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
91화
집중해서 듣지 않으면 언뜻 흘러가는 속삭임과도 같은 작은 한마디.
그러나 희은은 어째서인지 집중을 하지 않았음에도 자신의 귀에는 주선의 말이 너무나도 크게 울려 퍼짐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 내용이 무엇인지를 머리로 인지하는 순간.
“...뭐?”
희은은 단 한 음절을 뱉은 후에 말을 잃었다.
주선아는 자신의 친구가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말을 정정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녀는 더욱 담담하게 다시 한번 말을 반복할 뿐이었다.
“너랑 못할 거 같아.”
주선아의 말에 순간 희은은 사고가 멈췄다.
전혀 생각하지도 못했던 대답이었다.
그 사실을 확실하게 인지하자 희은은 망치로 머리를 맞은 것 같은 거대한 충격을 받았다.
18년이라는 시간 동안 떨어지거나, 아니면 따로 무언가를 해본 적이 거의 없었던 만큼 주선아의 말은 더욱 크게 와 닿았다.
이어서 충격에서 벗어난 희은은 갑자기 그녀의 지척까지 다가갔다.
“아니 아니! 장난이지?”
잔뜩 흥분한 목소리로 말하던 그녀가 억지로 유쾌한 웃음을 지었다.
지금 주선아가 평소처럼 거짓말을 진심처럼 포장하는 장난을 치고 있다고 믿으면서 말이다.
“진짜야.”
그러나 주선아의 표정은 너무나 담담했다.
언뜻 보면 차갑다고 느낄 수도 있는 그녀의 얼굴.
그 표정을 확인한 순간, 희은은 그제야 깨달을 수 있었다.
“...선아 너 진심이구나.”
주선아는 장난을 치고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모를 리가 없지.’
사실 주선아가 그런 말을 뱉은 순간부터 그녀 자신도 알고 있었다.
그저 모른 척하며 피할 뿐.
자신이 원하는 답과 달랐기에 거부하고 싶었던 것이었다는 것을 그녀는 부정했을 뿐이다.
그 사실을 자각한 순간, 희은의 입에서 나지막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왜야?”
평소에 장난기나 웃음기는 하나도 느껴지지 않았다.
지금만큼은 그녀도 진심으로 당황했으니까.
잠시 고민을 하던 주선아는 이어서 희은을 향해 처음과 똑같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전에 먼저 다른 애한테 같이 팀을 맺자는 제안을 받았어.”
학년 1위인 주선아에게 이런 제안이 들어오는 것은 당연하다.
그 사실을 머리가 이해했을 때, 희은은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후 확신했다.
‘거짓말.’
팀을 맺기 싫다는 말은 진심이었겠지만, 이 말은 분명 거짓말이다.
자신이 제안한 순간부터 지금까지 말투와 어투, 그리고 목소리까지 모든 것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균일했지만, 그럼에도 알 수 있었다.
주선아가 다른 아이들은 물론, 가족조차 모르는 자신의 본심을 꿰뚫어 보는 만큼 자신 또한 그녀의 뜻을 알 수 있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속언이 있지만 그 말은 둘에게는 통용되지 않는 말이다.
가늠하기 어려운 사람의 속을 알 수 있을 정도로 둘은 18년이라는 세월 동안 서로를 봐왔으니까.
직후 희은의 입가가 시원스러운 호선을 그렸다.
씨익.
“뭐야 그랬어?!”
다시금 얼굴에 밝은 웃음을 머금은 희은이 아쉬움의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러면서도 시선은 주선아의 이마에 꽂혀 있었다.
거기에는 한 가지 비밀이 존재했다.
오직 이 세상의 사람 중에서는 안희은 그녀만이 알고 있는 사실.
그것은 주선아 본인이어도 알지 못하는 비밀이었다.
지긋...
주선아가 어쩔 수 없이 거짓말을 할 때는 항상 미간에 특유의 미세한 주름이 생긴다는 것을.
그리고.
그런 표정에서 시작되는 거짓말은 모두 날 위해서 하는 말이라는 것도 말이다.
‘도대체 왜...?’
그 진의가 무엇인지는 여전히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말이라도 해줬다면 고맙다고 생각했을 테지만.
아무리 그래도 숨기는 것은 조금 서운하다.
그렇지만 티를 낼 수는 없다.
