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
55화
파아앙...
환하게 빛을 내는 포탈에서 학생들이 천천히 걸어 나오기 시작했다.
“우웁...포탈 싫어...”
몇 번이나 들어가 본 포탈이지만 적응이 되지 않는다.
속을 뒤집어놓는 구토감에 곧바로 눈을 감고 싶었던 선일의 귀로 반갑지 않은 기계음이 들려왔다.
띠링!
[스킬: 표정 숨기기가 발동합니다.]
“왜 지금 발동하냐고...”
선일은 똥 씹은 표정을 지었다.
물론 그렇다 한들 표정 숨기기에 의해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평온한 얼굴로 보이겠지만 말이다.
애써 후들거리는 다리에 힘을 주어 꼿꼿이 선 선일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근데 왜 다른 애들은 괜찮아 보이냐...’
“뭐 찾는 중이야?”
그 순간, 선일의 눈앞에 불쑥 나타난 소년.
아니, 소녀.
금발을 찰랑거리며 다가온 유리는 선일과 처음 던전에 들어갔을 때의 복장과 달랐다.
마법사임에도 불구하고 그때는 활동성을 중시해 대체로 가벼운 옷을 입고 있었던 반면 지금 그녀는 허리 아래까지 내려가는 기장의 로브와 함께 노란색의 화려한 사냥모를 머리에 쓰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마탑 [고귀한 왕국] 특유의 문장이 떡하니 그려져 있는 멋스러운 로브를 보며 선일은 그녀를 향해 조용히 물었다.
“...넌 어디 뭐 외교하러 가?”
“무슨 소리야~.”
유리가 뱉는 뻔뻔스러운 말에 선일은 어이가 없었다.
그녀가 입은 복장에서 하나도 빠짐없이 느껴지는 마력의 힘이 매우 강했다.
대충 수치로 치자면 선일의 손에 달린 여명과 황혼 정도는 아니지만, 그 바로 한 단계 아래 정도.
“현장체험에 A급 아티팩트들을 가져오네...”
아무리 미개척 지대로 간다고 하지만 이건 너무 과한 복장이었다.
강화도는 한국에 처음 생겨난 미개척 지대인 만큼 벌써 50년 전에 완전히 클리어 됐으니까.
“혹시 몰라서!”
“하아...”
해맑게 웃는 그녀의 표정을 보며 선일은 한숨을 쉬었다.
미개척 지대가 학생들의 수준에 맞지 않는다 하더라도 주변엔 성강과 학생으로 변장해 지키는 엘레나도 있다.
만약 선일이 아무것도 모르는 학생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꽤나 평범한 현장학습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오히려 충분히 안전하다고 생각했을 정도.
‘그래도 이 정도면 괜찮겠네. 아니.’
정말 충분하다.
유리 또한 선일의 계획에 존재했다.
만약 악사영에 적혀있던 현장체험의 일을 최대한 원만하게 해결하려면 원래 있던 말들만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상대에게는 그가 알지 못하는 변수가 생길 가능성도 있는 이상 생존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선일에게도 마찬가지로 그들이 알지 못하는 새로운 말 또한 필요하다.
‘내가 생각한 두 개의 말 중 하나가 바로 유리.’
그리고 또 다른 말은 바로...
“네 녀석.”
“왔어?”
싱긋.
선일은 뒤에서 느껴지는 살벌한 기세에도 여유로운 표정을 지었다.
물론 그 표정이 스킬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해도 상대의 속을 긁는 정도로는 충분할 것이다.
그 생각대로 선일의 표정을 본 상대방은 분노한 표정으로 다가왔다.
콰악!
“이선월 너 뭐해!”
옆에서 유리가 멱살을 잡은 선월을 급하게 말렸지만 그는 관심이 없었다.
물론 선일에게는 달랐지만.
자신의 멱살을 잡은 그의 힘을 가늠한 선일이 여유로운 표정을 지었다.
‘이선월.’
악사영의 주인공인 그가 바로 선일이 자신의 계획에 넣은 두 번째 말이었다.
“얼른 말해라.”
자신의 동생임에도 불구하고 살기 어린 눈빛으로 바라보는 이선월.
그런 형을 향해 여전히 여유로운 눈빛으로 바라보는 선일.
이어서 그가 입을 열었을 때.
“이건 놓고 말하지?”
흠칫!
순간 달라진 분위기에 선월이 감각을 끌어올렸다.
‘이 자식...’
이 정도였나?
입학 전과는 느껴지는 기세가 완전히 다르다.
