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
36화
“생각했던 것보다는 쉽군.”
나지막이 중얼거린 선월이 손아귀에 힘을 빼며 마력을 거뒀다.
선월의 옷은 처음 시련에 들어왔을 때처럼 똑같이 말끔했지만 그가 지나온 길 뒤쪽에는 꽤 많은 양의 몬스터 사체들이 널려있었다.
차가운 눈으로 몬스터의 시체들을 한 번 바라본 선월은 애검인 달미르를 가볍게 내려쳤다.
촤악!
날에 묻어있던 거무죽죽하고 끈적거리는 몬스터의 피를 털어내자 달미르가 한순간 들어났다.
사냥할 때는 검기를 사용해서 그런지, 평소에 차가운 은빛을 자아내는 아름다운 검날은 보기만 해도 서늘해지는 푸른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선월(僊月).
춤추는 달이라는 뜻처럼 그가 각성한 마력의 속성은 달이었다.
스릉...
철컥.
환도에 담겨있던 마력이 서서히 허공으로 사라지자 선월은 곧바로 달미르를 검집에 집어넣었다.
“어차피 더 이상 기척은 느껴지지 않으니 상관없겠지.”
혼잣말을 뱉은 뒤 천천히 발을 옮기는 선월.
전부 비슷비슷해 보이는 나무 때문에 미로 같은 시련이었지만.
‘어째선지 내가 가야할 곳은 알 수 있는 것 같군.’
이질적인 목소리가 말했던 초월이라는 것 때문인가.
여러 가지 의문이 들었지만 선월은 하나도 의식하지 않았다.
그저 본능이 시키는 대로 몸을 움직이고, 검을 휘두르는 것에만 집중할 뿐이다.
멈칫..!
선월은 순간 움직임을 멈췄다.
동시에.
슈화악-!
방금 전에 집어넣었던 달미르를 뽑으며 몸을 돌렸다.
무언가를 느낀 걸까.
선월은 곧바로 서있던 자리와는 멀리 떨어져있는 한 나무를 향해 달미르를 겨눴다.
이어서 그는 청명한 마력과 대조되는 낮은 목소리를 뱉었다.
“나와라.”
자신의 뒤를 조금씩 쫓아오고 있던 누군가를 향해서 살기까지 내뿜는 선월.
목을 조여 오는 진득한 살기에 추격자는 나무 뒤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그렇게 몸을 숨기고 있던 인물은 선월의 눈엔 너무나 익숙한 얼굴이었다.
“....성지연.”
“선월아 칼 내려주면 안됑?”
“가까이 오지마라.”
평소처럼 애교를 부리며 다가오는 성지연.
그런 그녀를 차가운 눈으로 바라보던 선월은 달의 마력을 점차 끌어올렸다.
소름이 돋을 정도로 날카로운 달미르의 칼날보다 훨씬 서늘한 분위기를 내뿜는 선월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시련에 처음 들어왔을 때 들었던 말을 기억할 테지.”
“우웅?”
“분명 목소리는 각자의 시험이라 했다.”
“그게 왜앵? 다 끝나구 네 마력이 느껴져서 일루 왔는뎅?”
성지연은 선월의 말이 하나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처럼 고개를 까딱거렸다.
평소와 같은 반응.
그러나 선월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언젠가 가문의 어른들께 시련에 대해 들었었다. 각자의 시험은 실패하든 성공하든 이후에는 다른 이와의 접촉 없이 다시 입구로 돌아온다고.”
선월의 차가운 말투에 생글거리는 성지연의 미소가 굳었다.
그러나 말은 끝나지 않았다.
“게다가 지금 너한테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
조용히 마력을 달미르로 불어넣는 선월이 강하게 이를 깨물었다.
으득...!
“단 한 번 느껴본 적이 있다. 2년 전이었지만 톡톡히 기억한다. 이 어두운 기운.”
한 손으로 잡고 있었던 달미르를 양손으로 쥐며 제대로 자세를 취한 선월.
곧장 전투를 시작할 것 같은 그의 모습에 성지연은 고개를 숙인 채 조용히 한숨을 쉬었다.
직후.
선월은 그녀에 대한 생각을 정리하며 선언했다.
“성지연 너는.”
마인이다.
짧지만 강렬한 말을 뱉은 선월은 천천히 달미르의 손잡이를 머리 옆에 위치시켰다.
마치 리히테나워 검술의 옥스와 비슷한 자세.
저 몸짓이 선월이 주로 선공을 취할 때 이루는 자세인 것을 알고 있었음에도 성지연은 기분 나쁘게 웃기 시작했다.
“쿡쿡쿡쿡...”
슈화악...!
동시에 심장에서 이동시킨 마기를 오른손에서 뿜어내기 시작한 성지연.
고개를 들은 그녀의 얼굴은 기분 나쁜 웃음과 함께 어딘가 맛이 간 듯한 눈빛을 지었다.