내가 남에게 걱정을 끼친다면.
아니, 적어도 그런 티를 낸다면.
항상 이상한 일이 일어났었으니까.
“괜찮아...?”
귀에 주선아의 목소리가 들렸다.
잠시 말을 멈췄던 그녀는 머릿속을 가득 채운 생각들을 지웠다.
“당연하지! 나라고 뭐 선아 너 없으면 안 되는 사람처럼 보여?”
이어서 그 말을 뱉은 주선아를 향해 바보 같은 웃음을 지은 희은이 손사래 치며 대답했다.
가슴을 쭉 앞으로 내민 채 당당한 척하는 희은.
오히려 미안해하는 자신을 위로하는 모습이 오히려 주선아의 마음에 엄청나게 커다란 돌덩이를 얹은 것처럼 불편했다.
그것이 아무리 상처를 받아도 남에게 전혀 티를 내지 않았던 희은이었기에 더욱 그랬다.
항상 자신의 상처가 얼마나 심할지는 가늠하지도 않고 남을 먼저 생각했으니까.
“미안...”
“뭐가 미안해! 내가 늦은 거지 뭐. 이럴 줄 알았으면 팀훈련 있다는 건 기억할 걸 그랬다! 그렇지? 헤헤.”
아쉽다는 표정으로 다시 한번 숨을 푹 내쉰 그녀.
그 모습에 마음이 약해진 주선아가 잠시 입을 다물고 있었을 때, 어느새 짐을 다 챙긴 희은이 일어섰다.
“읏차!”
“기숙사로 먼저 들어가려고?”
“아니!”
일어서며 가볍게 스트레칭한 희은이 밝게 대답했다.
헤헤거리며 해맑게 웃음을 흘린 그녀는 이어서 주선아에게서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너 없이 팀 꾸리려면 얼른 돌아다녀야지! 그럼 나 먼저 간다?”
“...응, 조금 이따가 보자.”
“엉, 저녁 먹을 때 연락해!”
말을 마치자마자 곧장 빠른 걸음으로 체육관을 빠져나가는 희은의 뒷모습.
항상 해맑은 그녀의 모습이 주선아의 시선에는 너무나 우울하게 보였다.
***
“하아...”
밖으로 나온 희은은 주변에 친구들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한숨을 내쉬었다.
평소에 짓던 웃음 또한 없었다.
지금 그녀의 얼굴은 바늘로 톡 건드리면 곧바로 터질 것만 같은 울음기 섞인 표정이었다.
희은은 하늘을 쳐다보았다.
“맑네...”
너무나 화창한 햇살.
긴 팔 긴 바지를 입고 있는 그녀에게는 조금 더웠지만, 그럼에도 날씨가 좋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었다.
원래 같았으면 이런 날에는 주선아나 다른 친구들과 같이 외출이라도 나갔겠지만, 오늘은 그럴 수가 없었다.
물론 믿었던 주선아에게 제안이 거절당했다는 점이 가장 큰 이유였지만, 그것 말고도 다른 이유가 존재했다.
“아니, 왜 나랑 팀을 안 한다는 거지...”
방금 전까지만 해도 주변을 바쁘게 돌아다니며 보이는 친구들마다 팀을 맺자고 말을 했지만, 어째서인지 그들은 전부 거절했다.
이미 팀원을 구했다는 이유로 말이다.
“설마 일부러 피하는 건가...?”
이번에 1학년과 함께하는 훈련은 성적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되어있다.
그러나 학년 톱인 주선아와 달리 희은의 실력은 빈말로도 좋다고 할 수 없었고, 그렇기에 다들 팀을 구할 때 실력이 좋은 동료와 함께하는 것이 당연히 좋을 것이다.
울컥.
그렇게 목소리로 감정을 뱉자마자 갑자기 심장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올라오는 것 같다.
불쾌한 답답함이 가미된 서운한 감정이었다.
“괜찮아 괜찮아.”
조용히 숨을 내뱉은 희은은 가슴께를 부드럽게 쓸어내리며 서운한 감정을 애써 억지로 눌러놓았다.
그러나 소용은 없었다.
씁쓸함이라는 또 다른 감정이 옷에 붙은 불쾌한 벌레처럼 온몸을 들쑤셨다.
