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23화
“뭐?”
선일이 뱉은 생각지도 못했던 말에 유리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원래도 백옥같은 얼굴이 더더욱 창백해지자 유약한 소녀같은 분위기가 풍겼다.
최애 캐릭터였던만큼 그녀를 지켜주고 싶은 마음이 치솟았지만 애써 가라앉힌 선일.
그는 조용히 마력을 끌어내며 목소리를 내었다.
“아까 본 문자를 보니까 써져있더라.”
“너 고대문자도 읽을 줄 알았어?”
그녀도 아까 전 벽에 써있었던 문자의 정체를 깨달았나보다.
해석하지는 못한 것 같지만.
물론 그도 설계자의 도움을 받아 확인한 것이지만 내색하지 않은 선일은 표정숨기기가 만들어준 부드러운 웃음을 입가에 머금은 채 말을 이었다.
“예전에 궁금해서 좀 알아봤었거든. 적혀있던 글자를 해석했을 때 이곳의 보스는 피의 귀족이야.”
“피의 귀족이라면…?”
“그래 네 생각대로 뱀파이어(Vampire)지.”
“뭐?!”
악사영에서 던전의 등급은 지하, 지상, 천하, 천상, 연옥 이렇게 다섯가지로 구분되어있다.
이 중 뱀파이어들이 존재하는 곳은 대부분 천하급 던전.
그 중에서도 피의 귀족이란 뱀파이어는 중세시절 유럽의 귀족처럼 작위체계로 이루어져있고 다른 혈족을 만들 수 있다.
물론 제일 큰 특징은 그저 강하다는 것.
가장 낮은 자작급의 뱀파이어라도 B급 헌터 5명이 팀을 이루어 사냥해야 하고, 그들의 위에서 군림하는 공작은 S급 헌터가 마주한다 해도 승리를 장담하기 어려웠다.
‘게다가 인간보다 강력한 신체능력은 기본, 개체마다 다른 특수능력을 가지고 있어 상대하기 어렵다는 단점이 배가 되지.’
그러니 유리가 이렇게 당황하는 것도 이해가 간다.
그렇다해서 그걸 포기할 생각은 없지만.
“괜찮아.”
소스라치게 놀라는 유리를 보며 한차례 부드럽게 웃으며 안심시킨 선일.
그는 이 던전의 보스가 정확히 누구인지 알고있었지만 아는 척을 하지는 않았다.
의심받을 것이 뻔하기 때문일까.
물론 그런 이유도 있겠지만 제일 큰 이유는 따로 있었다.
단순히 강하니까.
선일은 최애캐릭터이자 친구를 버리지 못하는 성격인 그녀를 속인다는 것에 양심이 쿡쿡 찔렸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강선일이 이선일이 된 지금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이번 기연은 무조건 얻어야만 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유리를 위험에 빠뜨릴 생각은 없었다.
확실한 공략법을 알고있는 이상 유리의 힘이 필요했던 선일은 만약 상황이 위험해졌다고 판단됐을 경우, 던전에 들어오기 직전에 받은 텔레포트가 인챈트된 주문서로 교관들을 부를 생각이었다.
선일이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 유리는 사기가 느껴지는 공간으로 들어가기 전에 혹시라도 모를 출구를 찾으려했지만 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이 곳을 빠져나가는 방법은 떨어진 구멍으로 다시 나가는 것뿐.
자신이 가진 마력만 충분했하다면 가능했을지도 모르지만 심장과 단전의 코어에 담긴 마력으로는 저 높이를 올라가기에는 부족했다.
“어쩔 수 없이 보스를 잡아야겠네.”
말을 뱉고나서 유리는 깊은 숨을 뱉었다.
티를 내지는 않았지만 살짝살짝 보이는 유리의 떨림을 보니 선일은 다시 한 번 마음이 무거워졌다.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은 선일.
표정숨기기로 감춰진 표정이 아닌 진심이었다.
결국 두 사람은 무너진 벽 안으로 발을 들였다.
동시에 익숙한 기계음이 선일의 고막을 건드렸다.
-띠링!
[원작의 기연을 발견하셨습니다.]
[서브 에피소드: 피에 미친 괴물이 시작됩니다.]
처음 보는 메시지.
선일은 본능적으로 보스가 깨어났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순간, 어둠 속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누구지?”
스슷...!
다 죽어가는 남자가 쉰 목소리로 뱉은 짧은 한마디였을 뿐인데 유리와 선일의 뒷목에 소름이 돋았다.
격이 다르다는 말이 이런 의미였을까.
