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
33화
“워치는 다 받았지? 그럼 여기를 봐봐.”
정호찬은 말을 하며 손목에 있는 자신의 워치를 손으로 툭툭 건드렸다.
그 손짓에 맞춰 앞에 서있던 학생들의 눈이 모두 자신에게 향하자 정호찬은 마력을 일으켰다.
“으차.”
거대한 바다를 연상하게 만드는 짙은 푸른색 마력.
소심한 정호찬이 가지고 있는 마력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한 인상 깊은 색이었다.
‘생각해보면 파도탑의 직계 제자니까 당연한가?’
“일단은 마력을 일으켜서 워치에다가 흘려보내봐.”
정호찬의 말대로 선일은 마력을 일으켰다.
아주 적은 양의 마력이 워치에 빨려들어가자 설계자의 기계음과 비슷한 소리가 나왔.
띠링!
워치의 화면에는 이런 문장이 떠올라 있었다.
-사용자 등록이 완료되었습니다.-
‘신기하네.’
글로 썼을 때는 그닥 체감이 되지 않았지만 직접 눈으로 보게되니 신기하기 짝이 없었다.
마력을 동력원으로 사용해 미개척지대나 던전 안에서도 사용이 가능하는 기계.
편리한 기계였지만 마력을 차단하면 사용이 불가능한 약점이 있었다.
물론 지금은 신호가 잡힌다는 표시가 뜨지만...
‘조금 있다 신호가 잡히지 않는다면 그때부터 성지연과 이슈탈이 움직인다는 말이겠지.’
워치의 동력원인 마력을 더 강력한 마기로 차단하는 기술.
적어도 워치를 사용해본 2학년이나 3학년이었다면 방심하지 않았을테지만 신입생에게는 워치가 어색하다는 허점을 꿰뚫은 방법이었다.
선일이 손목에 찬 워치를 내려보고있을 때, 정호찬의 말이 계속 이어졌다.
“너네가 시련에 들어간 순간부터 일어난 모든 일은 너희가 아닌 학교의 책임이야. 그러니까 무슨 일이 생긴다면 우리한테 바로 워치로 연락해.”
“아아 저 한마디만 해도 될까요?”
이지성으로 변장한 이슈탈의 생글거리는 웃음이 부자연스럽다는 것을 깨달은 선일.
어째서인지 자신만 그의 안면이 이상하게 움직이는지 알 수 없었지만 선일은 곧이어 그 이유를 대충 추측할 수 있었다.
‘표정숨기기 때문인가? 분명 능력으로 바꾼 가짜 얼굴일텐데 왜 이렇게 티가 나지?’
선일은 이선일이 속내를 숨기고 다니면서 생겼던 스킬에 이런 효과가 있었을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었다.
‘오 이건 예상 이상인데?’
설계자 때문에 등장인물이 선일 자신에게 향하는 감정을 알 수 있다지만 일정 이상의 강자는 감정 따위는 쉽게 숨길 수 있다.
물론 그들에게는 표정도 감추기는 쉽지만.
‘온갖 표정을 지으며 평생을 움직여온 안면 근육을 억지로 뒤튼다는게 감정을 감추는 것보다는 쉽지는 않지.’
“일단 설명은 이 정도만 했으면 다들 알겠지? 그럼 이제 출발.”
“다녀오겠습니다!”
유리의 밝은 외침을 시작으로 여섯 명의 소년소녀들은 시련의 입구인 숲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마지막으로 성지연이 교사와 같이 있는 이슈탈 옆으로 지나가며 그에게만 들릴 정도로 조용히 속삭였다.
“모든 것은 그들의 뜻으로.”
그녀의 속삭임에도 이슈탈은 그저 웃을 뿐, 아무런 말도 꺼내지 않았다.
대신 그는 의미 모를 말을 뱉었다.
“학생들 모두 귀찮은 일 생기지 않도록 조심해요.”
생긋.
‘미친놈.’
칭호처럼 만사를 귀찮아하는 그의 연기력에 말을 잃을 뻔한 선일은 조용히 그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유리와 선월을 선두로 시련 내부에 발을 내딛는 순간.
쿠궁-!
