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주인공의 먼치킨 동생이 되었다-94화 (94/180)

94

94화

어느새 길었던 하루는 저녁을 향해 다가가고 있었다.

다만 날이 길어져서 저무는 해는 보이지 않을 뿐.

그럼에도 사람의 몸은 시간에 적응한다.

그 증거로 낮에는 쌩쌩하던 사람이 저녁만 되면 이상하게 몸이 피곤해지는 것을 다들 한 번쯤은 느낀 적이 있을 것이다.

우우웅...

철컹!

주인의 마력을 인식한 철문이 열렸다.

“으어어...”

기숙사 방문을 열고 들어온 선일이 입으로 이상한 소리를 내었다.

영화에서나 나오는 좀비처럼 발을 질질 끌고 들어온 그는 곧장 어깨에 메고 있었던 가방을 대충 바닥에 던져 놓았다.

터억.

꽤 많은 짐이 들어있어서 그런지 기숙사 바닥에 닿은 가방에서 묵직한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아무리 무거워 봤자 근력 능력치가 8이 넘어가는 그에게는 기껏해야 가벼운 아령 정도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선일은 오늘따라 몸이 무거운 듯한 기분을 받았다.

물론 말 그대로 기분 탓이었다.

지금 그가 피곤하다고 느끼는 이유는 분명 정신적인 스트레스에서 비롯된 것이니까.

풀썩.

선일은 쓰러지듯 침대에 날아들었다.

호텔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고급 침대의 푹신함.

매일매일 느끼는 감촉이지만 언제나 자신을 편안하게 만들었다.

“...그냥 잘까?”

침대에 엎드리자마자 선일은 몰려드는 잠기운을 느꼈다.

판타지 소설 속에 나오는 서큐버스가 직접 그의 몸에 서린 것 같은 강력한 수마다.

그 유혹이 너무나 달콤해 곧이라도 취할 것 같았지만.

“생각해보니까 나 할 거 있었지.”

수마를 참아낸 선일은 힘겹게 눈을 바짝 부릅떴다.

그러나 여전히 침대에 누워있는 상태이다 보니 졸음은 완전히 떠나가지 않았고, 결국 선일은 몸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으으으윽...!”

편안한 공간에서 벗어나기 싫어하는 인간의 본능은 매우 강한 것으로 알고 있지만, 다행히 선일의 의지로도 충분히 물릴 수 있을 정도의 본능이었다.

이어서 의자에 앉은 그는 워치를 조작하기 시작했다.

툭.

그가 제일 먼저 워치로 들어간 것은 바로 내장된 전화번호부였다.

아까 만난 희은과 헤어지기 전, 1학년 팀원을 구해보겠다고 말한 선일은 곧장 워치에 저장된 전화번호부를 아래로 가볍게 스크롤하기 시작했다.

“...나 진짜 친구 없구나.”

그러나 확인하는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10초도 채 걸리지 않고 확인할 수 있을 정도로 그의 전화번호부는 휑했으니까.

그 사실을 다시 깨달은 선일은 골치 아픈 듯 머리를 긁었다.

“에휴...”

주변을 돌아다니며 팀원으로 스카우트를 하는 것은 선일의 스타일이 아니다.

그는 팀을 맺은 희은과 달리 밝고 사교성 좋은 성격이 아니었으니까.

학교생활을 하며 미소라는 가면을 쓰고 있는 이유는 단순히 다른 등장인물들을 만나면 최대한 부드러운 인상을 주기 위해서지, 빈말로도 성격이 좋다고는 말할 수 없다.

게다가 그는 여전히 학교에서 따돌림을 받는 상황이다.

저번 체험학습 이후로 무시하는 기색이 조금 줄어들기는 했어도 여전히 먼저 말 거는 사람은 없었고.

그렇다 보니 그의 전화번호부에 저장된 사람의 수는 대강 봐도 열 명을 채 넘지 않았다.

“뭔가 데자뷔 같네.”

하아, 하며 한숨을 내쉰 선일이 자신의 좁은 인간관계에 자조적인 미소를 지었다.

그래도 지금이 낫다.

과거에는 인간관계의 고립이 훨씬 심했었다.

강선일이었을 때 연락처라고는 보육원 사람 몇 명과 고작 친구 한 명의 번호밖에 없었으니까.