순간적으로 몸이 굳은 두 사람의 시야에 갑자기 어둠이 걷혀오기 시작했다.
조금씩.
아주 조금씩.
분명 빠르게 사라지는 어둠이었지만 두 사람은 몸의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허..”
성대가 굳은 것처럼 선일의 입에서 헛웃음이 나왔다.
어떻게 이선월은 이런 괴물 앞에서도 태연했던거지.
위기가 앞에 있었음에도 밸런스가 파괴된다는 말이 어울리는 악사영의 주인공에게 대단함을 느낀 선일은 심장에서 타오르는 불꽃에 생존이란 이름의 뗄감을 차곡차곡 넣기 시작했다.
고오오!
마치 천검의 대장장이가 사용하는 불꽃처럼 더욱 뜨겁게 타오르는 홍염.
칼날에 갖다댄 새파란 칼날처럼 소름돋는 서늘함을 애써 녹인 채 선일은 한 발자국을 내딛었다.
턱.
사방으로 세워져있는 십자가.
중앙에서 긴 머리가 흙먼지로 뒤덮히며 산발이 된 남자가 사슬에 묶인 채 선일을 바라보고있었다.
생기 넘치는 선혈처럼 짙은 적색을 띈 눈동자는 겉모습이 초라하든 상관 없었다.
그 안에서 느껴지는 욕망은 빙의 후 만났던 어느 누구보다도 강렬했다.
‘그러니까 혈족의 금기를 저질렀겠지.’
구속된 남자는 말을 이어갔다.
기분 나쁜 실소를 흘리면서도 죽음의 기운이 물씬 흐르는 눈빛은 점점 진해졌다.
“...날 이곳에 쳐넣은 역겨운 사내의 냄새가 나는군.”
선일을 바라보는 붉은 눈동자가 살벌한 빛을 자아냈다.
동시에 사람을 빨아들이는 매력이 느껴졌다.
스스로도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조금씩 발이 움직였을 때, 선일의 손목을 누군가가 잡아챘다.
“선일아.”
흠칫.
뒤를 돌아보니 언제 다가왔는지 유리가 손을 잡고있었다.
물기 젖은 눈빛으로 선일을 바라보는 유리.
마치 그가 어딘가로 떠나버릴 것처럼 애처럽게 말했다.
“괜찮아?”
그제서야 선일은 깨달았다.
방금 유리의 손이 조금이라도 늦었다면 녀석의 능력인 정신 조작에 걸릴 뻔했다는 것을.
“고마워 유리.”
선일은 자신의 손을 잡고있는 새하얀 손을 부드럽게 떨쳐내었다.
그 모습을 보며 구속된 사내는 다시 한 번 웃음소리를 내었다.
“크크크 옆에 있는 소녀의 기운을 어딘가 익숙한 기운이길래 조금 헷갈렸지만 역시 카멜롯의 핏줄이 맞았군..
구깃...
유리는 눈가를 아주 작게 찡그렸다.
“그 남자의 피도 마시고 싶었건만... 아쉽게도 그 옆에 있는 신의 기사에게 막혔었지.”
마치 자신의 시조를 아는 듯한 사내의 말투에 유리의 표정이 굳어졌지만 이번에는 선일이 막아설 차례였다.
홍염을 신체 밖으로 뿜어낸 선일을 보며 사내가 아주 살짝 눈가를 찌푸렸다.
“역시 그 놈과 비슷한 악취가 진동하는군. 태양이라니 아주 역겨워...”
사내는 말을 뱉으며 몸을 일으켰다.
직후 쇠사슬이 모두 떨어졌다.
촤자장!
손목과 발목 그리고 목의 걸린 쇠사슬이 불협화음을 연주해 귀가 불쾌했지만 사내는 개의치 않았다.
잠시 사슬과 십자가를 바라보며 미소지은 사내는 갑자기 기운을 뿜어냈다.
파앙!!!!
생물은 모두 가지고 있는 피처럼 찐득한 핏빛이 감도는 힘은 다름 아닌 죽은 자의 힘.
그는 오랜만에 움직인 몸에 조금씩 적응하면서도 앞에 서있는 아주 작은 소년과 소녀를 쳐다보며 입맛을 다셨다.
“하아... 오늘 밤은 너무나 아름답겠군. 오랜만의 식사가 별미이니...”
너무나 운이 좋아.
쿠웅...!
사내가 노래하듯 가볍게 목소리에.
십자가가 모두 쓰러졌다.
쿵..!
섬짓!
