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
72화
춥다.
지금은 4월이다.
매서웠던 꽃샘추위는 저번 달에 전부 지나갔기에 이제는 따스한 날씨만 올 것인데.
햇빛이 들어오지 않는 것일까.
‘잠깐...?’
분명 오늘 오전까지만 해도 햇빛이 쨍할 정도로 오늘은 따뜻했다.
하지만 지금 선일의 몸은 그 주변의 공기를 차갑다고 판단했다.
왜일까.
방의 온도가 달라졌다는 이질감을 이성으로 깨달은 순간, 선일의 눈이 번쩍 뜨였다.
“잠깐 춥다고?!”
선일은 작게 소리치며 상체를 급하게 일으켰다.
그는 볼 수 있었다.
이선일의 방에 있는 창문이 활짝 열린 것을.
그리고 보았다.
창문 안으로 들어오는 빛은 밝은 햇빛이 아닌 어둠을 꿰뚫는 은은한 달빛이라는 것을.
눈을 감았던 아침이 아닌 어둠이 내려앉은 밤이라는 것을 깨달은 직후, 선일은 잊고 있었던 한 가지 법칙을 떠올렸다.
사람이 가장 늦었다고 생각했을 때.
“아 미친...”
그때는 이미 원래 생각했던 시각보다 훨씬 늦었다는 변하지 않는 사실을.
“지금 시간 몇 시야?!”
선일이 정확한 시간을 확인하기 위해 워치를 바라보았을 때.
그는 손목에 매달았던 워치의 알림을 보며 몸을 흠칫 떨었다.
-연회는 일곱 시 정각에 시작이다.
선일의 워치에는 한참 전에 온 이천야의 문자가 있었다.
그러나 지금 눈에 들어오는 시각은 정확히 6시 50분.
연회 시작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은 선일의 얼굴이 새하얘졌다.
“X 됐네...?”
펄럭!
지체할 시간이 없다는 것을 깨달은 선일이 빠르게 몸을 일으켰다.
순식간에 침대에서 벗어난 선일.
그대로 옷장까지 달려가 기세 좋게 문을 열었던 선일은 곧이어 두 번째 난관에 봉착했다.
끼익.
“미친.”
빙의했던 당일에는
이선일의 옷장 속은 공간마법이라도 인챈트 되어있는 듯, 수없이 많은 옷이 옷걸이에 걸려있었다.
그가 기숙사에 들어갈 때 가져갔던 캐리어 속의 옷들이 새 발의 피로 보일 정도.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옷들 사이에서 잠시 멈칫한 선일이 입을 열었다.
“...근데 뭐 입고 가야 하지?”
***
“후우... 늦지 않아서 다행이다.”
제시간에 맞춰 연회장에 도착한 선일이 가슴을 쓸어내렸다.
이어서 사람들이 가득한 연회장을 천천히 바라본 그의 눈이 추억에 잠겼다.
‘여기는...’
본가의 천무궁 그 안에 있는 연회장.
잊을 수가 없다.
두 번째 동화를 할 때, 과거의 이선일이 자신의 형만 칭찬하는 것을 듣기 싫어 빠져나갔던 그 공간이었다.
‘넓긴 하네.’
선일은 표정 숨기기로 평온한 표정을 유지하며 연회장 안을 둘러보았다.
이어서 그는 꽤 늦게 도착한 자신보다 먼저 연회를 와있는 사람들을 쳐다보았다.
‘분명 이천야는 간단한 연회라고 했었는데...’
하지만 간단한 연회라고 하기에는 사람의 수가 이상하게 많았다.
거의 백 명에 가까운 사람들.
천검이가의 연회라서 그런지 다들 차려입고 온 상태였다.
고급스러운 사람들을 보며 갑자기 신경이 쓰인 선일은 자신이 입고 있던 옷을 다시 확인하기 시작했다.
‘이상하지는 않겠지?’
다행히 자신의 눈에는 별문제는 없는 것 같다.
이곳까지 오면서 중간중간 지나가던 천검이가의 사용인들이 자신의 복장을 살짝 흘겨보는 것 같았지만.
선일은 정장과 용포가 반씩 섞인 듯한 옷을 입고 있었는데, 꽤 특이한 형태임에도 그의 부드러운 분위기와 잘 어우러져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
허나 그 사실을 몰랐던 선일은 자신의 복장이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이어서 낙천적으로 생각하기 시작했다.
‘뭐... 그래도 이 정도면 괜찮겠지.’
애당초 남들이 괜찮지 않다고 말을 하더라도 지금 와서 옷을 갈아입기는 꽤나 어렵다.
그 사실을 알고 있는 선일은 천천히 연회장 안쪽을 향해 걸어갔다.
주변의 사람들은 중앙을 향해 유유히 걸어가는 그를 무시한 채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아이고 요즘 길드 상황은 괜찮나?”
“하하하하, 뭐... 다 똑같습니다.”
이렇게 각자 겪고 있는 상황에 관해 이야기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그것보다 오늘 연회가 강화도에서 일어났던 일 때문이라면서요?”
“진짜요?”
