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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젯밤.
희은과의 전화를 만족스러운 결과로 마친 선일은 곧바로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우우우웅.
뚝.
“뭐냐.”
“주무셨습니까, 스승님.”
“괜찮다.”
짧은 신호음이 끝난 후 전화를 받은 사람은 바로 성강이었다.
이미 하늘에는 태양 대신 달이 떠올랐지만 선일은 그가 자고 있지 않을 것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전화를 받는 순간 뱉은 문안 인사는 그저 예의상의 형식일 뿐.
그리고 예상대로 성강의 묵직한 목소리는 아침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잡설은 됐다. 전화한 용건이 무엇이지.”
워치를 통해 다시 한번 성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람의 대화에도 순서가 있기 마련인데.
그런 순서를 다 제쳐두고 곧장 본론으로 들어가자는 성강의 성격은 시원하다 못해 냉기가 느껴질 정도였다.
씨익.
그의 말을 들은 순간, 선일의 입꼬리가 슬그머니 올라갔다.
원래는 할 말을 고르고 있었던 그가 입을 열었다.
“부탁 하나만 들어주시면 좋겠습니다.”
미리 생각해두었던 할 말들을 기억의 저편으로 던져놓은 선일은 스승과 똑같이 전화를 건 목적부터 뱉었다.
부탁하는 말투가 어떻게 보면 건방지다고 느낄 수도 있었지만, 그는 딱히 걱정하지 않았다.
“답답하니 뜸 들이지 말고 말해라.”
앞에서도 느껴졌다시피 성강은 그런 사소한 것을 신경 쓰는 성격이 아니었으니까.
용건을 말하게끔 스승에게 허가를 받은 선일.
그는 소리 없는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스승님, 내일 신령께 받으신 철패를 빌려주실 수 있으십니까.”
성강은 잠시 말이 없었다.
평소라면 제자의 부탁에 대해 즉시 답을 해주는 그였으나, 이번만큼은 아니었다.
선일은 성강이 이렇게 고민하는 이유에 대해 진작 알고 있었다.
‘당연하지.’
지금 여기서 계속해서 언급하는 신령이라는 인물은 인간이었다.
그것도 아버지인 이천야나 스승인 성강이 속했던 개척대 [진격]의 멤버이자 현재는 천외천의 일원.
그만큼 성강과 신령은 과거부터 인연이 깊었지만.
‘현재의 성강은 그녀를 껄끄럽게 생각하고 있었지.’
아니, 껄끄럽게 생각하는 것은 성강 혼자뿐일 것이다.
원작에서도 신령은 그를 잊지 못했으니까.
‘신령과 성강은 서로 사랑했었으니까.’
쉽게 말해 전 연인.
물론 진격에 속해 있을 때 연인이라 지금은 헤어진 지 오랜 시간이 지나 무덤덤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안타깝게도 신령은 여전히 성강을 향한 마음을 접지 않은 상태였다.
“그냥 철패만 빌려주시면 됩니다.”
선일은 예의를 차리며 말하고는 있었지만 성강은 그의 목소리에 웃음기가 들어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제자가 스승을 놀린다는 사실에 성강의 머릿속에서 괘씸하다는 생각과 함께 부탁을 거절하고 싶은 욕구가 문득 들었다.
하지만 곧바로 생각을 비우며 이성을 잡은 그가 물었다.
“....어째서지?”
한참이 지난 후 들려온 성강의 음성은 한층 더 무거워진 상태였다.
선일은 그런 스승의 분위기에 맞추듯 웃음기를 지우고 목소리를 깔았다.
“그분께 부탁드릴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군.”
순간 다시금 거절하고 싶다는 욕구가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그 욕구는 성강의 신념을 이기지 못했다.
제자로 받은 이상 모든 지원을 해주겠다는 신념.
“후우...”
안타까운 감정이 들어간 작은 한숨을 내쉰 성강은 결국.
“그럼 내일 아침에 오는 순간, 바로 받아 가라.”
“감사합니다!”
제자의 부탁을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 * *
후우우웅!
푸른빛의 강풍이 금색의 프로미넌스를 안개에서 깔끔하게 지웠다.
희은은 10초도 채 되지 않은 시간에 선일의 공격을 소멸시킨 주인의 힘을 가늠할 수 없었다.
덜덜덜...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히 확실했다.
새롭게 등장한 또 다른 인물은.
방금까지 싸웠던 적과는 비교 불가능할 정도의 격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너네구나.”
“으윽...!”
프로미넌스 레이를 없애버린 주인공이 말을 하자 희은은 자신의 몸을 양팔로 껴안으며 주저앉았다.
위에서 느껴지는 압도적인 존재감.
저 존재감의 주인과 비교했을 때, 자신은 벌레나 다름없다.
밟히기만 해도.
아니, 귀찮은 듯 휘저은 손에 스치기만 해도 그대로 저승으로 향하는 벌레.
“괜찮아요.”
어느새 희은이 있는 계단으로 내려온 선일.
손에 장착하고 있던 여명과 황혼을 장갑으로 되돌린 그가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그와 동시에 그녀는 자신의 몸 안으로 흘러들어오는 다른 이의 마력을 느꼈다.
‘따뜻하다...’
비에 쫄딱 젖은 사람에게 온기를 불어넣는 포근한 마력.
어떻게 사람이 이런 마력을 가지고 있는지 의문이 들 정도로 강렬한 힘이었다.
촤라라락.
떨고 있던 희은의 상태가 조금 진정되자 선일은 고개를 들었다.
그대로 하늘을 바라본 그가 누군가에게 인사하듯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신령을 뵙습니다.”
