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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화.
슬슬 꽃샘추위가 오는 3월 초반.
입학한 후 처음으로 학교 밖으로 나온 선일과 하윤은 신입생들에게도 알려져있는 꽤 유명한 양식집에 앉아있었다.
하윤은 음식을 기다리면서 자신의 앞을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다.
“하아...”
그런 그녀의 모습을 봐도 선일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평소 같았다면.
“왜 그래 하윤아?”
라면서 물었을 그였겠지만 지금은 그러지 않았다.
아니, 그럴 수가 없었다.
“...”
죄인마냥 고개를 숙인 채 식은땀을 잔뜩 흘리는 선일.
무슨 말이라도 하려고 입을 열려는 순간, 그의 옆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미안. 나도 저녁을 안 먹었던 참이라.”
소녀와 소년의 중간에 서있는 중성적인 목소리에 선일과 하윤은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그들의 시선을 받은 금발의 소년, 아니 소녀인 유리는 특유의 사파이어빛 눈동자를 커다랗게 만들면서 조신하게 웃었다.
그 모습을 바라본 주변 여성들의 심장은 덜컥 내려앉는 듯했지만 하윤에게는 이상하게 불편한 느낌이 들었다.
‘어쩌다가 이러다가 된 걸까.’
기숙사 건물 앞에서 그의 얼굴을 봤을 때, 이상하게 경직되어있는 걸로 눈치를 챘어야했는데..
이상하게 들떠있던 방금 전의 자신을 바보처럼 생각하며 조용히 눈을 감았다.
‘생각해보면 특별할 거 없는 외식이지. 만약 저 사람이 끼지 않았다면...’
전화할 때 들었던대로 데이트가 될 수도 있었을텐데.
선일과 둘만 만날 줄 알았던 식사에서 불청객이 낄 줄 몰랐던 그녀는 한 번 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유리는 그런 그녀를 보며 미소를 입에 머금고 말했다.
“하윤이 너 선일이한테 이야기 많이 들었어.”
흠칫!
자신의 이름이 불청객의 입에서 나올 줄 몰랐는지, 하윤의 눈이 순식간에 커졌다.
동시에 자신의 신경을 조금씩 건드리는 소년이 자신에 대해 무슨 말을 했을지 궁금했던 하윤의 목소리가 무의식적으로 나왔다.
“무슨 이야기요?”
“아 이거 말해도 돼 선일아?”
하윤의 말을 듣자마자 자연스럽게 말을 끌며 선일을 보며 눈웃음을 치는 유리.
유리의 부드러운 웃음을 보자마자 자신이 진 것만 같은 이상한 기분이 들었지만 애써 울컥한 감정을 가라앉힌 하윤은 눈을 날카롭게 떴다.
이어서 두 여성의 눈길을 받은 선일의 목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그럼 말해도 되지.”
“그래?”
선일의 대수롭지 않은 말에 유리는 스스로의 입가를 소년으로 보기에는 작은 손으로 가렸다.
웃음을 가리려고 하는 행동이었지만 옆에 있던 선일은 볼 수 있었다.
그녀의 눈이 이상하게 장난기가 넘쳤다는 것을.
‘왜 저렇게 웃지.’
찌릿!
직감이 선일의 뇌리를 톡톡 건드렸다.
모든 종류의 감각을 강화시키는 감각증폭이 더해진 선일의 직감은 과장 좀 보태서 미래를 조금이나마 읽을 수 있었다.
불안함이 몸을 감싸는 직후, 선일은 일어나고나서 유리나와 했던 대화들이 떠올랐다.
2년 전에 만났던 그녀와의 추억을 다시금 회상하고, 그녀가 이곳에 입학하기 위해 했던 노력, 그리고 마지막.
‘아... 설마 그건가?’
짧은 시간동안 나눈 대화 속에서 그녀의 심기가 이상하게 불편해보이던 주제가 떠올랐다.
모든 것을 떠올리자마자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가는 선일.
허나 제지할 틈도 없이 유리의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선일이가 네 칭찬을 많이 하더라~. 마법도 되게 화려하면서 절제된 아름다움이 있어 깔끔하고 동시에 파괴적이라던데.”
“그래요?”
이런 말을 선일이 했을 줄은 몰랐던걸까.
뜻밖의 칭찬을 들은 하윤의 뺨이 붉게 달아올랐다.
물론 그 정도가 자세히 보지 않는다면 체크할 수 없을 정도로 아주 미약했지만 정면에서 바라본 선일은 그 변화를 알아챌 수 있었다.
‘조금 목소리가 올라갔네.’
