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
45화
서울의 어느 허름한 달동네.
아니, 동네라고 부르기에도 찜찜한 지역.
이곳의 실체를 본 뒤에 원래 세계의 이름을 듣는 사람이라면 분명히 믿지 않을 것이다.
제일 먼저 작가인 나조차 그랬으니까.
“진짜 믿기지가 않네.”
선일은 자신이 가고 있던 거리를 둘러보았다.
칙칙한 색깔들로, 그조차도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군데군데 벗겨진 자국이 있는 컨테이너나 판잣집.
울퉁불퉁한 돌멩이, 하물며 사람 하나는 가뿐하게 부러뜨릴 수 있는 바위가 즐비한 비포장도로.
그 누가 알까.
이렇게 허름하고 눈빛이 찌푸려지는 거리가.
원래 내가 있던 현실에서는 최고의 땅값을 자랑하던 강남이라는 것을.
“참 내가 생각해도 설정 이상하게 지었어.”
선일은 헛웃음을 지으며 생각했다.
이윽고 그의 주변에서 미세한 기척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선일이 그대로 뒤를 돌아보았을 때,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시야엔 여전히 회백색의 공터뿐.
확실히.
‘조언이 효과가 있네.’
강남에 오기 직전, 잠시나마 성강과 나눴던 대화가 떠올랐다.
오늘부로 스승을 맡은 성강이 제일 먼저 한 일은 가벼운 조언.
물론 그의 조언은 원작의 기연이라고 생각될 정도로 효과가 있었기에 머리가 뛰어난 선일은 곧바로 흡수할 수 있었다.
헌터 중 최강자라 할 수 있는 천외천, 성강이 그에게 제일 먼저 해준 말은 자신의 움직임이나 마력을 다루는 컨트롤에 관한 내용이 아니었다.
감각을 벼리는 법.
성강의 목소리를 떠올린 그가 똥 씹은 표정을 지었다.
‘...생각해보면 그걸 조언이라고 말할 수 있나?’
조금 더 감각이 날카로워졌다는 점에서 보정이 들어가긴 했지만 생각해 보면 그의 행동은 조언이라기보다는 훈련에 가까웠다.
조언을 듣는 중간중간 성강이 공격을 했고, 대부분의 타격은 선일은 반응하지 못했다.
예고를 하지 않았기에 그런 것도 있었지만, 성강이 공격을 했을 때는 몇 가지 특별한 점이 눈에 띄었다.
첫 번째.
피격자가 절대 예상하지 못하는 타이밍에 타격했다는 점.
그리고 두 번째.
공격을 하는 사람이라면 느껴지는 결을 배제했다는 점.
살기나 적의와도 같은 감정은 물론, 인간이 특수한 행동을 하기 위한 아주 미세한 움직임까지.
성강의 공격은 인간의 움직임에 영향을 주는 모든 것이 지워져있었다.
“뭐라도 알 수만 있었으면 그나마 나았을 텐데.”
선일은 처음부터 끝까지 그에게 공격을 허용하기만 했지만 그의 가르침은 대단하다고 말할 수 있었다.
고작 한 시간이 채 되지 않는 짧은 시간으로 감각을 이 정도까지 벼려냈으니 말이다.
조언을 듣기 전이었다면 집중을 해야 느꼈을 게 분명했다.
‘뒤에서 느껴지는 기척이 꽤 많네. 게다가 성인도 섞여있지만 몇몇은 애들도 있는 것 같은데.’
자신이 빙의한 이선일도 나이로 따지자면 애였지만 굳이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이어서 기척들에게서 느껴지는 감정을 깨달았다.
‘의구신과 경계, 그리고 미세하게 느껴지는 적의.’
헌터들이나, 여러 가문의 자제들은 이곳 강남에 발은 물론, 시선조차 두는 것을 꺼려 한다.
무거운 회색빛과 적막은 자신들이 올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이었다.
‘분명 설정에는 강남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대부분 부랑자나, 고아. 그리고 범죄자들이 숨어 산다고 만들었지.’
이제는 밝은 빛으로 나올 수 없는 자들과, 태어날 때부터 어둠에서 살아왔던 이들.
나이를 먹은 노인들과, 나이를 먹는 어른들, 그리고 나이를 먹을 아이들이 모두 싸우는 곳.
악사영에 써뒀던 이 문장이 바로 대한민국의 할렘이나 마찬가지인 강남의 설정이었다.
평소에는 사람이 들어오지 않는 무법지대에 갑자기 외부인이 들어왔으니...
‘경계할 만도 하겠지.’
