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
87화
해가 정확히 중천에 뜬 순간.
우우우웅.
아무도 없던 대한고의 체육관 바닥에 거대한 마법진이 생성됨과 동시에 천장에서 환한 빛 무리가 내렸다.
이어서 빛은 조금씩 뭉쳐지며 어떤 형상으로 변해갔다.
언뜻 보아서는 마치 빛으로 만들어지는 인형과도 같았다.
그렇게 만들어진 인형의 숫자는 백이 넘어갔을 때, 빛은 점점 굳어갔다.
굳어가는 것뿐 아니라 색과 질감까지 변해갔다.
그렇게 몇 초 동안 진행되던 빛의 변화가 완전히 멈추었을 때.
차라랑...!
마치 거울 조각이 깨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빛의 인형은 완전한 인간이 되었다.
그렇게 변화한 학생들의 정체는 다름 아닌 대한고의 1학년들이었다.
아침에 있었던 자리 그대로 서 있는 학생들 대부분이 호흡도 제대로 하지 못한 채 몸을 끌어안고 있었지만.
“하아하아...!”
반대로 숨을 급하게 몰아쉬는 학생들도 몇몇 존재했다.
어찌 되었든 두 분류의 학생들 모두 전쟁터에 나갔던 병사처럼 극한까지 긴장한 모습이었지만, 곧바로 장소가 변화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면을 벗어났다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학생들이 천천히 몸을 추스르기 시작했다.
어떤 학생들은 옆에 있는 학생에게 의지하기도 했고, 또 다른 학생들은 마력을 가다듬기도 했다.
그렇게 마지막 학생까지 이면에서 돌아오자 빛무리 세 개가 단상 위에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화아아아!
학생들을 이동시켰던 빛 무리보다 훨씬 진한 기운을 풍기는 빛의 인영은 정확히 세 명이었다.
그 숫자는 정확히 이면에 이동한 선생과 같았다.
훈련에 참석한 다른 학생들과는 풍기는 존재감 자체가 달라서 그런지 현실로 돌아오는 것이 조금 늦었다.
각기 다른 세 명의 선생 중 가장 먼저 돌아온 것은 A반의 담임인 이상철이었다.
“누가 성에 도달한 거 아이가?”
강력한 정전기가 몸을 훑고 지나간 것처럼 머리카락이 삐죽 솟아있는 이상철.
특유의 경상도 사투리를 뱉은 그는 손에 들고 있던 검을 검집에 집어넣었다.
열기가 가시지 않는 몸을 식히기 위해 가볍게 팔을 돌리며 마력을 가다듬었다.
이따금 그가 가진 번개 속성의 마력으로 인해 샛노란 스파크가 몸에 튈 때마다 번개에 당한 학생들이 흠칫 몸을 떨었다.
“그렇지 않을까? 우리는 묶여있었으니까.”
이어서 이상철의 옆에 땀을 흘리는 정호찬이 나타났다.
교실에 들어왔을 때와 똑같은 힘 빠진 목소리를 낸 그는 이상철과 마찬가지로 마력을 가다듬으며 학생들을 천천히 확인했다.
다행히 이상 증상을 보이는 학생들은 그의 눈에 보이지 않았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아무리 현실에 타격을 주지 않는 이면에서 한 훈련이라고 한들, 자신이 가르치는 학생들에게 살초를 날려 공포를 주었다는 사실은 사라지지 않으니까.
정호찬은 밀려드는 찝찝함과 미안함을 애써 지우려 하지 않았다.
“돌아왔으면 다들 제자리에 똑바로 서라.”
마지막으로 돌아온 성강의 목소리가 체육관에 울렸다.
분명 많은 학생들을 상대로 힘을 썼음에도 그는 지친 기색 하나 없는 평소와 똑같았다.
다른 선생들과 마찬가지로 돌아오자마자 학생들의 상태를 확인한 그는 자연스럽게 기세를 가다듬었다.
기세를 정리하면서도 몸 밖으로 난폭한 힘이 새어 나왔지만, 옆에 있는 정호찬과 이상철은 당황하지 않았다.
“모두 고생했다.”
후들거리는 몸에 힘을 주며 선 학생들.
그런 학생들을 향해 성강이 그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이번 훈련은 강력한 적에게 살아남을 방법을 대충 알려주기 위함이었다는 것을 기억하겠지.”
그렇습니다!
성강의 말에 학생들은 있는 힘 없는 힘을 쥐어짜며 대답했다.
