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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화
끼이익...
“윽..!”
낡은 문고리를 남은 한 손으로 힘겹게 돌리며 문을 열은 선일이 신음 소리를 내었다.
그의 손에는 스무 권이 넘는 책들이 들려있었다.
게다가 선일이 들고 있는 책들은 모두 단순한 강의서가 아니었다.
“후우...”
하나하나가 사전처럼 두꺼운 책인데다가 모든 물건들이 고대에 만들어진 유물들인지, 그가 들고 있는 책들에서는 엄청난 마력들이 느껴졌다.
고대의 물건은 현재 살아가는 헌터의 마력이 닿으면 부식하는 특성을 가지고 있었기에 선일은 이 모든 것을 마력 없이 기본적인 신체능력으로만 가져가야만 했다.
그것도 대한고의 넓은 부지중에서도 가장 외진 곳에 있는 레크라의 연구소로..!
“아니 이런 걸 왜 시키지?!”
선일은 지시를 한 레크라에게 향하는 화를 애써 누르며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젠장! 이럴 거면 조수하지 말걸! 연구소는 왜 이렇게 먼 곳에 있는 거야..!’
강의 시작 전에 레크라가 말했던 조수는 선일이 될 수 있었다.
물론 원작과 마찬가지로 하윤도 같이.
수업을 들었던 수많은 학생들 중에서 레크라가 관심을 가지고 있는 두 사람이었기에 선일은 확신할 수 있었다.
이후 주변 다른 학생들의 얼굴에서 급격한 질투와 분노를 볼 수 있는 불편한 강의가 진행되었지만 선일은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차피 다른 학생들은 될 수 없었으니까.
‘....그냥 조수 안 할걸 그랬나.’
그러나 지금은 후회해도 늦었다.
점심을 먹자마자 출발했지만 거리가 너무나 멀어 점심시간을 완전히 소비한 선일이 이를 악 물 면서 바닥에 책을 내려놓았다.
쿠웅-!
손에 든 책들을 내려놓자 마치 벽돌들을 땅바닥에 던져놓은 것 같은 소리가 났다.
처음 빙의했을 때에 비해 스텟들이 전체적으로 많이 성장했다지만 마력을 쓰지 않으니 매우 고단한 일이었다.
“후우..”
이마에 맺힌 땀을 옷소매로 닦아내자 구정물 특유의 불쾌한 끈적임이 느껴졌다.
고서들을 만지느라 온몸에 묻은 먼지들을 보며 얼굴을 찌푸린 선일.
대충 손으로 툭툭 털어낸 그가 레크라의 연구소 안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1층은 평범하네.”
그러나 선일은 알고 있었다.
지금 시야에 보이는 모든 공간이 환상이라는 것을.
선일이 조용히 눈을 감자 초현실 저항이 활성화되며 오감이 확장된다.
...덜컹.
선일은 자신의 발아래에서 매우 미세한 기척을 느낄 수 있었다.
조금씩 꿈틀거리는 것이 생명체와 비슷했지만 그 존재를 느낀 선일은 속이 역겨워졌다.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저 아래에 있는 것은 생명체 따위가 아니다.
온갖 오물들을 모아다가 합쳐버린 쓰레기.
아니, 폐기물이라고 말해도 모자랄 정도로 불결한 존재!
‘이 시기에는 아직 완성품 마체병기들은 없을 때니까...’
아마도 저 아래에 있는 역한 존재는 연구자인 레크라가 만든 마체병기의 프로토타입 버전.
하윤의 씨앗을 개화시키고 싶어 했던 레크라가 마체 병기를 현장학습 에피소드에 내보냈었기에 톡톡히 기억하고 있다.
‘...내가 생각한 전개지만 진짜 잔인하게 써놨네.’
다행히 현장학습에 같이 따라갔던 엘레나가 뒤늦게 처리했지만 하윤은 다행히 아니었다.
마체병기에게서 다른 사람들을 지키려다가 악마의 힘을 약간이나마 사용했고, 아무리 악마에 대해 자세히 모르는 학생들이라도 그녀가 다루는 불꽃의 불길함은 느낄 수 있었다.
이후 그녀를 향한 따돌림은 더더욱 심해져 씨앗이 발아하는 속도가 빨라지면서 중간고사 때 폭주하는 전개가 시작된다.
촤라락.
원작을 다시금 확인한 선일의 머릿속에서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만약.
‘내가 여기서 마체병기를 없애버린다면...?’
생각을 하는 선일은 조용히 마력을 일으켰다.