다행히 느껴지는 기척들 중에서는 선일에게 위협을 가할만한 인물들은 없었다.
실제로도 위협은 느껴지지 않았고.
강남은 대한민국의 할렘이기에 이곳에서 만약 사고가 일어난다면 대대적으로 관리가 들어갈 수도 있는 것을 그들은 알고 있는 것이었다.
‘게다가 지금 내 얼굴은 풍랑의 자식처럼 보이겠지.’
지금 선일은 원래 성강에게서 받은 아티팩트 [야누스의 가면]을 사용 중이었다.
원래 그의 특징이었던 갈색 머리와 검은 눈동자는 사라지고, 연한 녹색의 머리색이 인상적인 장발의 미청년으로 변장한 상태였다.
아무리 강남이라도 그 흔한 뉴스나 스마트폰이 안 보고 사는 것은 아닐 것이다.
‘하물며 신문이라도 보겠지.’
지금 그가 변장한 인물은 원래는 악사영에는 없는 인물이다.
모티브는 성강과 마찬가지인 천외천, [풍랑]의 아들이었다.
풍랑은 바람 속성에 대한 친화성이 너무나 뛰어나 머리색이 연한 녹색빛을 띈다고 알려져 있다.
그리고 그의 피를 이은 자녀들까지 모두 다.
‘풍랑의 설정은 가족애가 강한 인물이지. 아무리 뒤가 없는 사람이라도 풍랑의 자식일지도 모르는 자를 건드리는 것은 감당하기 힘들지.’
선일은 자신의 노림수가 그들에게 통했다는 것을 깨닫고 천천히 발을 옮기기 시작했다.
***
“흐음... 이 근방인 거 같은데?”
강남을 관통하는 거리를 그대로 지나 근방에 있는 산에 들어온 선일.
그러나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것에 의문이 든 선일이 지그시 눈을 감았다.
우우웅-!
단전의 코어에서 마력이 채워진다.
동시에 선일의 몸에서 터져 나온 파장이 그를 중심으로 사방으로 퍼져나간다.
마치 경지를 이룬 헌터들이 사용하는 공간장악과도 비슷해 보였지만 조금 차이점이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선일이 쓰는 건 공간장악의 하위호환이었다.
“공간장악이 GPS라고 친다면, 지금 내가 쓰는 기술은 초음파랑 비슷하지.”
잠수함이나 박쥐가 장애물을 피하기 위해 쓰는 초음파.
그러나 선일은 초음파 대신 마력으로 찾고 있는 타깃을 파악하는 방식이었다.
이어서 조금 더 정신을 집중하자...
투욱.
계속해서 퍼져가는 마력에 무언가가 걸린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선일의 입가에 호선이 그어졌다.
“저기 있었네.”
그는 앞쪽으로 다시 걸어가기 시작했다.
조금씩 던전 특유의 기운이 짙어지는 것을 느끼며 눈을 감고 걸어간 선일.
이제 바로 코앞에서 느껴질 정도로 던전의 짙은 기운이 짙어졌을 때...
뚜욱..!
무언가 부러지는 소리가 귀에 울려 퍼졌다.
그리고 선일이 소리를 인식하기까지 걸린 시간.
단 0.5초.
던전의 흉흉한 기운이 갑작스레 비대해지는 것을 눈치채자마자 선일은 곧바로 단전의 마력을 심장의 코어로 끌어올렸다.
화륵!
마치 지하수를 끌어올리는 펌프처럼 심장에 가득 차자 그는 곧장 태양을 불러냈다.
동시에 온몸으로 퍼트리는 황금의 불꽃..!
콰가가각!
정면에서 거대한 돌개바람과 함께 던전 특유의 정체 모를 기운이 덮쳐오기 시작했다.
예민해진 감각이 반응하자마자 온몸을 강화시키긴 했지만 던전의 기운은 그럼에도 부족했다.
“우웁!”
선일의 입에서 구토를 뱉을 때와 비슷한 소리가 튀어나왔다.
하지만 그에 맞춰 돌개바람도 사그라드는 것을 깨달았다.
‘좀 더 버텨야 돼!’
슈우우...
그의 생각은 정확했다.
자연현상, 어쩌면 재해 현상이라고 부를 수도 있는 던전과 그를 클리어하는 헌터.
둘의 기묘한 대치가 점점 끝나가기 시작했다.
이후 1분 정도가 더 지나고 나서야 던전의 기운은 흔적도 없이 깔끔히 사라졌다.
물론 선일의 체감으로는 1분이 아니라 1시간처럼 느껴졌지만.
“후우.”
