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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점심.
점심도 대충 거르고 야외로 나온 선일.
그는 대한고 본관에서 조금 떨어진 야외 공원에 앉아 책에 시선을 두고 있었다.
띠링.
물론 시선만 자연스럽게 책에다가 둘 뿐.
그가 진짜 보고 있는 것은 바로 설계자의 메시지였다.
선일은 어젯밤 알람과 함께 새로운 에피소드의 내용을 확인하고 있었다.
[새로운 가능성이 열립니다. 서브 에피소드가 활성화됩니다.]
[세계의 분기점이 가까워졌습니다!]
[세계의 특수성에 따라 에피소드의 난이도가 메인으로 승격됩니다!]
[메인 에피소드: 새로운 인연이 시작됩니다.]
어젯밤 갑작스럽게 시작된 에피소드.
그 메시지의 내용들은 선일의 눈에는 익숙한 단어들로 가득했다.
새로운 가능성.
세계의 분기점.
세계의 특수성.
빙의 이후 이제 한 달이 갓 넘은 선일은 이 단어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지 못했다.
도대체 어떤 가능성을 말하는 건지.
분기점은 또 언제고 세계의 특수성은 도대체 뭐인지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허나 유일하게 그가 확신할 수 있는 것이 하나 있었다.
그건 바로...
‘X됐구만.’
이번 에피소드가 만만치 않을 것이라는 말이다.
시련과 강화도 이후 다시 등장한 세 번째 메인 에피소드.
빙의 후 몇 번의 에피소드를 거친 선일은 대충 서브와 메인의 차이가 무엇인지 대충 감을 잡을 수 있었다.
‘서브는 나 혼자서도 가능한 에피소드. 그리고 메인은...’
선일 혼자로는 힘든 에피소드.
즉 주조연들의 전력이 필요한 에피소드라고 선일은 정의했다.
서브와 메인 말고도 히든 에피소드라는 또 하나의 난이도가 존재하지만, 어떤 에피소드가 히든으로 분류되는 지는 아예 감이 잡히지 않았다.
물론 자신이 내린 기준이 확실하지는 않다.
그러나 지금까지 분석해본바, 에피소드가 나눠지는 기준은 이것이 가장 가능성이 컸다.
이어서 머리가 아파진 선일은 들고 있던 책과 안경을 무릎에 가볍게 내려놓았다.
“근데 왜 하필이면 팀 훈련에서 메인이냐고...”
다른 이벤트라면 상관이 없다.
원작에 나왔던 조별 중간고사나 기말고사 전에 있을 교류회 같은 경우엔 선월이나 하윤, 유리 같은 주연들과 도움을 빌릴 수 있을 것이다.
허나 이번 팀 훈련은 경우가 달랐다.
2학년과 같이 시행하는 팀 훈련은 단 두 팀만이 같은 던전 안으로 들어간다.
그 말은즉슨 한 공간에 있을 주조연이 있을 확률이 꽤나 낮다는 말이었다.
‘게다가 내가 어떤 던전을 갈지도 예상이 안 되니까.’
선일의 생각대로 팀 훈련은 시련이나 강화도 현장 체험처럼 같은 공간에 있을 가능성은 매우 적었다.
악사영에 적혀있기로 이번 훈련은 던전을 학생들이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선생들이 정해주는 방식이었으니까.
그것도 팀의 성향과 정반대, 즉 카운터 같은 느낌의 던전을 말이다.
‘성강 교관님한테 부탁해봐야 하나.’
자신이 제자가 된 이후 무엇이든 지원을 해주겠다고 약속을 했었으니 당연히 도와줄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선일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일단 이건 보류.’
양심이 찔린다거나 하는 감정의 문제는 아니었다.
그런 사소한 감정에 자신의 생존을 맡기기에는 너무나 가벼웠으니까.
선일이 의견을 사고의 구석으로 던져놓은 이유는 바로 지원에 관련된 내용이었다.
‘애초에 그렇게 지원은 나한테만 해당하는 거니까.’
그렇다고 해서 다른 등장인물들이 배정받은 던전으로 가기에는 팀의 성향과 전혀 안 맞는 던전일 가능성도 있다.
아니, 거의 그럴 것이다.
지금까지 그가 만난 주조연 중에서 가장 좋은 사이라고 말할 수 있는 하윤과 유리와는 애초부터 맞지 않는다.
그 둘은 마법사이고, 선일은 무투가였으니까.
‘그렇다고 해서 이선월이 있는 곳을 가기에는 애매하고...’
원작의 주인공인 선월 또한 마찬가지.
그는 검을 쓰고, 자신은 주먹을 쓴다.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큰 차이였으나 더 큰 문제는 아직 둘의 사이가 그리 좋지 않다는 것이었다.
‘원작보다는 조금 괜찮아진 것 같지만.’
그렇다고 해서 함부로 도와달라고 하기에는 그렇다.
강화도에서 도움을 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선월이 원하는 것을 정확히 알고 있었기에 할 수 있었던 말이었다.
“어떡해야 하지.”
아무리 사고를 굴려봐도 시원한 방법이 안 나온다.
굳어진 머리를 식히기 위해 선일은 고개를 위로 올려 하늘을 바라보았다.
말 그대로 기분이 좋아지는 봄 날씨에 잠시 어지러워진 생각을 접어둔 선일.
기분 좋은 햇빛에 눈을 감은 채 졸음을 느끼던 그의 앞에 그림자가 드리웠다.
스륵.
인기척을 느끼자마자 눈을 뜬 선일.
그의 앞에는 훈련복이나 사복이 아닌 대한고의 교복을 입고 있는 희은이 들어왔다.
