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
52화
철컹.
마력으로 인식하는 철문이 열리자 강남에서의 일이 끝나고 빠르게 돌아온 선일이 기숙사 방으로 돌아왔다.
일찍 돌아올 것이라고 생각해 외박계를 쓰지 않았던 선일이 도착했을 때는 이미 시간은 밤 12시를 훌쩍 지나있었다.
원칙대로라면 기숙사 통금시간인 12시가 지났기에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꼼짝없이 밖에서 밤을 새웠어야 했지만.
“어라? 이선일 학생 맞죠? 성강 교관님 지시로 특별 임무 간다고 들었는데?”
다행히 그를 알아본 기숙사 사감이 그를 불렀다.
사감의 말속에 갑자기 튀어나온 이름에 놀란 선일은 자연스럽게 대답했다.
“아 조금 일찍 끝나서요.”
“그래요? 고생했네. 시간 늦었으니까 얼른 들어가서 쉬어요.”
선일의 외출이 늦을 것을 미리 예상했던 걸까.
고작 몇 시간 전이지만 스승이 된 이상 성강은 최대한 그가 할 수 있는 것을 맞춰주려 하는 생각인 것 같다.
“이건 조금 감사하네. 그건 그렇고 일단 먼저...”
그는 자신이 입고 있던 옷을 바라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거의 누더기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해진 옷.
흑기에 뚫리고 검에 베이고 또 열기에 탄 옷들을 보며 아쉽다는 표정을 지은 선일은 옷을 벗고 곧장 샤워실로 들어갔다.
쏴아아...
김이 올라오는 따스한 물이 맨몸에 닿자 몸에 과하게 들어갔던 힘이 천천히 빠져갔다.
동시에 꽤나 격한 전투에서 놓을 수 없던 긴장의 끈이 풀려가며 마음이 편안해지기 시작했다.
이어서 선일은 물을 맞으며 샤워기 아래에 거울을 바라보았다.
확실히 취업하랴, 아르바이트하랴 쉴 틈 없이 살아가며 지쳤던 빙의 전 강선일의 몸과는 다른 잔근육이 붙은 탄탄한 몸이었다.
게다가 눈에 있는 연한 다크서클이나 살짝 빠진 볼의 젖살.
확실히 아침과 달리 많이 초췌해졌지만 그럼에도 훈훈함은 떠나지 않은 얼굴을 가볍게 쓰다듬은 선일이 입을 열었다.
“누가 이선월 동생 아니랄까 봐 얘도 잘생기긴 잘생겼네.”
피식.
바보 같은 소리를 한 선일이 실없는 웃음소리를 내었다.
샤워할 때의 얼굴이 잘생겨 보이는 건 원래 세상뿐 아니라 빙의를 해도 똑같나 보다.
곧이어 시선을 내린 선일은 왼쪽 가슴, 정확히는 심장이 있는 부위에 타투처럼 새겨져있는 손 크기의 비취색 나비 날개를 쳐다보았다.
“그래도 다행이네. 계약은 성공해서.”
나비 날개의 정체는 요정 공주 우르슬라와의 계약이었다.
처음 생각했던 계획과는 조금 달라졌지만 그럼에도 어쨌든 계약은 성공했다는 것에 만족한 선일이 손으로 부드럽게 문양을 쓰다듬었다.
느껴지는 요정 특유의 따스한 힘에 자연스레 눈을 감자 낮은 심장소리가 들려왔다.
두근!
눈을 감으며 정신을 집중하자 이 문양을 남긴 우르슬라의 기운이 희미하게나마 느껴졌다.
너무나 따뜻해 기분 좋고 아름다운 힘.
우르슬라의 치유를 받았을 때 느꼈었던 온기가 몸을 감쌌다.
스윽.
눈을 뜬 선일의 입가에는 어느새 미소가 지어져있었다.
이어서 그의 기억 속 우르슬라가 떠올랐다.
여왕의 자리를 뺏기 위해 잊혀진 찬탈을 하려 했던 에리얼을 처리한 후, 우르슬라와 계약을 했던 선일.
모든 일을 끝내고 기숙사로 돌아가기 위해 우르슬라와 헤어질 때, 마지막으로 했던 말이 있었다.
『저희 또 만날 수 있겠죠...?』
떠나는 그를 잡고 수줍은 소녀처럼 얼굴을 붉힌 우르슬라.
표정처럼 그녀의 목소리가 아련해 보이는 것은 기분 탓이었을까.
그 모습이 이상하게 부끄러웠지만 이럴 때마다 표정 숨기기는 선일의 얼굴을 숨겼다.
“당연하죠. 계약자인 만큼 언제가 또 볼 수 있을 겁니다.”
그녀에게 긍정의 대답을 남긴 후, 밖으로 나간 하늘은 도시의 밤이라고 하기엔 별들이 너무나도 밝게 빛났다.