희은은 전혀 가시지 않자 결국 한숨에 그 감정을 넣어 토해내기 시작했다.
“하아아...”
아까 전에는 도대체 어떻게 숨겼던 건지.
이럴 때 보면 항상 자기 자신이 너무나 대단하다.
물론 그 대단한 이유가 되게 하찮았지만.
피식.
여전히 사라지지 않는 씁쓸함에 희은은 자조적인 웃음을 뱉었다.
갑자기 몸을 움직이기도 싫어진다.
그냥 훈련이고 팀원이고 다 때려치우고 기숙사에 들어가서 잠이나 푸욱 자고 싶다.
“그래, 가자. 금요일까지랬으니까 시간은 많이 남았네.”
결국 오늘 팀을 만들기에는 글렀다고 생각한 그녀가 벤치에서 일어났을 때, 발아래에서 무슨 소리가 들려왔다.
동시에 부드럽고 따뜻한 존재감이 그녀의 다리 아래에서 느껴졌다.
“냐아아...”
존재감의 정체를 확인하기 위해 아래를 본 희은의 눈에 작은 고양이 한 마리가 들어왔다.
고양이의 등 쪽에 존재하는 익숙한 무늬에 그녀의 눈이 커졌다.
“어라? 레오?”
그녀의 발아래에서 몸을 비비는 노란색 고양이의 정체는 대한고의 명물이라고 불리는 레오였다.
귀여운 외모와 특유의 경계심 강한 성격 탓에 여학생들의 인기를 독차지하던 레오였지만.
“왔어?”
희은은 너무나 익숙한 듯 자연스럽게 레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또 어떻게 알고 왔대~.”
“냐아앙~.”
부드러운 손길 때문인지 기분이 좋아 보이는 레오에게서 그르렁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떻게 이렇게 혼자 있을 때만 아는 건지...
피식거리는 웃음을 지은 희은은 조용히 눈을 감으며 레오에게 말했다.
“너 막 사람 안 좋아한다는 거 다 거짓말이지?”
“냐앙.”
“아니야? 그냥 나만 좋아하는 거야?”
“냐아~.”
레오는 희은이 한 마디씩 뱉을 때마다 울음소리를 내었다.
마치 그녀가 하는 말이 뭔지 아는 것처럼 말이다.
그 모습이 너무나 귀여워 희은은 몸을 비비는 레오를 들어 올려 무릎에 앉혔다.
“읏차... 매번 느끼는 건데 넌 이상하게 무겁다 그치?”
“냐아아...”
희은은 무릎에서 기분 좋은 울음소리를 내는 레오를 보니 우울하던 기분이 조금 나아지는 것 같았다.
매번 이랬다.
입학했던 당시부터 지금까지 그녀가 항상 속을 끙끙거릴 때마다 항상 레오가 다가왔다.
그 사실이 너무나 고마워진 희은은 언제나처럼 레오에게 속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레오야 내가 그렇게 못 미덥나...?”
“냐앙?”
레오는 그녀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것처럼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런 행동을 보지 못한 희은이 말을 이어갔다.
“선아도 그렇고, 다른 애들도 그렇고. 조금 외롭다.”
“냐아.”
레오의 애처로운 울음소리가 귀에 맴돌았다.
그 소리가 자신을 위로하는 것 같아 희은은 마음이 따뜻해졌다.
작은 미소를 지은 희은이 하늘을 바라보았다.
지금 옆에 있는 레오의 따스함이 화창한 하늘에 떠 있는 해 같았다.
“그래도 너라도 있으니까 조금 낫다. 고마워.”
스륵.
그렇게 말을 마치자마자 레오가 손을 뿌리치고 몸을 일으켰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당황한 희은이 물었다.
“갑자기 왜 그래?”
그러나 레오는 대답 없이 훌쩍 점프하며 벤치 아래로 내려갔다.
이어서 그는 어딘가를 향해 걸어가던 중에 뒤를 돌아보며 울었다.
“냐아아!”
살랑거리는 꼬리가 마치 따라오라는 것 같다.
그것을 깨달은 희은 또한 옆에 있던 짐을 들고 일어섰다.
“어디 가?”
“냥.”
그제서야 만족한 듯 레오는 여유로운 걸음으로 자리를 옮기기 시작했다.
희은은 그의 목적을 알지 못한 채 알 수 없는 고양이를 따라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