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22화
무협소설 속에서나 등장하던 이기어검과 비슷한 형태.
온몸에 황금의 마력을 띄운 채 가라앉힌 눈빛으로 사이클패트를 바라보고 있는 유리의 모습은 너무나 신비로웠다.
악사영을 집필할 중학생 시절, 그가 유리의 마법을 처음 적으며 강렬한 카타르시스를 느꼈을 때와 같이 지금 온몸에는 소름이 돋았다.
표정숨기기로 다행히 무표정으로 보이겠지만 그는 심장이 과하게 뛰는 흥분을 가라앉히려 노력했다.
웅웅웅웅-!
허공에 떠오른 두 자루의 검은 금빛을 머금고 맑은 검명이 울렸다.
검 자체에서 마력이 느껴지지 않았기에 아티팩트는 아닐 테지만 저 청아한 울림은 세계 최고 수준의 장인이 만든 것 같았다.
‘불카누스가 만든 건가.’
든든한 아군을 보며 잠시 잡생각에 빠져 집중이 흐트러진 선일.
앞에 대치하고 있던 사이클패트들이 몬스터가 가진 특유의 본능으로 그걸 느낀 것인지 순간적으로 날아올랐다.
확실히 동굴 지형에서 암살자라고 불리는 만큼 놈들이 상대의 약점을 찾는 속도는 대단했지만.
“모습을 보인 순간 이미 끝났어. 이 멍청한 짐승들아.”
캬악-!
외국어는 잘 못 알아들어도 욕은 어찌 그렇게 잘 들리는지.
그건 만국공통, 아니 만종공통인 것 같다.
그 말대로 저 놈들은 내가 뱉은 말에 살기를 마구 내뿜으며 달려들었으니까.
슈화악!
동굴에 찝찝한 바람을 가르며 날아오는 거대한 박쥐들.
처음에 죽었던 사이클패트와는 달리 남은 놈들은 단 한 번에 날갯짓으로 선일의 목을 노리려하지는 않았다.
갑자기 나는 고도를 급격하게 낮춘 놈들이 물어뜯으려는 부위는 다름 아닌 다리.
먼저 기동력을 낮춘 뒤 농락하며 사냥하려는 계략에 선일은 픽 소리를 내며 비웃었다.
‘확실히 하급 몬스터라 그런지 1차원적이네. 물론 그 정도로도 이곳에서 살아남긴 쉬웠겠지. 물론 그 놈의 부산물인 것도 있지만.’
헛웃음이 나왔다.
악사영의 원작자인 선일이 설정한 그대로인 것을 오랜만에 보았기에 반가웠지만 그렇다 해도 방심하면 당하는 게 사람이란 존재다.
선일은 몸에 피어오르는 홍염을 은빛이 감도는 건틀릿에 옮기기 시작했다.
고오오…
심장 속 코어에서 마치 용이 움직이기 직전 조용히 몸을 푸는 것 같은 위압적인 소리가 귓속에서 울려 퍼졌다.
전보다 성장한 마력.
용암처럼 뜨거운 홍염이 핏줄 속을 타고 흐르는 것 같은 기분에 자연스럽게 입꼬리가 올라간다.
이제 사이클패트와 남은 거리는 고작해야 3미터 남짓.
속으로 숫자 삼까지 센 선일이 외쳤다.
“간다 유리.”
“…응.”
조용히 눈을 감은 채 집중하는 유리.
숨소리조차 내지 않는 그녀의 의식이 마치 허공에서 유랑하는 검에게 옮겨간 것처럼 날카로운 그들은 유려한 춤을 추기 시작했다.
검의 템포에 맞춰 선일도 근육을 긴장시키는 순간.
유리의 검이 밝은 궤적을 그리며 날아갔다.
슈욱-!
키에엑!
선두에서 날아오던 사이클패트가 고통에 찬 단말마를 힘없이 뱉으며 아래로 떨어졌다.
꼬챙이에 꽂힌 것처럼 안면부터 관통된 금빛 검.
동족을 살해한 흉악한 무기에 남아있는 몬스터들의 시선이 집중된 틈을 타 선일은 긴장시킨 근육에 홍염을 일으켰다.
촤악-!
검을 꽂아 넣은 몬스터 특유의 탁한 푸른 피가 동굴 벽에 뿌려지는 것을 신호로 선일이 팔을 뻗었다.