거대한 마력이 그들의 몸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으윽...!”
“이..이게 뭐야!”
그 정도가 얼마나 심하냐면 원작의 주인공인 선월조차 미간을 찌푸릴 정도!
마력의 속박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그들의 귀에 공통적인 목소리가 들렸다.
시련에 찾아온 자들이여.
거대한 초월의 축복을 받은 그대들은 모두 각자의 시험을 받을 것이니.
검을 한 번 휘두르는 것도.
발을 한 걸음 내딛는 것도.
마력 한 줄기를 다루는 것도.
모두 한 몸처럼 느껴라.
그렇게 된다면.
필멸자의 몸으로도 초월을 느낄 수 있을 터이니.
우웅.
누군가의 말이 끝나자마자 그들을 묶어두던 마력이 사라져 몸이 자유로워짐을 느낀 학생들이 순간.
“어라?”
“왜 그래 유리?”
“선일아 지금 내 몸이 이상해!”
선일은 당황이 그대로 묻어나는 유리의 말을 듣다가 몸으로 눈을 돌려보니 그녀의 아래에서 생겨진 황금빛 마법진을 보았다.
그 순간.
촤앙!
하윤의 발 아래에는 유리와 같은 문양의 붉은 마법진이 그려져 있었다.
“저도 그래요!”
황신영은 당황하지 않은 척 조용히 활을 들었지만 선일은 그녀 역시 눈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선월앙 나 무서웡!”
“떨어져라.”
마찬가지로 아래에 마법진이 생긴 둘.
선일은 성지연이 자신의 암살 대상인 선월에게 계속해서 애교를 부리며 앵기고 있었고, 선월은 그런 그녀를 귀찮아하며 밀쳐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근데 선일이 넌 왜 안 생겼지?”
“응? 그러게?”
원작대로라면 분명 시련의 참가자들은 공간이동 마법이 실행될 텐데...
어째서인지 그의 발밑만 허전한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그걸 알아볼 시간은 없었다.
우릉!
다시금 누군가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제 그대들은 서로의 시련에 간섭하지 못한다.
“뭐야! 공간이동?”
고귀한 왕국의 후계자인 유리가 제일 먼저 공간이동의 전조를 깨닫았다.
직후.
슈욱!
학생들은 각자 바람이 스치는 소리를 배경으로 깔며 순식간에 선일의 시야에서 사라졌지만, 선일 혼자 유일하게 처음 들어왔던 모습 그대로 그 자리에 남아있었다.
원작에 적혀있던 구절과는 다른 현상에 선일은 의문을 가졌지만, 그 의문이 풀리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대는 참으로 재미있군.
혼자 남겨진 상황에서 그리 놀라지도 않는 것을 보아 예상한 건가?
학생들의 귀에 울렸던 목소리와는 다른 아주 따스한 목소리였다.
이 목소리의 주인이 누군지 직감한 선일.
‘위그드라실..?’
세계수 위그드라실.
전세계적으로 폐쇄적이기로 유명한 엘프의 땅에서 섬기는 어머니이자 태초의 생명이라고 불리는 악사영의 초월자 중 하나.
전 세계 곳곳에 퍼져있는 시련의 정체가 그 위그드라실이라는 사실은 원작자인 선일 말고는 아무도 모를 것이다.
그런 선일의 생각을 읽은 것일까.
오오.
내 정체를 알고 있었나.
무기질적인 느낌이 들었던 시련의 목소리와는 다르게 따스한 목소리에서는 놀라운 감정이 물씬 묻어났다.
목소리는 다시 말을 이어가기 시작했다.
물론 정확한 이름은 위그드라실의 잔재이지만 정답에 가까운 답을 내놓다니.
도대체 그대의 정체가 무엇인지 알 수가 없군.
부드러운 웃음소리를 낸 그녀는 이어서 작게 고민하는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인간과 동떨어진 존재라고 불리우는 초월의 존재들이 인간처럼 고민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원작자인 선일의 눈에는 너무나 이상해보였지만 위그드라실은 개의치 않았다.
그녀는 오직 자신의 품 안에 들어온 이 이질적인 소년에 집중할 뿐!