여전히 온몸은 아팠지만 그래도 대부분 회복된 상태였다.
인벤토리에는 APX 물약도 아직 남아있었고, 주변 사람들이 공격을 인지하지 못하는 비장의 한발의 쿨타임도 완전히 끝났다.
게다가 오늘 수업이 끝나고 학교 밖에 있는 던전에 갈 예정이었기 때문에 여명과 황혼에도 각각 마력을 충전해놨다.
‘퍼센트로 따지면 약 90퍼센트 정도?’
완벽이라고는 말할 수 없지만 그래도 만전에 가까운 상태.
완성되면 트롤과 같은 회복력과 골렘 정도의 단단함을 가지고 있는 마체병기이지만...
‘아직 부족한 점이 많은 프로토타입이라면.’
이 정도로도 충분하다.
츠으으...
그러나 선일은 마력을 거둬들였다.
여명에 내장된 스킬인 [프로미넌스 레이]의 파괴력은 연습실 안을 부숴버릴 정도로 강하다.
시련에 들어갈 때보다 더욱 많은 마력을 충전시켜놓은 현재의 여명은 더더욱 강할 것이다.
거센 후폭풍은 반드시 일어날 것이고, 연구소를 들른 이는 조수인 자신밖에 없다는 것을 레크라는 알 것이다.
‘...참자.’
선일이 반 정도 변한 여명을 장갑으로 다시 변형시키던 그때.
“어머 다 가져왔구나?”
섬뜩.
끈적한 목소리와 함께 농익은 마기가 느껴졌다.
어느새 선일의 뒤에 서있는 레크라.
아무렇지 않은 듯 부드러운 미소를 지은 후, 몸을 돌린 선일이 입을 열었다.
“선생님 오셨어요?”
‘아무런 기척도 느끼지 못했는데?!’
속으로는 힘겹게 평정을 유지하는 선일이었지만, 그럼에도 표정으로 들킬 일은 없었다.
다만 걱정되는 것은 레크라가 자신의 마력을 느꼈다는 점이었다.
그러나 선일의 걱정과 다르게 그녀는 자신이 시킨 일을 완수한 그를 향해 기특하다는 표정을 지었을 뿐이다.
“무거웠지?”
“조금요.”
선일은 어깨를 으쓱이며 그녀의 말에 여유롭게 대답했다.
그런 그를 바라보며 알 수 없는 눈빛을 지은 레크라가 다시금 목소리를 내었다.
“다행이네. 근데 마지막에 마력이 느껴졌는데. 어떻게 된 거니?”
젠장.
선일은 속으로 욕지거리를 뱉었다.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최소한의 마력만 일으켰지만, 그럼에도 추기경인 그녀의 감각을 무시하지 못했다.
1초가 1시간처럼 지나가는 순간에 선일은 자신이 가져왔던 책 방향으로 눈을 흘겼다.
“사실 저 책들을 들고 온 다음에 손에서 이상한 기운이 느껴져서요.”
“으흠 그래?”
짙은 콧소리와 함께 그녀의 눈빛이 의문으로 바뀌었을 때, 선일은 여전히 웃음을 유지하고 있을 뿐이었다.
선일의 표정에서 아무것도 읽어내지 못한 레크라가 대답했다.
“이게 조금 위험한 책들이라서 내가 코팅해놨는데, 그걸 느꼈나 보구나.”
“아 그런가요?”
그런 위험한 책을 맨몸으로 옮겨라고 한 점에서 레크라가 자신을 실험했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티는 내지 않았다.
이어서 워치가 12시 50분을 알려주자 선일이 자연스레 말했다.
“선생님, 일 다 했으면 가봐도 될까요? 옷을 갈아입어야 할 것 같아서.”
레크라가 선일의 몸으로 시선을 내리자 그가 입고 있는 옷이 거무칙칙한 먼지들이 잔뜩 묻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가 고서들에 쳐놨던 결계들을 느꼈다는 점에서 지금 당장이라도 온갖 실험을 하고 싶었지만, 학교 안에는 아무리 그녀여도 감당하기 힘든 사람들이 있었기에 조용히 있어야 했다.
결국 아쉬움과 지식욕에 대한 본능을 이성으로 누른 레크라가 외투의 주머니를 펄럭였다.
“어어 그럼. 얼른 들어가고 나중에 필요할 때 부를게.”
“알겠습니다.”
공손한 인사 후 문밖으로 멀어지는 선일의 뒷모습을 보며 그녀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근데 도대체 어떻게 내 결계를 꿰뚫은 거지?”
