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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화
선월의 기척이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선일은 숨을 내뱉었다.
“후우... 이제 진짜 끝난 건가.”
곧장 설계자의 알림을 펼쳤다.
[서브 에피소드: 네가 알던 내가 아니야 종료.]
[‘이지운’과의 전투에서 승리하였습니다!]
[보상으로 소정의 스텟이 상승합니다!]
딱 생각했던 정도의 보상이다.
애초에 난이도 자체는 그렇게 어렵지 않았던 에피소드니까.
“현장 체험 끝났을 때는 스텟은 아예 못 얻었으니까.”
이어서 선일은 자신의 능력치를 확인하기 시작했다.
[스테이터스]
-명칭:이선일
-칭호:명문가 아들내미(보통),선을 지탱하는 자(특이),겉과 속이 다른 존재(유일)
-근력:LV7(+0.1)
-마력:LV7(+0.5)
-민첩:LV6(+0.3)
-체력:LV6(+0.5)
-지능:LV7
-친화력:LV3
-스킬
적양권(S),초현실저항(S),자연체(A),필중일발(B),표정숨기기(B),덮어쓰기(?),운명보정(?)
‘확실히 처음 빙의했을 때에 비해서는 많이 올랐네.’
근력과 체력은 거의 세 배 가까이 뛰었고, 특히 민첩은 여섯 배 이상 성장했다.
상승 폭이 가장 낮은 마력은 1.5배밖에 안 올랐지만 애초에 마력은 다른 스텟들에 비해 올리기가 힘들다.
가지고 있는 스킬 또한 동시대의 다른 학생들과 비교하면 확실히 뛰어난 편이다.
모두 종합했을 때, 어떻게 보면 이선월 급은 아니더라도 주연들, 아니 조연들과 비슷한 속도이지 않을까?
“확실히 이 정도면 나쁘지 않네.”
그렇다 해서 이 정도 수준에서 안주하기에는 이르다.
운명 보정이 알려준 위기들, 그중에서도 경고문구가 떴던 분기점이 언제인지 정확히 알지 못하는 이상 더욱 강해져야 한다.
‘적어도 중간고사 전까지는 스텟들을 전부 9까지는 올려야 해.’
그러기 위해서는 언제까지 에피소드 보상만 기다릴 수는 없다.
육체의 성장은 성강의 수련을 받으면서 조금씩 하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마력이다.
고작 A급에 불과한 자연체로는 마력을 올리는 것에 한계가 있었고, 그 한계는 거의 지척까지 다가왔다는 것을 선일은 이미 예전부터 알고 있었다.
“어떻게든 정보를 모아야겠어.”
선일은 말을 뱉으며 하늘을 바라보았다.
시선에 보이는 하늘은 너무나 밝았다.
그 빛이 중천에 뜬 달에서 비롯된 것을 깨달은 순간, 선일은 피와 열기 때문에 달아올랐던 몸이 순식간에 식었다는 것을 자각했다.
“....이제는 진짜 자자.”
더는 몸을 조이는 피로를 버티지 못할 것 같았기에 선일은 뒤늦게 자신의 방으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
홀짝.
이천야는 어두운 집무실에서 차를 한 모금 머금었다.
그의 표정은 이상하게 후련해 보였으나, 그를 바라보던 이주아의 얼굴은 어딘가 찜찜해 보였다.
결국 참지 못한 그녀가 입을 열었다.
“가주님, 장로들을 그냥 두실 겁니까.”
“음.”
이주아의 말에 이천야는 대련이 끝난 후의 연회를 떠올렸다.
자신의 자식들이 확실한 실력을 보여줬기에 비고를 여는 것에 대해서는 다시는 이야기는 나오지 않았다.
허나 숨긴다 해도 이천야의 눈에는 장로들에게 감춰진 불순한 분위기를 파악할 수 있었다.
찻잔을 내려놓은 그가 턱을 괴며 무거운 목소리를 말했다.
“생각해보면 조금 거슬리기는 하지.”
“요즘 장로들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습니다. 특히 이무룡 장로는 대련이 끝난 둘째 도련님께 살기를 풀풀 풍기기도 했습니다.”
‘슬슬 정리해야 할 때가 온 건가.’
지그시 눈을 감으며 생각을 정리하는 이천야가 작게 손짓했다.
그 손짓의 의미를 깨달은 이주아가 고개를 숙였다.
“이미 조사해놨습니다.”
“말해보게.”
큼큼, 목소리를 가다듬은 그녀는 주인의 명에 따라 입을 열었다.
“현재 장로진 중 몇몇 인물들은 다른 오대가문에 접촉한 것으로 파악했습니다.”
“예상했던 정도군.”
“하지만 그게 문제가 아닙니다. 아니, 그건 문제라고 할 수도 없을 정도죠.”
“설마.”
천천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이천야의 눈이 가늘어졌다.
동시에 그의 분위기가 변했다.
