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
54화
하윤과 같이 석양을 마주 본 후 대한고는 일주일이라는 꽤나 짧은 시간이 지났다.
그러나 시간이 짧다고 해서 변한 것이 없지는 않았다.
제일 먼저 레크라가 학교로 다시 돌아왔다.
다른 교사와는 달리 출근을 하는 그녀의 표정으로 보았을 때, 기쁨과 동시에 연구자의 지식욕에서 시작된 광기가 느껴졌다.
‘죄 없는 아이들의 영혼을 다 모아 마체병기를 가동할 생각에 신나겠지.’
때마침 요즘 학생들의 대화 주제 또한 레크라와 관련이 있었다.
“요즘 실종 엄청 자주 일어나던데...”
“맞아. 그것도 다 10살 아래인 애들만 그렇게 사라진다던데?”
“아냐. 우리랑 비슷한 나이 때도 사라진댔어.”
“이것도 다 마족숭배자 짓 아니야?”
그들이 가지고 있는 워치나 스마트폰에 떠오르는 기사들 역시 최근 일어난 실종사건이 주를 이루었다.
다만 원작과 달라진 것은.
‘이상하게 규모가 커졌다는 점이 조금 걸리네.’
레크라가 개발한 마체병기에도 어린아이들의 영혼이 무한히 들어가는 것은 아니다.
선일이 만들었던 설정에 따르면 한 기의 마체병기당 들어가는 영혼의 양은 최대 이백에서 삼백.
하지만 요즘 들려오는 기사에 따르면 벌써 사라진 아이들의 수가 천여 명에 가까웠다.
‘어쩌면 현장체험에 난입하는 마체병기는 하나가 아닐 수도 있어.
확실히 실종된 아이들의 수가 너무 많았다.
이 정도 수로 봤을 때, 많으면 세 기까지 가동이 가능하다.
간간히 연구소로 갔을 때는 고작 한 기밖에 존재하지 않았지만, 이곳에만 레크라의 연구소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아.’
선일은 표정 숨기기로 본심을 숨기면서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빙의자인 자신이 들어옴으로써 벌써 몇몇 전개들이 변화하는 것은 이미 전부터 자각하고 있었다.
다행히 대부분의 흐름들은 원작과 동일하게 진행되었기에 별 걱정은 하지 않았지만.
‘이번에는 뭔가 다를 것 같다는 느낌이 들어.’
몇 번이고 위기를 경고한 그의 직감은 주인에게 이번 에피소드가 매우 힘들어질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러나.
아무리 힘들어진다 한들 선일이 위기를 느낄 정도는 아니었다.
왜냐하면.
“선생님들한테 들었는데 엘프족에서 보낸 교환 학생이 이번 현장체험에 같이 간다던데?”
“맞아! 저 애일 걸?”
선일은 떠드는 학생들의 주제가 한 학생을 가리키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와 하윤을 포함한 몇몇은 가지 않았지만 다른 학생들 대부분이 몰려있는 공간.
그쪽으로 자연스럽게 시선을 돌린 선일이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나 이종족 처음 봐! 너 진짜 이쁘다!”
“엘프들은 활 잘 쏜다던데! 너도 궁수야?”
“아..아니.”
시끄럽게 재잘거리는 학생들의 중앙에는 얼음이 된 것 마냥 멈춰있는 한 소녀가 있었다.
반대로 생기가 넘쳐 보이는 풀빛 머리와 가녀린 체구를 가지고 있는 소녀.
활동하기 편한 가벼운 복장을 입고 있는 그녀의 가슴팍에 대롱대롱 매달린 명찰에는 작게 이름이 쓰여있었다.
‘치트키인 엘레나가 있지.’
명목상 대한고의 교감 자리를 맡고 있지만 그녀는 거의 99퍼센트의 1학년들에게 얼굴이 알려지지 않았다.
‘그중 나는 1퍼센트에 들어가지만.’
중요한 회의나 사건들이 있지 않는다면 대부분 그녀의 고향인 엘프의 숲에서 살아가고 있었지만, 이번 현장체험만큼은 그녀가 보호자로써 같이 간다.
다만.
‘학생으로 변장해서 말이지.’
이 전개는 원작과 달라지지 않았다.
그 말은즉슨 엘레나는 마체병기를 상대하지 못한다는 말이다.
씨익.
선일은 학생들에게 어쩔 줄 몰라 하는 그녀를 눈에 담으며 웃음을 흘렸다.
원작자인 선일이 엘레나를 당황하게 할 인물의 정체를 모를 리가 없으니까.
물론 그 인물도 지금의 선일이 마주하기에는 너무나도 강력한 힘을 갖고 있지만.
‘그래도 상관없어.’
이미 시련을 갔다 온 이후부터.