그러나 달라지는 것은 없다.
쿠구구구....
기세를 급격하게 올린 선월을 마주하자 등 뒤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원작과는 달리 자신의 재능을 분명히 했음에도 아직 모자라다.
그러나 선일의 생각을 다른 헌터들이 들었다면 욕을 했을 것이 분명했다.
‘역시 이 정도로는 아직 한참 멀었네.’
클리셰 범벅인 악사영 속에서 그의 성장 속도를 따라잡는 것은 거의 불가능이라 말할 수 있을 정도!
그렇기에 지금 선일의 성장도 말이 안 되는 것이었지만 치트나 다름없는 빙의자라면 이 정도는 해야 한다며 스스로 납득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만족하지 못한 선일이 속으로 혀를 찼다.
‘칫.’
“도대체 그 말을 한 이유가 뭐지.”
이선월은 맹수처럼 으르렁거렸다.
잘못하면 곧바로 칼을 꺼낼 것 같은 이선월.
스위치를 누르면 한 번에 분위기에도 선일은 주먹을 쥐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보고 선일이 저항을 할 생각이 없다는 것을 깨달은 이선월은 그때가 돼서야 기세를 가다듬었다.
그러나 여전히 멱살은 놓을 생각을 하지 않는 이선월이 다시 입을 열었다.
“어째서 네가 성강씨의 제자가 되었다는 말을 하는 거지.”
“궁금해?”
끄덕...
조용히 고개를 끄덕거리며 긍정한 이선월을 향해 선일은 상쾌해 보이는 웃음을 지었다.
“그럼 오늘 나 좀 도와주라.”
***
강화도의 모든 지역을 뒤덮는 미개척 지대 안에서도 최후방에 위치한 초소.
갑작스런 이상으로 현장과 직접적인 접촉이 위험해져 가장 가까운 현장까지도 들어가는 것이 불가능해 들어온 쉼터에는 사람들이 몇 명 있었다.
“저 녀석들 대한고 학생이라고?”
“엘리트네 엘리트.”
“나도 저렇게 풋풋할 때가 있었지...”
“염X하네 크크크.”
잠시 휴식을 취하기 위해 들어온 현역 헌터들은 아직 새 물건이라며 빛을 내는 장비를 입은 앳된 학생들을 흐뭇함과 궁금함이 반쯤 섞인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고, 그들의 시선을 받는 학생들 중 몇몇은 긴장감에 얼굴이 굳어있었다.
그런 학생들의 앞에서 먼저 걸어가던 한 청년이 입을 열었다.
“학생들은 다들 따라오세요~”
지금 학생들을 인솔하는 인물은 담당 교사로 따라온 성강이 아니라 미개척 지대에서 활동하는 B급 헌터인 김철민이었다.
이제 곧 있으면 경력 3년 차가 되는 그가 내는 목소리에는 애써 숨기려고 한 웃음기가 묻어났다.
그렇다고 해서 학생들을 무시하는 웃음은 아니었다.
김철민의 마음속에는 오직 후배가 될지도 모르는 학생들에게 좋은 인상을 남겨줘야겠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쉼터 안을 구경하는 애들을 바라보며 흐뭇한 표정을 지은 그가 설명을 시작했다.
“전 세계에 퍼져있는 수많은 미개척 지대의 최소 등급은 지상부터 시작한다고 모르는 사람은 없겠죠? 그리고 강화도는 수많은 지상급 미개척 지대 중에서도 일명 관지기의 재앙라고 불립니다. 그 이유가 왜냐!”
격해진 말투에 한 번 숨을 크게 들이쉰 김철민은 뒤에 있는 커다란 창문을 손으로 가리키며 말을 이어갔다.
“이곳에 나오는 몬스터들은 대부분 언데드이기 때문입니다.”
“히익...!”
급격하게 으스스 해진 김철민의 분위기에 몇몇 심약한 학생들이 작은 소리를 내었다.
그런 학생들을 보며 빙그레 웃은 김철민은 밖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강화도에는 수많은 고인돌이 존재합니다. 역사에 조금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알다시피 고인돌은 이곳을 지배한 권력자 층의 무덤입니다.”
타악-!
어느새 밖에 나온 학생들과 김철민.
김철민은 허리춤에 매달은 검을 빼더니 저 멀리에 보이는 거대한 ㅠ자를 이룬 돌들을 가리켰다.
