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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화
“...”
마치 그녀의 시간만 멈춘 것처럼 하윤은 선일의 말을 듣고도 아무런 반응을 하지 못했다.
갑작스러운 제안에 당황한 것인지, 아니면 자신과 밥을 먹기 싫었던 것인지.
입을 다물고 침묵을 유지하는 하윤의 표정이 충격으로 물들어있었다.
어째서인지 알 수 없지만, 그런 그녀의 얼굴을 보자 선일은 은근한 서운함을 느꼈다.
“왜 그런 반응이야.”
선일의 입에서 툭툭거리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다른 때 같았으면 표정 숨기기가 선일의 감정을 가려줬을 테지만, 이번만은 발동하지 않았다는 점이 이상했다.
그제서야 정신을 차린 하윤이 입을 열었다.
“느...네? 뭐라고 했어요?”
당황했는지 그녀는 말을 더듬었다.
그 모습을 보며 피식거리는 웃음을 지은 선일이 다시 한번 같은 말을 반복했다.
“오늘 끝나고 같이 저녁 먹자고.”
“...갑자기요?”
능글맞은 말투에 하윤은 선일을 의심하는 것처럼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러면서도 뺨이 살짝 달아오른 것이 꽤나 부끄러운 표정과 비슷했다.
‘...귀엽네.’
“저녁은 평소에도 같이 먹잖아요.”
“그렇지.”
그 말대로 선일과 하윤은 거의 외출을 하지 않았다.
하윤은 배신자의 딸이라는 이유로 후원자도 구하지 못해 돈을 아껴야 한다는 금전적인 이유 때문이었고.
선일은 간간이 나가 필요한 정보나, 아이템들을 구하는 등 필요한 일이 아니라면 굳이 나갈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둘은 첫날 이후로는 같이 밖에서 밥을 먹을 일이 없었다.
저녁의 대부분은 선일과 하윤, 그리고 마찬가지로 귀찮다는 이유로 수업 이후에는 기숙사 밖으로 나가지 않는 유리.
이렇게 셋끼리 저녁 시간을 보내는 것이 평소의 일상이었다.
“오랜만에 밖에 나가서 먹자구.”
“그래요? 아... 잠깐만요.”
말을 잠시 멈추고 무언가를 생각하는 하윤.
사람을 화나게 하는 방법 중 하나가 말을 하다 마는 것이라는 밈도 있는 것처럼 선일은 그녀가 말을 하려 했는지가 문뜩 궁금해졌다.
그러나 하윤은 머릿속으로 계속 고민하고 있는지 한참이 지나도 말을 하지 않았다.
가끔 하는 움직임이라곤 작은 입을 간간이 열었다 다시금 귀엽게 앙 다무는 정도?
“저기...”
2분 정도 시간이 지났을 때, 그녀는 간신히 입을 열었다.
게다가 원래 그렇게 큰 목소리를 내지 않았던 하윤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작았다.
그럼에도 선일의 귀에는 그 어떤 것들보다 크게 들려왔다.
“응?”
“유리씨는... 안 가요?”
힘들게 말을 한 하윤의 얼굴은 방금 전보다 확연히 붉어져있었다.
그 표정이 마치 유리를 좋아하는 것처럼 보여졌다.
‘생각해 보면 저번부터 그랬지. 유리랑 같이 있을 때도 즐거워 보이고.’
확실히 유리는 남장을 해도 그 미모가 전혀 수그러들지 않았다.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여리여리한 귀공자 상이랄까.
게다가 마탑의 후계자라는 지위와 그에 걸맞은 능력 때문에 유리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이 학교 내에만 해도 수없이 많았다.
어떤 세상의 기준을 가져와도 잘 난 인물.
그게 바로 유리 펜드래건이라는 소녀였다.
‘원작에서도 신하윤은 유리가 이선월의 도움으로 그녀의 아버지에게 벗어날 때까지는 여자였다는 사실을 모르지.’
생각해 보면 하윤이 그런 감정을 갖는 것도 당연하다고 생각이 들었다.
그녀 역시 사람을 잘 못 믿는 것뿐, 감정을 못 느끼는 사이코패스 같은 존재가 아니니까.
오히려 그렇게 상처를 받았기에 호감이나 사랑을 갈구하는 인물이었다.
‘그렇기에 만약에 악사영을 완결까지 지필 했으면...’
진정한 행복을 찾는 인물은 신하윤이 아니었을까.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이상하게 마음 한구석이 찜찜했지만 선일은 의식하지 않았다.
아니.
의식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안 가. 오늘은 너랑만 둘이 먹고 싶어서.”
“그래요?”
하아.
선일의 대답을 듣자마자 하윤은 긴 숨을 내쉬었다.
그의 제안을 듣자마자 계속 물어보고 싶었던 질문이 해결되자 답답했던 속이 편해지는 것 같았다.