아니, 그전부터.
선일의 머릿속에는 모든 정보가 들어있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 선일의 계획은 확실했다.
‘유일한 변수라면 레크라의 계략뿐이겠지.’
그러나 문제 될 것은 없다.
압도적인 힘 앞에서는 계략 따위는 그저 아무것도 아니니까.
그 사실을 이 세상에 오기 전부터 깨닫고 있던 선일은 조용히 웃음을 지웠다.
***
“다 왔나 보군.”
-예!!
성강의 말에 학생들이 동시에 큰 목소리로 대답했다.
마치 첫날을 다시 보는 것 같은 데자뷰를 느낀 선일은 가볍게 손을 만지작거렸다.
선일의 모습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던 성강이 다시금 마력으로 성대를 강화했다.
“오늘 현장체험을 간다는 것을 알고 있겠지.”
-그렇습니다!
“너네들이 어릴 때부터 주구장창 갔던 평범한 현장체험으로 생각하지 마라. 우리가 가는 것은 말 그대로 현장이다.”
싸아아...
성강의 한마디에 학생들의 입이 조용히 닫혔다.
현장이라는 단어의 무거움을 알았기에.
그들의 목덜미에는 이미 차가운 땀이 맺혀있었다.
“이선일!”
“예.”
“우리가 어디로 갈지 아는가.”
그의 질문에 선일은 자세를 고치며 대답했다.
“강화도입니다.”
꿀꺽.
다른 이들의 침묵 속에서 조용히 마른침을 목으로 넘어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동시에 학생들의 얼굴이 무섭게 굳어간다.
헌터의 자식들인 선일이 말한 강화도의 의미를 모를 리 없었다.
“정답이다.”
딱.
바위도 쉽게 박살 낼 수 있을 것 같은 성강의 인상과는 달리 손가락을 튕기자 가벼운 소리가 학생들이 서있던 체육관을 가득 메웠다.
그와 동시에 그의 뒤쪽에 위치한 스크린의 불빛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한국에 존재하는 미개척 지대는 아직 밝혀지지 않은 곳을 포함해 총 열다섯 곳이라는 것을 알고 있겠지. 그중 한 곳이 바로 강화도.”
삐빅!
스크린에 떠있는 대한민국의 지도가 확대되며 강화도에 초점이 집중됐다.
강화도 위에는 한자로 天上이라고 표시되어 있었다.
“한국의 첫 번째 미개척 지대가 있는 곳이다.”
미개척 지대.
총 다섯 가지의 등급이 있는 던전과 달리 미개척 지대는 제일 낮은 등급이라 해도 아래에서 두 번째, 지상급부터 시작한다.
지하급은 생도 수준에서도 클리어가 가능하지만 지상급부터는 난이도가 확실히 달라진다.
‘얘네들은 아직 아무것도 모르겠지.’
아직 입학한 지 이제 곧 2달이 되는 1학년들이었지만 모두 실전을 겪어봤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없었다.
그들 모두 학교의 커리큘럼에 의해 던전에 들어간 경험이 있었지만, 그것들은 모두 교관들이 주관하에 안전하게 시행했을 뿐.
진정한 실전을 해봤다고 말할 수 있는 학생은 거의 없었다.
어떻게 보면 처음 현장에 투입되는 학생들의 반응은 각각 달랐다.
‘...X됐다.’
‘하 씨.. 거기를?’
‘진짜 빡세게 구르겠네.’
이렇게 절망하고 욕하는 학생들이 있는 반면.
자신들의 무기를 만지며 눈빛을 반짝이는 사람들도 있었다.
‘...궁금하군.’
‘이거 성적에도 반영된다고 했으니까....’
그 사이에서 선일은 그들과는 다른 미래를 보고 있었다.
‘어차피 우리가 가는 곳은 난이도가 낮아.’
그렇기에 현장체험에서는 위험한 일은 딱히 없을 것이지만.
‘마체병기가 나타날 때, 신하윤이 악마의 힘을 안 쓰는 것이 제일 중요해.’
그녀가 다른 한심한 학생들을 지키기 위해 악마의 씨앗을 쓰지 않는 것이 후일에 편해진다.
꽈악.
아무도 모르게 주먹을 쥔 선일.
그 위를 덮는 장갑에서 뜨거운 열기가 느껴졌다.
태양의 힘.
떠오르는 태양이 새로운 아침을 여는 것처럼, 이번 에피소드의 어둠을 박살 낼 그의 유일한 무기였다.
그 순간.
툭툭.
“응?”
“야...”
자신의 어깨를 가볍게 건드리는 손짓에서 어색함을 느낀 선일이 뒤를 바라보았다.
어느새 찾아왔는지, 뒤를 돌은 선일의 눈에는 엘레나가 들어왔다.
