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
93화
어쌔신.
암살을 업으로 삼은 사람.
한자로는 자객(刺客)이나 살수(殺手).
비슷한 영단어로는 스태버(stabber).
남몰래 적을 죽이는 직업들을 모두 포함하는 것이 바로 어쌔신이었지만, 선일이 쓴 원작에서 어쌔신과 암살자는 서로 의미가 약간씩 달랐다.
‘악사영에서 어쌔신은 단순히 암살만을 목적으로 하는 포지션이 아니지.’
적의 후방이나 측면에서 대기하다가 진영을 헤집으며 생긴 빈틈 동안 적들을 헤집으며 강력한 일격을 날린다.
이것이 어쌔신이라고 하면 떠오르는 가장 기본적인 임무이기는 하지만 다른 임무 또한 그에 못지않게 막중하다.
다른 포지션들이 하지 못 하는 직접적인 보급부터.
전음이나 텔레파시가 통하지 않는 후발대에 메시지를 전하는 전령 역할까지.
어떻게 보면 서포터와 비슷한 느낌.
물론 가진 공격 능력에 따라 더 세부적으로 나누어지기는 하지만 이런 임무를 통틀어 어쌔신이라고 통틀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거지?”
하지만 희은이 말했다.
자신은 어쌔신이라고.
고작 2년 뒤에 그녀가 직접적인 공격 기술 하나 없는 테이머였기에 더욱 아이러니했다.
충격적인 사실에 순간 인지에 부조화가 온 선일이 자기도 모르게 입 밖으로 목소리를 내었다.
“응? 무슨 말 했어?”
“아무것도 아니에요.”
다행히 희은은 잘 못 들은 것 같았다.
선일은 가볍게 숨을 내쉰 뒤, 다시 빠르게 사고를 돌렸다.
‘이것도 내가 모르던 설정이야.’
요정 공주 우르슬라와 유리 펜드래건과 이선일의 관계.
이것들처럼 또다시 모르는 설정이 등장했다.
그에 대해 평정심을 찾은 선일이 희은의 눈을 바라보며 속으로 외쳤다.
‘설정창.’
띠링!
푸른 텍스트가 나타남과 동시에 가벼운 기계음이 들렸지만, 선일의 감정은 전혀 가볍지 않았다.
그의 눈엔 복잡함만으로 가득 차있었다.
다행히 진작에 발동된 표정숨기기로 인해 표정을 희은에게 들키지는 않았지만, 순간 말을 이을 수 없었던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아니...이게 무슨?’
[설정창]
-명칭:안희은
-칭호:암살 못하는 어쌔신(희귀),신수의 사랑을 받는 소녀(유일),마수의 흥미를 끄는 소녀(유일)
-근력:LV6
-마력:LV5
-민첩:LV8
-체력:LV5
-지능:LV5
-친화력:LV9(현재 잠겨있음)
-스킬
흑영의 춤(A), ???(?), ???(?)
희은의 스텟 자체는 친화력과 민첩을 제외하면 선일과 비교했을 때, 조금 낮은 수준이었다.
물론 미래의 그녀가 가진 공격 대부분을 소환수들이 맡는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이건 너무나 낮은 수준이었다.
이어서 선일의 눈에는 희은의 친화력 수치가 띄었다.
‘미친.... 9레벨이라고?’
희은의 말을 들어보면 아직 자신이 테이머라는 것을 자각은커녕 예상조차 하지 못하는 것 같은데.
그럼에도 자신과는 비교 불가능한 압도적인 친화력에 가졌다는 점에 선일이 눈이 살짝 커졌다.
이어서 그의 시선은 9라는 숫자 옆에 붙어있는 또 다른 텍스트와 스킬들을 번갈아 보기 시작했다.
‘스텟이랑 스킬이 내가 썼던 설정이랑 전혀 달라.’
어떻게 보면 이상하지만, 한편으로는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생각해보면 희은과 만나기 전에도 몇 가지 가설들을 생각하고 있었다.
[미래에 등장할 몇몇 등장인물들을 지금 만났을 때, 자신이 만들었던 설정이 달라져 있을 수도 있다.]
선일이 이런 가설을 떠올렸던 이유는 매우 단순했다.