“언데드들은 대부분 고인돌 아래에서 빠져나옵니다. 과거에는 리치라도 있던 것처럼 수만 명의 언데드가 빠져나왔죠. 다행히 수만 많지, 하나하나가 지하급 몬스터나 마찬가지인 스켈레톤이 주를 이뤘기에 현재는 클리어가 되어있는 상태입니다.”
미개척 지대의 클리어.
던전에서의 클리어는 완전한 소멸을 의미하지만 미개척 지대에서는 달랐다.
각 지역에 존재하는 터주.
즉 보스를 소탕하게 되면 미개척 지대에 서식하는 몬스터의 수가 급격히 줄어들게 되는 현상을 바로 클리어라 부른다.
‘...곧이네.’
손목에 위치한 워치로 시간을 확인한 선일은 조용히 마력을 가다듬었다.
체험학습의 인솔을 담당교사인 성강이 아니라 김철민이 하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원작에서도 원래는 성강이 학생들을 데리고 다니며 여러 곳을 탐방하기로 계획이 되어있었지만...’
그러나 성강은 이곳에 도착한 오전부터 조금씩 이상한 기운을 감지하게 된다.
헌터였던 시기에는 소탕을, 교사인 지금은 학생들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해야 했던 그는 곧바로 이상한 느낌을 몰래 알아보기 위해 김철민에게 학생들을 맡기고 최심부로 떠났다.
하지만 최심부에서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 성강이 다시 돌아오려는 순간, 갑작스러운 몬스터 웨이브가 시작된다.
‘그리고 그 시간은 정확히 오후 1시.’
어째서 선일은 자신이 악사영에 이런 쓸데없는 내용까지 썼는지 기억은 나지 않았지만, 지금은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체험학습의 점심시간인 1시까지 남은 시간은 고작해야 5분 안팎.
‘슬슬 시작하겠다.’
무리에서 가장 뒤쪽에서 시간을 보내던 선일이 빠르게 워치를 조작하기 시작했다.
삐빅.
삐빅.
문자를 보내자마자 온 답신을 확인한 선일이 슬그머니 발길을 옮겼다.
곧바로 무리에서 벗어나려던 찰나, 누군가 그의 손목을 강하게 잡았다.
터억.
“...어디 가요.”
선일을 잡은 인물은 다름 아닌 하윤이었다.
그녀는 어딘가로 사라지려던 그를 의심의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어디 가냐구요.”
“아 잠깐 화장실 좀 갔다오려고.”
선일은 곧바로 생각한 대답을 내뱉었다.
의심할 거리가 없는 평범한 대답.
방금 말로 선일은 하윤이 손목을 놔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거짓말.”
“...응?”
그녀가 나지막하게 뱉은 한 마디에 선일은 무의식적으로 반문했다.
이후로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그의 검은 눈동자에 하윤이 들어왔다.
“선일씨 아까 전부터 이상했어요. 정확히 말은 못 하겠지만...”
어딘가 평소랑 달랐어요.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은 채 그 자리에 멈춰 선 선일.
그 모습이 마치 아버지가 떠올라 고개를 숙인 하윤은 손목을 놓지 못했다.
아주 잠깐의 침묵조차 숨이 턱 막혀왔다.
그대로 10초나 지났을까.
익숙한 소년의 목소리가 그녀의 귀를 울렸다.
“하윤아.”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소년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훨씬 따스하게 들려왔다.
이어서 그의 하얀 손목을 잡았던 자신의 손이 천천히 멀어지기 시작했다.
그 반응에 놀라 급하게 고개를 들었을 때.
“괜찮아. 별일 아니야.”
싱긋.
자신을 안심시키려는 듯 그는 평소처럼 웃고 있었다.
그의 웃음에 잠시 할 말을 찾는 동안 선일은 멈추지 않았다.
“너 아무것도 안 해도 돼. 그냥 유리하고 같이 있어줘.”
첫 번째 말은 제대로 못 들었지만 이어지는 말은 톡톡히 들었다.
갑자기 유리와 같이 있으라는 이유를 알지 못했지만 선일은 물을 시간을 주지 않았다.
스르르...
그는 계속해서 자신을 잡으려 하는 하윤의 손목에 따듯한 마력을 매끄럽게 흘렸다.
자신을 부드럽게 감싸는 선일의 마력이 마치 사람들을 포근하게 감싸는 태양빛과도 같다고 생각했다.
조금씩 평온해지는 하윤의 표정을 보며 안심한 선일의 입가에 미소가 감돌았다.
“금방 갔다 올게.”
그 말을 끝으로 선일은 순식간에 하윤의 시야 밖으로 사라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