“검 말고는 그 어떤 물건이나 연애에도 관심이 없어 보이더니 그런 사소한 정보는 기억하네에? 질투 나게.”
원작자인 강선일이 그녀를 미친년이라 한 이유.
악사영에서도 색욕의 마인들은 모두 아름다운 외모를 가진 인간들을 보면 극심한 소유욕을 느끼기 때문.
그 정도가 어느 정도냐며...
“널 죽이는 일은 꼭 지연이가 하고 싶었는데... 이제야 이루어지넹?”
그들은 자신의 목표물의 목숨이 사라지는 그 광경까지 눈에 담고 싶어 할 만큼 엽기적이다.
“...”
그러나 소름 돋는 성지연의 속내를 선월은 알지 못했다.
오직 검으로 자신의 적을 구축하려 기세를 끌어올리는 중이었다.
“하아...”
성지연이 끈적끈적한 숨결을 뱉었다.
귀염상인 그녀가 보이는 요염한 모습은 주변에 만약 사내들이 있었다면 모조리 홀렸을 정도로 매혹적이었지만, 선월의 마음을 움직일 수는 없었다.
“후우...”
선월이 깊은 숨을 내쉬며 집중하자 달미르의 날에 차갑게 벼린 달의 마력이 조금씩 모습을 드러냈다.
하지만 성지연은 시릴 정도로 푸르게 맺힌 검날을 보고 마치 진미를 기다리는 것처럼 혀로 입술을 핥았다.
그런 인간 같지도 않은 모습은 감정을 잘 느끼지 못하는 선월에게도 소름이 돋을 정도!
말하거나 표현하지 않아도 선월이 자신을 경멸한다는 것을 깨달은 성지연은 더 이상 참기 힘든지 곧장.
“지연이가 먼저 갈겡?”
“..!”
순식간에 거리를 좁혔다.
마인의 신체능력이 같은 등급의 헌터보다 훨씬 우세한 것을 알고 있었기에 선월은 다행히 반응
했다.
까앙!!
선월은 왼쪽에서 날아오는 성지연의 손톱을 막을 수 있었다.
마기로 인해 길어진 손톱은 달미르와 정확히 맞닿아도 부러지지 않을 만큼 단단했다.
그렇게 막아낸 손톱을 곧장 튕겨낸 선월.
중앙이 열린 틈을 타 역공을 취하려는 순간.
“히힛.”
스카아악!!!!!!
선월의 검은 한 자루였지만.
성지연의 손은 두 개였다.
“칫.”
상처를 짧게 바라본 선월이 혀를 찼다.
오른쪽 옆구리에서 새어나오는 붉은 피.
베이는 타이밍에 맞춰 반사적으로 몸을 틀었기에 깊은 상처는 입지 않았지만.
‘...마력이 조금씩 움츠러드는군.’
상처에 잔향처럼 남아있는 마기 때문인지 선월은 몸이 잘 움직이지 않는 것 같았다.
게다가 조금씩 시야와 정신이 흐려지는 것 같았다.
‘마기의 효과인가.’
처음 보는 마인의 능력을 정확히 파악해야한다.
꽤나 어려운 생각을 하며 처음 살기와는 달리 회피나 방어에만 집중하는 선월을 보면서 성지연이 소름 끼치는 웃음소리를 내었다.
“키키키킥! 몸이 잘 움직이지 않지이?”
“닥쳐라.”
차갑게 대꾸한 선월이 마력의 출력을 더더욱 늘렸다.
상처에서도 마력이 새어나가는 것을 느꼈기에 기회가 올 때, 최대한 빠르게 처리해야한다.
“히힛! 죽어!”
성지연이 손톱을 크게 휘둘렀다.
맞으면 확실히 죽음을 맞이할 테지만.
‘큰 기술에는 그만큼 틈이 있다.’
우웅.
심장에서 푸른 달빛이 새어나온다.
이어서 달빛이 달미르의 날에 덧씌워지자 선월이 자연스레 왼발을 앞으로 뻗었다.
쿵.
작은 진각이 울리며 왼손의 힘을 뺀다.
그리고 반대로 오른손을 강하게 쥐면서 달미르의 날을 아래로 떨어뜨렸다.
“후우..”
작은 호흡 안에 느껴지는 마력.
푸른빛이 흘러나오는 밝은 냉기에도 성지연의 얼굴은 너무나 태연했다.
그녀가 무언가를 노린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선월도 신경 쓰지 않았다.
‘백천창월류 우수식(右手式).’
자신이 행하는 검은 그런 시답잖은 수작으로는 막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
그저 적을 구축할 뿐이다.
‘초승달 베기..!’
초식이 완성된 순간.
창월이란 말처럼 푸른 달이 검에서 빛난다.
슈욱...!
