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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화
지혜롭던 우르슬라는 죽었다.
색을 잃은 이유.
이차원으로 떨어진 이유.
악마와 내통을 했다는 모함이 들려왔던 이유.
하물며 자신의 권속이었던 어린 요정이 이렇게 배신한 이유.
아무것도 모르니 죽었다고 해도 무방하다.
『도...도대체 왜?』
등 뒤에서 느껴진 충격에 앞으로 쓰러진 우르슬라의 입에서 애처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 파벌의 지도자였다기엔 아니, 오히려 지도자였기에 너무나도 볼썽사나운 모습이었지만.
에리얼은 동정 같은 헛된 감정에 신경을 쓰지 않았다.
한껏 들뜬 얼굴을 한 에리얼이 입을 열었다.
「뭘 왜에요! 들었잖아!」
우르슬라는 말을 잃었다.
그 말을 하는 에리얼의 얼굴이 그녀의 눈엔 기쁨이나 환희가 아닌 광기로 비춰졌기 때문이다.
결국 쓰기 싫었던 권능을 써서라도 에리얼을 제압하려던 때.
『크윽...!』
원래는 사용되었어야 했을 권능 대신에 등줄기를 타고 올라오는 고통이 시작되었다.
등에 꽂혀있는 불길한 단검.
그로 인해 얻은 상처의 통증은 절대 약하다고 말할 수 없었다.
오히려 지금까지 받아왔던 통증 중에서 가장 고통스러웠던 색을 잃을 때와 버금가는 아픔에 우르슬라는 신음 소리를 내었다.
「하하하하!! 여왕이 내 발아래에 있다니! 그럼 내가 더 위인 거잖아!」
에리얼은 말을 하다 말고 앞을 향해 천천히 다가왔다.
이어서 쓰러진 우르슬라와 눈을 맞춘 그녀의 표정이 얼어붙었다.
「근데 난 왜 여왕이 아니야? 왜... 왜!」
철썩!
새하얗던 우르슬라의 뺨이 붉게 달아올랐다.
그러나 그녀는 뺨의 고통을 알 수 없었다.
등의 고통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녀의 머릿속에서는 온통 에리얼에 대한 충격뿐이었으니까.
『...어째서 이런 일을 벌인 거니.』
「아니 여왕님! 계속 말했잖아요! 여왕하고 싶어서 라니까?!」
광기로 가득 찬 에리얼.
이미 예전의 장난기 가득했던 어린 요정은 완전히 사라졌다.
언제부터였을까.
아무리 파벌 중 가장 지혜롭고 강한 힘을 가진 여왕이라고 해도 같은 요정의 마음을 읽는 것은 불가능했다.
『아니.』
이어서 우르슬라의 입에서 허탈한 공기 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녀는 처연한 웃음을 입가에 매달며 작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냥 내가 모자라서 그런 건가...』
「뭐라고 했어요?!」
절망이 채워진 우르슬라가 뱉은 말에 에리얼이 궁금한 표정을 지었지만 질문을 받은 그녀는 입을 열지 않았다.
그 모습이 마치 자기를 무시하는 것처럼 보였던 걸까.
에리얼은 속에서 끓어오르는 분노를 그대로 표현하기 시작했다.
『으윽...!』
가뜩이나 아팠던 등의 상처가 더더욱 쑤셔왔다.
비명을 참으려 깨문 입술에서 하얀 피가 주르륵 흘렀다.
「아프죠? 여왕님의 자격을 떨어뜨리기 위해 만든 단검이에요. 찬탈이라 하던가? 그게 있으면 여왕이 될 수 있다고 하더라구요?」
찬탈.
들어본 적이 있다.
이제는 사라진 풍습, 아니 기회였지만 태어나는 순간부터 정해진 파벌의 지도자 자리를 다른 요정이 빼앗을 수 있게 만드는 유일한 기회였다.
요정족의 영원한 공주 [메르세데스]께서 요정족에 썩어빠진 지도자 따위는 없어야 된다는 말과 함께 만드신 풍습이라고는 하지만.
‘분명히 그분께서 사라지고 나서는 자신의 안위만을 걱정한 전대의 지도자들이 모든 기록을 말소했다고 들었는데..?’
「후우! 이걸 만드는 데 조금 오래 걸리긴 했지만 확실히 통하네요 헤헤.」
아무렇지 않게 뱉은 에리얼의 말에서 이질감을 느낀 우르슬라가 잘 돌아가지 않는 사고를 회전시켰다.