수많은 별들이 아름답게 빛나는 것이 어색했던 선일은 조용히 야누스의 가면을 쓰기 시작했다.
***
어느새 훌쩍 시간이 지났는지 손목에 워치는 새벽 1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내일 아침에도 수업이 있었기에 곧바로 선일은 머리를 가볍게 말리며 샤워실에서 나왔다.
“후우 진짜 엄청 피곤하네.”
10분 만에 샤워를 마치고 나온 선일의 몸에서 힘이 쭉 빠지기 시작했다.
학교를 나왔을 때부터 직전까지 풀지 않았던 긴장감이 몸이 녹아내리는 것 같은 샤워에 완전히 풀려갔다.
순식간에 무거워진 발걸음으로 힘겹게 침대로 걸어간 선일.
침대에 몸을 맡기기로 한 그는 다이빙하는 것처럼 푹신한 침대로 뛰어들었다.
“으어어...”
피곤한 탓에 눈이 저절로 감기는 선일의 입에서 마치 좀비나 귀신에게서 들릴 것 같은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이어서 엎드린 몸을 애써 뒤집은 그가 맘대로 움직이는 머리를 가만히 정리하며 베개 위로 올렸다.
“...”
포근하고 따스한 침대의 느낌에 자연스레 눈이 감겨온다.
그러나 금세 정신력으로 애써 수마에 빠지는 것을 참은 선일이 입을 열었다.
“그래도 보상 확인은 해야지... 읏 차...”
아저씨 같은 소리를 뱉으며 다시금 귀찮은 몸을 일으킨 선일이 설계자의 알림을 확인하기 시작했다.
지금 에피소드를 해결하고 얻은 꽤나 뜻밖의 보상에 선일의 잠겨가던 눈이 커졌다.
“어라?”
[서브 에피소드: 여왕의 재림 종료]
[에피소드 보스 ‘찬탈자 에리얼’을 해결해 스텟이 미약하게 상승합니다!]
[새로운 등장인물 ‘요정 공주 우르슬라’를 지켜냈습니다! 특수 스텟 친화력을 획득합니다!]
[스텟-친화력: 이 세상에 살아가는 모든 존재에게 친밀감을 느끼게 합니다.]
[‘요정 공주 우르슬라’를 지켜내 친화력이 상승합니다!]
[침식률이 상승합니다!]
매번 보는 침식률에 대한 메시지는 넘겨버린 선일이 보상에 대해 확인하기 시작했다.
“특수 스텟?”
특수스텟이란 말 그대로 그냥 스텟이 아니었다.
악사영 내에서도 일반적인 인물들이 가지고 있는 스텟이 아닌 몇몇 특별한 힘을 가지고 있는 캐릭터들에게만 존재하는 설정.
특수 스킬을 가지고 있는 인물들의 예를 들면 정령과 소통할 수 있는 유리 펜드래건의 정령력 또는 바티칸 소속의 성자들이나 극한까지 불도를 익힌 스님들이 가지고 있는 성력등이 존재한다.
게다가 특수 스텟은 일반적인 스텟들에 비해 올리기 힘든 만큼 특별한 효과 같은 메리트가 있었다.
기대하지도 않았던 던전에서 얻은 뜻밖의 성과에도 선일은 뭐라 표현할 수 없는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근데 어디서 들어봤는데...”
딱 한 가지 이상한 점.
그 사실이 선일의 신경을 분산시켰다.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특수 스텟의 정체를 기억해 낼 수 있었다.
“친화력은 분명 등장인물이 가지고 있는 스텟이었는데?”
그 말대로.
친화력이라는 스텟은 악사영에 등장하는 주연 중 한 명이 가지고 있는 스텟이었다.
게다가 친화력을 가진 주연은 선일과 매우 가까운 곳에 있었다.
“안희은이었나?”
선일이 다니는 대한고의 2학년 선배 안희은.
직접 공격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없는 특이한 캐릭터임에도 그녀가 주연인 이유는 이 세상 모든 존재를 이해하고 또한 소통할 수 있는 능력인 친화력 때문이었다.
“근데 이게 왜 나한테 생긴 거지?”
선일은 요정과의 일을 해결해 얻은 스텟.
그러나 기묘하게도 악마나 초월자를 제외한 존재 중 안희은이 유일하게 소통하지 못한 존재는 요정이었다.
“모르겠다.”
마치 퍼즐을 맞추는 것 같은 어지러운 기분에 머리가 아파진 선일이 다시금 침대에 몸을 누었다.
처음엔 가벼운 마음으로 갔던 던전이었지만 그곳에서 생겨난 에피소드를 클리어 한 것에 만족한 선일은 마지막으로 자신의 스텟을 확인했다.