“에휴... 내가 왜 그런 말을 했을까.”

아무리 기분에 이끌렸어도 그런 말을 했으면 안 됐는데.

그 사실에 후회하면서도 선일은 연락처를 바라보며 계속해서 고민했다.

“이미 다 팀이 있을 거 같은데.”

선일의 연락처에 저장된 사람들은 학교 내외로 너무나 유명했다.

그만큼 원하는 사람도 많을 것이니 지금 연락해봤자 늦은 것일 수도 있지만.

“그래도 한 번쯤은 연락해봐야겠지.”

결국 고민만 하다 보면 끝이 안 날 것 같았기에 선일의 손가락이 워치를 눌렀다.

직후 워치로부터 수신호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rrrrrr....

RRRRRR.....!

잠시 짧은 수신호가 지나갔다.

그리고 이어서.

“선일씨?”

“응, 하윤아”

익숙한 목소리가 워치를 넘어 선일의 귀에까지 들려왔다.

아까 전까지 이야기했던 하윤의 목소리에 그는 웃음소리를 내었다.

“갑자기 웬일이에요?”

“잠깐 물어볼 게 있어서 전화했어.”

“뭔데요?”

진심으로 궁금해하는 하윤의 목소리에 선일은 앉아있던 의자를 뒤로 눕힌 상태로 편하게 말을 꺼냈다.

“하윤아, 혹시 나랑 팀 하지 않을래?”

“....”

이상하게도 워치 속에서 하윤은 침묵을 유지했다.

평소 같으면 곧바로 대답했을 텐데 그녀는 이상하게도 말을 꺼내지 못했다.

그러나 고민하는 눈치는 아닌 듯 보였다.

뭐랄까.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느낌.’

아.

그 순간, 선일의 머릿속에서 한 가지 생각이 지나갔다.

직감이었다.

그는 그 즉시 자신의 직감을 하윤에게 표현했다.

“하윤이 너 팀 구했구나.”

“...네.”

왜 생각하지 못했을까.

그저 괴롭힘이 줄어든 나와는 달리 배신자의 딸이라는 하윤의 평판은 조금씩 나아지고 있었는데.

가끔 보면 먼저 말을 거는 학생들도 몇몇 있었으니까 어떻게 보면 그녀에게 팀을 하자고 한 사람들도 있을 수도 있었다.

선일은 조금 당황했지만 부드러운 음성으로 그녀를 대했다.

“그랬구나. 조금 아쉽다.”

“미안해요.”

“아냐. 내가 좀 더 빨리 이야기할 걸 그랬다.”

전혀 미안할 게 없는 데도 사과를 하는 하윤을 향해 미소를 지었다.

물론 전화를 하면서 지은 웃음이었기에 직접 볼 수는 없었다.

“다른 사람이 직접 스카우트한 거지?”

“네. 주선아라는 2학년 선배가 먼저 제안을 주셔서.”

“주선아?”

처음 듣는 이름이다.

어쩌면 이선일과 같은 엑스트라였기에 기억 못하는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딱히 소설을 봐도 언급된 적도 없다.

도대체 하윤을 스카웃한 이가 누구인지 그는 너무나 궁금했지만.

‘그것보다는 일단 팀원을 구하는 게 우선이니까.’

“알겠어. 그러면 이따가 보자.”

선일은 궁금증을 잠시 접어놓은 채 그 말을 끝으로 하윤과의 전화를 끝냈다.

* * *

하윤과의 대화를 마친 이후.

선일은 계속해서 팀원을 구했다.

그래 봤자 그가 희망을 품고 연락을 한 사람들은 유리와 선월 딱 두 명이었고.

둘의 반응 역시 선일이 생각했던 바와 다르지 않았다.

“하아...”

의자에 몸을 누인 채 천장을 바라본 선일의 입에서 깊은 한숨이 튀어나왔다.

이렇게 전부 거절할 줄 알았으면 침대에 누워서 그냥 잠이라도 잤을 텐데.

갑자기 몸이 무기력해진다.

“커뮤니티에라도 올려 봐야 되나?”

대한고 학생들은 전부 1학년 때 보급받은 헌터용 스마트 워치를 사용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예 스마트폰을 쓰지 않는 것은 아니다.