오른손 건틀릿에 밀집된 홍염은 선일의 정면에서 낮게 날아오는 사이클패트를 향해 내리꽂았다.
푸확!
섬뜩한 파육음이 울렸다.
동시에 선일은 건틀릿에서부터 전해지는 몬스터의 경련에 강렬한 쾌감을 느꼈다.
‘한 방.’
단 한 방에 터지는 사이클패트의 머리.
대련과는 다른 느낌이었다.
모든 감정을 쏟아내도 괜찮은 존재가 있다는 것이 자신의 안에 존재하는 이선일의 기억을 자극하자 선일은 순간 당황했다.
곧이어 모든 잡생각을 버리고 앞에 남아있는 3마리의 사이클패트에 다시 신경을 집중하며 몸을 움직였다.
주먹에 닿은 사이클패트를 그대로 바닥에 부딪히자 사람보다 조금 작은 박쥐 머리는 산산이 부서졌고 동시에 허리를 일으킨 선일은 발로 땅을 박찼다.
고작 10초도 안 되는 짧은 찰나에서 동족들이 연속으로 죽었다는 것과 자신들보다 강한 존재에게 도망칠 수 없다는 무의식이 머릿속에 가득한 두 마리의 사이클패트는 패닉에 빠지며 자신의 공포를 느꼈지만 선일과 유리는 그런 몬스터의 생각을 알 리가 없었다.
신의 축복을 받았다고 설정한 헌터의 입장에서 그들은 인류의 적.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고작 적이란 단어 하나였다.
이후 그들과 대치한 두 마리의 몬스터의 눈은.
…콰직!
붉은 빛을 잃었다.
전투라는 단어보다는 학살이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압도적인 사냥을 끝낸 두 사람은 푸른 피로 더럽혀진 동굴을 바라보았다.
이제는 평가를 위해 가져가야하는 몬스터의 부산물을 챙기기 전, 유리는 무심한 어투로 말했다.
“여기 사냥이 편하네. 나랑 상성이 좋아.”
그녀는 사이클패트의 시체에서 유일하게 부서지지 않은 핏빛 외눈을 허공에 떠있는 검으로 뽑기 시작했다.
꽤 고어한 광경이었지만 유리는 괜찮은지 자연스럽게 말을 이어나갔다.
“그래? 다행이네.”
“그건 그렇고 너는 재작년이랑 완전 달라진 것 같은데?”
“재작년?”
재작년이라면 2년 전.
악사영에서 제일 중요한 떡밥들과 원작의 큰 비중을 차지하는 주연들의 과거사가 나오는 시기다.
물론 유리도 그 중 한 명이었지만 그녀에 대해 나온 것은 고귀한 왕국 내에서 다른 후계자와의 일화밖에 없었다.
‘이선일이 영국에 갔던 건가? 그건 아닐 텐데.’
그 순간, 선일의 뇌리에 황금빛이 번뜩이며 스쳤다.
‘잠깐. 이선일은 나오지 않아도 천검이가의 2년 전이 나오지 않나…?’
분명 기억난다.
천검이가 후계자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개최한 연회.
물론 악사영에서는 주인공인 이선월의 시점으로 나오지만.
‘이선일과 이선월은 쌍둥이야.’
그렇기에 둘의 생일은 완전히 같을테니 연회의 주인공도 둘이었을 것이고, 오대가문의 위세가 대단한만큼 고작 생일연회에도 초대받은 사람들은 대부분 유명인일 것이다.
‘영국 마탑의 후계자인 유리도 그곳에 있었을 수도 있어.’
아니.
확실하다.
직후 잠시 풀어두었던 표정숨기기를 사용한 선일.
그는 부드러운 미소를 내쉬며 유리에게 역으로 물으려던 찰나, 그녀는 자신이 했던 말을 얼버무렸다.
“…아니다 잊어줘.”
어째서인지 전투가 끝났는데도 유리의 얼굴은 살짝 붉어져있었다.
아까 전과 지금의 뉘앙스를 보니 과거에 이선일과 무슨 일이 있었던 것 같은데…….
도대체 원작전에는 이선일은 뭔 짓을 하고 살았는지.
