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
39화
띠링!
마치 뭔가를 알려주는 듯한 이상한 기계음이 들렸다.
감은 눈 틈 사이로 빛이 새어 들어온다.
나는 내 얼굴을 비추는 빛이 어떤 색깔인지 정확히 알 수 있었다.
어디선가 본 적 있는 익숙한 푸른색.
옷을 이루는 재질처럼 선명한 색이 아니다.
그렇다고 물, 얼음, 달과 같은 청명한 푸른색도 아니었다.
마치 노트북 파일이나 익숙한 펜과 같은 인조적인 느낌이 드는 푸른색.
“으음...”
입에서 어리광처럼 튀어나온 신음소리와 함께 소년은 몸을 일으켰다.
무의식적으로 시계보다 창문을 바라보니 따스한 주홍빛의 노을과 어두운 남색 하늘이 뒤섞여 선명한 보랏빛을 자아냈다.
달은 문을 열고.
해는 지고 있었다.
‘언제 잠들었지.’
“...하암.”
소년은 하품을 지었다.
책상에는 고풍스러운 고서들이 놓여 있었다.
어딘지 모르게 불길한 책들에게서 눈길을 돌린 소년.
‘저기에 노트북이 있었나?’
화려한 방과는 어울리지 않는 낡은 노트북.
그래서 그런 건지 아니면 너무나 익숙한 느낌이 들어서 그런 건지.
소년은 노트북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결국 그는 검은 화면으로 차있는 노트북 전원을 켜기 위해 책상으로 몸을 움직였다.
그 순간.
끼에엑!!!
“끄윽!”
소년은 무릎을 꿇었다.
온몸이 극심하게 떨렸다.
방금 그 소름끼치는 기운.
아니.
고작 나 따위가 기운이라고 평할 수 있을까.
축복을 받은 헌터나 여러 능력이 있는 이종족은 절대로 낼 수 없는 사악한 기운.
그렇다고 몬스터라고 하기에는 온몸에 퍼져있는 신경과 세포가 공포를 자아내는 강대한 힘.
삐빅!
몸의 떨림이 멈추지 않았지만 소년은 주머니 안에 들어있는 핸드폰을 꺼냈다.
“...이건 긴급 문자?”
전쟁이나 천상급 이상의 게이트가 출몰하는 경우 같은 재앙 상황일 때, 전국의 핸드폰은 동시에 울린다.
마력이 없는 일반인을 대피시키기 위해, 힘을 가진 헌터들에게는 지원을 요청하는 알림.
선일은 계속해서 울리는 문자의 내용을 확인했다.
-현재 서울 광화문에 악마숭배자에 의한 테러가 일어났습니다. 일반인들은 대피를, A급 이상의 헌터들은 최대한 빠른 지원 바랍니다.-
“뭐..?”
서울에는 수많은 사람이 살아간다.
평범하게 회사와 학교를 다니는 일반인들이 다수이긴 하지만, 적어도 서울 인구의 40퍼센트는 마력을 다룰 수 있는 헌터였다.
게다가 서울은.
‘세계 5대 가문 중 하나인 천검이가랑 마탑인 파도탑, 그리고 멸악의 가문이 있는 곳일 텐데? 게다가 지원의 정도도 이상하게 커.’
소년은 이해를 할 수 없었다.
교단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악마숭배자들이라고 해봐도 지옥 입구에 발을 들이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서울에 테러를 했다는 점.
그리고 A급 헌터 같은 베테랑들의 지원이 필요하다는 점.
아무리 봐도 이해할 수 없는 문자 이후에도 긴급 문자는 이어졌다.
-현재 악마숭배자에 의한 테러로 서울 광화문에 등급을 알 수 없는 몬스터가 소환되었습니다. S급 이상의 헌터들은 최대한 빠른 지원을 요청합니다.-
“뭐..?”
설마 방금 그 기운이 몬스터인건가?
얼굴이 새하얘진 소년.
그 순간, 소년의 방 밖에서 남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협회에서 지원 요청이 왔으니 나가야 하오. 부인.”
“이번엔 조심하십시오. 가주 상황이 심상치 않아 보입니다.”
대화에 이끌려 좁은 문 틈 사이로 눈을 가져다댄 소년은 앞에 서있는 부부를 볼 수 있었다.
한복과 비슷한 단정한 옷차림의 여자와 그 앞에서 검은 도복을 입고 동양식의 장검을 허리춤에 찬 남자.
살벌한 복장과는 별개로 아내를 포근하게 껴안은 남자가 다시금 입을 열었다.
“나는 괜찮으니 부인은 선월, 선일과 함께 몸을 안전히 보호하시오.”
아내를 따뜻한 눈빛으로 바라본 남자.
