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
73화
이무룡과 비슷한 키의 소년.
나이는 자기 아들들과 비슷해 보였다.
이천야는 보기 좋게 이무룡의 옆에 선 소년에게 시선을 두며 말했다.
“그 아이는?”
“제 손자입니다, 가주.”
어딘가 닮았다고 생각했는데 혈육이었나.
이천야는 그제야 그 소년의 정체를 깨달았다.
“아아... 기억나는군. 이무룡 장로가 그렇게 아끼는 핏줄이라고.”
“그렇습니다, 가주.”
대답하는 이무룡이 가볍게 고개를 숙이자 옆에 가만히 서 있던 소년, 이지운도 마찬가지로 고개를 숙였다.
“이지운이라 합니다. 현 천검을 뵙게 돼서 영광입니다!”
“고맙군.”
이지운의 목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연회장을 울렸다.
자신감이 돋보이는 그의 기세를 간단한 대답으로 흘려버린 이천야가 말을 이어갔다.
“그래서. 지금 이무룡 장로가 하는 말의 의미는 그 아이로 실력을 검증하자는 것이오?”
“정확히는 이선월과 이선일, 그 두 아이를 각각 실력을 검증하자는 것이지요, 가주.”
“헌데 지금 보이는 아이는 딱 한 명일 뿐인데. 남은 하나는 어떻게 할 것이오.”
자연스럽게 걸려드는 이천야.
물론 그 모든 것이 연기였으나 이무룡과 장로들은 가주가 그 생각을 꿰뚫고 있음을 알지 못했다.
권력이 조금 줄어들어 가문 내에서 영향력이 약해지기는 했으나, 아직 그들의 위치는 가주와 가장 가까운 장로진이었으니까.
아니, 오히려 그들이 살아오며 얻은 영향력으로 따지면 아직 20년도 되지 않은 가주보다도 높다.
‘라고 생각하고 있겠지, 노친네들.’
이천야는 뻔히 보이는 생각에 비웃을 뻔했으나 그가 가진 인내심은 대단했다.
무표정으로 묻던 그를 바라보며 이무룡은 속으로 됐다며 생각하기 시작했다.
“오늘 연회에는 방계의 자제들도 꽤나 많지요, 가주. 그들 중에서 대련을 바라는 인물이 두 소년 중 원하는 이를 골라 대련을 하는 것입니다.”
“오호... 생각이 빠르군, 장로.”
“감사합니다, 가주.”
이천야의 입에서 나오는 어투 자체는 평범했으나 이무룡은 그가 자신을 비꼬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적어도 스무 살은 덜 먹은 애송이가 가주라는 이유로 이런 식으로 자신을 하대하자 가슴 깊은 곳에서 분노가 차올랐으나, 그는 겉으로 티를 내지 않았다.
그저 웃음으로 이면을 가렸을 뿐.
‘후우.... 참자. 곧 있으면 네 아들 녀석을 대놓고 쓰레기 처리를 해주마.’
“너희는 괜찮겠느냐.”
이무룡의 제안을 들은 이천야는 앞에 서 있는 두 아들에게 물었다.
조용히 칼자루에 손을 가져다 대기 시작한 이선월이 입을 열었다.
“저는 상관없습니다.”
“선일이는.”
“저도 괜찮아요.”
사실 괜찮지 않았지만 선일은 바로 뒤에서 느껴지는 이천야의 기척에 웃음을 띄웠다.
물론 그 표정을 지은 것이 자의가 아니라 스킬의 힘을 사용했지만 말이다.
“됐군.”
둘의 입에서 만족스러운 대답이 나오자 이천야는 다시 연회장을 바라보았다.
정확히는, 저 앞에서 은은한 미소를 지은 이무룡을 한 차례 노려본 그가 누군가를 불렀다.
“이주아.”
가주의 부름에 이천야가 나왔던 통로로 누군가 조용히 걸어나왔다.
순간 선일은 기척을 놓쳤으나 이름을 듣고 그녀가 누군지 곧바로 깨달았다.
그와 동시에 키가 큰 여성이 이천야에게 다가와 고개를 숙였다.
“부르셨습니까, 가주님.”
“야외 대련장을 준비하게.”
“알겠습니다.”
가주의 명령에 조용히 대답하고 다시 들어가는 이주아.
이어서 이천야는 연회장을 향해 소리쳤다.
“이선월과 이선월, 이 둘의 실력을 보고 싶은 가문의 일원은 야외의 대련장으로 나오도록. 그리고 너희는 대련 준비해라.”
“알겠습니다.”
“예.”
철컥.
가주의 명령이 떨어지자 선일과 선월은 그대로 내려가 각자의 방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
그 후로 몇 분 뒤.
