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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아아암....
어딘가에 앉아있던 선일은 지루한 하품을 내쉬었다.
지금 그가 있는 곳은 방금까지 있었던 신령의 던전이 아닌, 대한고의 체육관이었다.
‘이렇게 시간이 안 지날 줄은 몰랐는데.’
저번에 들어갔던 이면이나 던전과 같은 이차원은 현실과 시간의 흐름이 다른 경우가 많았다.
세간에 알려지기를 던전 안에 들어가면 시간의 흐름이 엄청나게 빠르거나, 또는 엄청나게 느리게 흐르는 경우가 대다수였다.
그렇기에 이번에는 제발 시간이 빨리 흐르기를 기대했건만.
‘왜 이렇게 일찍 끝난 거야!’
선일은 속으로 아우성쳤다.
아무리 그의 영혼이 20대 중반의 별거 없는 청년 강선일이라고 한들, 현재 육체나 신분은 악사영 속 고등학생 이선일이다.
물론 그가 신령을 만나러 간 가장 큰 이유가 테이머의 재능을 막아놓은 희은의 봉인을 풀려는 목적이었다지만...
이렇게 땡땡이도 치지 못하는 것은 예상외였다.
“하아...”
한숨을 내쉬며 훈련 중인 다른 학생들을 쳐다본 선일.
어째서인지 오늘따라 북적북적한 체육관.
그의 시선 안에서는 익숙한 얼굴들도 보였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많았다.
‘2학년들도 같이 훈련을 하는구나.’
선일은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의 대부분이 2학년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원래 오후의 체육관은 올해 1학년이 사용하는 것으로 정해져 있다.
하지만 오늘 던전을 갔다 오니 성강에게 이번 주 금요일까지는 두 학년이 함께 하는 것으로 바뀌었다는 말을 들었다.
선일은 선생과 훈련 교관들이 이렇게 시간을 바꾼 이유를 금세 알 수 있었다.
‘생각해보니까 다음 주 월요일에 있을 팀 훈련에 앞서 합동 훈련을 하는 것으로 일정이 변경되었다고 그랬었지.’
그것을 언급한 내용은 단 한 줄이었지만 선일은 애충 기억해낼 수 있었다.
현실의 강선일이 이런 내용을 썼던 시기가 그가 중학교를 다닐 때 있었던 한 행사 때문이었던 것 같다.
‘내가 이걸 적었을 때가 무슨 체육대회였나 축제였나 그랬을 텐데.’
어렴풋하기는 하지만 아마 체육대회였던 걸로 기억한다.
여타 학교들과 같이 선일이 다녔던 중학교 또한 체육대회를 준비한다는 목적으로 다른 학년과 같이 시간을 보냈으니까.
그렇다고 한들 친구가 딱 한 명밖에 없었던 그에겐 재미있던 기억은 아니었다.
하지만 타지, 아니 다른 세계에 있으니 그리운 기억임은 부정할 수 없었다.
‘그 자식은 어떻게 지내려나.’
이곳에 떨어지기 직전에 일어났던 친구의 모습을 떠올리던 선일은 자연스럽게 시선을 훈련 중인 학생들에게 돌렸다.
그의 눈에는 1학년 2학년 나눌 것 없이 어우러져 있는 광경이 들어왔다.
대여섯 명씩 모여 있는 사람들은 서로의 합을 맞춰보고 있는 모습이 대다수였다.
선일은 그들이 훈련하는 모습을 보며 한 번 더 하품을 내쉬었다.
‘2학년 중에서 괜찮은 사람 있는지나 한 번 볼까.’
그렇게 생각한 선일이 개인 훈련을 하는 학생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신령을 만나러 가며 탔던 성강의 차 안에서 대화를 나눴을 때, 희은은 아직 남은 2학년 팀원을 구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시간이 지난다면 알아서 구해질 것이 분명하지만, 그는 시간이 아까웠다.
“흐으음...”
입으로 이상한 소리를 내던 선일은 한쪽 눈을 감았다.
대충 세어봤을 때, 개인 훈련을 하는 사람들은 대략 쉰 명 정도 되는 듯 보였다.
