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
65화
슬쩍 눈을 떠 세상을 바라보았을 때, 선일이 있는 곳은 더 이상 비하인드의 공간이 아니었다.
선일의 시선 속에 보이는 세상은 새하얀 은하수와 어둠이 아닌 밝은 빛이 흘러들어왔다.
허나 생각대로 움직일 수는 없었다.
지금 이 장소는 그저 내가 있던 세상과는 완전히 다른.
악사영의 세계니까.
‘이번엔 어떤 기억이지.’
“...으윽.”
침착하게 생각을 정리하는 강선일과 다르게 지금 누워있는 인물의 입에서는 신음을 흘러나왔다.
어차피 평소에 했던 동화처럼 지금 들어가 있는 몸의 주인은 이선일일 것이다.
콰아앙...!
무언가 무너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꽤나 멀리서 들렸기에 여기까지는 영향이 없는 것 같았으나, 그럼에도 확인해야 한다.
쓰으윽.
이선일도 같은 생각이었는지 표정을 찡그리면서도 몸을 일으켰다.
강선일의 정신도 그의 시선에 따라 하늘을 확인한다.
목재로 만들어진 낡은 천장.
그리고 듬성듬성 나오는 틈새로 새어 나오는 빛.
눈을 찌르는 뜨거운 빛이 들어오지 않는 곳까지 이동하고 나서야 선일은 이 장소의 정체를 깨달았다.
‘여기 강화도였구나.’
확실히 천장이 익숙하다.
천장뿐만 아니라 내부에 위치한 칙칙한 물건들도 마찬가지.
방금 전까지 봤던 모든 것이 똑같다.
선일은 강화도임을 확인하자 이번 기억이 뭔지를 깨달았다.
‘이거 현장체험이구나.’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동화가 시작되며 비하인드가 기억들을 보여줬을 때는 매번 그 시기와 관련이 있었으니까.
처음 기억을 봤을 때는 이선일이 프롤로그부터 배치고사를 볼 때까지의 기억이었다.
두 번째 동화는 유리와 함께 밤피르를 처리했을 때였고, 그때 보았던 기억은 자신이 쓰지도 않았던 어릴 적 이선일이 유리와 처음 만났던 날에 대해 봤었다.
그리고 지금이 세 번째.
시련에서의 일과 우르슬라와의 만남에서 침식률은 올랐으나 동화가 진행되지 않은 이유를 선일은 아주 약간이나마 추측할 수 있었다.
‘원작과 조금의 연관도 없는 일이면 동화는 진행되지 않는 건가?’
방금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이 가장 가능성 있는 가설이었으나 선일은 이 가설이 어딘가 오류가 있음을 깨달았다.
‘분명 시련을 끝냈을 때는 너무 급격히 상승해 동화로는 감당이 안 된다고 적혀있었는데...’
허나 우르슬라가 깨어났을 때는 그런 알림은 없었다.
아주 약간의 오류.
그리고 그 안에 자신이 모르는 법칙이 있음에 선일은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하 미치겠네.’
도대체 침식률의 법칙이 무엇일까.
어떤 이유로 상승폭이 달라지고, 또 어쩔 때는 악사영에 적혀진 기억을 읽는다.
애초에 침식율을 무엇인가.
그것이 무엇이기에 강선일과 이선일을 섞어놓으려는 것일까.
‘모르겠어.’
아무리 사고를 돌리고, 작가로서의 기억을 되살려보아도 침식률은커녕 ㅊ자로 시작하는 단어는 떠오르지 않는다.
‘...으윽!’
그 순간, 머리가 깨질 것 같은 통증이 밀려왔다.
더 이상 들어가면 안 된다는 경고처럼 그 통증은 매우 강렬했다.
‘하하... 이게 락인가?’
선일은 비하인드의 말을 떠올렸다.
자신과 그에게 걸려있다는 잠금.
그럼 그 잠금의 존재 의미는 도대체 무엇을 위함일까.
대부분의 질문들이 풀리지 않는다.
허나 확실한 것은.
‘락을 풀려면 침식률을 올려야 한다는 건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순간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침식률을 상승해 어느 수준까지 도달한다면 질문의 답은 저절로 알게 된다는 것을.
그리고 또 한 가지.
그전에 침식률에 대해 깊이 파고든다면 화를 입는 것은 자신이라는 것을.
이 두 가지를 자각한 선일은 침식률을 머릿속에서 지우기 시작했다.