그녀를 확인하고 반사적으로 물은 선일.
“엘레나님..?”
“님자 붙이지 마라.”
어딘가 많이 피곤해 보이는 그녀는 조용히 으르렁거렸다.
그 모습을 천천히 보고 있던 주변의 학생들이 자기들끼리 소곤거리기 시작했다.
“교환학생, 쓰레기한테는 왜 다가가냐?”
“몰라. 쟤 얼굴은 반반해서 그런 게 아닐까?”
“이선일이 뭐가 잘생겼냐. 내가 훨씬 낫지.”
“개소리 노.”
그들의 말을 하나도 빠짐없이 듣고 있었지만 선일은 모른 척했다.
하지만 엘레나도 마찬가지로 다른 학생들의 말을 들었다.
“너 취급 왜 그러냐.”
“예?”
“존댓말도. 하아...아니다. 그건 그렇고 왜 아무것도 안 하냐.”
“뭘 말입니까.”
“딱 봐도 쟤네보단 훨씬 강하잖냐.”
곁눈질로 선일의 시선을 유도한 엘레나였지만 선일은 입을 열지 않았다.
그저 가볍게 어깨를 으쓱거릴 뿐.
그 행동만으로도 질문의 대답을 피한다는 것을 알게 된 엘레나는 더 묻지 않았다.
이어서 선일의 머릿속에 그녀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부탁인데 너 이번 일은 비밀 좀 지켜주라.
‘전음.’
텔레파시와 비슷하지만 전혀 다른 기술.
복잡한 마법과는 달리 의지를 마력에 담아 직접적으로 날리는 고급 기술이었지만 선일은 여전히 평온한 눈으로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어떤 비밀이요?
선일도 그녀를 향해 전음을 날리자 반대로 엘레나의 눈이 커졌다.
-너 전음 쓸 줄 알았냐?
-뭐... 약간 정도는요?
-그래..? 조금 욕심이 나긴 하네.
의지가 약해졌는지 제대로 들리지는 않았지만 무슨 말인지 대충 예상이 갔다.
제자 욕심.
말년이라는 설정 덕에 엘레나는 뛰어난 재목들을 보면 욕심이 생긴다.
그것도 탐욕의 마인들과 비슷할 정도의 커다란 욕심을 말이다.
그녀에게 그런 말을 들은 순간부터 선일은 꽤나 고평가를 받은 것이지만 아무 말도, 의지도 담지 않았다.
그저 부드러운 미소를 입가에 희미하게 매달아 놓을 뿐.
선일의 표정을 본 그녀는 한숨을 쉬었고, 다시금 진짜 목적이 담긴 전음이 들려왔다.
-그건 그렇고 내가 이번에는 보호자로 참가하는 건 알지.
-예...뭐. 그렇게 오신 순간부터 그럴 것 같았습니다.
-내 느낌 상 이번 체험학습에서 악마숭배자가 올 거라는 느낌이 강하게 들거든?
-네.
그녀의 직감은 정확했다.
원작에서도 현장체험에서 그녀가 상대하는 것은 마체병기가 아닌 또 다른 악마숭배자였으니까.
-근데 내가 직접 교사로 간다고 하면 딱 봐도 이 X끼들이 안 나타겠지?
-그렇겠죠.
-그래서 내가 학생으로 연기하는 거니까 절대 티 내지 마라?
쉽게 말해 학생들을 미끼로 삼겠다는 말.
만약 다른 사람들이 들었다면 어린애들을 위험에 빠뜨렸다고 욕하겠지만.
‘그녀 스스로 자신이 있다는 거겠지.’
세계에서 가장 강력하다고 평가받는 천외천 중 한 명에다가 마찬가지로 비슷한 수준의 실력자인 성강도 있으니 학생들에게는 피해가 없을 것이라고 단언한 것이었다.
그러나 악사영의 작가인 선일은 알고 있었다.
현장체험에서 학생들이 마주치는 미래를.
신하윤이 악마의 힘을 아주 조금이나마 꺼내게 되는 미래를.
마지막으로.
이 일로 인해 미래에 일어나는 첫 번째 참극을.
‘그건 막아야 돼.’
힘든 것은 분명하다.
어려울 것이 분명하다.
그렇지만 빙의자인 자신이 있는 이상.
‘막을 수 있다.’
달라지지 않는 사실을 다시금 상기시킨 순간, 저 앞에서 성강이 입을 열었다.
“이제 출발하도록 하겠다.”
그 말과 동시에 스크린 뒤에 숨겨져 있던 포탈이 드러났다.
이어서 푸른빛을 내뿜는 포탈 너머로 학생들이 조금씩 사라지는 것을 보며.
-알겠습니다.
선일은 의미심장한 미소와 함께 그녀에게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