이어서 위그드라실은 결정했다는 것처럼 마력으로 그의 몸을 들어올렸다.
잠깐 그대를 초대하지.
슈욱..!
그 말과 동시에 선일의 시야가 순식간에 새까만 어둠 속으로 암전했다.
직후 아주 짧은, 찰나와도 비슷한 시간이 지난 다음 선일의 눈 앞에 보이는 곳은 더 이상 하늘 위까지 나무가 닿아있는 숲이 아닌.
짹짹...!
후웅.
아름답다라는 말로도 표현이 불가능할 것만 같은 초원이었다.
하늘에서는 현실 세계에서는 볼 수 없는 환상 속에 살아가던 새들이 지저귀고, 땅에서는 신수라고 불리는 짐승들이 햇빛을 째고 있었다.
시원함과 따스함이 공존하는 신비로운 바람은 초원 위에 서있는 모든 이들에게 생기를 불어넣었으며.
이쪽으로 오거라.
직전까지 들었던 위그드라실의 목소리가 귀를 꿰뚫자 선일은 조용히 눈을 돌렸다.
“...위그드라실?”
아름다운 장관의 중심에 서있는 한 여인.
멀리서 보기에도 엄청난 신성함이 감도는 그녀에게서 선일은 거부할 수 없는 어머니의 포근함을 느껴졌다.
보고만 있지 말고 얼른.
잠시 넋을 놓았던 걸까.
선일은 무의식적으로 자신이 그녀에게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위그드라실의 말대로 선일은 천천히 한쪽 발을 떼가며 그녀에게 다가갈수록 선일은 이상한 분위기를 느꼈다.
한번쯤...
아니.
너무나 익숙한 이 향기.
“라벤더.”
이 냄새를 알고 있구나.
선일의 작은 혼잣말을 들은 위그드라실이 슬며시 미소지었다.
그녀가 이제 넘어지면 닿을만큼 가까워지자 선일은 흐릿하던 얼굴을 제대로 보았다.
어딘가 낯이 익숙한 얼굴을 보자 선일은 자신도 모르게 말을 뱉었다.
“닮았어.”
어머니랑...
뒷말을 뱉지는 않았지만 선일은 자신이 얼마나 이상한 생각을 했는지 깨달았다.
어머니라니.
자신에게 어머니는 단 한 명.
원장님 뿐이었다는 것을.
‘원장님은 분명 내가 있었던 세상의 인물이었어. 그리고 그 사람은...’
그 뒤에 이어지는 말은 생각하기도 싫었다.
어머니가 왜 자신에게서 떠나갔는지.
그 이유를 알지 못했기에 허투루도 꺼내기는 싫었다.
뭐라고 한 것이냐.
지근거리에서 뱉은 말이었기에 평범한 사람이었어도 들을 수밖에 없는 말이었을 텐데.
위그드라실은 선일의 목소리을 들을 수 없었던 것처럼 행동했다.
그러나 그런 위그드라실에게도 그는 의문을 가질 수 없었다.
선일의 머릿속에서는 잊고 싶은 과거로 가득 찼다.
흠....
확실히 이상하구나.
“예?”
이상함은 넘겨두고.
위그드라실은 자신의 앞에 서있는 작은 소년이 처음 시련에 들어왔을 때 느꼈던 이질감을 더욱 세세하게 느낄 수 있었다.
분명 인간, 아니 생명이라면 육체와 영혼의 균형이 동일할텐데.
너는 그런 생명체와는 달리 균형이 맞지 않는구나.
그녀가 뱉은 말의 진정한 의미를 눈치챈 선일은 그제서야 자신의 어머니에 대한 생각을 잊을 수 있었다.
위그드라실과 원장님이 비슷하다는 것은 착각이라고 일단락시킨 그는 자신이 균형이 맞지 않는 이유를 대충 추측할 수 있었다.
‘내가 이선일의 몸에 들어왔기에 그런 건가.’
게다가.
흥미롭다는 것처럼 눈가의 주름을 찌푸린 그녀의 말은 끝나지 않았다.
이어지는 그녀의 말은 선일조차 의미를 전혀 알 수 없는 말이었다.