[스테이터스]
-명칭:이선일
-칭호:명문가 아들래미(보통), 선을 지탱하는 자(특이), 겉과 속이 다른 존재(유일)
-근력:LV5(+0.7)
-마력:LV5(+0.6)
-민첩:LV5(+0.5)
-체력:LV5(+0.3)
-지능:LV7
-친화력:LV3
-스킬
적양권(S), 초현실저항(S), 자연체(A), 필중일발(B), 표정숨기기(B), 덮어쓰기(?)
“이제 슬슬 자연체도 성장시켜야 하는데.”
자연체로 올릴 수 있는 스텟이 거의 한계까지 도달했는지 최근 스텟의 성장이 매우 더딘 편이었다.
“확실히 A급 스킬에는 한계가 있네.”
이제 B반 중에서도 그를 이길 수 있는 인물들은 신하윤이나 황신영 정도밖에 없다.
그들 또한 선일이 숨겨진 모든 패들을 꺼내면 간단히 제압하겠지만 가뜩이나 주변 사람들의 관심을 받고 싶지 않은 그로써는 마땅히 사양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선일이 마주할 위험들은 수없이 많았기에 여기서 만족하고 안주할 수는 없었다.
“근데 어떻게 성장시키지?”
그렇지만 선일이 가진 스킬들은 대부분 악사영에서는 등장하지 않았던 스킬들이었다.
머릿속의 설정집에 약간의 정보라도 있었다면 어떻게든 방법을 찾았을 테지만 이상하게 정보는 없었다.
그렇다면 유일한 방법은.
“몸으로 부딪히며 찾아야 하나?”
물론 그것이 답이라는 것을 알고 싶었지만 선일은 부정하고 싶었다.
그러나 현실을 자각한 선일은 언젠가 자신이 하게 될 생고생들을 머릿속에서 그려지는 것은 피할 수 없었다.
***
다음날 아침.
“어제 어디 갔다 왔어요? 종례 끝나자마자 곧바로 뛰어가던데?”
“응?”
교실에 가장 먼저 와서 앉아있는 평소와는 달리 학생들 중에서 가장 늦게 도착한 선일을 보며 하윤이 물었다.
그녀의 물음에 선일은 피곤한 하품을 내쉬며 부드럽게 대꾸했다.
“아아 나 어제 잠깐 외출하고 왔어.”
“그래요? 그렇기엔 어젯밤에 상태가 되게 안 좋던데?”
“봤어? 나 엄청 늦게 들어왔는데 신경 쓰였구나?”
“네?”
화악..!
갑자기 훅 들어오는 선일의 말에 신하윤의 뺨이 불에 닿은 것처럼 뜨거워졌다.
“아니 잠깐 바람 쐬러 창문 열었는데 선일씨가 보인 거였든요?”
“그랬구나~.”
“진짜라니까요?”
차가운 얼굴과는 다른 귀여운 하윤의 반응에 피곤한 것도 잊고 쿡쿡 웃은 선일.
자신을 바라보는 피곤한 눈 속에 장난기가 들어있는 것을 확인하자 한 층 더 부끄러워졌다.
‘아씨... 나 왜 이러지?’
짜증을 내며 급하게 자신의 눈을 피한 하윤을 보며 선일은 스킬이 만든 인위적인 표정이 아닌 진심으로 우러나오는 부드러운 웃음을 지었다.
‘왜 이렇게 귀엽지 진짜? 악사영에서는 이런 느낌 아니었는데.’
조금은 더 장난을 쳐 하윤이 삐진 모습을 보고 싶은 작은 욕망이 생겨났지만 이성으로 누른 선일이 가볍게 기지개를 피며 말을 이어갔다.
“어제 특별 임무 때문에 던전 갔다 왔어.”
“...진짜요?”
우수한 학생들에게 각 선생이 내리는 특별 임무가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그것이 선일일 줄은 몰랐다.
토끼처럼 눈을 크게 뜬 하윤이 입술을 앙 다물었다.
‘대단하다.’
여전히 약한 자신과는 달리 그는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그 사실이 너무나 부끄러웠다.
게다가 선일은 역시 자신과 마찬가지로 따돌림을 당하고 있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부끄러움은 더더욱 크게 다가왔다.
“무슨 생각 해?”
“아!”
갑자기 말을 멈춘 하윤을 바라보고 있는 선일의 눈에 장난스러운 기색은 없었다.
걱정하는 눈빛으로 자신을 다정하게 바라보고 있는 소년에게 하윤은 희미한 웃음을 지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런 하윤의 변화를 선일이 모를 리가 없었다.
거의 한 달 가까이 같이 지내온 것도 있었기에 그 변화는 더욱 크게 다가왔다.
무슨 걱정일까.
아무리 악사영의 작가인 선일도 사람인지라 생각까지 꿰뚫어볼 수는 없다.
“하윤아.”
그렇지만.
“오늘 나랑 저녁 먹으러 가자.”
작가인 만큼 등장인물의 기분을 풀어주는 것 정도는 누구보다 잘 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