워치의 기능은 마력이 흐르는 던전이나 미개척 지대에서 외부로 긴급한 연락을 하기 위해 만들어졌을 뿐, 커뮤니티나 뉴스 같은 소식을 알려면 스마트폰을 사용해야 했다.

“귀찮네...”

그렇게 말을 하면서도 선일은 책상 서랍 안에 넣어두었던 스마트폰을 꺼내기 시작했다.

툭.

투둑.

3월부터 대부분의 일상을 워치를 사용하면서 시간을 보내서 그런지 오랜만에 사용하는 네모난 스마트폰은 어색했다.

그 사실에 선일은 데자뷰를 느꼈다.

“생각해보니까 군대 갔을 때도 이랬었지?”

익숙한 감각이다.

빙의하기 이전 세계에서 강선일이 훈련소를 수료하고 자대에 가 몇 개월 만에 핸드폰을 사용했을 때가 생각났다.

개 같았던 군 생활을 떠올리자 징글징글한 생활이 떠올라 순간 노이로제에 걸릴 것 같았지만.

“진짜 오래된 것 같네.”

지금으로써는 그런 기억 또한 이곳에서는 그만 가질 수 있는 특권이나 마찬가지였다.

물론 동시에 다시는 경험하고 싶지 않은 싫은 기억이기도 했다.

오랜만에 느끼는 향수다.

그에 동조한 선일은 현실에 존재했던 강선일이었을 때 겪었던 기억들을 떠올리려다가 이내 생각을 멈췄다.

피식.

직후 그의 입에서는 웃음이 새어나왔다.

진짜 단단히 미쳤나 보다.

아무리 추억보정이 심해도 그 지옥 같았던 시간을 머릿속에 되살리다니.

“에휴...”

그런 생각을 하면서 스마트폰을 바라보던 선일.

남은 방법인 학교 커뮤니티에 들어가기 전, 그는 잠시 스마트폰의 전화번호부를 확인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시간이 지나지 않아 익숙한 번호가 그의 눈에 들어왔다.

“생각해보니까 얘도 연락처에 있었지.”

번호의 정체는 다름 아닌 배치고사 날 싸웠던 박대기.

대련이 끝나고 깨어난 그와 몇 마디 연락(과 비슷한 협박)을 남긴 이후로는 단 한 번도 연락해본 적이 없었지만, 아직 스마트폰의 연락처에는 남아있었다.

그 순간.

“잠깐만...”

머릿속에 좋은 아이디어가 번쩍인 선일은 곧바로 스마트폰을 부술 듯이 빠르게 두드렸다.

박대기를 향한 문자였다.

띡.

문자가 전송되는 화면을 보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은 선일이 핸드폰을 내려놓았을 때.

우우웅.

우우우우웅...!

책상에서 거센 진동이 울렸다.

진동의 정체가 문자라는 것을 확인한 선일의 입에 잔혹한 미소가 그려졌다.

씨익.

이어서 선일이 스마트폰을 확인했을 때.

역시 예상대로 박대기의 문자가 와있었다.

-....응?

엄청나게 당황한 사람처럼 그의 문자는 단순했다.

허나 선일은 박대기에게 답장을 보내지 않았다.

그저 담담하게.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첫 번째 신호음이 가기도 전에.

R.....

“....여보세요?”

전화를 받은 박대기의 목소리에서 떨림이 느껴졌다.

자신을 무서워하는 모습에도 선일은 여유롭게 말을 뱉었다.

“어, 대기야. 문자 봤지?”

“으...으응.”

꿀꺽.

말을 더듬은 박대기가 마른침을 삼켰다.

훈련을 따라가며 조금 강해졌다고 말할 수 있지만, 여전히 선일에 대한 공포가 거대했다.

아직도 그의 몸에는 배치고사의 고통이 사라지지 않았다.

“긴장하지 마, 대기야.”

허나 선일은 그 사실도 꿰뚫어 보았다.

아니, 그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연락을 한 것이었다.

많이 성장하기는 했지만 선일의 진짜 실력을 알고 있는 데다가 아직 공포가 남아있는 점을 보니 컨트롤 하기도 쉬울 것이 분명하다.

그러니까....

“너 나랑 팀 좀 하자.”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