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
71화
짧은 시간이 지나고, 다른 아버지의 용건이 없는 것을 깨달은 선월이 입을 열었다.
“말씀 끝나셨다면 이만 가도 되겠습니까.”
“아아 그렇지.”
그는 앞에 있던 찻잔을 옆으로 가볍게 치웠다.
침묵에 목이 타들어 가는 것 같은 선일은 곧바로 마시고 있던 차를 빠르게 입안으로 밀어 넣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이천야는 더더욱 말했다.
“오랜만에 집에 돌아온 자식들을 너무 오래 붙잡고 있는 것도 예의가 아니지. 얼른 일어나 보아라.”
“감사합니다.”
가주의 허락이 떨어지자 선일과 선월은 각각 앉았던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들은 들어왔던 문 앞에 바로 선 채 말했다.
“들어가 보겠습니다.”
“그래 좀 이따가 보자꾸나.”
드드드득.
마찬가지로 일어난 이천야가 뒤를 돌은 순간, 문이 열렸다.
둘이 들어왔을 때와는 반대로 문은 바로 닫히지 않았다.
이어서 두 아들의 기척이 점점 작아지는 것을 확인했을 때, 열려있던 문으로 또 다른 누군가가 들어왔다.
철컥.
깔끔한 양복을 입고 있는 젊은 여성.
서구적인 양복과는 어울리지 않는 긴 환도를 허리춤에 매달은 여성이 들어오고 나서야 문이 천천히 닫히기 시작했다.
이천야는 자신의 집무실 의자에 앉으며 들어온 그녀를 향해 입을 열었다.
“자네 왔는가.”
자신의 비서이자 경호인 그녀를 확인한 이천야는 미뤄두었던 서류 작업을 천천히 시작했다.
“예 가주.”
가볍게 눈인사를 했던 자신의 아이들과는 달리 그녀는 허리를 깊게 숙였다.
공손한 인사에 가볍게 반응한 이천야는 그녀를 곧게 바라보며 물었다.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듣고 싶어서 불렀네.”
“어떤 것을 말씀하시는 건지 잘 모르겠습니다.”
묵직한 가주의 질문에 이주아는 조금의 틈도 없이 대답했다.
숨기려 하고는 있지만, 그녀는 이미 자신이 한 말의 의미를 파악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천야는 진작에 깨닫고 있었다.
이어서 그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이주아를 향해 가볍게 말했다.
“이미 눈치채지 않았는가.”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그제야 말을 꺼내는 그녀의 뻔뻔함에도 이천야는 화를 내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의 질문이 궁금해 죽겠다는 것처럼 미세하게 눈이 커진 상태였다.
“그래, 자네는 저녁에 이루어질 대련이 어떻게 될지 말해보게.”
그 때가 돼서야 이주아는 가주에게 대답하기 위해 굽혀있던 허리를 펴며 상체를 들어 올렸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곧장 결론부터 이야기하는 것은 하수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그녀의 눈이 그를 쳐다보았다.
이어서 섬기는 가주가 계속해서 자신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에 작게 한숨을 내쉰 이주아는 이내 입을 열기 시작했다.
“큰 도련님은 본가를 떠나있는 시간이 그리 많지 않았음에도 큰 성취를 이룬 모습입니다.”
“그건 느끼고 있었네.”
빙빙 돌려서 이야기하는 그녀에게 이천야는 즉답했다.
당연한 대답에 그녀의 눈에 의문이 차올랐다.
애초에 자신보다 강한 천검이다.
자신이 눈으로 본, 아니 온몸으로 느낀 사실을 그가 모를 리가 없다고 생각한 이주아의 대답을 가주는 바라고 있었다.
“이선월 도련님은 오늘 저녁에 이루어질 대련에서 누가 나오든 패배할 일은 절대 없을 것입니다.”
“...”
“큰 도련님은 마지막으로 저에게 검을 배우셨을 때보다 지금이 훨씬 성장하셨습니다. 육체와 마력, 그리고 기세 모든 요소가.”
“그렇군.”
“애초에 본가를 떠나기 전부터 같은 또래 중에는 이선월 도련님을 실력으로 웃도는 자는 없었습니다.”
“그랬었지.”
당연한 사실을 말하는 이주아에게 무뚝뚝하게 대답한 이천야의 손이 빨라졌다.
가주가 밀려있던 서류 작업을 하는 것을 보면서 그녀의 말이 이어졌다.
“그리고 이선일 도련님은...”
“도련님은?”
말을 흐리는 이주아에게 이천야가 대답을 요구했다.
잠시 대답을 망설이던 이주아는 가주의 요구에 어쩔 수 없이 대답하기 시작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별 차이가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물론 이선월 도련님과 같이 떠났을 때보다 분명 성장한 것은 맞지만, 딱히 그리 큰 변화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흐음...”
