은 다름 아닌 강귀수였다.
‘이거 폭주 스크롤이었나?!’
들어본 적 있다.
스승님에게 존재하는 폭주 스크롤.
언젠가 있을 후일을 위한 생명력을 얻기 위해 사용한다고 아껴놓았던 건데...
‘이걸 고작 안희은에게 쓴다고?’
도대체 제가 뭐길래 저러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그가 유일하게 아는 것은 리치와 연결된 집안 중 하나의 자제라는 것뿐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사소한 사실에 놀랄 시간이 아니었다.
강귀수는 빠르게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이후 안에서 꺼낸 탈출용 스크롤을 펼쳐본 강귀수의 표정이 다시 한번 변했다.
“하...”
안에 있는 스크롤의 마법식을 읽은 강귀수의 눈이 축 처졌다.
그가 들고 있는 탈출용 스크롤은 안타깝게도 텔레포트 스크롤이 아니었다.
아니, 애초에 탈출용이 아니었다.
강귀수의 머릿속에서 스승이 이 스크롤을 줄 때 했던 말이 떠올랐다.
-상황이 잘 풀리지 않으면 마지막에 이 스크롤을 써라.
그는 단 한 마디도 탈출용 스크롤이라고 하지 않았다.
학교에 다니다 보니 머릿속이 꽃밭인 학생들에게 물든 걸까.
잊고 있었다.
생각해보면 당연한 거였는데.
“스승님은 이런 분이었지...”
인간성을 버린 리치에게 제자들이란 그저 자신의 흑마술을 이어갈 핏덩어리, 또는 대업을 위한 버림패라는 사실을 깜빡했다.
직후.
쿠구구구구....!
그들이 있던 땅바닥에서 무언가가 튀어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