고오오...
목덜미가 따끔거린다.
최대한 자제한 것이 분명하지만 그럼에도 꽤나 난폭한 기운이다.
그러나 이주아는 그의 살기에도 담담히 말을 이어갔다.
“네, 클리어 쪽에도 접촉한 것으로 파악했습니다.”
“정신이 혹시 나가버린 건가? 아니, 정신은 이미 나갔겠군. 목숨을 그냥 쓰레기통에 갖다버렸으니까.”
평소 무뚝뚝하던 이천야의 입에서 난폭한 말이 튀어나왔다.
무슨 일이 있다고 한들 평정심을 잃지 않는 가주였지만 이주아는 그런 반응에 이해할 수 있었다.
클리어라는 집단은 악마숭배자와는 또 다른 세상을 좀먹는 벌레들이었으니까.
“누구지? 많고 많은 집단 중에서도 하필 그 정신병자들에게 연락한 미친놈은.”
“이무룡과 그의 파벌입니다.”
“쓰레기 X끼들.”
덜컹!
결국 참지 못한 이천야가 의자를 박차며 일어섰다.
그는 밤하늘을 수놓은 별들을 보며 화를 다스렸다.
이주아는 주인의 뒷모습을 보며 물었다.
“어떻게 하실 겁니까?”
“분명 애들이 대한고를 갈 때, 이무룡 장로가 그랬었지. 가문 밖에서 배우는 행동은 전통을 깨는 것이라고.”
갑자기 이야기가 딴 길로 새자 이주아는 의문을 가졌으나 그걸 직접 표현하지는 않았다.
의구심을 깔끔하게 정리한 그녀가 공손하게 대답했다.
“예, 분명 그랬습니다.”
“그럼 내가 가주가 된 순간부터 전통이라는 이름의 악습들을 바꾸려 하는 것도 그들은 잘 알겠지.”
분위기가 한 번 더 달라졌다.
더없이 차갑다.
아니, 이럴 때는 싸늘하다가 맞으리라.
자신의 주인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제왕의 분위기에 이주아는 한쪽 무릎을 꿇으며 고개를 숙였다.
이어서 이천야의 입에서 마력과 함께 낮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주아 이번 주말이 끝나면 선포해라. 새로운 흐름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명목하에 성인 이하의 일원들은 외부로 나가서 배움을 받고 돌아오라고.”
“알겠습니다!”
“다만 그 기간은 최소 1년이며 일원들이 가문 밖으로 나가 돌아오는 순간까지 가문의 힘을 빌릴 수 없다는 조건은 여전하다.”
사족처럼 붙은 마지막 말이 그녀의 귀에 묵직하게 내려앉은 순간, 이주아는 그의 진의를 깨달았다.
가주의 목적은 새로운 흐름을 받아들이려 하는 것이 아니다.
진짜 목적은 바로 장로들의 목줄을 잡는 것이다.
‘확실히 장로들은 혈육을 아끼는 이들이 많다.’
그들이 외부에 나가 있을 때, 가문의 힘을 빌리지 못한다는 이야기는 말 그대로 본가와는 아무 연관이 없는 사람으로 대한다는 말이다.
그렇기에 장로들 또한 혈육이라 한들 함부로 도움을 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정도로 장로들을 견제하는 것은 어렵다.
가문에서 몇십 년이라는 세월을 보낸 그들은 밖에도 연줄이 존재할 테니 몰래 인원을 붙일 것이 분명했다.
‘물론 그건 가주님도 마찬가지다.’
장로들이 손자나 자식에 보호자를 붙인다면 우리는 반대로 감시자를 붙이면 된다.
이주아는 그렇게 생각하는 이천야의 머릿속을 조용히 예측했다.
‘확실히 효과적이다.’
한 가문의 절대자인 이천야의 머리에서 나온 계략이라기에는 너무나 비겁한 방식이다.
그가 현 천검인 이상 가문을 지켜야 할 의무가 존재했으니까.
그러나!
‘먼저 선을 넘은 것은 장로들이다.’
천검이가의 장로이면서 다른 가문과 연락을 취했고.
그것으로도 모자라 버러지 같은 작자들에게 손을 내밀려 했다.
마지막으로 가주를 방해하며 직계를 모욕했다.
이주아는 그가 그 사실을 확실히 한 순간부터 그들에게 자비는 없을 것을 직감했다.
이어서 그녀가 허리춤의 검을 검집째로 뽑았다.
쿵!
바닥을 검집으로 강하게 내리친 이주아는 검을 수직으로 세웠다.
그러고서는 검의 손잡이를 이천야 쪽으로 살짝 기울였다.
그 모습은 마치 가주에게 자신의 검을 뽑으라는 것처럼 보였고, 실제로도 가주의 명을 받을 때 취하는 자세였다.
이천야가 조용히 검에 손을 올리자 이주아의 입에서 결의가 담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가주의 명을 받들겠습니다.”