“왔느냐.”
“예, 아버지.”
어느새 바로 뒤까지 다가온 선일과 선월.
연회에 참석할 때, 입었던 복장이 아닌 편안한 무복으로 갈아입은 둘은 대련장 앞에 서 있는 이들을 바라보았다.
‘다섯 명.’
생각보다 많은 수였다.
‘아니, 오히려 적은 수인가.’
이선월의 재능은 천검이가를 넘어 널리 알려졌다.
진심으로 자신들의 무를 개척하는 자들은 세계에서도 손꼽히는 유망주로 알려진 선월과 대련하고 싶어한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안타까운 점은.
‘딱히 이선월에게 상대가 될 만한 사람은 없네.’
앞에 서 있는 인물들의 힘을 대강 확인하는 순간, 선일은 그들의 미래를 알 수 있었다.
그들이 모두 다 같이 공격하더라도 선월에게는 손끝 한 번 닿을 수 없다.
아니.
‘나한테도 닿을 수 없다.’
지금 선일이 느끼는 감정은 자만 같은 오만한 감정이 아니다.
순수한 힘의 차이였으니까.
그 사실을 인지한 선일이 편하게 생각하려는 순간.
싱긋.
‘웃었어?’
저 앞에 있는 다섯 명의 인원 중 한 소년이 선일을 향해 희미한 웃음을 지었다.
언뜻 보면 곧 있으면 시작될 대련에서 상대를 존중하는 듯 보였으나.
다른 사람이 짓는 표정 속에 가려진 의미를 쉽게 알아채는 선일의 눈은 속일 수 없었다.
‘날 무시하고 있네.’
자신보다 분명한 하수라고 생각하는 소년의 얼굴.
어딘가 익숙해 보인다고 생각했건만.
이제야 기억났다.
‘이무룡의 손자. 날 노리고 있나.’
아까 전, 이천야와 이무룡이 대화하는 도중, 자연스럽게 이무룡의 옆에 붙었던 이지운이라는 소년이었다.
직후, 선일은 이지운의 설정을 확인하기 시작했다.
띠링.
[설정]
-명칭:이지운
-칭호:천검의 방계(보통), 검술의 수재(특이)
-근력:LV7
-마력:LV8
-민첩:LV7
-체력:LV6
-지능:LV5
-스킬
검의 재능(A),천재검(B+),강약약강(C)
확실히 또래 중에서는 수준급의 힘이다.
등급이 낮기는 하지만 검의 재능이라는 스킬도 가지고 있고, 준수한 스텟도 가지고 있었으니.
게다가 특이 등급의 칭호까지 가지고 있으니 같은 힘을 가지고 있어도 그 힘의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
‘이 정도면 악사영에서도 조연급으로 성장할 수 있을 텐데.’
설정창을 끈 선일은 그에게 대답을 들려주는 것처럼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의 여유만만한 모습을 확인한 이지운은 그를 비웃기 시작했다.
‘저 자식이 할아버지가 말씀하신 본가의 쓰레기인가?’
확실히 별다른 힘은 느껴지지 않는다.
또 다른 가주의 직계인 이선월은 가만히 있으면서도 명검처럼 차갑고 날카로운 분위기가 감도는 반면, 이선일은 특별한 점은 없다.
이 정도면 딱히 힘을 들이지 않고 농락을 할 수 있음이 분명하다.
‘기대되는군.’
크크크.
이지운이 자신의 할아버지처럼 속으로 비열하게 웃었을 때, 이천야의 입이 열렸다.
“그럼 이제부터 대련을 시작하지. 이지운이라고 했나.”
“그렇습니다!”
“둘 중 실력을 보고 싶은 이가 있는가.”
“예!”
이천야의 질문에 이지운은 자연스럽게 자신의 검을 들며 소리쳤다.
“저는 이선일 도련님과 붙고 싶습니다!”
“그렇군. 이선일, 너는 어떻게 하겠는가.”
예상했던 것처럼 이지운은 선일을 노리고 나왔다.
지목을 받은 그는 은은한 미소를 지으면서 조용히 앞으로 걸어나왔다.
“뭐... 상관없어요.”
“그럼 둘은 각자 자리에 서도록.”
저벅.
뚜벅.
선일과 이지운은 각자 마주 볼 수 있도록 대련장의 양 끝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이주아, 심판을 보아라.”
“알겠습니다, 가주님.”
언제나 가주의 뒤에서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던 이주아는 이쳔야의 명을 따라 대련장 중앙을 향해 걸어갔다.
이어서 정확히 둘 사이에 있는 그녀는 곧바로 대련을 시작할 선일이 빈손으로 몸을 푸는 것을 보며 그에게 물었다.
