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
67화
현장체험 다음 날.
정신을 차리자마자 곧바로 퇴원한 선일은 지금 학교가 아닌 홍대에 나와 있었다.
현실에서는 부의 상징이었던 강남이 부랑자들과 범죄자가 가득한 곳으로 변한 것과는 달리 악사영의 홍대는 현실과 같이 젊은 열기가 가득한 곳이었다.
“피곤해 죽겠네...”
빙의하기 전의 강선일도, 빙의 후의 몸인 이선일도 두 사람 다 인파가 많은 곳에서 기가 빨리는 성격이었는지 선일은 졸음에 의해 눈이 감기려고 하는 것을 힘겹게 참았다.
근처 벤치에 앉아 수많은 사람들이 행복한 웃음을 띤 채 길거리를 거니는 광경에서 시선을 뗀 선일이 하늘을 쳐다보았다.
“날씨는 좋네.”
어제 있었던 일들은 전부 꿈이었다는 것처럼 선일의 위에서 쏟아지는 햇빛은 너무나 따스했다.
태양의 힘을 다뤄서인지, 아니면 오늘이 휴일이라 그런지.
햇빛과 그에 걸맞은 맑은 날씨 사이에 덩그러니 앉아있으니 아직 점심을 먹지 않았음에도 식곤증처럼 나른함이 그의 몸을 가득 채웠다.
“하아암~.”
기분 좋게 하품을 내쉬는 선일.
그 모습이 꽤나 흉해 보였을 것이지만 그럼에도 이선일이 가진 꽤나 훈훈한 얼굴 덕분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들이 더러 있었다.
“저 사람 되게 괜찮다.”
“그러게. 번호 물어볼까?”
“가위바위보 진 사람이 가는 걸로?”
“에이 이긴 사람이 가야지!”
그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는 소녀들은 그를 바라보면서 꺄르륵거리고 있었고 선일은 그런 소녀들의 대화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듣고 있었다.
‘확실히 이선일도 잘생긴 편이지.’
현실에서 실패자 강선일로 있을 때는 단 한 번도 듣지 못했던 말이지만 선일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대한고에서 무시를 당하면서도 주변에서 얼굴 정도는 반반하다는 말이 간간이 들려왔으니까.
다만 악사영의 주인공인 선월이나 다른 주연들이 그와는 차원이 다른 비정상적인 외모를 가지고 있었을 뿐!
선일이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동안 그에게 꽤 많은 사람들이 다가왔고 그들 대부분의 레퍼토리는 단순했다.
번호를 좀 달라거나.
또는 자신의 번호를 준다거나.
또는 커피나 식사라도 같이 하자거나.
“후우...”
이쯤 되면 익숙해질 만도 했으나 선일은 여전히 그런 사람들의 반응에 적응을 하지 못했다.
다시 한번 말한다시피 강선일에게는 이런 경험이 없었으니까.
물론 강선일 역시 사람이고 또 남자였기에 가끔씩 거울로 얼굴을 확인할 때마다 ‘나 정도면 괜찮지 않나?’라는 생각을 했었으나 들려오는 반응은 전부.
‘차가웠지.’
헛소리하지 말라는 둥.
그를 보며 박장대소를 터트렸던 반응이 대부분이었다.
‘물론 대답해 준 놈들이 대부분 그 자식이었지만...’
허나 지금은 신경 쓰지 않는다.
그것보다 선일은 유일한 친구와의 추억 아닌 추억들을 떠올렸다.
‘그때는 어렸으니까.’
조용히 쿡쿡거리는 선일이 눈을 감았다.
강선일이었을 때는 애초에 연애를 할 생각도 없고, 그런 여유도 없었기에.
그저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며 평가하는 것은 사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아무리 그래도 막 웃을 만큼 나쁘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그 친구가 지금의 모습을 보고 들었다면 오히려 내가 웃었을 텐데.
웃음기 남아있던 선일의 표정은 조용히 굳어졌다.
“그 자식 어떻게 지내려나...”
유일한 친구였고, 또한 자신을 무시한 친구였지만 그렇기에 더욱 생각난다.
지금은 어떻게 지낼지.
그렇게 욕하던 부장 놈 대리기사 일은 잘 하고 있는지.
마지막으로.
‘나는 어떻게 됐을까.’
남아있던 세상.
현실의 강선일은 도대체 어떻게 되었을까.
“쓰읍...”
“저기요...”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답답한 마음에 냉수를 마시듯 호흡을 들이쉰 선일에게 누군가가 다가왔다.
“네? 왜 그러시나요?”