그가 만들었던 주조연의 설정들은 작품의 시작인 입학식을 기준으로 만든 인물들이 대다수이기는 하지만.
이미 성장을 완성한 시기를 기준으로 만들어놓은 인물들도 많이 있었고.
애당초 별다른 설정을 만들기가 애매해 적어놓지 않은 등장인물들도 극소수이지만 존재했다.
‘일단 내가 빙의한 이선일부터 그랬으니까.’
게다가 이선일 뿐만이 아니다.
지금까지 만나왔던 사람 중 B반의 담임인 정호찬부터 시련에서 만났던 이슈탈.
그리고 맹약을 맺은 우르슬라까지.
이 네 명은 아예 애초부터 악사영의 주요 내용인 이선월의 성장에 그리 중요하지 않은 인물이니 설정을 만들어놓지 않았지만.
‘안희은은 아니야.’
먼저 말한 경우에서 희은은 정확히 두 번째 경우에 속했다.
그녀의 첫 등장은 선월의 2학년 2학기 기말고사지만, 졸업 후에는 그 누구보다 많은 비중을 가진 인물이다.
3학년부터 파견을 주로 나가며 수많은 마인들과 전투를 치르는 선월을 옆에서 최대한으로 조력하는 인물 중 한 명!
그렇다 보니 선일은 그녀의 설정을 비중이 커지는 2년 뒤의 미래를 생각해서 적었다.
‘그때는 다른 스텟들은 몰라도 친화력은 20에 가까워졌고, 스킬 또한 단순하지만 강력한 것들이었지. 하지만 지금은?’
희은이 악사영에서 처음으로 등장하는 3학년은 지금으로부터 1년 뒤의 시점이다.
원작에서는 지금 2학년인 그녀가 1년이라는 시간 안에 최고의 테이머로 성장하는 것이 기정사실이었을지 모르지만.
지금은 아닐 수도 있다.
아직은 추측뿐이지만.
‘이 시기의 안희은은 도대체 뭐였을까.’
선일은 확신하기 위해 사고를 한 번 더 가속했다.
촤라락.
책이 펼쳐지는 소리와 함께 빠르게 악사영의 설정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다.
이어서 자신이 기억하고 있는 미래의 희은이 가진 설정들을 떠올리기 시작했다.
특히 그가 며칠 동안 심혈을 기울여 만들었던 스킬들은 확실하게 기억난다.
‘하나는 인연의 끈, 그리고 다른 하나는 동등한 관계.’
희은이 가진 단 두 개의 스킬은 다 S+급 등급으로 친화력과 테이밍을 강화하는 스킬이었다.
그러나 어째서인지 지금 그녀는 세 개의 스킬을 가지고 있다.
‘공교롭게도 그 중에서 물음표 스킬들의 수는 두 개지.’
한 사람도 갖기 힘든 물음표 스킬이 두 개라는 점.
그리고 남은 하나는 익숙한 스킬인 흑영의 춤.
모든 것을 조합하는 순간 선일의 머릿속에 남은 퍼즐 조각들이 번쩍하고 지나갔다.
‘설마...’
‘갑자기 왜 이렇게 조용해졌지?’
그가 말이 없자 희은의 마음 속에서 조금씩 불안한 감정이 스멀스멀 기어 올라왔다.
힘들게 구한 첫 번째 팀원인데 혹시나 다시 결정을 번복하지는 않을까라는 불안감.
그 불안감이 그녀의 심장을 가득 채우려 했을 때 선일은 입을 열었다.
“선배.”
“응?”
처음에 웃음은 온데간데없이 진지한 눈빛으로 묻는 그에게 살짝 당황했지만 희은은 티를 내지 않았다.
이어서 선일이 물었다.
“혹시 출신 가문이 어디 신가요?”
“나? 으음...”
짧은 침묵 후에 들려온 갑작스러운 질문.
잠시 고민하던 희은은 민망하다는 듯이 옅은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미안해. 대답하기가 좀 그러네...”
“그렇군요.”
긍정적인 대답은 아니었다.
동시에 선일은 확신할 수 있었다.
‘흑영의 춤은 암살자 가문인 흑영궁의 직계한테만 전수되는 무술이야.’
그리고 그 무술을 그녀가 가지고 있다.
그 말인즉슨?