살짝 어이가 없어진 선일이 그녀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 직접적으로 묻고 싶었지만.
그럴 겨를은 없었다.
쿠구궁-!
땅이 울렸다.
쿠룩!
…캬아악!
갑작스러운 지진과 연이어 들려오는 하울링에 유리는 많이 당황했지만, 선일의 심장은 요동질 하나 없었다.
물론 표정숨기기가 바꿔준 표정답게 그의 얼굴은 창백해지면서 굳어졌지만.
그가 당황하지 않는 이유는 간단했다.
이미 알고 있었으니까.
‘원작에서도 5마리의 사이클패트를 잡으면 기연을 얻을 수 있는 장소의 입구로 떨어지는 전개였지.’
어째서 그렇게 시작되는 것인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수업시간에 갑자기 떠오른 전개를 선일은 곧바로 공책에 적어놔 고아원에 가자마자 원장님의 노트북으로 타이핑했던 때가 떠올랐다.
소설을 썼던 기억들을 조금씩 생각하다보니 악사영의 세계가 현실이 된 지금을 냉정한 이성으로 바라볼 수 있었던 선일.
쿠릉.
발아래에서 작게 들려오는 불길한 소리에 곧 있으면 떨어질 것이라고 생각한 선일은 약간 겁이 났지만 곧바로 정신을 다시 잡았다.
직후.
부웅.
밟고 있던 땅이 마법처럼 사라지며 순식간에 그들은 떨어지기 시작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유리가 소리쳤다.
“이게 뭐야아!”
“눈 감아!”
허공에 뜨는 것 같은 이상한 감각에 순식간에 바닥으로 꺼지는 두 사람d,s 바이킹이 내려올 때, 심장이 덜컥거리는 느낌을 받았다.
찝찝한 바람이 거세게 스치자 허공에서 균형을 잃은 유리.
문득 감은 눈 속에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암흑이 무서워진 유리가 비명을 질렀다.
“꺄아아!”
턱.
갑자기 손에서 느껴지는 따스한 온기에 정신을 차린 유리.
분명 위기상황임에도 설렌 유리였지만 선일은 그녀를 보지도 않고 급한 목소리로 외쳤다.
“마력을 일으켜!”
“응?”
“얼른!”
떨려오는 심장을 애써 가라앉히며 다시금 코어로 황금빛 마력을 일으킨 유리.
단단한 마력이 느껴지자 선일도 이어서 홍염을 일으켰다.
다행히 이렇게 떨어지는 것은 한번 경험해봤다.
분명 그 때는 분명 괜찮았다고 생각했는데.
‘진짜 X나 무섭네!’
빠른 속도로 낙하하는 선일은 우습게 봤던 자신을 후회했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그는 마력으로 오감을 강화함과 동시에 떨어지는 방향으로 마력을 빠르게 쏘아 보냈다.
잠수함이 장애물의 유무를 알아내는 기능처럼 어딘가에 가로막힌 마력은 곧바로 주인에게 다시 돌아왔다.
그는 유리의 마력이 느껴지는 방향으로 소리쳤다.
“유리! 내가 신호를 줄 때 아래로 마력을 쏴!”
세찬 바람소리에 소리가 묻혀 귀가 잘 들리지 않았을 테지만 다행히 그녀는 선일의 말을 알아들었다.
“알겠어!”
“그럼 간다!”
이제 남은 시간은 약 5초.
선일은 속으로 마지막 카운트다운을 시작했다.
‘오사삼이일!’
“지금이야!”
화르륵!
촤앙!
폭발하듯 분출된 마력.
두 마력은 순식간에 합쳐 몸집을 불린 뒤에 땅바닥을 맞닿았고, 동시에 거대한 먼지폭풍이 일어나 떨어지는 그들의 몸을 받혔다.
원래대로라면 다시 돌아오는 마력의 반발력으로는 그들을 멈추기 힘들었을 것이지만 바람으로 인해 약간이나마 느려진 낙하속도를 멈추기에는 충분했다.
철퍽!
선일과 유리는 찝찝한 동굴 아래로 꼴사납게 떨어졌지만 다행히 그런 생각은 갖지 않았다.
오히려 다친 곳 하나 없이 떨어졌다는 것에 다행이라고 느낀 둘은 어디선가 미세하게 느껴지는 공기를 눈치 챘다.
