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26화
철컥.
양호실에서 돌아간다고 된다는 허락을 받은 선일이 기숙사 방으로 다시 돌아왔다.
해가 뉘엿뉘엿할 때 들어와서 그런지 아니면 고된 전투를 하고나서 그런건지.
방 안의 열린 창문에서 풍겨오는 바람에 평소보다 더욱 편안한 기분을 받았다.
“더럽게 피곤하네.”
외출복 상태 그대로 침대에 풀썩 쓰러진 선일.
클리어 마법으로 그나마 전투 때 묻은 흙먼지나 피는 지웠지만 찢어진 부분은 고칠 수 없었다.
이선일의 기억에 따르면 꽤나 아끼는 옷이었기에 버리는 것은 너무나 아까웠지만 어쩔 수 없었다.
선일은 자신을 빨아들이는 침대에서 애써 벗어나 옷을 갈아입었다.
가벼운 후드티와 무릎까지 오는 반바지를 입기에는 아직 날씨가 쌀쌀하지만 그는 개의치 않고 다시 침대에 누웠다.
“어차피 안 나갈 거니까.”
드드득!
던지듯이 대충 방치해뒀던 핸드폰이 울리며 책상을 때렸다.
누군가가 보낸 문자메세지의 알람소리에 선일은 꾸물거리며 다시 일어났다.
“으어어….”
그는 온몸에 귀찮음과 피곤함이 동시에 밀려들었지만 핸드폰에 뜬 문자를 보았다.
-괜찮아요?
하윤의 걱정 어린 문자에 선일의 눈이 커졌다.
동시에 얼굴 근육이 부드럽게 풀어지며 입가가 쓰윽 올라갔다.
선일은 손가락을 망설임 없이 화면에 터치했다.
뚜르르…
뚝!
“여보세요.”
“선일씨?”
귀 옆에 댄 전화기에서 무미건조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렇지만 분명 하윤의 말투에는 미미안 억양이 들렸다.
뭐랄까.
미소 지으며 웃는 느낌?
딱 그 느낌이었다.
선일은 언젠가 볼 수 있을 그녀의 환한 웃음을 상상했더니 이상하게 간질거렸다.
순식간에 마음을 진정시킨 선일이 조용히 숨을 내쉬고는 말을 이어갔다.
“문자 했길래 연락했지.”
“어디 다친 데는 없어요?”
그녀의 질문에 선일은 대수롭지 않은 것처럼 대답했다.
“으음. 그냥 팔다리에 구멍 나고 과다출혈로 어지러운 정도?”
“…”
배치고사 날 하윤과의 전화 중에 들었던 것과 비슷한 말투로 가볍게 대답했지만 목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
선일은 대답 없는 그녀가 어째서인지 화가 난 것 같다는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신하윤’의 악마화는 현재 6%입니다.]
생각이 아니라 진짜 화가 났나보다.
원작에서도 그리고 빙의한 이후에도.
씨앗이 성장할 때는 대부분 그녀의 심기가 불편하거나 스트레스를 받을 때 상승하니까.
물론 그 정도가 미미하긴 했지만 선일은 말을 정정하기 시작했다.
“농담이야. 그 정도까지 심한 건 아니었어. 그리고 상처도 다 치료했고.”
“다행이네요. 던전을 클리어했다며요?”
“운이 좋았지.”
하하.
자연스럽게 웃는 선일의 뒷목에서 식은땀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만약 비하인드가 내게 말을 걸지 않았다면.
그래서 동화의 고통으로 쓰러졌다면.
아마 나는 원작의 이선일과는 다른 허무한 죽음을 맞이했겠지.
의자에 털썩 몸을 던지듯 내려앉은 선일이 몸에 힘을 풀면서 다시금 입을 열었다.
“봤어?”
“아뇨. 저도 던전을 클리어하느라 늦게 나와서…. 주변에서 들리던데요 선일씨 쓰러졌다고.”
“누구랑 팀이었는데?”
“흐음...”
그녀는 어울리지 않게 말꼬리를 늘렸다.
마치 자신의 눈치를 보고 있는 것 같은 하윤에게 선일은 다시 물으려던 찰나, 하윤의 목소리가 아주 작게 울렸다.
“…이선월씨요.”
“우리 형?”
물론 원작에서도 둘이 페어를 맺기는 했지만 선일은 다시 생각해보니 유리와 자신처럼 뜻밖의 조합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둘의 시너지가 원작 내에서도 최고로 설정해뒀었던 그였지만 마음 한 구석에 알 수 없는 무언가가 차지하고 있는 것처럼 찝찝했다.
선일은 이상한 느낌을 애써 무시하면서 말을 이어갔다.
“어땠어 우리 형?”
“대단하던데요. 보스를 잡기 전까지는 제가 마법을 쓸 필요도 없이 그냥 검으로 다 잡았어요. 그러면서도 하나도 안 힘들어하던데.”