은근히 기분이 좋아보이는 하윤을 보자 선일은 제일 먼저 심장이 편안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생각과는 달리 유리가 별말을 하지 않아서 그런가.
선일은 안도의 한숨을 속으로만 내쉬고 티내지 않았다.
장난기 어린 눈빛을 그대로 내려놓은 그녀는 사뭇 유쾌한 분위기를 자아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도 연습장에서 가끔씩 봤었거든. 너 연습하는 모습. 되게 인상적이더라.”
“...그런가요?”
유리는 처음에 자신을 멀리하던 하윤의 경계심이 약해진 것을 느꼈다.
그녀는 여전히 무표정했지만 기분 좋음이 숨겨지지 않는 그녀를 보며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
이 학교에서 선일을 처음 만났을 때, 곧장 기억하지 못했다하더라도 유리는 자신의 안에 그가 매우 큰 부분을 차지한 것을 자각하고 있었다.
그것도 2년 전부터.
그가 자신을 다시 불러준 후, 조용히 나눈 많은 대화에 유리는 많은 감정을 느꼈다.
처음 그가 이 학교에 대해 매우 좋은 평가를 할 때에는 그녀도 애정을 느꼈다.
이후 선일이 멸마가문의 후계라는 여자애때문에 따돌림 비슷하게 당한다라는 말을 직접 들었을 때, 그녀는 무척이나 화가 났었다.
기구하게도 같은 반이 아니다보니 그 계집애를 조질 수는 없어 너무나 아쉬웠지만 선일은 딱히 신경쓰지 않아보였다.
유리는 그에게 물었었다.
“친한 애는 있어?”
“응. 신하윤이라는 애.”
그의 입에서 자연스럽게 나온 친하게 지내주는 친구가 있었다는 말.
그 말을 들었을 당시에 유리의 머릿속에서는 다행이라는 생각보다도 친구가 유명한 악마숭배자의 딸이라는 사실에 약간 불편했지만 그녀는 곧 그런 생각을 지울 수 있었다.
‘선일이의 친구라면 좋은 애겠지!’
이런 생각과 더불어 수업 후 연습장을 가면 꼭 신하윤이라는 아이가 있었기에 긍정적으로 생각이 될 수 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유리는 조금 가슴이 먹먹해지는 것을 느꼈다.
신하윤이라는 소녀에 대해 말할 때의 그는 어딘가 들떠보여 그 사실이 너무나 아렸다.
‘물론 선일이는 의식하지 못했을테지만.’
만약 자신이 그의 입에서 나온다면 그럴 수 있었을까.
자신과 흑요석빛 눈동자의 소년은 특별한 일로 이어진 둘만의 유대감이 있었지만, 그건 하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후 유리는 선일에게 전화를 걸었다.
“선일아 저녁 같이 먹을래?”
“...미안. 선약이 있어.”
스마트폰 너머로 그의 목소리를 들은 순간 유리는 직감할 수 있었다.
아무리 긴 머리를 가리고 남장을 하더라도.
절대 무시할 수 없는 여자의 감.
“하윤이라는 친구랑 만나러 가는거야?”
“응. 그래서 나중에 봐야할 것 같은데...”
“그래?”
그 말을 들은 순간, 유리는 고민하지 않았다.
“나도 갈래!”
“...뭐?”
물론 선일은 그녀에게 매우 당황했었지만 유리는 개의치 않았다.
개인적으로 이 학교에서 그의 유일한 친구이자 전세계적으로 유명했던 범죄자 ‘악마숭배자’의 딸이 어떤 인물인지에 대한 기대감도 있었지만 제일 큰 이유는 달랐다.
날카롭게 말하는 여자의 감.
만약 둘 사이에 내가 들어갈 공간이 없어진다면.
‘질 것 같아서.’
그런 생각을 하던 유리는 아무도 보지 못하게 손으로 가려놓은 입가에서 조용히 쓴웃음을 지었다.
***
‘쟤가 왜 저러지?!’
적절히 발동한 표정숨기기 덕분에 들키지는 않았을테지만 선일은 자신의 뺨이 붉게 타오르려는 것을 느꼈다.
원래 세계에 있었을 때도 칭찬을 잘 하지 못했던 그였기에 자신이 한 말을 남의 입으로, 그것도 당사자 앞에서 들어보니 얼굴을 들을 수가 없었다.
쓰윽.
입가를 가렸던 손을 내린 유리.
그녀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밤 늦게까지 마법연습하는 모습을 보니까 되게 자극 많이 받았어.”
말을 마친 유리의 입에서 밝은 웃음이 튀어나왔다.