십자가가 바닥에 맞닿자 직감에 위치한 경종이 미친 듯이 울렸다.
동시에 선일은 심장을 더더욱 강하게 불사르며 소리쳤다.
“유리!”
이미 진작에 마력을 일으켰던 유리의 몸에서 황금빛 오오라가 펼쳐졌다.
동시에 그녀의 팔찌 안에 들어있던 검들이 튀어나왔다.
검은 총 다섯 자루.
그 중 네 자루의 검은 사이클패트를 사냥할 때 사용했던 강철검과 같은 형태였으나 단 하나의 검은 달랐다.
유리의 마력과 어울리는 금빛의 검.
혹시 모를 위기에 대응하기 위해 아버지가 가진 검 중 하나인 칼리번이었다.
쐐액!
다섯 자루의 검을 동시에 날린 유리의 아름다운 목소리가 찢어질 것처럼 쏟아졌다.
“내가 서포트할게!”
선일은 그녀에게 말이 아닌 행동으로 답했다.
아서의 마법인 영광스러운 왕은 딜과 탱, 서포트의 역할을 전부 할 수 있는 밸런스가 갖춰져있다.
그러나 단점은.
‘팀의 능력을 많이 탄다는 것!’
타닥!
빠르게 달려나간 선일은 어느새 은빛 건틀릿으로 변한 손을 강하게 말아쥐며 불꽃을 몸에 둘렀다.
[스킬:홍염권이 활성화됩니다.]
[신체와 마력에 강렬한 불꽃이 깃듭니다.]
홍염권의 따스함을 공격으로 모두 치중시킨 선일.
원작에서도 유리가 가진 가장 빼어난 마법이 서포트였던만큼 뒤를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그럼에도 저 사내를 잡기에는 부족하다는 것을 알고 있던 선일은 처음부터 전력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고오오...
[스킬:자연체가 활성화됩니다.]
[신체에 생동감 넘치는 생기가 깃듭니다.]
자연체를 활성화시키자 단전 속으로 빨려들어오는 강렬한 힘.
다행히 사기가 아니라 사내를 봉인했던 남자의 힘이 느껴졌다.
턱 끝까지 차오른 상쾌함에 감각이 더욱 예민해졌다는 느낌을 받은 선일이 주먹을 내질렀고, 동시에 사내의 뺨을 스쳤다.
치이익...
살이 익는 냄새가 불쾌하게 코를 찔렀지만 선일은 입술을 물었다.
원작 속 사내의 능력은 정신조작 뿐이 아니었다.
‘정확히는 저 녀석의 능력인 왜곡에 포함된 능력이었어.’
딱.
손가락 튕기는 소리가 나자 뺨에 스친 상처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러나 여전히 살 익는 악취는 사라지지 않았다.
욱씬.
뺨이 쓰라렸다.
사내는 선일을 마치 광대처럼 바라보며 눈가를 둥글게 만들었다.
“스스로 자해하지 말거라. 식사가 손상되면 아까우니 말이다.”
“쳇!”
혀를 세차게 차며 뺨을 문지른 선일.
그 말대로 방금 공격은 사내가 아니라 선일이 자신의 몸에 입힌 상처였다.
다행히 피가 묻지 않아 미끌거리지는 않았지만 상처를 불로 지졌기 때문에 고통이 더욱 심했다.
어떻게든 통증을 의식적으로 밀어낸 선일의 뒤로 다섯 자루의 검이 빛을 내뿜었다.
“글로리!”
그림자 속에서 피어나는 광륜.
어둠이 짙을수록 더욱 강해지는 유리의 마법이 코앞까지 들이닥치자 사내는 그제서야 손을 움직였다.
“아직 완전히 회복하지 못한 상태에서 이 공격은 조금 위험하겠군.”
그는 손을 한 바퀴 돌리며 핏빛의 기운을 방패처럼 넓혔다.
이후 다섯 개의 광륜이 피로 이루어진 방패에 맞닿자.
터엉..!
자연스레 튕겨나왔다.
동시에 유리의 눈동자가 경악으로 가득 찼다.
분명 자신의 검은 칼리번을 제외하면 평범한 검이기는 하지만 미스릴이 함유되어 마력으로 강화하면 적어도 천하급 던전의 B급 몬스터 정도는 가볍게 통하는 검이다.
그걸 막았다?
그것도 약화된 상태의 사기로 이루어진 방어막으로?!
‘게다가 사기의 물질화를 할 수 있다는 건 적어도 백작급 뱀파이어일텐데?!’
“한눈 팔지마!”
콰앙!