***
“이선일. 예비 헌터라는 놈이 시간 준수도 똑바로 못하나.”
“아... 레크라 선생님이 시키신 일이 있어가지고...”
“변명하지 마라!”
체술 수업의 교사가 질책하자 선일은 그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그 모습을 보며 교사가 멸시하는 눈빛을 띠며 중얼거렸다.
“이러니까 쓰레기 소리를 듣지.”
말이 중얼거렸다지, 뒤에 있는 다른 학생들에게도 다 들릴 정도로 큰 목소리였다.
“큭큭.”
“병X 자식.”
“쟤가 무슨 천검이가야. 검도 안 쓰고, 권술도 잘 못하는데.”
저 멀리에서 교사의 말을 들은 학생들이 비웃음을 짓자 선일의 입가에 쓴웃음이 지어졌다.
따돌림은 일부러 자신이 유도한 것이었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듣기 거북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만일 자신이 악사영을 썼던 중학생 때였다면 저런 욕을 절대 참지 못했을 테지만, 지금은 그것보다도 생존이 중요했다.
선일이 불편해 보이는 혀를 차는 교사에게 한 번 더 고개를 숙이려는 순간.
“배우는 학생들에게 험한 말을 하는 쓰레기는 당신 같군.”
교사의 뒤에서 천천히 누군가가 다가왔다.
“뭐라고?!”
순간 발끈한 강채산이 고개를 돌려 목소리의 주인을 확인한 순간, 그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리기 시작했다.
“헉! 성강 교관님?!”
“강채산 교사, 대한고를 다니는 교사 중 누구도 학생들을 보며 쓰레기라고 말하지 않네. 그게 왜인 줄 아는가?”
“...”
강채산은 말이 없었다.
뒤에 있는 학생들 또한 화를 직접적으로 맞는 것도 아니면서 입을 다물었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쿠구구궁...!
성강에게서 범접할 수 없는 강자의 격이 느껴져서.
거대한 격에 뒷걸음질 치는 강채산을 보며 성강이 무거운 입을 열었다.
“배우는 사람이 쓰레기가 되면...”
그 이유는 가르침을 내려주는 사람에게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성강의 말을 들은 선일이 순간 숨을 삼켰다.
그의 몸에서 퍼져 나오는 무거운 마력이 분노를 동반하며 터져 나왔기 때문이다.
선일이 거대한 기세를 그대로 느끼며 감탄하고 있었을 때, 단전이 저릿거렸다.
“윽.”
거의 다 나았다고 하지만, 아직 완전히 회복된 것은 아니었다.
그에게서 등을 돌리고 있었던 성강도 그것을 느낀 것인지 성강은 조용히 마력을 거둬들였다.
“강채산 교사, 내 말 똑똑히 기억하고 계시오.”
“예예...”
“이선일, 너는 나를 따라와라.”
“...네.”
저벅저벅....
이후 체육관을 빠져나온 둘은 복도를 걸었다.
앞에는 성강이, 뒤에는 선일이.
두 사람은 적당한 간격을 유지하면서 끝까지 걸었고, 곧 굳게 닫혀있는 문 앞에 도달할 수 있었다.
“들어가라.”
철컥.
성강이 뱉은 말이 트리거였는지, 철문의 손잡이에서 잠금이 풀리는 소리가 들렸다.
조용히 문을 밀며 들어간 선일의 눈앞에 처음 보는 공간이 들어왔다.
거의 축구장 만한 체육관.
그 면적의 4분의 1 정도 되는 평평한 바닥과 벽면에 그려져있는 수많은 마법진들.
원작자인 선일은 체육관에 이런 공간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성강이 직접 만든 수련실.’
성강의 총애를 받은 이선월이 사용했던 수련장.
적어도 A급 중에서도 최상급 헌터들이 하는 공격도 쉽게 버티고, 또한 수련을 하는 헌터들의 체력과 회복력이 이곳에서는 배 이상으로 증가한다.
대한고에서도 유일하게 엘레나와 그만이 알고 있는 공간에 자신을 데려왔다는 것이 무슨 의미일까.
선일이 갑작스러운 성강의 행동을 추측하려던 때.
고오오...
육감이 경고했다.
피해야 한다고.
타앗!
선일은 망설이지 않았다.
곧바로 적양권의 보법을 밟으며 성강으로부터 벗어난 선일.
이후 뒤를 바라본 선일의 표정이 눈에 띄게 달라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