그들의 외침에도 차갑게 반응한 그가 이번에는 왼손을 활짝 피며 말했다.
“악마숭배자의 계급에는 크게 다섯 개로 나누어져 있다. 평신도, 전도사, 사제, 추기경, 교황.”
그는 마인들의 계층을 하나씩 입으로 뱉으며 손가락을 접었다.
완전히 손가락이 접히자 감정표현 없이 평정을 유지하던 그의 눈에 차가운 빛이 감돌았다.
싸아아...
그는 실망하고 있었고, 학생들도 그것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바보들은 아니었다.
체육관 안에 있는 모든 학생에게 더없이 싸늘한 분위기를 감돌게 한 그가 물었다.
“그중 선생들의 수준이 어느 정도였을 것 같나.”
담담히 뱉은 그의 물음에 방금 전과 달리 학생들은 침묵했다.
하나같이 고개를 숙인 학생들을 차갑게 노려보던 성강이 한숨을 쉬며 말을 이어가기 시작했다.
“나를 제외한 다른 선생들은 전도사 그리고 내 수준은 정확히 사제 정도였다. 그 말인즉슨 너희들은 고작 하급 계급과 중간 계급 마인에게 당한 거다.”
성강이 뱉는 말에는 은연중에 한심함이 묻어 나왔다.
그럼에도 자존심이 상해 보이는 학생들은 없었다.
“너희들 중에서는 네 명이 살아남았다. 그리고 딱 한 명만이 성에 도착해서 이 훈련을 끝냈지. 차이가 무엇인지 아는가?”
그 말에 대답할 수 있는 학생은 없었다.
기다려도 대답이 들려오지 않자 성강은 말했다.
“희생했다는 것이다.”
평소에는 잘 하지 않는 성강의 무거운 말투에 듣고 있던 학생들은 자연스럽게 침을 삼켰다.
“단 한 명이 성에 도달한 것으로 훈련 과제는 완벽하게 끝냈다. 하지만 이건 칭찬이 아니다. 만약 이 상황이 실전이었다면 어떻게 됐을 것 같나?”
학생들은 상상하지 못했다.
아직 그들은 그런 경험을 하지 못했으니 상상이 안 되는 것도 당연했다.
그 사실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성강의 무거운 입이 열렸다.
“아흔아홉 명의 시체는 쓰레기처럼 버려졌겠지. 그리고 혼자 살아남은 이는 죄책감에 시달리겠고. 너희가 한 희생은 언뜻 들으면 너무나 숭고하지. 그러나 현실적으로 쳐다본다면?”
희생.
너무나 고귀한 단어.
그러나 다른 관점에서 보자면.
“다른 말로 개죽음이다. 실낱같은 가능성에만 목숨을 던진 개죽음. 희생한 녀석들은 자신의 의지로 그런 죽음을 선택한 것이고, 아무런 저항도 못하고 죽은 녀석들은 타인에 의해 목숨을 결정된 것이고.”
그 목소리를 끝으로 학생들의 분위기는 더더욱 침울해졌다.
당연했다.
지금 성강이 하는 말은 그들에게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고 말하는 것이었으니 말이다.
이어서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불편한 침묵만이 감도는 체육관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기 시작했다.
물론.
“정확히 일주일 뒤 2학년과 팀을 맺어 시행하는 훈련이 있지. 원래대로라면 지상급 던전의 클리어가 목표지만....”
그 바람이 새로운 열정을 불어넣어 따스할지, 아니면 절망으로 가득 차 더없이 차가울지는 아무도 몰랐지만 말이다.
“내 권한으로 훈련의 내용을 바꾸지. 물론 알려주지는 않을 것이지만 적어도 마음을 굳게 먹어라.”
[다음 훈련에서 제대로 된 성과를 내지 못하는 녀석들은 제적 처리할 테니.]
성강의 마지막 말은 학생들에게 패닉을 일으키기 충분했다.
***
이야기를 끝으로 훈련을 완전히 마친 성강은 다른 학생들에게 휴식을 주면서 자신의 집무실로 들어왔다.
“피곤하군.”
한숨을 쉬며 들어온 성강은 자신에게 와있는 메시지를 확인했다.
메시지의 내용을 읽기 위해 손가락으로 워치를 조작한 순간.
콰앙!
“너 미쳤냐?!”
“스승님?”
갑자기 방문이 큰 소음과 함께 덜컥 열리며 스승인 엘레나가 안으로 들어왔다.