오늘 연회가 열린 이유에 관해 이야기를 하는 무리도 있었다.
특히 선일은 후자가 하는 말들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많은 사람들이 떠들어댔기에 듣기가 쉽지는 않았으나 그럭저럭 들을 정도는 되었다.
이어서 강화도에 대해 말을 하던 한 사람이 입을 열었다.
“아 나도 그렇게 들었네. 가주의 첫째 아들이 악마숭배자 놈들이 만든 괴물을 처리했다던데?”
“그럼 오늘 연회는 진짜 그걸 치하하기 위해 선가요?”
“일단 들려오는 소문으로 들은바 그렇다고 알고 있네.”
물론 진실은 선월이 아닌 선일이 마지막에 일몰의 검으로 처리한 것이었지만 그는 신경을 쓰지 않았다.
오히려 저렇게 왜곡되어 알려지는 것이 그가 원하는 바였다.
“근데 강화도에서는 둘째 아들도 있었다고 들었어요! 오히려 그 아들이 괴물을 잡았다는 이야기도 있던데.”
“아 그 능력 없는 둘째 말이요? 에이 찌라시겠지.”
“당연히 그렇겠죠?”
‘이야... 이선일에 대해서는 내부 사람들은 다 알고 있었구나.’
악사영에서 제대로 나오지 않았으나 확실한 것은 이선일도 유명인이다.
물론 그것이 주인공인 이선월과 반대의 이미지였으나 지금 그에게는 이렇게 알려지는 것이 편했다.
‘저렇게 알아주는 게 나한테는 편하지.’
자신이 원하는 대로 알려졌다는 사실이 만족스러워진 선일이 편안한 웃음을 뱉으려는 순간, 그의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어이가 없군.”
“형?”
기척도 없이 직전까지 다가온 이선월.
선일은 어느새 지척까지 가까워진 자신의 형이 하려는 행동을 보았다.
“아니 아니!”
선월이 그를 스쳐 지나가며 칼자루에 손을 대자마자 선일은 당황할 새도 없이 급하게 그를 막아섰다.
“형 갑자기 왜 검에다가 손을 올려?”
선일이 만류하는 말에 움직임을 멈춘 선월은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서 자신의 동생과 눈을 마주친 그가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네놈 내가 제일 싫어하는 인간의 종류가 무엇인지 모르지 않을 텐데?”
“뭐?”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것일까.
선일은 갑자기 선월이 꺼낸 말에 대해 당황하면서도 질문에 대한 답을 떠올리기 시작했다.
‘분명 악사영에서는...’
거짓말을 하는 자.
왜곡된 사실을 퍼트리는 자.
자신을 해하려는 자.
“분명 이렇게 세 가지였지?”
“그렇다. 헌데 저자들은 천검이가의 손님으로 온 자격임에도 그런 왜곡된 사실을 입으로 뱉으며 너의 명예를 깎아내리고 있다. 근데 네놈은 그런 말들을 듣고만 있지. 그렇기에 내가 처리하려는 것이다.”
한 치의 부끄럼도 없다는 것처럼 말을 마친 선월은 다시 고개를 돌려 그들을 향해 다가갈 준비를 했다.
하지만 선일은 그런 선월의 팔을 잡으며 다시 한 번 멈춰 세웠다.
이어서 그가 입을 열었다.
“다 맞는 말이잖아?”
“...뭐?”
선일의 말에 선월은 격렬한 감정이 가득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평소와는 달리 평온해 보이는 얼굴의 선일.
그러나 그 표정은 스킬로 인해 이루어진 것이었다.
자신이 표정숨기기라는 스킬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던 선월을 향해 선일이 나지막하게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저 사람들 말처럼 내가 형한테 못 미치는 것도 맞잖아.”
“무슨...”
“그리고 강화도에서는 애초에 나는 형이 다른 애들하고 잡아놓은 괴물에게 딱 한 번 공격을 날린 것뿐이고, 그 공격이 운 좋게 숨통을 끊은 거야. 오히려 저렇게 평가받는 게 나한테는 편하다고.”
“...”
그 말을 듣고 침묵하던 선월은 자신의 동생이 평소처럼 웃는 것을 보았다.
선월이 자신의 말을 듣고 아무 말도 하지 못하자 그의 어깨를 가볍게 손으로 두드리며 자연스럽게 잠시 멈췄던 걸음을 다시 움직였다.
그대로 선월과 스쳐 지나가던 선일은 딱 그의 귀에만 들릴 정도로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툭툭.
“물론 그게 내가 능력이 없다는 말은 아니지만 말이야. 아 어머니!”
말을 마친 선일은 선월에게서 눈을 돌리며 저 앞에서 둘을 향해 손을 가볍게 흔들고 있던 백설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예전과 달리 어머니라 부르는 모습이나 방금과 같이 말하는 모습을 보면 그가 어딘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든다.
꾸욱.
대한고에 같이 입학하기 전, 동생의 모습은 자신을 뛰어넘는다는 목표에 사활을 건 사람처럼 보였으니까.
그 모습이 추악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는지 동생은 주변인에게, 하물며 자신에게도 그런 질투심을 보이지 않으려 했던 것은 알고 있었다.