어느새 바쁘게 이뤄지던 서류 작업을 멈추고 자신을 바라보는 이천야를 확인한 이주아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그러나 겉으로 내색하지는 않았다.
그러면서도 자신이 파악하지 못한 정보가 있는지 곰곰이 생각하는 이주아의 귀에 이천야의 목소리가 들어왔다.
“계속 말해보게. 그래서 이번 대련은 어떻게 될 것 같은가.”
“솔직히 말하자면 큰 도련님과는 반대의 경우가 될 것 같습니다.”
“반대의 경우라...”
“예, 누가 나오든 쉽게 승리할 이선월 도련님과는 달리 이선일 도련님은 누가 나오든 힘든 싸움이 될 것 같습니다.”
그리고 결국 패배하실 것입니다.
이주아는 뒤에 이어질 말을 밖으로 뱉지 않았다.
어차피 자신의 말이 가진 의미는 그가 전부 파악하고 있을 것이 분명하니까.
그러나 이천야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예상과는 달랐다.
“자네도 보지 못한 것이군.”
“예?”
이천야가 하는 말의 의미를 바로 이해하지 못한 이주아가 그에게 되물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자네는 모르는 사실이 있네.”
순식간에 해결한 서류들을 옆으로 미뤄둔 이천야.
그는 여유로운 웃음을 띠면서 그녀가 한 질문에 대한 답을 꺼내기 시작했다.
“현재 대한고의 교사진 중에서 성강이 있는 것을 알고 있겠지.”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정보도 잘 알고 있겠군. 성강은 제자를 두지 않는다는 것을.”
“예, [강철]을 키우셨다는 스승과는 다르게 그분은 유달리 제자에 대한 욕심이 없다는 소문은 유명하지 않습니까.”
“헛소문이다.”
흠칫.
이주아의 표정에 금이 갔다.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천외천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자란 그녀로써는 처음 듣는 이야기였으니.
“놀랐나?”
“예, 조금 당황했습니다.”
“애초에 그런 말들이 나오는 이유는 성강에게 퇴짜를 맞은 이들이 퍼뜨린 헛소문이지.”
자신을 바라보는 이천야의 표정이 어딘지 모르게 부드러워졌다.
이주아는 그 표정을 잘 알고 있었다.
매번 천검이가의 안주인인 백설과 자식들에 대해 대화를 나눌 때 지었던 표정이니까.
인간을 벗어난 천외천, 또는 천검의 가주.
평범한 인간은 얻을 수 없는 수식어들 덕분에 사람들은 이천야를 괴물이나 영웅처럼 대했으나.
이런 표정을 지을 때는 더없이 자식들을 대견해하는 아버지가 된다는 사실을 이주아는 알고 있었다.
허나 이주아는 어째서 지금 가주가 그런 표정을 짓는지에 대해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이어서 이천야가 대화를 이어가기 시작했다.
“성강에게 제자 욕심이 없다는 말은 사실 거짓말이다. 오히려 제자에 대한 욕심은 많았지. 그러나 성강이 제자를 두지 않은 이유는 간단하다.”
꿀꺽.
세상에 알려진 자그마한 진실이 지금 이천야의 입에서 튀어나오기 직전이라는 것을 느낀 이주아의 목에 침이 넘어갔다.
“그의 제자가 되겠다고 자처한 이들이 전부 기준에 맞지 않아서였지.”
“그렇군요. 그런데 갑자기 그 이야기는 왜 하시는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잡설이 길었군. 선일이는 그런 성강의 제자다.”
“....예?”
결국 마지막까지 당혹감을 참을 수 없었던 이주아가 바보같이 반문했다.
이미 말을 꺼낼 때부터 그녀가 이런 반응을 보일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었던 이천야가 의자에 일어섰다.
“날씨가 좋군.”
이어서 그는 뒤쪽에 위치한 창문으로 하늘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아직 오전임에도 햇살이 뜨겁다.
밖에서 내리쬐는 태양을 잠시 바라보며 웃음을 지은 이천야의 입이 열렸다.
“물론 그 사실을 아는 인물들은 극히 소수이니 자네도 말을 함구해 주길 바라네.”
***
“하아...”
선일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일이 꼬였다.
현시점에서 가장 큰 관심을 받고 있는 강화도에서 일어났던 일이 그 유명한 천재 이선월이 처리했으니.
물론 가문으로 우리를 부를 것이라고 생각은 했으나 이런 일이 생길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않았다.
‘대련 이야기가 나왔을 때부터 불안했었는데...’
원작대로라면 이선월과 이선일이 이렇게 천검이가를 학기 중에 오는 일은 없었다.