핸드폰 너머로 들려오는 무미건조한 말투에 감탄이 느껴진다.
확실히 적당히 해도 됐을텐데 아무리 악사영의 세계가 현실로 변했다한들 주인공은 주인공인지 무쌍을 찍고 온 모양이다.
원작에서 묘사했던 선월의 검술을 상상하던 선일의 귓가로 하윤의 말이 다시 한 번 들려왔다.
“되게 신기한 게 보스를 잡고나서 저랑 이선월씨의 마력이 한층 성장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어요.”
“…응?”
일어나기 직전에 봤던 유리와의 기억과 고단함에 잊고 있었다.
던전 클리어.
즉 보스몬스터를 사냥하면 그 마력을 흡수할 수 있다.
‘물론 그런 경우가 거의 일어나지 않아 못한다고 봐야하지만.’
이선월이 가진 S급 특성 행운은 그가 기연을 모조리 흡수할 수 있게 만들었다.
게다가 그 행운은 주변인들까지 효과를 끼치기 때문에 아마 신하윤이 성장했다고 느낀 것도 보스의 마력을 알게 모르게 얻은 것이겠지.
선일은 조용히 주먹을 쥐었다.
‘그러고 보니까 내 기연은 어떻게 됐지?’
“운이 좋았네. 던전을 클리어하면 간간히 헌터가 성장할 수 있다 그러던데.”
선일은 자연스럽게 전화를 하면서 설계자 안에서 쌓인 알림들을 확인했다.
‘세 개인가?’
손가락으로 제일 최근에 온 설계자의 텍스트를 누르려던 순간, 그녀가 원래 전화를 걸었던 목적을 말하기 시작했다.
“그건 그렇고 저녁 먹었어요?”
“아니 아직 안 먹었는데.”
“그럼 저랑 먹을래요?”
“기숙사 식당에서?”
그는 들리지 않게 웃음 지으며 자리를 고쳐 앉았다.
그런 선일의 모습을 몰랐던 하윤은 선월의 이름을 말할 때보다 훨씬 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뇨…. 학교 밖으로 나가지 않을래요?”
무언가를 말하려던 선일의 입이 얼어붙었다.
그는 밤피르와 싸울 때보다 훨씬 느리게 돌아가는 사고를 생각했다.
이게 말로만 듣던.
“데이트 신청인가?”
“네?!”
화륵!
선일이 실수로 입으로 뱉어버린 말을 듣자 하윤의 볼이 붉게 타올랐다.
이제야 스스로 자각한 그 순간부터 데이트라는 단어가 그녀의 머릿속을 유영하듯 휘저었다.
“하윤아?”
말이 없는 하윤을 부르는 선일.
그도 적잖이 당황했던 건지 평소 능글거리던 목소리가 아주 조금씩 떨리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모습이 마치 설레하는 것처럼 느껴져 하윤은 귀까지 붉게 변했다.
동시에 선일의 시야에서 푸른 텍스트를 띄웠다.
[‘신하윤’의 악마화는 현재 5%입니다.]
“…나중에 문자로 이야기해요!”
뚝.
“여보세요?”
뚜뚜뚜뚜…
전화가 끊긴 후 들려오는 소리에도 선일은 핸드폰을 놓을 생각을 하지 못했다.
도대체 무슨 대화가 지나갔는지 정확히 기억도 나지 않았을 때, 새로운 문자가 왔다.
-오늘 7시에 기숙사 건물 앞에서 봐요.
하윤이 문자에서 전화로 끝내지 못한 대화의 결론을 내었다.
“푸흐흐…!”
선일은 무의식적으로 새어나오는 헤픈 웃음을 뱉으면서 옷을 정리해놓은 방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지금 입은 옷으로 갈아입을 때 생각했던 나가지 않겠다는 결심은 이미 그의 머릿속에서 잊어버린지 오래였다.
물론 나가려면 아직 2시간이나 남았기에 바로 입을 생각은 없었지만 그래도 조금 있다가 급하게 입는 것보다는 여유롭게 미리 생각해놓는 것이 편했다.
한참을 고민하다 결국 대충 옷을 고른 뒤에 선일은 정신없어 보지 못했던 설계자의 알림을 확인하기 시작했다.
제일 처음으로 올라왔던 알림은 안좋은 소식이었다.
[천공건틀릿 MK.3가 파손되었습니다.]
“이건 좀 아쉽게 됐네.”
그는 인벤토리에서 부서진 은빛 잔해들을 꺼냈다.
왼쪽을 담당하는 건틀릿은 다행히 완전히 파손되지 않았지만, 오른쪽 건틀릿은 거의 쇠쪼가리라고 부를 정도로 박살나있었다.
선일은 아쉬운 마음에 혀를 차며 다음 내용을 확인했다.