그런 천검을 누군가가 불렀다.
“대장 가셔야합니다. 저와 대장을 제외한 다른 [진격]의 인원들은 전부 모였다고 합니다.”
진격은 과거 천검이 속했던 공격대였다.
진격의 속한 인물들은 모두 현 시대의 천검, 파도탑주, 멸악의 가주 그리고 5대 가문 중 하나인 귀창청가의 가주.
현재 세계에 막대한 영향력을 펼치고 있는 강자들의 젊은 시절을 보냈던 공격대였으나 약 15년 전에 해체된 집단이었다.
지금 오는 긴급 문자가 그들의 지원이 필요할 만큼 심각한 상황이라는 것을 소년은 깨달았다. 문 안에서 느껴지는 자신의 아들이 불안해하자 천검은 누군가를 강하게 불렀다.
“성강!”
그의 말에 성강이라는 사내는 천검이라 불린 남자의 뒤쪽에서 천천히 걸어 나왔다.
건틀릿이라고 하던가.
주먹에 거대한 쇠장갑을 장착하고, 온몸에서는 꽤나 강한 마력이 느껴지는 아티팩트를 착용한 사내가 고개를 가볍게 숙였다.
“예 대장. 말씀하십시오.”
“이번 한 번만 내 아들들과 아내를 지켜줄 수 있겠는가.”
천검의 목소리는 누구보다 단단했지만, 소년은 그 속에 아주 작게 느껴지는 불안감을 찾을 수 있었다.
그러나 성강은 그런 천검의 감정을 알지 못하는지 낮은 목소리로 그 말에 대답했다.
“저도 이번 상황에는 빠지면 안 될 것 같습니다만.”
“친우로써 부탁일세.”
멈칫.
성강의 얼굴이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변했다.
소년은 그 표정의 의미를 알아챌 수 있었다.
‘왜 당황한 거지?’
“천야씨 진심으로 하는 말입니까?”
친우라는 이야기가 나오자 성강은 천검을 대하는 태도가 바뀌었다.
마치 그 태도를 미리 알고 있었던 것처럼 천검은 슬며시 미소 지었다.
“성강 자네도 느끼겠지만 이번 적은 미개척지를 먹은 터주보다 훨씬 이상이네. 적어도 천상급에서도 최고, 아니 연옥급일 수도 있지. 아마 생사를 넘나들 수도 있네.”
“...”
“내 삶이 이곳에서 꺾일 것이라고는 생각하지는 않지만 혹시 모르니 적어도 내 가족은 지켜야하지 않겠는가?”
“천야씨...”
소탈하게 말하는 천검의 눈에 비치는 단호한 감정을 눈치 챈 성강.
그는 결국 자신의 우상이자 동료에게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알겠습니다.”
“고맙네.”
모든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소년의 눈은 의문으로 가득했다.
이 날은 과거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았다.
마치 직접 겪었던 것처럼 너무나 선명하고 익숙했기에.
그러나 한편으론 마치 처음 보는 영화의 한 장면처럼 낯설었다.
익숙하다는 감정.
낯설다는 감정.
정반대되는 감정이 공존하자 소년이 조용히 중얼거렸다.
“난 이런 장면을 쓴 적이 없었는데...?”
흠칫!
소년은 소름이 돋았다.
애초에 나는 왜 글을 썼다고 생각한 거지?
이질감.
모든 생각이 이질감이고.
그를 감싼 세계가 이질적이다.
소년의 시야가 어그러지며 세상이 일그러졌다.
인간은 이해할 수 없는 지식을 들은 것처럼 머리를 가득 채운 통증.
이상하게도 소년은 이 고통이 너무나 익숙하게 느껴졌다.
“끄윽..!”
그럼에도 참지 못한 소년의 입에서 비명이 터지려하는 순간.
[이제 그만 일어나라.]
익숙한 텍스트가 소년의 눈 안에 푸른빛으로 튀었다.
***
“으윽..”
감은 눈틈 사이로 들어온 밝은 빛이 휴식을 방해했다.
희미하게 눈을 뜬 선일은 처음 빙의했던 때처럼 푹신한 침대에 누워있었다.
상체를 힘들게 일으킨 그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보건실은 아닌 것 같은데.”
왼팔에 꽂혀있는 링거 줄을 조심스럽게 정리한 선일.
은은하게 코를 찌르는 여러 약물 냄새와 푹신한 침대, 그리고 새하얀 천장을 보면 순간 대한고 내부에 있는 보건실로 착각할 수 있겠지만, 양옆에 가림막이 쳐져있던 보건실과는 달리 선일이 누워있는 곳은 작은 방이었다.