애초에 가주인 이천야가 떠나있는 두 사람을 부른 이유 중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것이 강화도에서 일어났던 일 때문이니까.
악사영에 따르면 강화도에 나타난 레크라의 마체병기를 처리하는 것은 단 한 명, 하윤 뿐이었다.
원작대로라면 그날 이선월은 이질감을 느끼자마자 갑자기 나타나는 언데드들을 상대하러 갔고, 유리도 마찬가지로 그를 따라갔으니.
‘귀찮게 됐네.’
내가 빙의한 후 상황은 바뀌었다.
악사영의 전개대로라면 전력이 거의 없는 학생들 사이에서 마체병기를 막았던 사람은 하윤 혼자.
그러나 원작과는 다르게 마체병기를 처리한 것은 하윤과 유리 그리고 나와 이선월 이렇게 넷.
‘마인이 몰래 개발하는 비밀병기를 고작 학생들이 처리했다는 건 충분히 전 세계에 유명해질 만하지.’
게다가 마체병기를 처리한 현장에서 대한고 신입생, 그것도 천검이가의 차기 가주로 예상되는 유망주 이선월의 공이 컸다.
오히려 그에 대한 포상을 주지 않는다는 전제가 이치에 맞지 않았다.
‘그냥 이선월은 빼고 셋이서 처리할 걸 그랬나.’
선일은 이선월이 없는 파티를 떠올렸다.
‘...조금 힘들었을 거 같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많이 힘들었을 것 같다.
애초에 그가 짠 파티가 악사영에서도 가장 밸런스가 좋은 파티였으니까.
다시 강화도에서의 일을 떠올린 선일은 스멀스멀 올라오던 후회감을 물리쳤다.
‘그래도 뭐... 신하윤이 악마화가 진행되지 않은 건 그나마 다행이네.’
이어서 그날에 보았던 동화대로 진행되었다면 학생들의 비난은 물론 수많은 매스컴에 그녀가 다시 언급되었을 미래는 분명했다.
선일이 어지러운 생각들을 다시 찾은 이성으로 정리하고 있었을 때, 그의 옆에서 선월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지.”
“그냥 좀 그래서.”
“흥.”
선일의 대답에 무슨 생각을 한 것일까.
그에게 차갑게 대답한 선월은 어이가 없다는 말투로 말했다.
“네놈 정도면 가문의 다른 이들에게 쉽게 지지는 않겠지.”
“그런가...”
그 말이 마치 그를 위로하는 것처럼 느껴졌지만 선일은 신경을 쓸 수 없었다.
생각을 정리하느라 선월을 향해 대충 대답한 선일은 순식간에 도착한 이선일의 방문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곧바로 문을 열고 방 안으로 들어가려 했을 때, 선월이 그를 멈췄다.
“잠깐 기다려라.”
“...응?”
갑자기 자신을 멈춰 세운 선월.
그를 의문이 가득 찬 눈으로 돌아본 선일이 되물었다.
어딘가 흐리멍덩한 상태인 선일을 노려보던 선월은 지금까지 묵혀두었던 말을 밖으로 내뱉기 시작했다.
“그래서 네놈이 성강님의 제자라는 것은 언제 증명할 거지.”
“아.”
생각해보니까 그랬었지.
애초에 강화도에서 마이웨이인 선월이 자신의 부탁을 들어줬던 이유도 그것 때문이니까.
그제야 정신을 차린 선일이 그를 향해 능글거리는 미소를 지었다.
“지금은 너무 피곤하고 조금 있다가 보여줄게.”
“하!”
현장체험 날부터 계속해서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피하는 자신의 동생에게 짜증이 올라왔으나, 다행히 지금 선월에게 달미르는 없었다.
이어서 그는 선일을 향해 노기를 꽉꽉 눌러 담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번이 마지막이다.”
“그래그래.”
스스슷.
선월의 분노가 진심이라는 것을 깨달은 선일은 그의 분위기에 온몸의 솜털이 곤두섰다.
허나 그를 향해 여유로운 표정을 지은 그는 대답 없이 머리까지 올린 오른손으로 힘없이 허우적댔다.
그런 동생의 표정에 선월은 더욱 열이 받았으나 마지막으로 이성을 잡았다.
등을 돌린 선월에게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약속 지켜라.”
“알았다니까.”
쿠웅.
선월의 발걸음에서 느껴지는 분노를 보면서 선일은 몸을 돌렸다.
그대로 자신의 방 안으로 들어간 선일은 침대에 누워 워치를 바라보았다.
저녁에 치러질 연회까지 한참 남았다.
그 사실을 확인한 선일은 천천히 눈을 감고 차오르는 수마에 몸을 맡기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