아쉽게도 그중 과반수가 1학년들이었다.
‘아 저기 박대기도 보이네.’
거대한 덩치에 맞는 망치를 휘두르는 박대기.
훈련에 열중하던 그는 선일의 시선을 느꼈는지 고개를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갑자기 움직임을 멈춘 채 경계하는 야생동물처럼 주변을 바쁘게 둘러보니 그와 같이 있던 학생들이 이상하게 쳐다보았다.
말 그대로 코미디스러운 상황에 선일의 입가는 부드러운 곡선을 그렸다.
-대기야.
흠칫!
선일의 목소리가 머릿속에 울리자 박대기의 몸이 움찔 떨렸다.
말이 움찔이지, 그 떨림이 얼마나 거대했는지 주변인들의 시선이 한순간에 끌렸다.
애초에 그의 반응이 멀리 떨어져 있던 선일이 마력을 사용하지 않아도 볼 수 있었을 만큼 거대했으니까.
직후 그는 전음을 이어갔다.
-뒤쪽이야.
그 목소리에 반항할 수 없었던 박대기는 그대로 몸을 돌렸다.
아주.
천천히.
끼기기긱....
빡빡한 관절이나 녹슨 톱니바퀴가 힘겹게 움직이는 소리.
박대기의 움직임을 보며 선일의 귀에는 그런 소리가 들렸다.
아니, 느껴졌다.
이후 완전히 뒤를 돌아본 그와 선일의 눈동자가 마주하자.
딸꾹!
박대기의 입에서는 거대한 소리의 딸꾹질이 튀어나왔다.
마치 공포영화나 만화 속에서 자신을 죽이려던 범인을 직접 마주한 듯한 반응.
그렇게 보는 박대기의 얼굴은 선일이 있는 자리에서도 볼 수 있을 정도로 새파래져 있었다.
‘좀 살살할 것 그랬나?’
선일은 박대기의 반응에 살짝 당황했다.
배치고사 날 이후 아주 가끔 문자만 했지, 그가 박대기에게 직접 말을 걸거나 이야기를 나눈 적은 없었다.
그렇기에 이렇게 심한 반응은 예상을 하지 못했었던 선일은 살짝 미안함이 느껴졌다.
“근데 저 표정은 좀 부담스럽다...”
사람을 마주친 작은 동물처럼 바로 울 것 같은 표정이 박대기의 거대한 덩치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아 자연스레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 이걸 말하려던 게 아니지?’
이상한 감상은 그대로 뇌 속 쓰레기통에 던져놓은 그가 박대기에게 물었다.
-대기야 팀원은 다 구했냐?
끄덕끄덕끄덕끄덕.
선일의 전음을 들은 박대기는 빠른 속도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잘못하면 목뼈가 나갈 것 같은 급박한 반응에 선일의 얼굴이 미묘하게 변했다.
너무나도 부자연스러운 반응.
주변사람들의 시선을 끄는 박대기를 보며 그의 눈빛에 한심하다는 감정이 떠올랐다.
‘자연스럽게 반응해라 좀...’
이어서 생각을 집어넣은 선일은 방긋하고 웃었다.
그 웃음을 보자 처참하게 맞았던 배치고사 날이 떠오른 걸까.
새파랬던 박대기의 얼굴색은 더욱 질려 보랏빛에 가까워졌다.
-잘했어. 고생했네.
남자를, 그것도 자신보다 훨씬 거대하고 나이가 들어 보이는 남자를 괴롭히는 취미는 없었던 그는 이번에는 순순히 칭찬했다.
허나 박대기의 반응이 이상했다.
“으으...”
독에 중독된 것처럼 완전히 보라색으로 변한 표정을 박대기는 이상한 소리를 내며 뒷걸음질을 쳤다.
그 주변에 있던 다른 학생들이 이상 증상을 보이는 그에게 다가갔지만, 박대기는 그런 손짓을 뿌리치고 체육관 밖으로 달려 나갔다.
“...?”
그의 반응에 어이가 없어진 선일이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악연으로 시작했다지만 어떻게 보면 그나마 연결고리가 있는 동성 친구나 마찬가지인데.