“이선일 도련님, 무기는 안 쓰십니까.”
“아아.”
이주아의 물음에 선일은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렸다.
마치 무도가처럼 붕대만 감은 주먹을 보여준 선일이 입을 열었다.
“제 무기는 이거라서요.”
‘허? 검가가 검도 안 써?’
선일이 보여주는 오만한 광경에 이지운은 속에서 분노가 울컥 차올랐다.
극한의 인내심으로 표정을 가다듬었으나 그는 입안에서 이가 갈리는 것만은 참을 수 없었다.
‘진짜 쓰레기였군. 어이가 없네.’
빠드득.
힘겹게 분노를 참는 모습을 보며 선일은 조용히 웃었다.
이어서 그는 자신을 날카롭게 노려보던 선월을 향해 전음을 날렸다.
-형.
-뭐냐.
마찬가지로 전음으로 대답하는 선월을 향해 선일이 딱 한 마디를 남겼다.
-보여줄게.
-...
그가 무엇을 보여준다는 것인지 깨달은 선월의 눈에 희미한 감정이 차올랐다.
물론 전음에 침묵했으나 선일은 선월의 눈에 떠오른 감정이 은은한 기대감과 열망이라는 것을 눈치챘다.
직후.
스릉.
맑은 울림이 뻗어나옴과 동시에 이주아가 검을 높이 들어 올렸다.
그러고서는.
“대련 시작하겠습니다.”
검을 내리치며 대련장의 먼지가 피어오르는 것을 시작으로 선일과 이지운.
둘이 동시에 움직이기 시작했다.
먼저 선공권을 가져가는 것은 다름 아닌 이지운.
선월과 같은 환도를 사용하는 그는 순식간에 선일에게 다가가 검을 휘둘렀다.
촤악!
그의 검이 아직까지도 내려앉지 않은 흙먼지를 갈랐다.
선일은 이지운의 검격을 보며 확실히 이 정도면 수재라고 불릴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만큼 빠르고 날카로웠으니까.
하지만.
’평범해.’
현장 체험에서 선월의 검술을 보았기 때문일까.
그의 검술은 분명 예술적이라고 볼 정도로 아름다웠고 강렬했다.
그러나 지금 이지운의 검은.
‘너무나 조잡하고 단순해.’
검에 대한 조예가 없어도 알 수 있다.
비교 대상이 괴물인 것이 잘못일 수도 있다.
한편으로는 저런 검을 가지고도 자만하는 이지운의 잘못이 더욱 크다고 생각이 된다.
‘이 정도는 마력을 쓰지 않아도 피할 수 있어.’
그는 이지운이 행하는 내려치기가 다가오는 것을 여유롭게 쳐다보았다.
마치 슬로우 모션처럼 느려진 검이 허공을 가른다.
하지만 선일은 검이 어깨에 닿기 직전까지도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그가 한 움직임은 고작.
스윽.
오른발 딱 한걸음.
아니, 반걸음을 뒤로 물러선 것이었다.
디딤발의 위치를 움직이며 이동하는 무게중심.
선일은 자연스럽게 그 흐름을 억지로 벗어나려 하지 않았다.
칵!
‘뭐지? 이걸 피했다고?’
정확히 말하자면 완벽히 피하지는 못했다.
결과적으로 이지운의 내려치기는 선일이 입고 있던 무복의 앞섬을 갈랐으니까.
그러나 어찌 됐든 자신의 공격은 실패한 것이다.
‘우연이겠지.’
후속타와 같은 별다른 움직임이 없는 선일을 보며 이지운은 자신이 실수했고 그 때문에 공격에 실패했다고 생각했다.
이어서 그는 땅에 닿아있던 검을 손목의 힘을 이용해 역으로 돌렸다.
이지운은 억지로 검을 회수하지 않고 유연하게 대각으로 베어 가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선일의 옆구리를 목표로 나아가는 검.
그의 검에는 약간의 마력이 흐르고 있었다.
‘이제는 실수 따위는 안 한다!’
그러나 선일은 조금 전과 마찬가지로 아무런 행동을 하지 않았다.
검 쪽으로 시선을 두지도 못하는 그를 보며 이지운은 잠시 후 일어날 미래를 머릿속에 그렸다.
옆구리에 피를 흘리고, 그 때문에 점점 움직임이 느려져 자신에게 농락당할 이 쓰레기의 미래를.
그러나 이지운은 알지 못했다.
그가 상상한 미래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고.
직후, 대련을 지켜보던 이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소리가 이상했다.
검의 예기가 살을 가르고 피가 쏫아지는 소리가 아닌.
쩌적!
마치 거대하고 단단한 바위에 쇳조각이 부딪히는 소리였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