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
98화
뭐만 하면 귀신들이 저주를 퍼부을 것 같은 섬뜩한 분위기를 풍기던 외부와 달리 게이트를 들어가자 오색의 안개로 가득했다.
마치 동양 판타지 속에나 등장할 법한 세상 같은 묘하고 신비로운 분위기.
안개의 정체가 던전 안으로 들어가는 통로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선일은 포탈 안에서 사고를 가볍게 회전시키기 시작했다.
‘이제부터가 진짜다.’
그들이 온 이곳은 일반적인 형태의 던전이 아니다.
차이점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중 가장 특이한 것은 이곳에는 보스 몬스터가 없다는 점.
‘물론 처음부터 없었던 것은 아니지.’
정확히 말하자면 없어졌다는 말이 맞을 것이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이곳은 악귀라는 이름의 몬스터이 존재하는 지상급의 던전이었고, 던전의 보스는 살의를 주체하지 못하는 미친 살인귀였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현재 시점에서 이곳을 지배하는 존재는 몬스터 따위가 아닌 악사영의 세상 어느 곳을 가도 볼 수 있는 평범한 헌터니까.
‘아니.’
평범하다고 하기에는 어폐가 있다.
던전을 지배하는 존재가 몬스터가 아닌 인간이다.
일단 그것부터 평범함이라는 단어와는 어울리지 않았다.
‘게다가 그걸로 끝이 아니지.’
던전을 개방하는 트리거를 실수로 건드린 현 주인.
그녀는 보스인 미친 살인귀를 퇴치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남아있는 악귀를 성불시키지 않고 전부 자신의 제자로 삼아 이곳을 자신의 땅으로 선언했다.
물론 귀신을 길들이는 것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중국에 존재하는 도사나, 일본의 음양사 같은 퇴마사 계열은 소환수 대신에 귀신을 다루기도 하니까.
“후우...”
이런 설정을 떠올린 선일은 이곳에 들어오기 직전의 상황을 떠올렸다.
하나같이 검은 양복을 입고 검은 마력을 사용하는 사람들.
아마 희은은 알지 못했을 것이 분명했지만, 그들은 모두 귀신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전 귀신이겠지.’
검은 양복을 입었던 자들은 모두 현재는 스승과 마찬가지로 신선의 길을 걷는 자!
게다가 그들은 귀신일 때의 힘은 그대로 가진 채 선인의 가르침을 받으니 꽤나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분명 가장 약해 보였던 사람도 B급 헌터는 가볍게 농락할만한 수준이었지.’
그런 자들이 안에 있다고 생각하니 어쩌면 지상급에서 천하급으로 성장하는 것은 당연한 순서일 지도 모른다.
그러나 걱정되지는 않는다.
애초에 그는 이 던전을 클리어할 생각이 없으니까.
“후우.”
이어서 선일은 통로가 거의 끝나감을 직감했다.
‘이제 곧이다.’
이곳의 주인이 우리에게 호의를 가지고 있을지.
아니면.
적의를 가지고 있을지는 알게 되기까지는 말이다.
선일은 긴장감에 숨을 내뱉으며 인벤토리를 활성화했다.
‘인벤토리.’
띠링.
안개로 가득 찬 시야 속에서도 활성화된 인벤토리는 푸른 빛으로 그의 눈을 밝혔다.
계속해서 선일은 인벤토리 안에 넣어두었던 의복을 손가락으로 누르자 순식간에 입고 있는 옷이 변했다.
불편하고 딱 맞는 교복이 아니라 본가에서 가져온 새하얀 무복이다.
꽈악.
선일은 도복이 몸을 감싸는 타이밍에 맞춰 여명과 황혼을 장갑에서 건틀릿 형태로 변화시켰다.
이후 주먹을 움켜쥔 그가 안갯속에서 빠져나오자마자.
터억.
무언가가 발에 걸리는 것을 느꼈다.
그것이 계단이라는 사실을 인지할 때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당연했다.
