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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화
적과 자색의 밝은 빛을 내뿜는 건틀릿과 묵빛의 검기가 실려있는 레이피어.
두 무인의 무기가 맞붙으며 흑백만 가득한 오두막에 불꽃이 튀었다.
그렇게 한차례 불꽃이 튀고 나면 흑기가 선일을 향한다.
곧바로 자신을 향해 날아드는 흑기를 총으로 요격한 선일이 머리를 굴렸다.
‘성가시다.’
근접에서 플라운더의 검을 막고 나면 원거리에서는 에리얼의 공격이 날아온다.
충분히 반응할 수는 있지만 그럼에도 목뒤가 서늘해진 완벽한 연계.
까득 소리가 날 정도로 강하게 이를 깨문 선일이 머릿속 원작을 빠르게 펼쳤다.
촤라락.
책이 펼쳐지는 소리와 함께 순식간에 악사영을 확인한 선일이었지만 그럼에도 이 상황을 타계할 해결책은 없었다.
‘젠장!’
텅!
플라운더의 찌르기를 다시 한번 튕겨내고 황혼으로 반격한 선일은 일순 주위를 둘러보았다.
한 가지 악사영에서 등장하지 않았던 내용의 전개를 풀어낼 방법을 찾기 위해서.
하지만 선일의 눈에 비춰지는 단서는 아무것도 없었다.
자신들이 아닌 다른 쪽으로 시선이 돌아간 것을 눈치챈 걸까.
여왕과 기사는 더더욱 날카로운 공격으로 그를 노려왔다.
선일이 보는 세상의 시간이 느려지는 순간.
꿈틀.
그는 발견할 수 있었다.
오두막 끝에서 그들을 멍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던 백발의 소녀.
그 소녀의 눈이 고작 자세히 바라보는 정도로는 알 수 없을 정도로 미세하게 맑아졌다는 것을.
‘뭐지..?’
아주 작은 변화.
그러나 선일의 직감은 말했다.
그녀가 이 오두막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우두커니 서있는 소녀가 전개를 풀어낼 유연한 방법일지 아니면 또 다른 불가사의일지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직감은 말 그대로 감각일 뿐, 미래예지 같은 능력이 아니니까.
다만 확실한 것은.
띠링!
[@*$가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합니다!]
[서브 에피소드: 여왕의 재림이 시작됩니다!]
설계자조차 그의 직감을 인정했다는 소리였다.
***
우르슬라.
지금으로부터 몇 백 년 전에 타락해 색을 빼앗긴 요정 여왕이지만, 색을 빼앗기기 전에는 가장 고결하고 뛰어난 여왕으로 평가되었었다.
요정들의 의회에 존재하는 지도자 중에서도 특히 지혜로운 그녀도 어째서 자신이 태어났을 때부터 같이 있어준 권속과 함께 죄인들만 가는 유배지인 이차원으로 떨어진 이유는 알 수 없었다.
그렇기에 그녀는 자신과 가장 가까웠던 지도자인 갈렌에게 억울함을 호소하기 시작했다.
『갈렌! 어째서 내가 이차원으로 떨어져야 하는 거죠?!』
【아직도 모르는 건가 비취색의 여왕 우르슬라. 그대가 요정족의 영원한 적인 악마와 내통했다는 것이 밝혀졌다. 그럼에도 할 말이 있는 건가.】
『당연하죠! 이건 모함이에요!』
억울함을 그대로 표현하는 우르슬라의 목소리에서 분노가 느껴졌다.
이제는 색을 빼앗길 예정이었다지만 여전히 강한 힘을 가지고 있는 우르슬라가 목에 차고 있던 구속구도 조금씩 허물어가기 시작했다.
그녀의 기세가 강해지자 의회에 있던 다른 요정족들의 지도자들이 당황했을 때, 많은 지도자 들 중에서 대표자 역할을 하고 있던 한 사내가 다시금 입을 열었다.
【우르슬라. 그대는 지금 이곳에 지도자로써 온 것이 아니다. 현재 그대의 위치는 한낱 죄인이다.】
<맞소! 어딜 죄인이 신성한 의회에서 그렇게 흉흉한 기운을 발한단 말인가..!>
여러 파벌이 있는 요정족 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파벌인 적갈색의 왕 갈렌.
묵직하고 살벌하 분위기가 감도는 목소리에 다른 지도자들도 따라서 소리치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르슬라의 기세는 꺾이지 않았다.
『의회는 제대로 조사한 것이 맞나요? 다른 지도자들이 뒷공작을 펼친 것은 아니고요?』
【...뭐?】
쿠우웅..!