‘안희은은 바로 그 흑영궁의 직계라는 건데.’
조금씩이지만 선일의 머릿속에서 퍼즐이 맞춰지기 시작했다.
가문에 속한 전원이 암살자인 흑영궁.
정의만을 비추는 세간에 의해 정통적인 가문으로 인정받지 못 했지만, 그들 역시 가문이다.
그렇기에 그들 역시 차기 가주가 되기 위해 암투를 벌인다.
다만 그 정도가 조금 심할 뿐.
‘대충 파악이 되네.’
모든 것을 종합하자 이걸로 대략적인 추측이 확신으로 변해갔다.
아직 개화하지 못한 물음표 스킬이 두 개.
게다가 떡하니 잠겨있는 친화력.
그리고 그녀가 소속된 곳이 바로 다른 가문보다 더욱 심한 수준의 암투가 벌어지는 흑영궁이라는 것까지.
모든 것들이 한 가지 정황을 가리킨다.
‘누군가 그녀의 힘을 미리 알고 제한을 걸어둔 거야.’
하지만 문제는 제한을 걸어둔 이가 도대체 누구인지였다.
흑영궁과 관련된 설정들을 모두 뒤져보면 대충이라도 범인의 정체를 확인할 수 있을 테다.
하지만 지금 앞에는 그를 기다리는 희은이 있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오래 해?”
그녀는 눈을 살짝 찌푸린 채 선일을 쳐다보고 있었다.
지금 당장에라도 확인하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살짝 자제한 그가 다시금 입가에 부드러운 웃음을 새겼다.
그러고서는 능글거리는 말투로 말했다.
“아니에요. 그냥 선배랑 팀이 되면 어떨까 하는 고민?”
“당연한 거 아니야? 완전 좋겠지~.”
그 말에 기분이 좋아졌는지 희은은 능청스럽게 대답했다.
숨김 따위는 하나도 없이 기분 좋음을 그대로 드러내는 그녀를 보며 선일은 어째서 자신이 안희은이라는 캐릭터를 만들었는지 떠올렸다.
‘좋아하니까 덩달아 나까지 기분이 좋네.’
친구라고는 단 한 명, 그것도 자신을 무시하는 이밖에 없었던 자신이었기에 쓸 수 있던 캐릭터.
희은 같은 성격이 주변인들에게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알고 싶은 궁금증.
아니.
단 한 명이라도 있으면 좋을 것 같은 저런 밝은 성격의 친구를 바라는 어릴 때 자신의 마음이었다.
그리고 그런 마음을 심어주었던 캐릭터가 지금 자신의 옆에서 말을 걸었다는 사실에 이번 웃음은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것 같았다.
“그럴 것 같아요.”
“그럼 너 나랑 팀 하는 거다?”
“네네.”
“히힛!”
대답을 듣자마자 장난기 넘치는 미소를 짓는 희은.
그녀의 웃음와 비슷한 미소를 지은 선일이 말했다.
“근데 선배.”
“응응!”
텐션이 확 올라간 그녀가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
그 모습을 보며 희은에게 강아지 꼬리가 있었다면 헬리콥터처럼 흔들렸을 것 같다고 생각한 선일.
곧바로 이상한 생각을 집어넣은 그가 이어서 물었다.
“근데 저희 팀원은 또 누가 있나요?”
“...으응?”
그 물음을 듣자마자 갑자기 텐션이 확 죽어버리는 희은을 보며 선일은 직감했다.
“저 혼자군요.”
“그건 맞는데 금방 모을 수 있어!”
“진짜인가요?”
“다..당연하지!”
시선을 회피했지만 희은은 당당하게 말했다.
살짝 말을 더듬은 점이 은근히 부끄러워하는 듯 보였다.
악사영의 그녀는 그 누구보다도 어른스러웠다는 것을 떠올려낸 선일의 입에서 피식거리는 웃음이 새어 나왔다.
화악!
그러나 선일의 속내를 알지 못하는 희은은 그가 자신을 무시하는지 알았는지 살짝 얼굴이 붉어졌다.
그런 자신에게 살짝 발끈한 희은이 입을 열었다.
“진짜라니까?”
직후 부드러운 음성과 함께.
“놀리는 거 아니에요.”
선일의 얼굴에 미소가 환히 빛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