허나 자신의 눈에는 동생의 행동 하나하나에 진심이 전부 보였다.
과거의 자신처럼 말이다.
“푹 쉬었니?”
“너무 자가지고 잘못하면 늦을 뻔했어요.”
“만약 늦었으면 아버지가 한소리 하셨을 거야.”
“다행이네요!”
백설과 이선일의 화기애애한 모습.
둘이 평범한 대화를 나누는 장면을 보면서도 선월은 이질감을 버릴 수 없었지만, 선일의 머릿속에서는 그저 등장인물이었던 이선월이 그 이질감의 정체를 알아낼 수는 없을 것이다.
아무리 그 등장인물이 세계의 중심이 되는 주인공이라 할지라도.
“저기 이제 슬슬 나오시는구나.”
아침에 봤던 소탈한 복장이 아닌 우아한 기품이 묻어나는 드레스를 입은 백설이 말했다.
그 말에 그녀가 저 위를 올려다본 선일.
백설이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에서는 이천야가 천천히 걸어나오고 있었다.
“전부 다 모인 것인가.”
평소에 입던 편안한 무복이 아닌 가주만이 입을 수 있는 검은 용포를 입은 이천야는 아래를 향해 손짓했다.
그 손짓이 자신들을 부르는 것을 깨달은 선일.
“가지.”
선일은 자신을 부른 선월과 같이 뒤쪽에 있는 계단으로 이천야를 향해 걸어 올라갔다.
이천야는 다가온 둘을 부드럽게 불렀다.
“이리 오거라.”
처억.
저벅.
자연스럽게 이천야의 양쪽 옆에 선 두 소년.
둘이 준비되었다는 것을 확인한 이천야가 연회에서 자신이 생각해뒀던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일단 본가에 온 모든 이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오늘 이렇게 연회를 꾸린 이유는 요즘 늘어나는 마인들의 움직임, 그 움직임을 저지하기 위해서는 그대들과 좋은 관계를 맺고 싶다. 그 전에!”
이천야가 잠시 말을 멈추자 선일과 선월은 타이밍 좋게 그의 앞으로 나섰다.
눈치 빠른 아들들을 따스한 눈으로 한 차례 바라본 이천야가 천천히 숨을 골랐다.
“다들 이번에 강화도의 미개척지대에서 일어났던 불미스러운 일에 대해서 들었겠지.”
이천야는 침묵하는 사람들을 무뚝뚝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다행히 사상자는 거의 안 나왔지. 그리고 그 일에는 천검이가의 일원인 이선월과 이선일이 같이 있었다고 하네. 아니, 같이 있는 정도가 아니라 해결에 큰일을 했지. 오늘 연회는 그대들과의 좋은 관계를 맺기 위함이 목적이나 동시에 큰일을 해낸 가문의 일원들에게 상을 내림도 있다.”
다행히 반박하거나 부정하는 자는 없었다.
물론 아직까지는.
생각했던 대로 진행되는 연회.
이천야는 이제 점잔을 떠는 장로들의 물결에 파문을 일으킬 때라고 생각했다.
“악마숭배자의 계략을 저지한 이선월과 이선일. 이 둘에게는 상으로 가문의 비고에 있는 물건을 하나씩 하사할 것이다.”
“안 됩니다!”
미리 예상했든 것처럼 연회에 있든 장로들이 반박했다.
이천야는 지금 이곳에 있는 장로 중 가장 강한 권력을 가진 ,이무룡에게 눈가를 찌푸리며 물었다.
“어째서인지 의견을 들어도 되겠소 이무룡 장로?”
겉으로 보이는 말투는 그를 대우해주는 것 같으나 사실은 가주가 그들에게 불쾌함을 가득히 들어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이무룡.
그러나 그는 능구렁이처럼 부드럽게 웃으며 이천야에게 대답하기 시작했다.
“가주, 아직 그 일원들은 아이들이고, 또한 그 주변에는 성강과 또 다른 강자가 있었다고 하던데 그들이 없었다면 오히려 천검이가가 그놈들에게 당했을 수도 있소. 2년 전처럼 말이요!”
“이무룡 장로의 말도 타당하지만 어쨌든 결과는 그놈들을 막았다는 것이오.”
“물론 천검이가의 일원이 빌어먹을 악마숭배자 놈들의 계획을 맞은 것은 큰 상을 내릴만한 큰 업적이오. 허나 그 아이들은 비고의 물건을 가지기에는 과분하다는 생각이 노인네에게는 듭니다.”
“호오... 지금 이 아이들의 자질이 부족하다라...”
“그럼 이러면 어떻겠소 가주?”
잠시 고민하는 이천야를 향해 가볍게 고개를 숙인 이무룡이 비열한 미소를 지었다.
일어났을 때는 미소가 사라지며 인심 좋은 할아버지 같은 표정을 지은 그가 말했다.
“오늘 연회에 온 이들 중에서 그 일원의 실력을 검증하는 것이.”
이무룡이 말을 꺼냄과 동시에 그의 옆에서 누군가가 자연스레 튀어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