빙의 첫 날과 같이 자신이 있는 장소에 대한 의문이 드는 순간, 문 밖에서 각기 다른 사람의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일어났어?”
“괜찮아요?!”
방 안으로 들어온 사람은 하윤과 유리였다.
두 사람 다 당황과 걱정, 그리고 기쁨이 섞여있는 미묘한 표정에 선일은 남에겐 보이지 않을 만큼 희미한 쓴웃음을 지었다.
‘많이 걱정했나보네.’
“난 괜찮아. 근데 여긴 어디야?”
“단군병원. 한국헌터협회에서 운영하는 병원이야.”
대답을 한 뒤 깊은 한숨을 지은 유리의 뒤쪽에서 하윤이 화를 내기 시작했다.
“왜 이렇게 무리를 해요!”
선일은 당황했다.
자신의 행동이 두 사람을 걱정하게 만들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표정변화가 거의 없는 하윤조차 저렇게 격한 반응을 보일 정도라면 말 다했다.
선일은 곧장 다가온 두 사람에게 미안하다는 감정이 느껴지는 웃음을 지어주자 두 소녀의 얼굴에 작은 화가 느껴졌다.
“시련이 어려우면 적당히 포기해도 되는데 왜 이렇게 걱정을 하게 만드냐!”
“그러니까요. 아무리 시련이라도 그렇지. 제발 무리 좀 하지 마요 선일씨!”
“하하... 미안.”
두 사람은 자신이 마인과 싸웠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는 것 같았다.
‘다행이다.’
그가 생각했던 최악의 상황은 교단의 자객을 죽였다는 사실이 밝혀져 그놈들에게 표적이 되는 것이었다.
다행히도 이번 에피소드를 끝내면서 제일 걱정했던 상황을 피했다는 사실에 안심한 선일은 한숨을 쉬었다.
동시에.
욱씬!
단전과 심장을 동시에 커다란 송곳으로 찌르는 고통에 선일의 얼굴이 찡그러졌다.
그를 바라보고 있던 소녀들은 그 모습을 바라보며 다시 걱정 어린 표정을 지었다.
하윤이 입을 열었다.
“의사 선생님이 며칠은 무리하지 말고 휴식을 취하래요. 마력 과부화에다가 온몸의 근육이 안 찢어진 곳이 없다고 했어요.”
“후우 괜찮아. 그건 그렇고 나 몇 시간이나 잤어?”
여전히 아프긴 해도 시련에서 성지연과 싸웠을 때보다 몸이 한결 편해진 상태였다.
평범하게 묻는 선일의 질문에 유리의 입에서 한숨이 나왔다.
“시련은 어제 끝났어.”
“..내가 하루 동안 잤다고?”
“응. 그리고 꽤나 큰 사건이 있었어.”
큰 사건이라는 단어를 언급하는 유리의 표정에는 음영이 짙게 졌다.
하루 동안 정신을 잃고 있어 무슨 일인지 알 수 없었음에도 선일은 그녀가 말한 큰 사건이 무엇인지를 직감했다.
악사영의 작가였기에 모를 수가 없었다.
‘이번 일로 대한고 내부에 있는 색욕의 마인들은 대부분 색출 당했나보네.’
“무슨 사건인데?”
“시련에 들어온 두 명이 악마숭배자였대. 선생님들 말고도 한 명 더 있었잖아. 그 사람하고 우리 반 성지연.”
선일은 처음 듣는 정보인 것처럼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진짜?”
“응. 그래도 다행히 그 사람은 죽었고 정신을 잃은 성지연은 단전의 마기를 폐쇄한 채 선월이가 끌고 왔더라.”
“...뭐?”
이건 진짜 처음 듣는 정보였다.
‘이선월이 성지연을 살렸다고?’
원작에서 선월은 가차 없이 성지연을 죽였다.
그는 자신을 위협하는 인물의 후환을 남겨두지 않는다.
그런 선월의 차갑고 뒤가 없는 성격 때문에 선일이 썼던 소설의 제목이 [악당보다 사악한 영웅님]이 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
‘설마 원작과 세상이 조금씩 다른 것처럼 이선월도 조금씩 달라지는 건가?’
“선일씨? 아직도 아파요?”
잠시 멍을 때렸는지 옆에서 하윤이 어딘가 불안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았다.
“어?”
“갑자기 멍 때리시길래.”
“잠깐 다른 생각하느라 그랬어.”
“힘들면 우리 갈게.”
“아냐, 아냐. 괜찮아.”
선일을 앞에 두고 걱정스러운 눈빛을 한 차례 교환한 유리와 하윤.
결국 같은 생각을 했는지 두 사람은 한숨을 푹 내쉬고 말을 이어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