‘일단은 계속해서 기억이나 볼까.’
선일이 생각을 정하자마자 이선일은 타이밍 좋게 문을 열었다.
마찬가지로 마기로 인해 골골대던 다른 학생들은 그런 이선일을 눈치도 못 채고 있었다.
이어서 천천히 문밖으로 나간 이선일의 눈앞에 믿을 수 없는 광경이 펼쳐졌다.
화르륵..!
초소까지 50미터 정도되는 거리가 있었음에도 똑단발을 한 소녀가 내뿜는 불꽃의 열기는 그에게까지 닿고 있었다.
그녀의 등 뒤에서는 불꽃으로 이루어진 천사의 날개가 달려있었다.
세라프.
불꽃의 천사라 불리우는 신하윤의 마법이 그녀의 앞에 있는 거대한 마체병기를 막고 있었다.
‘아까 전에도 봤지만.’
아름답다.
그녀의 표정에 떠오르는 처절함조차 생명들을 지키기 위한 천사처럼 보여졌다.
그러나.
‘밀린다.’
원작과 똑같다.
점점 그녀의 날개가 작아지는 것이 증거였다.
세라프는 그 힘이 너무나 강한 만큼 마력을 잡아먹는 속도가 다른 마법과는 차원이 달랐으니까.
꽈악.
이 싸움의 결말을 알고 있음에도, 아니 적었음에도 강선일의 눈은 그녀가 이기기를 바라고 있었다.
손톱이 꽉 쥔 주먹 안쪽 살을 파고들어갔고, 눈은 그녀의 싸움을 하나도 놓치기 싫은 것처럼 커졌다.
그와 마찬가지로 이선일의 눈도 커졌다.
“...찾았어.”
그러나 그가 시선을 집중하는 이유는 달랐다.
세라프의 아름다움.
그 하나에 매료된 강선일과든 달리 이선일의 시선은 그녀가 다루는 불꽃의 색에 고정되어 있었다.
‘검은색.’
연한 선홍색이나 노란색을 띠는 평범한 불꽃과는 달리 하윤의 불꽃은 검은색이 대부분이었다.
강선일은 작가였기에 그 색이 악마의 힘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이선일은 이제야 조금씩 깨닫고 있었다.
이윽고.
스륵...
그녀의 불꽃이 완전히 타오른 것처럼 붉은색에서 어둠으로 물들어갔다.
동시에 날개의 형태가 천천히 변화하기 시작한다.
촤악..!
날개가 완전히 펴졌을 때, 하윤의 등에 있는 불꽃은 더 이상 날아오르는 천사의 날개가 아니었다.
오히려 정반대.
그녀의 날개가 구멍이 숭숭 뚫린 박쥐의 것처럼 변해간다.
동시에 하윤의 이마에 검은 화염으로 이루어진 두 개의 뿔이 생겨난다.
‘안 돼.’
강선일은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지 못했다.
당장이라도 나가서 그 힘을 쓰지 말라며 막고 싶었으나 몸의 주인은 그렇지 않았다.
“...악마.”
이 세계에서 재앙으로 여겨지는 이름을 불렀지만 불안해하거나 혐오하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오히려 희망을 발견한 것처럼 이선일의 눈이 반짝였다.
정신이 연결되어 있었기에 이선일의 속마음을 읽은 강선일의 표정이 얼어붙는다.
‘이때부터구나.’
이선일이 악마의 힘에 더욱 큰 관심을 보인 이유.
힘을 가지고 싶다는 욕망.
가문의 수많은 어른들에게 인정을 받고 싶다는 욕망.
그리고 마지막으로.
“...수 있어.”
달처럼 고고하게 떠있는 자신의 형을 뛰어넘고 싶다는 욕망.
“뛰어넘을 수 있어...!”
이선일은 이날 자신의 세 가지의 욕망을 채울 수 있는 해답을 찾은 것이었다.
화륵!!!!
하윤이 내재된 씨앗의 힘을 받아들이자 전황은 달라지기 시작했다.
작아졌던 날개는 어둠을 받아들이자 그 크기를 불렸고, 마찬가지로 악마의 뿔도 커져갔다.
그녀의 눈은 동공에서부터 검은색으로 차올라간다.
기록에 적혀있던 악마의 생김새와 닮아가는 하윤을 바라보기가 너무나 힘들었다.
“아름다워.”
그와 반대로 이선일의 눈은 그녀에게 빨려 들어가 기괴한 욕망을 번뜩였다.