“오셨어요?”
“응응!”
나른함을 애써 밀어둔 선일이 입을 열자 희은은 밝게 대답했다.
그는 가볍게 기지개를 켜며 앉아있던 벤치에서 일어났다.
“일단 좀 걸을까요?”
“그래그래!”
그 말과 동시에 선일과 희은은 동시에 공원을 걷기 시작했다.
둘이 걸으려고 하는 공원에는 학생들이 꽤나 많아졌다.
분명 그가 도착했을 때만 해도 공원에서 사람을 찾기 힘들었지만, 지금은 대부분의 학생들이 점심 식사를 끝마친 시간이라 그런지 인파가 늘어난 듯 보였다.
삼삼오오 모여 산책하는 사람들과는 달리 침묵을 유지하던 선일이 곧바로 설계자의 기능을 사용했다.
‘설정창.’
질리는 기계음과 함께 푸른 텍스트가 그의 눈앞에 떠올랐다.
[설정창]
-명칭:안희은
-칭호:암살 못하는 어쌔신(희귀),신수의 사랑을 받는 소녀(유일),마수의 흥미를 끄는 소녀(유일)
-근력:LV6
-마력:LV5
-민첩:LV8
-체력:LV5
-지능:LV5
-친화력:LV9
-스킬
흑영의 춤(A),???(?),???(?)
*일부 설정이 잠금 해제 중입니다.(현재 30% 진행 중...)
희은을 처음 보았을 때 확인했던 설정과는 눈에 띄는 변화는 없었지만, 선일은 미소 지을 수 있었다.
그의 눈에는 그녀의 설정창 제일 아래에 있는 한 줄의 문장이 들어왔다.
‘잠금 해제라...’
확실히 신령을 만나러 갔던 것이 정답이었나보다.
선일은 아직 완전히 풀리지 않은 점은 아쉽기는 하지만 에피소드에 쓸 전력이 늘어남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동시에 선일의 머릿속에서는 한가지 의구심이 피어났다.
‘근데 안희은은 원작에서는 어떻게 봉인을 풀었던 거지?’
친화력을 막고 있었던 저주가 얼마나 강했는지 신령이 해제했음에도 곧바로 사라지지 않는다.
하지만 미래의 희은은 그것을 풀고 당당히 날아올랐다.
‘누군가 도움을 준 건가...?’
빠르게 사고를 돌리는 선일의 머릿속에서 온갖 추측이 들었다.
그가 본격적으로 머릿속에 각인된 원작들을 다시 한번 확인하려는 순간, 옆에 있던 희은의 목소리가 귀에 들어왔다.
“선일아?”
자신을 불렀던 선일이 입을 열지 않자 희은이 먼저 목소리를 내었다.
처음 만났을 때와 비슷하게 느껴지는 상황이었다.
“아 네.”
선일은 생각을 하는 것에 집중하느라 옆에 있는 그녀를 의식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정신을 차리고 잠시 사고를 멈춘 그가 말을 하려는 순간, 희은의 입이 먼저 열렸다.
“근데 할 말 있다면서 왜 지금 부른 거야? 조금 있다가 훈련할 때 말해도 되지 않아?”
진심으로 궁금한 표정을 지은 희은.
그녀를 향해 고개를 돌린 선일은 이제는 표정숨기기가 없어도 무의식적으로 지을 수 있을 만큼 익숙해진 미소를 지었다.
“훈련할 때 말을 하기에는 시기가 애매할 거 같아서요.”
부드러웠던 선일의 목소리는 언제나처럼 여유로웠으나 희은은 살짝 긴장했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하기에 훈련할 때는 애매하다는 말일까.
“뭔데...?”
“선배.”
“으응...?”
부드러웠던 목소리의 톤이 살짝 낮게 변했다.
선일의 입가에는 은은한 미소가 감돌고 있었지만, 그의 눈은 더없이 진지했다.
딱 봐도 중요한 이야기를 하려는 분위기에 희은은 반사적으로 긴장을 놓을 수 없었다.
[‘안희은’이 당신을 보며 긴장합니다.]
선일은 설계자의 메시지를 보지 않고도 희은이 긴장했다는 사실을 꿰뚫어 보았다.
이후 그녀를 불렀던 이유를 떠올려낸 그가 곧바로 이야기하려 했던 주제를 꺼내기 시작했다.
“새로 구했다던 2학년 팀원이 진짜 누구에요?”
“응...?”
희은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너무나 간단한 질문이다.
어째서 진지한 분위기를 취했는지 모를 정도로 말이다.
“설마 그거 물어보려고 부른 거야?”
“네.”
“난 또 뭐라고!”
선일의 말을 들은 희은은 웃음을 터트렸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생각보다 별거 아닌 질문이다.
질문에 대한 답을 기다리는 그에게 대답하려는 순간.
섬짓...!
선일은 자신을 향한 갑작스러운 살기를 느꼈다.
자신을 위협하는 적의를 감지했다는 정보는 머리보다 몸이 먼저 인지하자 본능은 곧장 살기를 느껴지는 방향을 찾기 시작했다.
본능은 적의를 보낸 인물을 찾는 시간은 얼마 걸리지 않았다.
애초에 선일과 가까이 있었으니까.
‘바로 뒤?’
살의의 주인이 매우 가까운 거리에 있다는 것을 깨달은 선일.
그는 반사적으로 몸을 돌리며 오른손 주먹을 등 뒤로 회전시켰다.
직후.
“희은이 팀원? 그거 나야.”
등 뒤에서 낯선 소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것도.
터억.
선일의 주먹을 막으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