“네놈들이구나.”
곧바로 하늘에서 대답이 들려왔다.
음성에 실려있는 거대한 존재감에 선일의 몸이 떨려왔다.
타이밍 좋게 발동된 표정숨기기로 부드러운 얼굴을 유지한 그가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바람길.”
선일의 말을 듣자마자 거대한 존재감의 주인이 의미 모를 시동어를 뱉었다.
이후 하늘에서부터 지상으로 바람이 일었다.
스으으...
그들의 몸을 감싼 바람은 날붙이처럼 거칠고 차가운 돌풍도, 흐릿한 연기처럼 희미한 실바람도 아니었다.
딱 던전을 가득 채운 안개를 밀어낼 정도의 푸른 산들바람이다.
슈화아아...
잠시 시간이 지난 후, 안개와 수증기가 합쳐져 한 치 앞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흐릿했던 시야가 깨끗해졌다.
덮여있던 안개가 사라진 하늘은 너무나 맑았다.
이곳이 몬스터가 존재하는 던전이 맞나 싶을 정도로 말이다.
하지만 선일과 희은의 시선을 끄는 것은 그런 하늘이 아니었다.
“던전 밖에서 온 인간을 맞는 것은 오랜만이구나.”
하늘에 떠 있는 두 명의 사람.
한 명은 입구를 막고 있던 이들과 똑같은 검은 양복을 입고 있는 여성이었고,
남은 한 명은 새하얀 비단옷을 입고 곰방대를 물고 있는 앳된 소녀였다.
이 정도만 해도 신비로웠지만, 그들이 허공에서 산들바람을 타고 내려오는 모습은 마치 전설로만 듣던 신선 또는 선인과도 같이 느껴졌다.
‘....이건 좀 대단하네.’
“흐으음... 신기하구나.”
던전을 들어온 이들이 신비로움에 눈을 떼지 못하는 사이, 어느새 검은 여성과 하얀 소녀는 가장 위에 있는 계단에서 천천히 걸어 내려오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오고서야 희은은 존재감의 주인이 나긋하게 말을 뱉는 소녀라는 것을 깨달았다.
직후 그녀의 머릿속에 직전에 선일이 했던 말이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선일아? 너 방금 분명 신령님이라고 말했지 않나?”
“맞아요, 선배.”
마치 알고 있었다는 것처럼 담담히 목소리를 뱉는 선일.
그 목소리를 듣자마자 희은의 머릿속에서 수만 가지 생각이 들었다.
연쇄작용처럼 이어지는 생각들의 고리.
희은의 머릿속에서는 어젯밤 선일의 말까지 생생히 재생되고 있었다.
“그그그...그럼 설마 오늘 가자는 던전이 여기였어?”
얼마나 당황했는지 희은은 말까지 더듬고 있었다.
그러나 반대로 그녀의 눈은 원망으로 강렬하게 빛났다.
선일은 그녀의 시선을 받는 자신의 옆통수에 강력한 레이저를 맞는 것만 같은 따가운 감각이 느꼈다.
“하하... 미리 말 못해서 미안해요, 선배.”
자연스러운 시선 처리로 희은의 눈빛을 회피한 선일이 말했다.
순간 그에게 배신감을 느낀 그녀가 뭐라 한소리를 쏘아내려고 했을 때.
“허허...”
이미 하얀 소녀와 검은 여성은 그들의 바로 앞까지 내려온 상태였다.
신령이라는 이명의 천외천을 마주하자 희은의 몸이 긴장으로 인해 얼어붙었다.
스윽.
하지만 선일에게는 전혀 긴장한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희은과는 정반대.
천검인 이천야와 학교의 교감인 엘레나, 그리고 스승인 성강까지.
그는 이미 예전부터 천외천이라는 존재들이 뿜어내는 존재감에 조금은 적응을 한 상태였다.
이어서 깊게 고개를 숙인 선일이 말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신령님. 이선일이라고 합니다.”
“네놈이 강철의 제자더냐.”
“그렇습니다.”
“호오... 신기하구나. 그 사람의 제자라니...”
하얀 소녀, 신령은 대화를 나누면서도 앞에 있는 선일과 희은을 눈으로 훑었다.
자신들을 세세하게 꿰뚫는 모습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둘의 목으로 마른침이 넘어갔다.
마치 시선에 의해 발가벗겨지는 듯한 느낀 그들.
희은과 선일이 힙겹게 의식을 다른 쪽으로 옮겼을 때, 뒤따르던 검은 여성이 그녀에게 바짝 붙으며 소리쳤다.
“스승님! 저놈이에요, 저놈! 그 이상한 불꽃을 쏘아대던 놈!”
“손님에게 먼저 공격한 네 녀석의 잘못도 있으니 조용히 하거라.”
“히잉...”
나긋한 말투였지만 신령은 여성을 혼내는 의미가 그대로 드러났다.
다 큰 여자가 어린애의 뒤에 숨는 데다가 삐진 표정까지 지으니 오히려 둘의 나이가 역전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신령이 더 위에 있기는 하지만 선일은 굳이 그 말을 입 밖으로 뱉지 않았다.
“흐으으음....”
무언가를 발견한 것일까.
불편한 침묵을 끝낸 신령은 말을 마치며 누군가를 가리켰다.
“너.”
“저...저요?”
신령이 가리킨 인물은 다름 아닌 희은이었다.
천외천의 갑작스러운 지목에 그녀의 얼굴에는 당황한 빛이 물들었을 때, 신령이 물었다.
“너는 도대체 무엇이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