악마의 검은 손톱이 소년의 목에 닿으려는 순간.
서걱.
차가운 죽음이 아래에서 위로 쏘아졌다.
“어라?”
싸늘한 무언가가 자신을 스쳐가자 성지연이 급하게 뒤를 돌았다.
어느 샌가 뒤에서 자리를 잡고 있는 선월.
그가 손에 든 달미르를 검집에 집어넣은 순간.
푸화악-!!!
“꺄악..!”
성지연의 목에서 피분수가 쏟아져 나왔다.
마인이라 해도 헌터와 거의 동일한 신체기관을 갖고 있었기에 동맥을 베인 순간, 성지연의 목숨은 잎새와도 같았다.
해가 사라진 밤에는 사그라지는 잎새처럼.
달빛을 받은 그녀의 숨소리는 조금씩 잦아져간다.
“....월앙 살...줘.”
목소리가 희미해진다.
이제는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할 정도로 숨을 쉬지를 못한다.
애처롭게 생명을 갈구하는 악마.
사람을 구해야한다는 천륜을 버린 이를 향해 선월은 더없이 차갑게 죽음을 선고했다.
“조용히 죽어라.”
숲을 울리는 목소리와 동시에 숨소리가 끊겼다.
어쩌면 처음으로 사람을 죽이는 일이었지만 선월의 심장은 하나도 무겁지 않았다.
저 소녀가 마인이라는 것을 깨달은 순간부터 이미 인간취급을 하지 않았기 때문일까.
아니면.
자신이 어딘가 비틀려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 때문일까.
‘내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군.’
그런 생각을 했다는 사실을 깨달은 순간 선월은 자각했다.
무겁지 않은 것이 아니었다.
그저.
무겁지 않다고 착각한 것이었다.
‘...젠장.’
평소라면 이런 감정소모 따위는 하지 않을 텐데.
‘아직 부족하군.’
그는 주머니에서 작은 고무 끈을 꺼냈다.
이어서 어깨 아래로 내려온 긴 흑발을 질끈 묶은 선월.
발걸음을 옮겼을 때, 순간 자신의 시야가 흐릿했다.
“피는 진작 멎었을 텐데.”
그리 많은 양의 피를 흘린 것도 아닌데 현기증을 느낀다는 점이 이상했지만 선월은 애써 정신을 잡았다.
이질감이 느껴지는 것 같지만…….
한편으로는 여전히 같은 공간 속인 것 같았다.
“그냥 빨리 빌어먹을 시련을 끝내야겠군.”
***
소름끼치는 웃음소리가 숲을 울렸다.
“킥킥킥킥! 아 너무 재밌엉!”
성지연은 살아있었다.
그것도 아주 멀쩡한 상태로 말이다.
핥짝.
그녀는 마기로 이루어진 손톱에 묻은 피를 핥았다.
“으음..! 역시 선월이 피는 너무 맛있어...”
피에서 느껴지는 달콤함과 마력 특유의 씁쓸함.
게다가 달 속성이라는 특이함에서 나오는 풍미까지.
어쩌면 마인이 아닌 뱀파이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선월의 피를 맛본 성지연은 행복함에 몸서리쳤다.
이어서 마인의 세포를 고양시키는 흥분감에 거친 숨을 내쉬던 성지연이 자신의 앞에 서있는 선월에게 다가갔다.
“하아하아... 그 차갑던 선월이가 지연이한테 미안해하다니... 너무 좋앙...”
선월의 옆구리에 처음 상처를 입힌 순간, 성지연은 곧바로 능력을 발동했다.
색욕의 마인은 그들이 맘에 드는 대상을 죽이기 위해, 환상을 보여준다고 한다.
나태의 그림자나 탐욕의 보석처럼 전투력이 뛰어나지는 않지만.
일곱 종류의 마인들 중에서는 가장 활용도가 높은 능력!
성지연은 선월의 흐릿한 눈동자를 바라보며 그의 뺨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고양감에 얼굴에 홍조를 띄운 그녀는 조금씩 선월의 손목에 날카로운 마기를 갖다 댔다.
“진짜 이때가 가장 좋앙. 저 공허한 눈빛... 환상 속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저 얼굴일 때.”
그럴 때 지연이는 가장 행복해!!!!!!!!
...스카악!
그대로 검을 든 선월의 손목을 자르기 위해 성지연이 손을 하늘 높이 들어 올린 순간.
깊은 숲 안쪽에서 소년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 손 치워.”
어딘가 선월하고 비슷한 목소리.
감정을 거의 내비치지 않는 선월에 비해 훨씬 부드럽고 따스한 목소리였다.
분명 직전에 들었던 목소리에 잠시 성지연의 움직임이 멈춘 순간.
타앙!
푸른 달과는 전혀 다른.
콰자작-!!!!!!!!
작은 태양이 그녀의 마기를 분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