아무리 신하윤이라는 소녀에게 선일을 빼앗기고 싶지 않다는 감정을 가지고 있다하더라도 지금 입에서 나오는 말들은 전부 진심이었다.
하윤은 칭찬이 나올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는지 작게 입을 벌린 상태로 얼어있었다.
“...감사합니다.”
볼에서 아주 미약한 열기가 느껴졌다.
칭찬을 들은지가 얼마나 됐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2년...’
황신영과의 대련 이후 반에서 자신을 까내리는 사람들은 많아져 주눅들만도 했지만 하윤은 연습을 멈추지 않았다.
물론 당사자 본인은 괴롭히지 않은 것처럼 태연하게 있었지만 하윤은 본능적으로 그녀가 시켰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옆에서 들려오는 방해도 많았고 은근한 괴롭힘도 있었기에 그녀는 연습장을 가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아무도 알지 못했을 것이라는 자신의 노력을 오늘 처음 만난 소년이 알아주었다.
그 사실만 해도 너무나 기뻤던 하윤은 조금씩 느껴지는 이질감을 느꼈다.
선일이 간간히 보이는 웃음에 유리라는 아름다운 소년의 눈길이 이끌리는 것을.
그리고 그 감정이 자신과 비슷하다는 것을 말이다.
‘에이 설마...’
“감사합니다.”
잠시나마 머릿속을 맴돈 이상한 생각을 조용히 없애버린 하윤이 조용히 말했다.
유리가 특유의 밝은 미소로 대답하자 두 소녀들의 훈훈한 모습을 바라보던 선일의 눈이 편해졌다.
이후 시작된 유리는 다시 입을 열었다.
“속성마력 되게 잘 쓰더라. 난 아직 개화 못 시켰거든.”
“아 진짜요?
두 사람 다 마법사인지라 마법에 대한 수다가 시작되자 무투가인 선일은 알 수 없는 단어들이 귀에 들어왔다.
학구열 넘치는 두 소녀의 대화를 선일은 따라가지 못했던 와중 알바생이 음식을 들고 다가왔다.
“음식 나왔습니다. 맛있게 드세요.”
“일단 먹을까?”
점점 머리가 어지러웠던 선일은 타이밍 좋게 온 알바생에게 엄청난 고마움을 느꼈지만 그 감정은 한순간이었다.
후룩.
“아 페르나의 개혁을 보면...”
냠.
“미소스의 계약이라는 책이었는데 되게 이론이 자세히 나와있더라고요.”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서도 마법사들의 공유는 끊기지 않았고, 선일은 그저 조용히 음식에만 정신을 집중한 채 얼굴을 내릴 수 밖에 없었다.
***
“후우 잘 먹었다.”
만족스러운 식사에 입가에 행복한 미소를 띄운 채 가게 밖으로 나온 선일.
그의 뒤로 하윤과 유리가 따라나왔다.
“오늘 재밌었어요.”
“나도. 되게 도움 많이 되더라.”
두 사람은 만족한 모양이었지만 선일은 머릿속에 맴도는 이상한 단어들을 지우기에 힘이 들었다.
싸아...
꽃샘추위에서부터 시작된 세찬 바람에 몸이 차가워진 선일.
그는 자연스럽게 입고온 재킷에 손을 넣더니 뒤를 돌았다.
“난 잠깐 어디 좀 들려야하는데 너네는 어떻게 할래?”
“나는!”
“전..”
그의 물음에 누가 먼저라고 할 수도 없이 하윤과 유리의 목소리가 겹쳤다.
우연인지 아니면 운명인지.
처음 만났을 때 감정을 다시 느낀 두 소녀의 몸을 이상한 승부욕이 감쌌다.
순식간에 선일의 팔을 작은 손으로 수줍게 잡은 하윤이 먼저 입을 열었다.
“같이 가요. 오늘 연습은 원래 안 할 생각이어서. 잠깐 바람쐬다 들어가면 될 것 같아요.”
그 모습을 본 유리가 조금 울컥했지만 티를 낼 수는 없었다.
오히려 하윤보다 가까이 다가가 선일에게 기댄 유리.
입가에 미소를 지은 유리가 말했다.
“나도 가지 뭐. 어차피 할 것도 없었는데.”
양손의 꽃.
이 말이 너무나 잘 어울리는 선일은 지나가는 사람들의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안그래도 예민한 감각에 감각증폭이란 스킬의 효과가 더해지니 주변 사람들의 소소한 저주가 느껴졌지만 그는 뿌리칠 수 없었다.
매정하게 들어가라고 하기에는 두 사람의 눈빛이 너무나 강렬했다.
결국 그는 절대 포기하지 않을 소녀들과 함께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