쿠웅...!
캬아아악!!!!
마침내 하윤의 눈이 완전히 검은색으로 물들자 마체병기의 무릎은 자연스럽게 무너졌다.
동시에 찢어지는 듯한 영혼의 비명이 하늘을 가득 채웠다.
아무리 순수한 영혼이라 할지라도 이제 그들은 천국으로 갈 수는 없었다.
지옥의 불꽃에 한번 닿은 그때부터 아이들의 영혼은 타락한 것이나 마찬가지니까.
티딕.
지옥불로 마체병기의 몸을 완전히 태웠을 때, 재는 남지 않았다.
말 그대로 소멸.
또는 재앙.
거대한 괴물과 그 속에 들어있는 영혼들에게는 억울한 벌이었다.
“뭐야...?”
완전히 상황이 종료되었다는 것을 깨달은 학생들이 하나둘씩 열린 문밖으로 나온다.
그리고 악마와도 같은 하윤의 모습을 보자마자 한 소녀의 입이 열린다.
허나 쓰러지기 직전에 보았던 학생들의 반응과는 다르다.
“...괴물!”
“그냥 꺼져버려!”
“배신자의 딸인 너가 우리를 구해줬다고 고마워할 것 같냐?”
“제발 뒤져버려!”
“악마년!”
학생들의 입에서 하윤을 매도하는 말이 날카로운 창처럼 튀어나와 그 무딘 날로 그녀의 심장을 찌른다.
수백수천 번의 외침이 그녀를 난도질한다.
‘이 개X끼들이!’
찢어지는 상처를 받음에도 가만히 있는 하윤.
점점 망가지는 그녀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던 강선일이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계속해서 욕설을 외치는 일밖에 없다.
그러나 그들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들리기는커녕 멈추라는 의지조차 도달하지 않았다.
주륵.
분명 이곳에 자신의 육체는 없음에도 주먹에서는 피가 흐르는 것 같다.
눈물일지도 모르겠다.
동시에 자신의 손이 무거워진다.
그 무게는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무거워져 칼이든 도끼든 작두든 어떻게든 잘라내 불태우고 싶다.
하지만 할 수 없다.
이곳은 그의 세상이 아니라 그저 기억이었으니까.
씨익.
이제는 매도를 넘어 자신들이 빠진 위험이 왔다는 책임을 그녀에게 돌린다.
그들 뒤에서 강선일은 이선일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져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의 부드러운 웃음 속에 삐뚤어진 욕망이 존재한다는 것도 깨닫는다.
‘....X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
그가 있었던 현실에서만 느꼈던 무력감이 강선일의 정신을 좀먹는다.
그 순간.
와장창.
방금 전까지 생생하던 세상, 아니 기억들이 무너져간다.
이어서 그가 눈을 떴을 때.
“선일씨 괜찮아요?”
어딘가 지쳐 보이는 하윤이 선일의 눈앞에 있었다.
완전히 끝났다는 것을 알기 위해 주변을 둘러본 선일.
그가 누워있는 침대도, 커튼도 모든 것이 하얗다.
마치 악마 따위는 없었다고 말하는 것처럼.
그제야 이 빌어먹을 기억이 끝나며 마침내 동화가 끝났다는 것을 알았다.
깊게 숨을 내쉬는 선일을 향해 하윤은 걱정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안색이 안 좋아 보여요.”
자신을 걱정하는 하윤의 모습.
그런 하윤을 보며 선일은 깊은 곳에서 무언가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난 괜찮아.”
그러나 선일은 힘들게 꾹꾹 눌러 담았다.
애써 지은 표정이 무너질 것 같았으나.
[표정숨기기가 발동합니다.]
이곳에 왔을 때부터 자신을 항상 평소처럼 남게 해준 이 고마운 스킬은 여전히 그를 지켜낸다.
“다행이네요.”
잔뜩 긴장했던 하윤의 표정이 안심으로 풀어지자 선일은 참을 수가 없었다.
그 감정이 얼마나 강했는지 표정숨기기로도 다 가리기가 힘들었다.
결국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하윤아.”
“네?”
“오늘은 좀 피곤해서 먼저 돌아가 주라. 내가 나중에 연락할게.”
“그럼 먼저 갈게요.”
“응.”
미안해.
철컥.
뒷말을 뱉지 못한 채, 그녀가 나간 문밖을 보며 조용히 눈물을 흘리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