땅이 울릴 정도로 강하게 발을 굴리며 주먹을 휘두르는 선일.
단순히 주먹질로 끝나는 것이 아닌 이선일의 몸이 기억하는 권각술과 홍염권이 조화되며 뱀파이어의 천적인 불꽃과 생기가 몸을 감쌌지만.
사내의 몸에는 닿지 않았다.
선일은 쿵쿵 떨리는 심장과 동요하는 표정을 감추기 위해 표정숨기기를 유지하며 생각했다.
‘저 녀석이 다루는 사기는 한 방향밖에 다룰 수 없어.’
그렇기에 공략법은 명확하다.
서로 다른 방향에서 공격을 하면 된다는 점.
다만.
‘그걸 공략하는 방법이 X나게 어려울뿐!’
“유리! 반대 방향으로!”
선일과 유리는 사내를 중앙에 둔 채 서로를 마주보며 호흡을 맞춰갔다.
분명 둘은 오늘 아침에 급조한 팀이었지만 이상하게도 뭘 하려하는지 이해가 갔다.
양방향에서 날아오는 소년의 무술과 소녀의 마법을 각각 뱀파이어의 강점인 신체능력과 죽음의 기운으로 받아내던 사내의 얼굴에 감탄이란 감정이 떠올랐다.
“사냥감이라 생각했지만 재미있군. 아무리 지금 봉인에 당한 상태이긴 해도 이 정도의 수준이라니... 이제 난 자네들에게 자격을 부여하지.”
내 이름을 들을 자격을 말이야.
‘온다!’
피의 귀족이 자신의 이름을 말한다는 것은 고작 한 끼 식사가 아니라 적이라고 생각한다는 의미!
아무리 유리와 선일이 명문가의 핏줄이라고 해도 영혼에 새겨진 격에서 시작되는 차이는 고작 그런 태생 하나로 메꿀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유리도 그걸 알고있는지 다섯 자루의 검을 조작해 자신의 앞에 위치시키기 시작했다.
입술을 질끈 씹은 그녀는 검 끝을 한 점에 모으며 입을 열었다.
“아발론(Avalon)!”
그 광경이 마치 꽃과 같아 너무나 아름다웠지만 감상할 시간은 없었다.
동시에 최상단의 위치한 칼리번의 검날에 새겨진 문장들이 빛나기 시작했다.
우웅-!
Swords for Knights, Knights for King.
문장이 허공에 떠오르자 칼리번을 포함한 다섯 자루의 롱소드에 왕의 휘광이 깃들었다.
현재 아서의 후계자인 유리가 사용할 수 있는 가장 강한 마법이 쏘아지는 것을 보며 선일은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찌지직...!
스텟이 증가했는데도 자연체를 사용한 단전의 부담은 거의 줄어들지 않았다.
다행히 저 사내를 봉인한 남자의 기운이 자신과 잘 맞는 덕분에 그렇게 거칠지는 않았지만 그 질과 양 자체가 달랐다.
조금씩 비명을 지르는 단전을 애써 무시하며 선일도 자신이 유일하게 사용할 수 있는 초식을 위해 불꽃을 오른손에 모으며 허리를 숙였다.
동시에 왼손으로 불꽃이 새어나가지 못하게 막자 어마어마한 열기가 천공건틀릿을 관통해 손에서 느껴졌다.
우릉...!
귀에서 폭발음이 들리는 듯 했다.
확실히 처음 사용했을 때보다는 힘이 강해졌다는 것을 느껴진다.
단전과 심장을 넘어 혈관과 신경, 근육까지.
하나도 빠짐없이 홍염의 마력으로 가득 차자 선일은 웅크렸던 불꽃의 날개를 폈다.
“으아아아!!!”
홍염권의 1초식.
열파강권을 사용하자 신체의 모든 불꽃이 한순간에 선일의 주먹을 통로로 터져나왔다.
그렇게 생명력 넘치는 불꽃은 순식간에 사내를 뒤삼켰다.
쿠와아아아!!!!
전방의 아발론과 후방의 열파강권.
두 방향을 동시에 공격했기에 단 하나의 기술이라도 맞으면 승리라고 생각했던 선일의 입가가.
“Каква лепа крвава тама.(아름답구나 피 묻은 어둠은.)
굳어졌다.
노래처럼 들려오는 사내의 미성.
아무 일 없다는 것처럼 말하던 피의 귀족.
아니,
Моје право име је Бампир. велики крвни паун(나의 진명은 밤피르. 위대한 피의 공작이다.)
밤피르.
그가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