그저 처음에 너무 심했다는 생각과 미안함에 그런 따뜻한 말을 했을 뿐인데 저렇게 반응할 줄은 몰랐다.
‘조금은 잘해줘야겠다...’
선일은 공포에 빠진 채로 밖으로 달려 나간 채 돌아오지 않는 박대기를 보며 조금은 안쓰럽다는 기분을 느꼈다.
* * *
같은 시각.
선일과 마찬가지로 체육관 벤치에 앉아있던 희은에게 누군가가 말을 걸었다.
“희은아.”
“응?”
그녀에게 말을 건 사람은 다름 아닌 주선아였다.
땀을 흘린 건지 물기에 젖어있는 은빛 머리카락을 수건으로 닦으며 다가온 주선아는 자연스러운 움직임으로 희은의 옆자리에 앉으며 물었다.
“오전에 어디 갔다 온 거야?”
“나 그냥.”
아.
언제나처럼 주선아의 말에 대답하려던 희은의 입이 멈췄다.
동시에 그녀의 머릿속에서 오전에 들었던 신령의 말이 떠올랐다.
[저주, 그것도 무언가를 강력하게 봉인하는 고위 저주로 보인다.]
누군가 자신에게 걸었다던 저주.
내게 존재하는 무언가를 봉인하는 저주를 걸었다는 신령의 말은 희은의 머릿속에 의심을 나았다.
‘나한테 저주를 건 사람. 그 사람이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가문의 사람인 것은 분명해.’
저주란 강력하지만 그만큼 조건을 맞추기가 어렵다.
마력만 있다면 세상에 신비를 일으키는 마법이나, 자신의 심상을 표현하는 무술과 달리 저주란 시행할 마력뿐만 아니라 저주의 대가가 존재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가 가문의 사람이라고 확신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저주는 거는 대상과 피대상자는 무조건 한 번은 마주쳐야 해.’
그렇지 않으면 저주는 애초에 시작되지도 않으니까.
희은은 대한고에 입학하기 전까지는 흑영궁에서만 살아왔다.
그렇기에 그녀가 접촉한 사람은 거의 대한고와 관련된 사람 또는 가문의 사람인 것으로 좁혀졌다.
게다가 저주는 걸리는 순간 즉시 반응이 온다고 알려져 있다.
어떤 반응일지는 알 수 없다.
고통일 수도, 불쾌한 기분일 수도, 또는 저주를 받은 사람의 성격이 변화할 수도 있다.
허나 희은은 살아가면서 단 한 번도 이상한 느낌을 받은 기억은 없다.
그렇다는 말은 그녀가 인지하지 못했을 때, 걸렸단 말이다.
그리고 그 때는 다름 아닌...
‘내가 어릴 때.’
그것도 기억이 나지 않는 아기 때 걸었다면 충분히 말이 된다.
누구일까.
그 정체를 알 수 없었지만 확실한 것은.
‘진짜 X같다.’
짧은 시간 거기까지 추리해낸 희은은 환멸을 느꼈다.
‘...역겨워.’
사람의 목숨은 아무것도 아닌 인간들의 더러운 피.
그런 피를 가진 사람들이 잔뜩 모여있는 곳이 자신의 가문, 흑영궁이다.
희은은 곧장이라도 심장을 잡아 뜯어버리고 싶었으나 안타깝게도 그럴 수는 없었다.
주체할 수 없는 감정을 애써 참아낸 순간, 주선아의 목소리가 들렸다.
“희은아.”
“어? 아 맞다! 어디 갔다 왔냐고 물었지?!”
대답을 기다리던 주선아의 무덤덤한 눈빛에는 궁금증이 떠올랐다.
주선아는 18년이라는 세월을 살아온 친구이자 가족이었다.
하지만 그 이전에 그녀 또한 이 역겨운 가문의 사람이다.
물론 친구를 믿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았지만.
‘그래도...’
믿지 못해.
조금씩 피어오르는 의심을 아무도 알지 못하도록 감춰둔 희은.
그녀는 의심을 피하기 위해 주선아와 평소처럼 대화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