***
다음 날 아침.
“진짜 죽겠다...”
빠르게 옷을 갈아입는 선일이 하품을 내쉬었다.
분명 씻었음에도 전날에 쌓인 피로 때문에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한다.
그러나 그의 손은 익숙하게 바지의 지퍼를 잠갔다.
이어서 셔츠를 입기 위해 팔을 안으로 집어넣은 순간, 어깨 쪽에 강렬한 통증이 일어났다.
욱씬!
“윽!”
선일은 통증이 느껴진 부위가 어젯밤 검에 베인 상처 중 가장 심한 곳이라는 걸 깨달았다.
“...좀 더 제대로 치료할 걸 그랬네.”
너무 피곤했던 탓에 자기 직전에 대충 붕대만 감는 간단한 응급처치만 하고 방치했던 것이 떠올랐다.
이렇게 아플 거라고 미리 알았다면 본가의 치료술사를 깨워서라도 부탁하는 건데.
어젯밤에 있었던 일들을 후회하던 선일은 곧장 손목에 감은 워치로 시간을 확인했다.
“조금 애매하네.”
하아, 선일은 한숨을 쉬었다.
한 10분 정도만 남았더라도 치료를 받고 이천야를 만나러 갈 수 있었을 테지만 시간이 너무 촉박했다.
결국 고통을 참으며 셔츠 안으로 팔을 넣을 수밖에 없는 선일이 이를 악물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어제 그냥 깨울걸...!”
쓰라린 고통을 인내하고 나서야 선일은 마침내 상의를 입을 수 있었고 직후 그의 방 안으로 선월이 들어왔다.
첫날과 다르게 가볍게 문을 두드린 그는 선일의 이마와 목에 흐르는 작은 땀방울을 보며 물었다.
“왜 이렇게 땀을 흘리는 거지.”
‘하.’
저 녀석은 알까.
어제 막무가내로 한 대련에서 입은 상처 때문이라는 걸.
선일은 당장에라도 소리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표정 숨기기의 힘을 빌려 웃음을 유지한 그가 능청스러운 분위기로 어깨를 으쓱거렸다.
“별거 아냐.”
어깨를 움직이자 다시 한번 쓰라린 고통이 그를 감쌌으나 다행히 티는 나지 않았다.
“얼른 나와라.”
“네이네이~.”
문을 나가는 선월에게 장난스러운 말투로 대충 대답한 선일은 적당히 웃었다.
이어서 방문을 나섰을 때, 그의 앞에는 걸음을 멈춘 선월과, 깔끔한 정장을 입은 여성이 있었다.
어딘가 선월과 닮은 듯한 차가운 인상의 미인은 선일을 보며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이선일 도련님.”
“아 네.”
‘이주아가 왜 여깄지?’
천검의 비서이자 선월의 스승인 그녀가 갑자기 자신의 방 앞에 불쑥 찾아왔다는 점에 당황한 선일은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그 또한 아무것도 들은 적이 없었는지 얼굴이 살짝 굳어있었다.
이어서 의문을 참지 못한 선월이 물었다.
“스승님 이른 아침부터 어째서 이곳에 오셨습니까.”
“일단 방 안으로 들어가시죠.”
그녀의 짧은 한마디에 선일과 선월은 다시 방으로 들어왔다.
마지막으로 들어온 이주아가 문을 닫자마자 말을 꺼내며 다시 한번 고개를 숙였다.
“가주님의 명으로 도련님들을 모셔가기 위해 왔습니다.”
선월의 질문에 이주아가 고개를 들며 말했다.
둘의 당혹감이 당연한 것을 깨달은 그녀는 말을 이어갔다.
“현재 가주님은 장로들을 모아 회의 중이십니다. 아마 조금 늦어질 것 같으니 저에게 두 분을 비고의 앞까지 직접 모셔오시라 하셨습니다.”
이주아는 말을 잠시 멈추고 바지 주머니에서 검은색의 무언가를 꺼냈다.
그것을 전해 받은 선일과 선월은 얇은 천 안쪽에서 미약한 마력을 감지했다.
“감각을 잠시 흐리게 만드는 천입니다. 비고의 정확한 위치는 가문 내에서도 극소수로 전해지다 보니 이것을 착용하지 않으면 가실 수 없습니다.”
이주아에게 이야기를 듣기 전에 그 사실을 알고 있던 선일과 선월은 곧바로 천을 눈에 감았다.
안대처럼 눈을 가리자마자 마치 우주에 누워 유영하는 듯한 감각에 둘은 자신들이 쓰러진다는 정보도 인지하지 못했다.
다행히 넘어지기 전에 둘을 지탱한 이주아가 마력을 일으켰다.
키이잉-!!!
순식간에 바닥에 그려진 기이한 문양이 검은빛을 내뿜었다.
이어서 검을 바닥에 꽂은 그녀가 입을 열었다.
“그럼 가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