너에게는 나와 같은 초월자의 손길이 느껴지는구나.
그것도....
죽음이 결정된 필멸자의 몸에 말이다.
***
시련의 밖인 현실에는 어느새 해가 중천에 떠있었다.
역겨운 태양을 의식하기는 싫었지만 슬슬 시간을 확인해야했던 이지성, 아니 이슈탈은 워치를 바라보았다.
‘12시. 시간이 됐군.’
이곳에서 대한고에 잠입해있는 아스모에게 들은 작전 시간은 정오.
해가 정중앙으로 왔을 때, 학생들과 같이 들어간 색욕의 신도(Layperson)가 연구자의 장치로 그들의 워치를 마기로 통신불량을 만든다고 했었다.
‘슬슬 시작해야겠군.’
“어라?”
이슈탈처럼 워치를 바라보던 이상철이 갑자기 정호찬을 향해 물었다.
“호찬이 네 워치되나? 갑자기 먹통이 되노.”
“그러게? 내 것도 이상하네.”
워치가 갑자기 먹통이 되어버리는 이상한 현상.
당황한 그들을 속이기 위해 이슈탈은 그들처럼 연기를 하기 시작했다.
“제 것도 그러네요? 들어가봐야 하지 않을까요?”
“지성씨 워치도 그래요? 도대체 무슨 일이지? 상철아 학교에는 연락이 안 되지?”
“아예 안 된다. 위치추적도 다 안 되는 것 보니까 확실히 시련에 무슨 이상이 생긴 것 같은데...”
조금씩 그들의 얼굴에 불안감이 차오르는 것을 본 이슈탈이 순간적으로 얼굴의 표정을 바꿨다.
“일단 학생들이 최우선이니 들어가야할 것 같네요. 한 분은 저랑 같이 들어가실래요?”
자신의 상태가 정상적이었다면 둘 다 같이 들어가도 상관이 없지만 아직 2년 전의 상처가 완전히 아물지 않은만큼 헌터 두 명을 상대하는 것은 무리라고 판단한 이슈탈.
물론 그 중 한 명이 B급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마지막 은퇴 임무인 만큼 안정성을 따지는게 맞았다.
이슈탈의 검은 속내를 알지 못했던 정호찬이 짐짓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그래야겠네요.”
“그럼 내랑 지성씨가 갔다오께. 니는 순간이동을 쓸 수 있으니 그게 낫지 않겠나.”
시원스럽지만 마찬가지로 심각한 이상철의 목소리에 정호찬이 고개를 끄덕였다.
빠른 판단으로 시련으로 들어가기로 결정한 이상철이 끌고 왔던 스포츠카에서 자신의 검과 푸른색과 노란색이 조화롭게 섞여있는 망토를 꺼내 입었다.
이슈탈 역시 가져온 단검을 장비한 뒤 정호찬을 향해 힘없이 미소를 지었다.
“갔다올게요. 무슨 일 있으면 곧바로 돌아오겠습니다.”
“네. 그럼 저는 일단 입구를 지키고 있을게요.”
“지성씨 들어갑시다.”
직후 시련의 안으로 들어간 두 사람.
학생들과 마찬가지로 거대한 마력이 두 사람을 짓눌렀지만 그들에게는 전혀 의식되지 않았다.
그저 산책을 하는 것처럼 가볍게, 그러나 신속하게 발을 놀리기 시작했다.
***
파지직...!
정전기와 비슷한 소리가 선일의 귀에 풀벌레보다 작게 들려왔다.
원작을 모르는 이선일이었다면 전혀 의식할 필요가 없었지만 강선일에게는 달랐다.
그가 느낀 것을 초월자인 위그드라실이 모를 리가 없었다.
이상한 것들이 숲에 무슨 짓을 하는가보구나.
위그드라실이 대수롭지 않다는 것처럼 뱉은 말에 선일은 조용하지만 살기 어린 사냥꾼의 눈으로 반응했다.
이어서 선일은 그녀를 뱉었다.
“위그드라실.”
응?
나지막하게 이어지는 선일의 목소리.
그러나 그의 양손에는.
“저 좀 보내주시죠.”
홍염과 청염이 거칠게 타오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