요양 중이던 그녀가 돌아왔다는 사실에 살짝 당혹스러웠지만 그럼에도 성강은 예를 차리며 그녀를 맞이했다.
“언제 오셨습니까, 몸도 성치 않으신데.”
“방금! 그건 그렇고 다음 훈련으로 학생들을 제적시킨다니 말이 되냐?”
“실망스러운 놈들이 많았기에 2학기에 시작할 선별작업의 시기를 당겼을 뿐입니다. 선별작업의 시기를 조정하는 일은 몇 년 전에도 간간이 이루어졌던 일이고요.”
“과거는 과거고! 그렇다 해서 네 권한이 그렇게 크냐?!”
“스승님이 요양하러 가시기 전에 저한테 넘기신 교감의 권한을 사용했을 뿐입니다. 기억 안 나십니까.”
성강은 담담히 대답했다.
그러나 그런 제자의 대답에 열이 오른 엘레나는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을 느꼈다.
게다가 성강이 하는 말은 모두 정설이라 어거지로 대답할 수도 없었다.
애초에 엘레나는 남의 말에 트집을 잡거나 논파를 잘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그녀가 제일 잘하는 것은 주먹을 휘두르는 것이었으니까.
“야 그래도 상의는 하던가 좀!”
“그 점은 죄송합니다만 결정을 번복할 수는 없습니다.”
성강의 눈은 너무나 단단했다.
자신의 제자가 저런 눈을 할 때마다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엘레나는 결국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한숨을 푹 내쉰 그녀가 말했다.
“하아.... 그래, 네 알아서 해라. 대신 조금만 적당히 해둬라...”
“예.”
말을 전부 마친 그녀가 방문을 향해 걸어갔다.
그렇게 손으로 문고리를 잡은 엘레나는 잠시 나가려던 것을 멈추고 성강을 돌아보았다.
“너 팔 왜 그러냐.”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래? 으음...”
엘레나는 생각하는 것처럼 잠시 입으로 소리를 내었다.
성강이 무언가를 감추려는 것처럼 보였지만 굳이 캐물을 생각은 없었다.
자신의 제자가 알아서 할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더더욱 그랬다.
“그러면 나는 휴가도 남았으니까 이만 돌아간다.”
“예, 스승님. 조심히 돌아가십시오.”
끼익...
성강은 문이 닫혀도 움직이지 않았다.
기척이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자리에 앉은 그가 무의식적으로 오른팔을 만졌다.
그는 조용히 대한고로 이동하기 직전의 일을 떠올렸다.
‘그 공격은 이상했지.’
자신과 제자의 전투.
그중 마지막 합은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더라도, 아니 그들이 직접 보았다 하더라도 절대 믿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산군의 발톱에 정통으로 마주한 선일의 주먹.
자신은 당연히 부수고 지나갈 것으로 생각했고, 또한 그렇게 되었다.
비록.
‘이선일은 분명 내 팔을 부러뜨렸지.’
상처를 입었지만 말이다.
비록 상처를 입은 곳이 현실이 아니고, 능력이 약해진 상태였다 한들 방어를 뚫고 들어올 줄은 상상치도 못했다.
그 대가로 선일은 이면에서의 목숨을 바쳤지만 말이다.
결국 그의 공격은 성공했고
성강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욱씬.
분명 이면에서 돌아오며 완전히 데미지가 사라졌지만, 이상하게도 팔이 부러진 감각이 여전히 남아있다.
정신에서 비롯된 환상통.
그러나 환상통이라기에는 너무나 생생했다.
정확히 2년 만에 느껴보는 몸이 부서지는 감각.
불쾌하면서, 이상하게 그리운 느낌이다.
그는 선일이 벽에 부딪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곧바로 추측을 머릿속에서 지웠다.
‘아직 벽을 넘기는커녕, 막히지도 않았을 텐데.’
헌터라는 종족이 강해지면서 중간중간 마주하는 한계.
대부분의 사람들이 벽이라고 부르는 경계를 넘을 때마다 깨달음을 얻는다.
이건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천외천에 오르기까지 수많은 동료와 적들을 마주했던 성강은 자신의 제자가 아직 벽에 도달할 수준은 아닌 것을 알고 있었다.
‘도대체 뭐지.’
제자의 눈부신 성장은 스승의 입장에서는 충분히 만족할 만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성강은 그런 선일의 움직임에 이질감을 느꼈다.
뭐라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기대되는군.”
그 말을 끝으로 성강은 눈을 감으며 잠을 청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