어째서인지는 그녀 스스로도 답은 알지 못했다.
고등학교 1학년.
연수로는 고작 17년.
하윤 스스로 생각해도 17년이란 삶이 길지는 않았지만 그럼에도 자신의 속을 채우는 감정들을 정의하기에는 충분하다.
그렇게 생각했던 그녀는 지금 느껴지는 감정의 답은 알지 못했다.
‘아쉬워하네.’
그러나 선일의 눈에는 전혀 다르게 보였다.
한숨의 사전적 의미는 근심이나 아쉬움이 있을 때, 또는 불안했던 마음이 놓일 때 내쉬는 숨이니까.
선일의 시선에서는 하윤이 내쉰 한숨이 아쉬움처럼 보여졌다.
“알겠어요. 저녁 몇 시에 볼래요?”
“그건...”
“얘들아 자리에 앉자.”
선일이 말을 이으려는 찰나, 담임인 정호찬이 타이밍 나쁘게 교실 안으로 들어왔다.
다른 학생들이 자리를 앉는 것을 보고 돌아가려던 하윤을 향해 한 마디를 툭하고 뱉었다.
“일단 수업 다 끝나면 연락할게.”
끄덕.
가볍게 고개를 흔드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한 하윤.
곧바로 출석이 시작했지만 반사적으로 대충 대답한 선일은 한순간 느꼈던 이상한 먹먹함의 정체에 대해 다시금 고민하기 시작했다.
***
선일의 수업은 평범했다.
오전에는 실내 수업.
그중 단 하나, 악마대처법의 선생인 레크라는 마탑의 연구회를 간다는 이유로 수업은 자습으로 대신했다.
그녀의 정체가 악마교단의 추기경이라는 것을 모르는 다른 학생들은 역시 대단하다며 레크라를 찬양했지만, 진실을 아는 선일에게는 그녀의 부재가 한없이 무서웠다.
‘소름끼치네.’
오늘부터 연수라는 명목하에 간간히 자습을 할 것이라고 전해 들었지만, 연구자가 하는 일은 연구회가 아니다.
그녀는 현장 체험에서 사용될 마체병기의 마지막 재료를 가지러 간 것이다.
그 재료라는 것은 바로.
‘인간.’
그것도.
수백의 어린아이들.
오소소...
소설을 썼을 때는 그렇게 크게 느끼지 못했지만, 빙의해 현실이 되었다고 생각하니 온몸에 신경이 곤두섰다.
죄 없는 사람들이 죽었지만 지금의 자신은 레크라를 막을 수 없다.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아는 선일이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그 이후에는 간단한 오후 수업과 어제부터 스승이 된 성강의 가르침을 받은 것으로 수업은 끝났다.
선일은 워치를 간단히 조작했다.
-수업 끝났어?
찌잉!
메시지를 보내자마자 곧장 하윤의 답장이 왔다.
-네.
-그럼 지금 나올래?
이번에 선일이 보낸 문자에는 답장이 조금 늦어졌다.
그럼에도 1분은 넘기지 않았기에 선일은 여유롭게 기다릴 수 있었다.
-그럼 저 옷만 갈아입고 나갈게요.
-그래.
하윤이 보낸 문자를 보자마자 입고 있던 교복을 벗어던진 선일.
순식간에 사복으로 갈아입고 거울을 보자 꽤나 멀끔한 모습이었지만, 선일의 눈엔 어딘가 불만족스러웠다.
“...”
그러나 고민도 잠시.
도대체 어디가 문제인가 하며 눈을 부릅뜨고, 또 여러 번 갈아입었지만 어째서인지 다른 옷들은 전부 던전 탐사용 복장이거나 활동하기 좋은 트레이닝 복 들이었다.
“... 나중에 옷 좀 사야겠네.”
결국 선일은 불만족스러웠던 처음의 옷으로 갈아입은 후 기숙사 밖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
대한고 앞에 자리 잡은 수많은 식당 중, 그들이 들어간 곳은 어디에서나 볼 법한 작은 분식집이었다.
그러나 이곳에 의미는 달랐다.
원작에서도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식당은 이 분식집이었으니까.
‘물론 아직 한 번도 안 찾아온 것 같지만. 뭐... 상관없겠지.’
“먹을만해?”
“여기 맛있네요.”
안 그래도 작은 입으로 쉴 새 없이 떡볶이를 오물거리는 하윤.
자신이 맛있게 먹는 것을 보며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은 선일의 시선이 이상하게 부끄러웠던 하윤의 얼굴이 붉어지기 시작했다.
“기숙사로 갈 건가요?”
“그럼 좀 걸을래?”
고개를 끄덕거린 하윤.