만약 조금이라도 시간이 늦었다면 분명 바닥에 부딪혔을 테니까.
그런 미래를 생각하며 계단을 올라가던 선일은 잊지 않고 뒤따라오는 희은을 향해 말했다.
“선배 앞에 조심하세요.”
“아악!”
하지만 이미 늦었나 보다.
이대로 계속 올라간다면 그녀가 무조건 넘어질 것을 직감한 선일.
계단 위로 올라가던 그는 희은의 비명을 듣자마자 빠르게 뒤로 돌았다.
포옥.
“휴우...”
자신에게 안긴 희은을 본 선일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넘어지기 시작했을 때 받았기에 다행이지.
만약 받지 못했다면 그대로 넘어져 계단에 머리를 박았을 것이다.
뭐 헌터는 그런 거로는 안 다치지만, 어찌 되었든 조금은 다칠 가능성도 있으니까.
실없는 생각을 마친 선일이 물었다.
“선배 괜찮아요?”
“...으응.”
선일에게 안긴 희은에게서 작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녀의 목소리가 살짝 떨리는 것을 눈치챘다.
‘부끄러워하는 건가?’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귀랑 목이 붉어진 것을 보니 부끄러워하는 게 맞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 이유까지는 알지 못했던 선일의 눈빛에는 의문이 들었다.
‘왜 그러지?’
“선배 혹시 넘어지면서 다쳤어요?”
“....”
희은은 대답이 없었다.
분명 기척은 느껴지는데.
선일은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자신의 짐작대로 희은은 부끄러워하고 있었다.
그것도 엄청나게.
‘아이 씨...’
그 말대로 희은은 자신의 한심함에 깊이 통한하고 있었다.
부끄럽다.
너무나 수치스러워 죽어버릴 것 같다.
화륵.
얼굴에 열이 올라온다.
보이지는 않았지만 안 봐도 비디오다.
지금 뜨거운 부분은 얼굴 하나만이 아니라 귀부터 목 아래까지 엄청나게 뜨겁다.
선배로서 믿을만한 행동을 보이기는커녕 이런 자잘한 실수에도 도움만 받고 있다.
‘내가 선배인 건가? 아니, 사실은 선일이가 선배가 아닐까?’
앞을 제대로 감지하지도 못해 계단도 못 알아보고!
그냥 넘어졌어도 쪽팔렸을 텐데 후배가 먼저 잡아주기나 하고!
이 정도만으로도 충분히 수치스럽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부끄러운 것은 자신의 얼굴이 닿은 선일의 몸에서 좋은 향기가 나 순간 떨어지기 싫다고 생각했다는 것이었다.
아니, 떨어지기 싫은 것으로 끝이 아니라 그냥 이 향기를 만끽하고 싶다.
‘그냥 이대로 죽을까?’
나 변태인가?
한심함과 수치스러움, 그리고 은근한 희망이 뒤섞여서 만들어진 엉망인 감정.
희은이 뭐라 정의해야 할지 모를 감정을 추스르고 있었을 때, 선일의 목소리가 귀에서 들렸다.
“선배 고개 들어요.”
“응?”
그러나 평소의 목소리와는 달랐다.
선일의 목소리에는 분위기를 편하게 만들어 주던 부드러움이 아닌, 대신이라고 하기에는 어딘가 이상한 긴장감이 들어 있었다.
무언가 상황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은 희은은 그 순간, 곧바로 고개를 들었다.
화악!
언제 옷을 갈아입은 걸까.
어느새 시선을 그에게 맞춘 희은은 단정한 교복이 아니라 움직이기 편하게끔 만들어진 하얀색 의복을 입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어서 그의 양쪽 주먹에 있던 반 장갑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는 처음 보는 형태의 건틀릿이 존재했다.
‘아니, 저게 건틀릿이 맞는 거야?’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선일의 무기는 이질적이었다.
희은의 주변에는 무투가가 많은 편이 아니다.
하지만 그렇기에 알아챌 수 있었다.