감았던 눈을 떴을 때, 그의 앞에는 처음 보는 소녀가 서있었다.
나이는 같은 고등학생 정도일까.
얼굴에 붉게 홍조가 띠어있던 소녀는 두 손으로 핸드폰을 꽉 쥔 채 말이 없었다.
반대로 소녀의 눈동자는 엄청나게 당황한 듯, 쉴 새 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야야 말 걸었어!”
“조용히 해! 딱 재밌어질 타이밍인데.”
“아아 왜 나는 보자기를 냈을까...”
“이길 수 있었는데!”
선일을 보며 떠들던 소녀들은 저 멀리서 그와 소녀를 아쉬움과 흥미가 반반씩 섞인 눈으로 번갈아 바라보고 있었다.
자신의 앞에 선 소녀의 뒤에서 발랄하게 떠드는 무리를 한차례 바라본 선일이 쓴웃음을 지었다.
‘쟤네들이었구나.’
선일의 얼굴에 핀 곤란한 표정을 보지 못한 것일까.
굳게 결심한 소녀가 선일을 향해 힘차게 핸드폰을 내밀었다.
“혹시잇!”
가까이서 보니 더욱 훈훈한 선일의 얼굴을 보며 긴장한 것일까.
소녀는 말하던 중에 혀를 깨문 것처럼 보였다.
‘아이고 아프겠다.’
고통이 꽤 심했을 것이 분명했지만 소녀는 부끄러워하면서도 계속 말을 이어갔다.
“여자친구 없으시면 번호 좀 주실 수 있나요?!”
“하하...”
딱 생각했던 말.
이어서 선일은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죄송합...”
그 순간.
“여자친구 있어요.”
선일의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평소보다는 더욱 높은 목소리 톤.
설마 하는 생각에 선일은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렸고, 뒤에 있는 사람의 모습을 쳐다본 그의 눈이 삽시간에 커져갔다.
“유리...”
반가운 마음에 그녀의 이름을 부르려던 선일.
평소처럼 유리라고 부르려던 그의 육감이 경고했다.
섬뜩.
동시에 선일의 목덜미에 살기가 느껴졌다.
만약 본명을 부르면 큰일이 날 것 같은 느낌.
감각이 말해주는 위기를 깨달은 선일의 등에서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선일은 순발력을 발휘해 말을 멈추지 않았다.
“나!”
“선일아 많이 기다렸어?”
그제서야 밝은 웃음을 지은 유리.
그녀의 모습은 대한고의 유리 펜드래건과는 달랐다.
평소에 족쇄처럼 하고 다녔던 남장이 아닌 산뜻한 분위기를 내는 테니스 치마와 따스한 봄 날씨에 너무나 잘 어울리는 노란색 맨투맨과 새하얀 스니커즈.
그리고 어깨 아래로 부드럽게 흘러내리는 웨이브 진 찬란한 금발 머리를 보며 선일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미친.’
말로는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그녀가 이렇게 꾸민 모습은 밤피르와 전투를 끝낸 직후 보았던 기억 이후에는 처음이었으나, 그때보다 더욱 아름다워진 것 같았다.
선일과 같이 유리의 모습을 보고 있던 소녀의 반응도 그와 똑같았다.
유리의 눈이 말을 이어가지 못하는 소녀를 향해 나아갔다.
“제 남자친구가 잘생겼죠?”
선일은 자신을 향해 자연스럽게 남자친구라고 뱉는 유리에게 반박할 수 없었다.
그녀가 지닌 봄처럼 따스한 분위기와는 달리 마치 목덜미에 칼이 들어온 것 같은 꽃샘추위에 선일의 목에 마른침이 넘어갔다.
그제서야 만족한 유리가 입꼬리를 올리며 다정한 말투로 말을 이어갔다.
“제가 오랜만에 남자친구랑 만난 거라서요. 혹시 괜찮으시다면 그만 가주실 수 있나요? 조금 부담이 되는데.”
오늘 날씨처럼 부드럽고 다정한 어투였으나 유리를 앞에 둔 소녀는 깨달았다.
그녀의 웃음은 딱 입가에만 있을 뿐.
눈은 전혀 웃고 있지 않다는 것을.
위험하다는 사실을 깨달은 소녀가 선일에게 내밀었던 핸드폰을 빠르게 회수하고 고개를 숙였다.
“죄...죄송합니다!”
말을 더듬으며 사과 인사를 남긴 소녀는 곧바로 같이 있었던 친구들을 향해 도망치듯 달려나갔고, 그제서야 선일의 목을 조이던 팔이 풀려지기 시작했다.
“유리.”
“유리나.”