적양권의 열기 때문인지, 아니면 원래는 안전하게 개방시켰을 던전의 저항 때문인지.
그의 이마에는 뜨거운 땀방울이 수없이 맺혀있었다.
손으로 땀을 털어낸 선일이 쉼 호흡하며 바닥을 내려보았다.
자신의 부주의로 인해 부러진 나뭇가지를 가볍게 차면서 씁쓸한 목소리를 뱉었다.
“젠장. 트리거를 눈치를 못했네.”
던전은 어느 곳에나, 언제든지 생겨날 수 있다.
악사영 속 등장인물들이 던전에 대해 알고 있는 정보는 이게 끝이다.
하지만 작가인 선일은 그들이 알지 못했던 던전의 비밀을 알고 있었다.
“던전은 갑자기 생기는 현상이 아니라 트랩이지.”
트랩(Trap).
그 말대로 던전의 정체는 함정이었다.
트리거가 활성화되면 그대로 던전이 생겨나는 수동적인 트랩.
물론 시간이 지나면서 개방되어 위치가 밝혀지기도 하지만.
‘난 그렇게 기다릴 필요가 없지.’
악사영에 대한 정보들을 대부분 알고 있는 선일은 그렇게 번거로운 작업을 하지 않아도 된다.
‘던전을 개방하는 트리거는 주변에 굴러다니는 평범한 물건 중 하나. 그리고 그걸 헌터가 아닌 일반인이 건들면 그대로 기운에 찢기는 거지.’
그렇기에 던전이 갑자기 생겨날 때, 일반인들이 연관된 사고가 많은 것이다.
헌터라고 던전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하는데, 그들과는 전혀 다른 생활을 하는 일반인들이 갑자기 생기는 자연현상에 대해 알 리가 없었다.
“그건 그렇고 이건 이상하네. 분명 악사영에서는 꽤나 강했다고 적혀있었는데..?”
던전을 향해 성큼성큼 다가간 선일이 눈앞에 있는 게이트를 바라보았다.
처음 개방될 때는 흉흉한 기운이 꽤나 강했지만 지금 보니 그리 강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어딘가 비틀린 것 같다는 이질감에 선일이 스킬까지 써가며 감각을 더욱 넓혔지만, 그럼에도 달라지는 점은 안 보였다.
결국 이질감의 정체를 알기 위해서는 던전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은 선일이 게이트 안으로 발을 집어넣었다.
***
“으으... 이 멀미는 진짜 몇 번을 겪어봐도 적응이 안 되네.”
던전을 들어올 때마다 느껴지는 구토감에 선일이 손을 머리에 가져다 대었다.
말과는 다르게 이선일의 몸은 적응을 했는지 금방 회복할 수 있었다.
눈을 뜬 선일의 앞에는 넓은 초원이 있었다.
그러나 풀의 색깔이 이상했다.
검은색.
하얀색.
두 가지 색으로만 가득한 초원.
색이 사라진 세상이라는 괴리감에도 선일은 웃었다.
“악사영에 써있던 그대로네.”
자신이 썼던 창작이 그대로 구현된 세상이었다는 점에 그는 안심할 수 있었다.
어떻게 공략을 하고, 또 어떻게 보상을 얻을지는 이미 처음 썼을 때부터 알고 있었으니까.
“그럼 천천히 가볼까?”
촤라라락!
선일은 이미 손에 끼고 있었던 황혼과 여명을 동시에 권총 형태로 변형시켰다.
평소였다면 건틀릿 형태로 전투를 들어갔겠지만 이번만큼은 예외였다.
‘이 던전을 클리어하기엔 근접 공격으로는 힘드니까.’
악사영에 나왔던 무채색의 초원.
이곳의 몬스터는 초근접인 건틀릿으로는 간단히 상대할 만한 적이 아니었다.
보스라면 모를까.
선일은 오른손으로 하늘을 향했다.
직후.
화르륵-!
방아쇠가 당겨지자 무채색의 세상에서는 볼 수 없는 황금빛과 붉은빛이 한데 섞여 회색의 하늘을 꿰뚫었다.
그리고...
“이제 깼나 보네.”
어디선가 조용하지만 불쾌한 마력이 느껴졌다.
무채색만 허용하는 세상에서 감히 주인의 허락도 없이 짙은 색을 칠했다는 것에 분노한 것일까.
저 멀리서 선일의 절반만 한 몬스터들이 달려오기 시작했다.
하나같이 색이 사라진 존재들.
그들을 향해 황혼과 여명을 조준한 선일.
타앙-!!!
이후 그의 손가락이 방아쇠를 당기며 전투의 시작을 알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