그녀가 알고 있는 무투가들은 모두 유파가 달랐지만, 공통점은 존재했다.
‘분명 건틀릿은 좀 더 뭉툭하지 않았나?’
희은이 떠올린 무투가들의 공통점.
그것은 바로 무기인 건틀릿이나, 너클의 형태였다.
형태로 보나 주된 목적으로 보나.
주변의 무투가가 다루는 건틀릿은 망치나 방패를 연상시켰다.
그러나 선일이 가진 건틀릿은 뭐라고 해야 할까.
‘발톱 같아.’
마치 맹금류의.
아니, 용이 가진 날카로운 발톱 같은 형태의 장갑이었다.
건틀릿의 형태는 섬뜩하기 그지없다.
그러나 희은은 아이러니하게도 든든하다는 느낌 또한 받았다.
“선배!”
희은이 잠시 변한 선일의 모습에 정신을 놓았을 때, 선일이 외쳤다.
직후.
까앙!
강철이 강하게 튕기는 소리가 희은의 귓속에 침투하며 잡생각을 떨쳐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상황 파악을 하기 위해 고개를 들었을 때, 안개 속에서는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라..? 이걸 막아내?”
“크윽...!”
“선일아!”
10대 특유의 풋풋함과 20대의 뜨거움, 그리고 30대 같은 노련함이 전부 조화롭게 섞인 여성의 목소리.
안개로 가려져 목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딱 봐도 매력적이고 위험한 사람이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꼈다.
이어서 희은은 낯선 목소리보다도 신음을 내뱉은 선일을 쳐다보았다.
화륵.
보이는 것은 뒷모습뿐이었기에 얼굴은 제대로 볼 수 없었지만 다른 것들은 확실히 볼 수 있었다.
건틀릿에서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는 붉은 기운.
희은은 붉은 기운의 정체가 자연적으로 발생한 열기가 아닌 선일의 마력에 의해 일어난 현상임을 깨달았다.
“거짓말인 줄 알았는데.”
그리고 그 열기는 낯선 목소리가 들린 방향에서도 느껴졌다.
놓치기는 했지만 대충 상황이 예상되었다.
기습.
안개 속에서 방금 빠져나온 자신들을 향해 누군가 공격을 한 것이다.
그것도 던전의 몬스터라고 예상되는 존재가 말이다.
공격을 쳐냈다는 사실을 깨달은 희은의 눈이 걱정으로 차오르기 시작했다.
“괜찮아?”
“네... 괜찮아요.”
갑작스러운 공격을 쳐낸 선일은 상체 앞으로 가져오며 자세를 잡았다.
동시에 마력을 일으킨 그는 분위기를 변화시켰다.
우웅.
일촉즉발의 분위기.
그 도화선에 손을 얹어놓은 선일은 조용히 웃음 지었다.
씨익.
언뜻 보면 그냥 평범한 미소.
그러면서도 동시에 무언가를 꾸미고 있는 사람들만이 짓는 사악한 웃음이었다.
애초에 그런 선일의 이면을 희은은 보지 못했다.
자욱한 안개에서 빠져나오기는 했지만, 희은은 그의 뒷모습만 쳐다보고 있었으니까.
허나 기습을 날린 여성에게는 전혀 아니었다.
선일의 얼굴에 매달린 꺼림칙한 미소를 눈치챈 그녀가 물었다.
“음? 너 무슨 짓을 꾸미고 있는 거니?”
기습을 날린 여성이 물었지만 선일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나지막한 목소리로 뒤에 있는 소녀를 불렀을 뿐이다.
“선배.”
“응?”
걱정도 잠시.
전투 상황에 들어서자 어느새 단검을 꺼내 양손에 집은 그녀가 무의식적으로 반문했다.
“갑니다.”
어디를 간다는 의미인지는 정확히 말을 하지 않아도 알아들었을 것이다.
뒤에 있는 희은도.
앞에 있는 수수께끼의 여성도.
직후.
콰앙-!
밟고 있던 바닥이 폭발하며, 두 사람이 날아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