곧바로 그녀를 앞장선 선일이 조용히 어딘가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10분 정도 걸었을까
자신들이 꽤나 먼 거리에 위치한 숲속으로 들어가자 그제서야 하윤은 학교가 점점 멀어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해가 조금씩 지면서 점점 으슥해지자 하윤이 물었다.
“어디 가는 거예요?”
“비밀.”
그러나 선일은 그저 장난기 넘치는 표정으로 대답을 회피할 뿐이었다.
“뭐예요...”
이상하게 무거웠던 아침과는 달리 능글거리는 평소의 성격으로 돌아오자 하윤은 어이없는 웃음을 지으면서도 살짝 안심할 수 있었다.
그 사실을 알지 못한 선일은 여전히 발걸음을 옮기기 바빴다.
‘...도대체 어디로 가는 걸까.’
하윤의 움직임이 느려졌다.
선일을 믿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조금 무서워지는 것은 사실이었기에 본능적으로 경계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생각도 잠시, 곧바로 먼저 들어가던 선일이 걸음을 멈추고 말했다.
“다 왔어.”
하윤은 부드러운 미소를 짓는 선일을 향해 궁금한 눈으로 바라본 뒤 곧바로 그가 가리고 있는 풍경을 바라보았다.
직후 그녀의 눈이 더없이 커졌다.
“우와아...”
동시에 입에서 본능적인 탄성이 새어 나왔다.
그만큼 그녀가 보고 있는 세상은 아름다웠다.
화르륵...
따스한 봄인 4월.
달이 날아드는 시간이 줄어들고 그만큼 태양이 길어짐에 따라 그들이 서있는 자리는 아직 해가 존재했다.
황혼을 가기 전, 가장 아름답게 빛나는 석양이 떠있는 호수는 하윤을 위로하기 위해 불러낸 장소였고, 또한 선일에게는 또 다른 의미로 다가왔다.
‘...기분 이상하네.’
악사영에서 가장 힘든 시기를 보냈던 하윤.
그녀의 몸속의 악마가 조금씩 영향력이 강해져 고통이 들 때마다 힘든 시간을 버티기 위해 매일 찾아왔던 쉼터.
그 쉼터는 바로 이곳이었다.
‘원작에서는 악마의 씨앗이 사라지고 이선월이랑 같이 왔었지.’
기분이 묘했다.
악사영의 주인공인 이선월과 히로인인 신하윤.
그 둘이 기숙사를 벗어나 몰래 찾아왔을 때는 새벽녘의 달이 비춰졌고.
악사영의 엑스트라 이선일과 히로인인 신하윤.
그 둘이 수업을 끝내고 힘들게 찾아왔을 때는 저녁 날의 해가 비춰졌다.
‘참...’
우연이네.
그렇게 생각하던 선일은 조용히 옆을 바라보았다.
선일의 옆에 서있던 하윤은 여전히 아름다운 풍경으로부터 눈을 떼지 못했다.
자신을 바라보는 선일의 시선을 느낀 건지 하윤은 마찬가지로 그를 바라보려 고개를 돌렸다.
그대로 선일이 그녀의 표정을 보았을 때.
“괜찮...아?”
선일은 순간 말을 잃었다.
“너무 좋아요.”
그녀가 웃고 있었다.
간간이 보여주는 희미한 미소가 아닌.
환한 웃음까지는 아니어도 확실히 웃는다고 말할 수 있는 표정이 지금 선일의 눈앞에 들어왔다.
“...”
악사영에서 고통의 원인인 악마의 씨앗이 사라졌어도 이선월의 앞에서만 웃음을 짓는 그녀가 지금 내 앞에서 웃음을 짓는다.
그 사실이 선일에겐 너무나 어색하고 이상하게 다가왔다.
씨익.
그러나 선일의 입가는 슬며시 올라갔다.
동시에 그는 깨달을 수 있었다.
신하윤이 힘들어했을 때마다 느끼는 이상한 감정.
그 정체가 무엇인지는 아직 확신하지는 못하지만.
“다행이다.”
확실한 건 죄책감이 아니라는 것이다.
표정이 풀어졌다.
빙의한 첫날부터 계속해서 가지고 있던 고민이 약간이나마 해결되자 속이 편해졌다.
이어서 평온한 표정을 한 선일을 향해 여전히 웃음 짓던 하윤.
그녀가 물었다.
“이런 장소는 어떻게 알았어요?”
대답을 어떻게 해야 할까.
아주 잠깐 고민하던 선일이 기분 좋아 보이는 웃음소리와 함께 딱 한 마디를 뱉었다.
“음... 그냥.”
책에서 봤어.
“그게 뭐야...”
평소처럼 장난스러운 선일의 대답에 시니컬한 표정을 지은 하윤.
다시 석양으로 시선을 돌린 두 사람의 하루 아래로 해가 넘어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