[던전보스‘밤의 공작 밤피르’를 퇴치하여 성스러운 마력의 조각을 흡수해 스텟이 성장합니다. 추가로 감각증폭(A)이 생성됩니다.]
“원작에서 이런 스텟 상승은 없었는데. 개이득이네.”
기감을 강화시켜 주변을 인지하는데 보조하는 스킬인 감각증폭.
박쥐의 특성인 예민한 감각을 그대로 따온 것만 같은 스킬이 바로 첫 번째 기연이었다.
‘이선월은 S급 스킬인 초감각이었지만 뭐…. 그건 행운 때문이니까.’
아직도 찢어질 것처럼 아픈 단전 때문에 자연체를 활성화시키기는 무리였지만, 그럼에도 그는 감각증폭으로 인해 강화된 기감이 아주 미약하게 주변의 마력을 인지시키는 것을 느꼈다.
애초에 스킬만 해도 충분한 보상이었지만 스텟이 상승한 것은 만변무형을 개방시키기 위해서 자연체를 계속 운용해야했던 그에겐 희소식이었다.
게다가 스텟은 그 정도로 끝이 아니었다.
선일은 설계자를 확인하자마자 눈을 크게 뜰 수밖에 없었다.
“오!”
[원작의 첫번째 기연을 획득하셨습니다. 보상으로 스텟이 상승합니다.]
마지막 메시지에 커졌던 눈이 한 번 더 커졌다.
자신도 주인공 만만치 않은 행운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을까라고 생각한 선일은 생각난 김에 스텟을 확인하기 시작했다.
“스텟창.”
[스테이터스]
-명칭:이선일
-칭호:명문가 아들래미(보통),겉과 속이 다른 존재(유일)
-근력:LV4(+0.2)
-마력:LV4(+0.6)
-민첩:LV4(+0.1)
-체력:LV4(+0.3)
-지능:LV7
-스킬
적양권(S),자연체(A),감각증폭(A),표정숨기기(B),덮어쓰기(?)
계산해보니 약 1의 스텟을 얻은 선일.
이제 보니 확실히 몸에서 느껴지는 근육의 움직임이 달랐다.
‘심장에서 느껴지는 마력의 양도 확실히 많아졌어.’
게다가 확실히 성스럽다는 수식어가 붙어서 그런지 마력 자체도 정순하기 그지 없었다.
물론 그 정도가 바티칸에 존재하는 성자들이나 불가의 원로스님 정도의 순도는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확실히 몬스터에게 추가로 데미지를 줄 수 있을 것이다.
모든 메시지를 확인한 뒤 만족한 표정으로 침대로 돌아온 그는 핸드폰을 들었다.
곧장 인터넷으로 자신이 알고있는 원작의 미래와 관련된 정보나 기사를 검색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첫날과 마찬가지로 딱히 건질만한 정보는 없었다.
그는 핸드폰을 대충 던지고 방 한 구석에 고이 모셔둔 만변무형과 그 위에 있는 건틀릿의 잔해들을 바라보며 조용히 뇌까렸다.
“무기도 새로 구하긴 해야하는데.”
권술가로 생활하는 지금 아마도 만변무형이 자신에게 맞춰줄 무기는 건틀릿일 것이라고 확정했다.
선일은 눈을 감고 밤피르와의 전투를 회상하기 시작했다.
덮어쓰기를 통해 순간적으로 맛본 내 몸이 아닌 감각.
그 안에서 줄타기하듯 넘나든 죽음과 삶의 경계선.
모든 구간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몇 번이나 비디오처럼 돌려본 선일은 애써 외면하고 있었던 자신의 약점을 뱉었다.
“원거리 공격이 없다.”
확실히 격투가의 특성 상 상대에게 붙어야한다는 치명적인 약점이 존재한다.
학생들끼리 하는 대련에서는 같은 부류끼리 싸우느라 딱히 생각하지 않았었지만, 밤피르와의 전투에서는 철저히 서로의 공간을 만드는 것부터 압도당했었다.
만약 덮어쓰기를 사용하지 못했다면.
만약 비하인드가 오지 않았다면.
만약 유리 없이 나 혼자서 싸웠었다면…!
“진짜 죽었었겠지?”
선일은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석궁 같은 것도 알아봐야하나? 아님 슬링샷?”
건틀릿에 장착할만한 원거리 무기들을 찾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자 선일은 조용히 핸드폰을 들었다.
빠르게 인터넷을 들어간 그는 무기나 영약들을 파는 헌터마켓을 검색하기 시작했다.
곧바로 원거리 카탈로그를 누른 그의 입에서 깊은 한숨이 나왔다.
“에휴….”
너무 비싸다.
“게다가 대부분이 활이네….”
자신과 어울리는 무기가 없다는 것을 깨달은 선일은 다시금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나중에 본가로 복귀했을 때, 공방에 이야기를 해야겠다고 생각한 선일은 곧바로 명상 속에서 자신의 전투를 회상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