‘악마의 기운이 느껴지는 단검. 그리고 에리얼이 뱉은 말.’
자신이 색을 잃은 이유와 에리얼의 찬탈이 연결되어 있다.
이 사실을 본능적으로 깨달은 우르슬라가 빠득 소리가 날 정도로 강하게 이를 물었다.
순진했던 에리얼을 듣기 좋은 말로 꿰어낸 자.
자신이 악마와 내통했다는 모함을 한 자.
그리고.
이미 사라진 전대의 지도자들 중 유일하게 현재의 의회에 남아있는 자...!
평소에 보이지 않았던 우르슬라의 낮은 목소리에서 불길함을 느낀 에리얼.
『그 자식이구나.』
멈칫.
『카나리아.』
색을 잃기 전, 그녀의 파벌이 가지고 있던 비취색.
메르세데스께서 처음 태어날 때 가지고 있었던 색을 우르슬라가 가지고 있다는 것에 질투했던 연녹색의 여왕.
「그...그걸 어떻게?」
느낌이 적중했다는 것을 깨닫자 차가운 분노와 기쁨을 넘어선 광기만 보여주던 그녀의 얼굴이 깨졌다.
처음으로 에리얼이 보여준 당혹함에 자신의 생각이 정확했다는 것을 확신한 우르슬라가 주먹을 쥐었다.
「하!」
주륵.
손바닥에서 피가 흐른다.
색을 잃기 전의 아름다웠던 비취색의 피가 아닌 눈처럼 하얀 피.
순수한 느낌이 감도는 백혈(白血)은 폭발하는 것처럼 격하게 끓어오르는 것 같다.
「근데 그걸 이제 알아도 어쩌려구요? 이제 나한테 죽을 건데.」
하아하아.
숨이 가빠 와진다.
심장에 담기에는 너무나 격한 분노.
그 모든 것을 후일을 위해 삼켜야만 하는 것을 앎에도 너무 힘들다.
그와 반대로 그녀의 얼굴은 언제나 그래왔듯 조용히 미소 지었다.
‘에리얼은 찬탈이라는 풍습만 알고 정확한 내용은 몰라.’
그녀가 뱉은 자신을 죽인다는 말.
찬탈이라는 행위가 역사 속에서도 매우 희귀한 경우였기에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지만.
‘찬탈이 진행되는 동안 지도자는 목숨을 잃지 않는다.’
물론 목숨만 잃지 않을 뿐 거의 식물과 다를 바 없는 상태일 테지만.
‘적어도 시간은 벌 수 있어.’
그 시간이 어느 정도인지는 자신도 알지 못한다.
한순간보다 짧을 수도 있고 영겁보다 길 수도 있다.
그렇기에 우르슬라는 아주 조금의 희망을 가지고 있었다.
‘이차원도 요정의 세계와 마찬가지로 인간과는 완전히 차별화된 다른 세계.’
원래 세계를 이동해 다른 세계에 간섭을 하는 인간은 거의 없었다.
딱 한 명.
그녀를 구해주었던 사내를 제외하고는.
만약 그분처럼 차원을 뛰어넘어 이곳에 찾아오는 인물이 있다면...!
‘살 수도 있어.’
도박이었다.
여왕이었을 때는 단 한 번도 하지 않았던 도박.
그러나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 도박이 될 것이다.
『플라운더.』
자신이 따랐던 여왕의 목소리에도 수호자는 여전히 아무런 감정도 비치지 않는다.
그 역시 자신처럼 에리얼에게 당한 것이겠지.
우르슬라는 뺨에 슬며시 흘러내리는 눈물과 함께 미소 지었다.
둘의 아련한 모습을 꼴 보기 싫다는 것처럼 눈살을 찌푸린 에리얼이 입을 열었다.
「플라운더.」
여왕에겐 반응 없었던 그가 에리얼의 부름에 대답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세뇌를 해뒀다지만 자신에게 복종하는 수호자의 모습을 보자 에리얼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우르슬라를 향해 손가락질했다.
「이거 옮겨.」
허공을 나는 듯한 부유감이 느껴지자 우르슬라는 포기한 것처럼 무채색의 풀을 쳐다보았다.
그녀의 얼굴은 언뜻 보기에는 모든 것을 포기한 것처럼 보였지만 일말의 희망을 갖고 있다는 것은 에리얼은 모르고 있었다.
예전에도 지금도 못하는 연기였지만.
자신에 비해 아직 한참은 어린 에리얼을 속이기에는 충분하다.
『메르세데스시여...』
마지막으로 태초의 요정을 부르며 그녀는 천천히 시간을 기다리기 시작했다.