우르슬라의 말에 재판장이 조금씩 떨려오기 시작했다.
여러 색의 힘을 다루는 요정족 중에서도 적갈색은 땅의 기운.
그 지도자인 갈렌이 다루는 땅의 힘은 작은 지진을 억지로 일으킬 수 있을 정도로 강했다.
콰앙!
갈렌이 강하게 내리친 재판장의 탁상이 산산조각 부서졌다.
우르슬라의 발언에 분노한 그는 거친 숨을 내쉬며 우르슬라를 감싸고 있던 구속구의 기운을 불어넣었다.
『윽?!』
【지금 그대의 발언은 매우 불경하다! 우리를, 하물며 요정족의 영원한 공주 메르세데스께서 구성하신 의회를 의심한단 말인가!】
안 그래도 답답하던 구속구가 더욱 강하게 목을 조여오자 우르슬라의 얼굴이 고통스럽게 변했다.
억지로 기운을 일으켜 해제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헐겁게 만들려고 했던 그녀의 힘이 빠져나갔다.
그에 반해 갈렌은 여전히 여진을 일으키고 있었다.
갈렌은 우르슬라를 손가락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우르슬라 그대는 죄인이다! 그리고 죄인이라면 응당 벌을 받아야 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 건가!】
<옳소옳소!>
【조용히! 지금부터 판결을 내리겠다!】
꿀꺽.
누군가가 침을 삼켰다.
꽈악..!
또 다른 누군가는 주먹을 쥐었다.
긴장하는 자세.
그러나 우르슬라는 알고 있었다.
저 앞에 자신의 편은 아무도 없었구나라는 것을.
【지금부터 우르슬라와 그녀의 권속이 가지고 있던 비취색을 빼앗고 흑과 백 두 개의 색만 사용하게끔 허용한다! 이후 이차원으로 유배형에 처한다!】
흑과 백이라는 무채색.
요정족에게 무채색의 의미는 달랐다.
타락했다는 것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었으니까.
동시에 구속구가 불쾌한 소음을 내며 작동하기 시작했다.
『아악!』
고통스러웠다.
지금까지 느껴왔던 고통을 모두 합쳐도 새 발의 피라고 생각이 들 정도로 강한 통증이었다.
마치 자신이 태어난 이유와 살아왔던 요정의 삶을 통째로 부정하는 듯한 느낌에 우르슬라는 머리가 어질거렸다.
그럼에도 이상하게 귀는 정상적이었다.
<살려주세요 우르슬라님!>
<아니 죽여주세요 여왕님..!>
뒤에서 권속들이 비명을 지르는 소리가 들려왔으니까.
그 사실을 눈치챈 순간 우르슬라 스스로도 자랑스러워했던 모습이 하나둘씩 변해감을 느꼈다.
찬란했던 녹빛의 머리는 칙칙한 느낌이 드는 하얀색으로 변해갔고, 아름다웠던 풀빛의 드레스는 먹이 든 것처럼 검게 변했다.
판결에 따라 정신을 잃으며 이차원으로 떨어지는 그녀의 귀에 이상한 소리가 톡톡히 들렸다.
피식.
의식하지 않으면 듣지 못할 만큼 작은 소리였지만 고통에 얼룩진 그녀의 감각은 이상하게도 또렷했다.
그녀는 어느새 삐쩍 말라버린
『웃고 있어..?』
그녀는 힘이 들어가지 않는 몸을 애써 가누며 고개를 돌렸지만 아쉽게도 웃는 자의 얼굴이 정확히 보이지는 않았다.
복수를 하겠다는 목표조차 나에게는 안 된다는 걸까.
시야가 검은 눈물로 흐릿하게 변해갔다.
동시에 그녀는 그런 검은 시야 속에서도 누군가를 떠올렸다.
『백의시여...』
우르슬라가 태어나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어렸던 그녀를 지키고 하물며 악마에 의해 마기로 침식되어가던 요정의 세계 또한 신성한 불꽃으로 구원한 인물.
그런 영웅적인 행보에도 인간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쫓겨났지만 그럼에도 어린 자신에게 따스하게 웃어주며 구원해 줬던 사내.
그 남자가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나를 구원해 주세요...』
【비취색의 여왕이었던 타락자여. 이차원에서 천천히 억 겹의 시간 동안 죄를 뉘우치도록.】
마지막 갈렌의 말로 완전히 색을 잃고 이차원으로 떨어지는 우르슬라를 향해 누군가 말했다.
<...꼴좋다 우르슬라.>
이것이 그녀가 마지막으로 들었던 말이었다.