방금 전을 기억 못하고 본명을 부른 선일의 말을 유리는 곧바로 정정했다.
“둘만 있을 때는 그렇게 부르기로 했잖아.”
“아 미안.”
목을 감쌌던 완전히 풀려 편안해진 선일이 다시금 고개를 돌려 유리의 얼굴을 쳐다봤다.
그의 시선에서는 방금까지 웃고 있었던 유리의 뺨이 공기로 인해 빵빵하게 부풀어 있었다.
마치 삐진 것 같은 유리의 표정에 선일은 피식거렸다.
그러나 비웃음은 아니었다.
“알았어 유리나.”
확인하는 것처럼 그녀가 좋아하는 이름으로 부르자 유리는 방금까지 삐쳐있었던 것이 거짓말처럼 활기찬 웃음이 채워졌다.
그런 유리의 표정을 보면서도 이상함을 느낀 선일.
그는 어이없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아니, 그건 그렇고 남자친구는 뭐야.”
“너 지금까지 여기 있으면서 몇 명 다가왔지?”
유리는 선일의 말에 대답을 하는 대신, 오히려 역으로 질문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여유롭게 한 질문이라기에는 은근히 필사적으로 느껴졌기에 선일은 무의식적으로 그녀의 말에 대답했다.
“한... 열 명?”
“다 여자였지?”
“어떻게 알았어?”
“딱 보면 다 알지요~.”
말을 하면서 킥킥거리는 유리.
이어서 앞으로 걸어온 그녀가 자연스럽게 선일의 옆에 자리를 잡았다.
마치 그네에 있는 것처럼 그녀는 다리를 앞뒤로 휘적거렸다.
“예전 빚 갚았다?”
“뭐?”
“너 안 귀찮게 도와준 거라구~. 누나한테 고마워해라?“
“참...”
뻔뻔하게 말을 하는 유리.
악사영에서도 비슷한 일화가 있었던 것을 기억해 낸 선일이 눈치채지 못하게 유리를 쳐다보았다.
‘생각해 보면 악사영에서도 이런 에피소드가 있었지. 분명 길드 가입을 떨쳐내는 일이었나?’
이선월이 천검이가임을 알면서도 계속해서 귀찮게 하는 한 길드장을 떼어냈던 에피소드.
물론 뉘앙스나 대화의 내용은 달랐으나 어째서인지 그 에피소드가 떠올랐다.
다만 다른 점은 그녀의 얼굴이 방금 도망친 소녀와 같아 보인다는 걸까.
‘뭐... 기분 탓이겠지.’
그냥 오랜만에 소녀의 모습을 해서 들뜬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 선일이 그녀의 표정에 대한 추측을 기억의 저편으로 날려버리며 손목에 있는 워치로 시선을 옮겼다.
“벌써 한 시네.”
“아 진짜? 읏차.”
뒤이어 시간을 확인한 그녀가 소리를 내며 벤치에서 일어났다.
가볍게 기지개를 켠 유리가 마찬가지로 일어나고 있던 선일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점심 먹었어?”
“아직 안 먹었지. 애초에 유리나, 네가 먹지 말고 오라고 했잖아.”
“그럼 식당은 생각해놨겠지?”
“안 하면 때린다며...”
말을 끌던 선일의 얼굴에 피곤한 표정이 드러났다.
하지만 표정숨기기는 발동하지 않았다.
마력을 사용하는 평범한 스킬들과는 달리 표정숨기기는 정신력을 소모하는 탓에 어젯밤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 지금의 선일에게는 부담이 된다.
설계자 또한 그런 주인의 상태를 알고 있는 것인지 평소와 달리 자동으로도 발동되지 않는 것 같았다.
그가 투덜거리면서도 찾아놨던 식당을 검색하는 모습에 유리는 들뜬 표정을 지었다.
“히히.”
말을 뱉지는 않았으나 유리는 자연스럽게 누군가를 떠올렸다.
자신과 마찬가지로 선일에게 구원을 받은 소녀.
자신이 먼저 알았음에도 같이 있는 시간이 훨씬 많은 무표정한 소녀.
그러나 선일과 마찬가지로 가장 소중한 인연 중 하나.
“가자.”
그런 유리의 속마음을 모르는 선일은 유리를 쳐다보았다.
“그래 가자~. 근데 우리 어디가?”
“이 근처에 피쉬 앤 칩스로 유명한 집이 있대.”
“너무 좋다!”
헤헤.
근 2년 만에 둘만 보내는 시간을 만끽하기로 한 그녀의 발걸음은 그 무엇보다 가벼웠고, 또 경쾌하다는 것을 선일은 눈치채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