***
콰앙!
스릉.
푸슉!
건틀릿과 주먹.
그리고 기이한 흑기가 오두막 곳곳에 상처를 남긴다.
그럼에도 부서지지 않는 것은 이곳이 그들의 집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역시...’
전투의 여파로 거의 모든 곳이 부서지고 잿더미로 변한 상태였지만 단 한 곳.
백발의 소녀가 있는 공간에는 두 사람이 절대 공격하지 않았다.
게다가 선일이 실수로 그쪽을 공격할 때마다 플라운더와 에리얼이라는 요정은 그곳을 수호하는 것을 최우선으로 했다.
그것으로 두 요정에겐 저 소녀가 매우 중요하다는 의미라는 것을 확인했다.
‘물론 설계자가 말해줬기는 하지만 혹시 모르니까.’
가뜩이나 조금씩 전개가 비틀려 생존이 힘들어졌는데 아무리 설계자의 에피소드가 크다고 해도 제 눈으로 확인해야 편하다.
그것이 아무리 작은 정보라 해도 말이다.
투욱.
선일은 자신이 그곳으로 조금씩 몸을 움직이는 것을 아무도 의식하지 못하게 더더욱 날뛰었다.
그러나 그들은 선일을 죽이는 것보다 소녀를 확보하는 것이 훨씬 중요한지 그가 조금씩 다가갈수록 떼어내는데 바빴다.
그럴 때마다 시간은 조금씩 흘러간다.
촤악-!
선일이 플라운더가 휘두르는 검을 피한다.
이후 곧바로 건틀릿을 권총으로 바꾼 선일이 에리얼의 공격을 요격하려 했지만.
‘후속타가 날아오지 않는다?’
어그러진 연계에 플라운더에 뒤를 바라본 선일의 눈이 미묘하게 둥그러졌다.
그의 시선에 보이는 것은 기세등등했던 처음의 모습과는 달리 거친 숨을 내쉬고 있는 에리얼이 들어왔다.
「하아하아..!」
그 순간, 자신의 시선을 의식한 플라운더가 급하게 검을 찔러들어왔다.
그러나 너무나 급한 공격에.
쩌적.
여명의 총신으로 플라운더의 검을 튕겨낸 선일은 직후.
쾅!
지친 에리얼을 향해 달려들기 시작했다.
「어...어어!」
괴물 같은 인간이 플라운더를 무시하고 자신을 향해 뛰어오자 에리얼의 안색이 눈에 띄게 질려갔다.
전투가 시작하고 처음 겁에 질린 그녀가 흑기를 뿌려대며 악을 썼다.
「플라운더 나를 지켜!」
주인의 말에 플라운더가 기운을 폭발시키며 가속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플라운더가 에리얼을 향해 다가가는 선일의 앞을 막으려 했을 때.
<...?!>
이미 그의 시야에서 선일은 사라졌다.
전투 중에 적을 놓치는 것은 머저리나 할 짓이다.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수호자는 곧바로 기감을 오두막 내부에 확산시켰다.
요정과 인간의 기척은 다르기에 빠르게 선일의 위치를 찾은 플라운더.
아무도 볼 수 없지만 투구 속에 가려진 얼굴은 당혹함으로 얼어붙었다.
「이 인간 어디 갔어?」
그러나 다가오는 공포에 눈을 감았던 에리얼은 여전히 선일의 위치를 알 수 없었다.
그녀가 아는 것은 플라운더가 당황했다는 것.
이상함을 느낀 에리얼의 얼굴이 굳어가자 직후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디 보냐?”
「서..설마?」
선일의 목소리를 들은 에리얼이 급하게 뒤를 돌았다.
처음과 달리 온몸이 상처투성이인 상태로 서있는 선일.
그러나 그의 뒤에는 처음과 달리.
전 여왕 우르슬라가 있었다.
「막아! 안 막으면 죽어!」
전투를 하느라 찬탈의 속도를 낮춰뒀던 에리얼이 목소리가 쉬도록 소리치며 흑기를 미친 듯이 흑기를 쏘아댔다.
플라운더는 그녀가 외치기 전부터 그를 향해 레이피어를 들고 달려들었다.
무서운 속도로 날아드는 공격을 하나도 빠짐없이 바라보고 있었던 선일.
콰앙...!
그가 주먹으로 바닥을 내려찍자.
“체크메이트다 이 자식들아.”
적금색 태양이 일어낸 거대한 벽이 우르슬라와 그들을 구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