***
이후 그녀가 깨어났을 때, 권속들과 함께 서있는 원래 있었던 비취의 궁전이 아니라 온통 검은색과 하얀색으로 칠해진 세상이었다.
산뜻한 색들만 보았던 고향과 비교했을 때, 며칠만 지내도 정신이 이상해질 것 같은 곳이었지만 원래 죄인들이 간다는 허무의 공간보다는 나았다.
마지막에 갈렌이 배려를 해준 것일까.
『그건 아니겠지.』
모든 일 중에서도 특히 의회에서 일어나는 재판에서는 시종일관 무겁고 진지한 자세를 취했던 그였으니까.
아무리 가까운 사이였다 한들 배려를 해주지 않을 것이었다.
아마도 지금 이곳으로 유배를 온 것은 오류일 것이다....
라고 생각했던 우르슬라는 어느 순간부터 그 생각을 후회했다.
언제부터였는지는 기억이 안 난다.
「안녕하세요 여왕님!」
『어머 에리얼이구나. 무슨 일이니?』
나락으로 떨어졌던 자신에게 더더욱 거대한 나락이 존재할 줄은.
「별일은 아니구요! 여왕님 뵈러 왔어요!」
항상 장난기 넘치는 미소를 짓고 있는 요정 에리얼.
그녀의 발랄한 웃음은 언제나 자신을 기분 좋게 만들었다.
『그러니? 고맙구나 항상.』
「에이 뭘요~ 이렇게 노력해 주시는 여왕님이 더 감사하죠! 아 맞다!」
『응? 무슨 일 있는 거니?』
「생각해 보니까 수호자님을 아까 뵀거든요!」
『플라운더님이? 요 며칠 얼굴 한 번도 안 비추던데 어디 계시니?』
「저 뒤쪽에 있는 개울에서 조용히 검을 수련하고 계셨어요! 최근에 기이한 기운이 느껴진다 하시던데. 그래서 혼자 알아보고 계신 것 같아요 헤헤.」
『그렇구나.』
에리얼이라는 어린 요정이 권속 중 어느 누구도 보지 못했다던 사라진 수호자를 보았다고 말했을 때.
우르슬라는 의심하지 않았다.
아무리 요정족의 숨겨진 비열함이 크다지만 이렇게 다 같이 색을 잃은 입장에서 그 누가 배신을 할 것이라고 생각했었던가.
『그럼 플라운더님을 보러 가야겠구나.』
「저도 같이 가도 되나요?」
『위험할 수도 있을 텐데.. 괜찮겠니?』
「네!」
그 누구보다 생존본능이 강해 실수로라도 자신의 목숨이 위험할 수 있는 일에는 가까이도 가지 않는 요정족.
그렇기에 에리얼의 반응은 이상했지만 우르슬라는 의식하지 않았다.
에리얼의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기쁨도.
뒤에서 따라오면서도 장난을 참을 수 없는 것처럼 보이는 경쾌한 발걸음도.
평소와는 미세하게 달라 보이던 미소도.
그 모든 것은 같은 요정족에게 배신당한 우르슬라에게는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다.
터억.
약간의 시간이 지나고 도착한 개울에는 평소에 입던 투구와 갑옷을 벗은 플라운더가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오래간만에 보는 반가운 얼굴에 우르슬라의 얼굴이 밝을 웃음을 자아냈다.
『플라운더!』
“...”
우르슬라는 침묵으로 대답을 대신하는 플라운더에게 이질감을 느꼈다.
원래대로라면 우르슬라가 부를 때마다 곧장 대답을 하는 그였지만 지금의 플라운더는 어딘가 나사가 하나 빠진 것처럼 보였다.
이어서 검을 치켜들은 그가 천천히 다가오자 불온한 기색을 느낀 그녀가 뒷걸음질을 치기 시작했다.
『...왜 그래요 플라운더?』
여왕인 그녀의 말에도 대답하지 않은 플라운더는 목소리를 내는 대신 빠르게 레이피어를 휘두르며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갑작스레 달라진 기사의 모습에 힘을 일으키며 공격을 방어한 우르슬라가 소리쳤다.
『에리얼 도망치렴!』
에리얼이 도망칠 시간을 벌 생각으로 우르슬라는 앞으로 나아갔다.
여왕인 자신보다 권속을 아끼는 참된 지도자의 모습.
그러나...
푸욱.
『에...에리얼?』
「여왕님...」
에리얼에게서 들려오는 대답은.
「이젠 내가 여왕 할래요.」
소름 끼치는 광기와 함께 자신의 등을 꽂은 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