“통하는 공간이 있는 것 같아.”
“그러게 찾아보자.”
자연스럽게 건넨 선일의 말에 유리는 대충 먼지를 털어내고 바람의 근원지를 찾기 시작했다.
슈우욱…
물론 선일은 바람이 흘러나오는 공간이 어딘지를 원작을 통해 알고 있었지만 유리처럼 떨어진 곳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잠시 후, 자신보다 한 뼘 정도 더 높은 위치에서 바람이 느껴지자 유리가 그에게 손짓했다.
“여기서 바람이 흘러나와.”
“잠시만.”
그는 어느새 장갑으로 변한 건틀릿으로 벽의 먼지를 쓸었다.
동시에 기괴한 문자를 발견하자 설계자가 그 문자를 해석해 선일의 눈에 텍스트로 보여주었다.
[이 곳에 잠든 피의 귀족을 살하는 자. 그와 대척점에 있는 힘을 얻을 것이다.]
‘찾았다.’
철컹!
장갑에 마력을 넣자 기계장치가 움직이는 듯한 소리를 내며 건틀릿으로 변했다.
이어서 선일은 홍염을 주먹에 두르고 온 신경을 벽에다 집중했다.
유리가 갑자기 전투를 준비하는 모습을 보며 당황해했지만 선일은 그녀를 향해 조용히 뇌까렸다.
“유리 내 뒤에 서서 마력으로 강화해.”
“응?”
무의식적으로 다시 물은 유리.
곧이어 선일의 표정이 진지하다는 것을 깨닫은 그녀는 그 말대로 마력을 신체에 둘렀다.
그녀의 몸이 마력으로 보호되고 있는 것을 깨닫자 선일은 마력을 집중하며 중얼거렸다.
“왼발은 앞, 오른발은 뒤. 과하게 들어가는 힘은 빼고 눈은 내 주먹이 닿는 위치에 놓는다….”
이상한 모습을 보이는 선일.
갑작스러운 상황에 이상해진 건지.
걱정 어린 표정을 지은 유리를 뒤로 한 채 선일은 조용히 마지막 한 마디를 뱉었다.
“홍염권 제 1초식 열파강권 개(改).”
말을 뱉으며 선일은 주먹을 내질렀다.
지금 쓰는 기술은 박대기와의 대련 때 사용했던 열파강권이었지만 약간의 차이점이 있었다.
개전(開展).
‘쉽게 말하자면 궁극기를 일반 스킬로 바꾼 거지.’
열파강권 개는 원래 약점이었던 극심한 마력소모를 개선했다.
간단하게 정리하면 파괴력을 줄이는 대신 효율성을 늘린 버전!
원래라면 원작에 단 한번도 등장하지 않았던 기술을 활용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지만 작가인 그도 몰랐던 이선일이라는 캐릭터의 격투술에 대한 천부적인 재능과 동시에 마력과 신체를 더욱 세세하게 느낄 수 있는 자연체라는 스킬.
그리고 악사영의 세계에 빙의한 강선일의 특권인 설계자까지.
이 세 가지가 조화를 이뤘기에 선일은 홍염권의 새로운 활용법을 알아낼 수 있었다.
‘만약 단 하나라도 부족했다면 개전이 힘들었겠지.’
콰득..!
불꽃을 감은 주먹에 낡은 벽이 조금씩 부서지기 시작했고 몇 초도 지나지 않아 산산조각난 벽은 무너지며 더 거센 흙먼지를 일으켰다.
“콜록!”
먼지바람을 막으려 신체 밖으로 마력을 내보내려했지만 이상하게 나오지 않았다.
“콜록콜록…!”
더러운 먼지가 호흡기로 들어오자 거세게 기침하는 유리.
몬스터의 사기가 함유된 공기를 홍염으로 태운 선일이 눈에 마력을 집중하자, 한치 앞도 보이지 않았던 공간이 흐릿하게나마 시야에 들어왔다.
간지러운 목을 애써 진정시킨 그녀도 마찬가지로 선일처럼 눈을 강화했다.
다른 스텟은 몰라도 마력 하나는 그의 배 이상이기에 신체강화의 수준이 달랐다.
그 말은 즉슨 똑같이 마력으로 신체를 강화해도 선일보다 효과가 높다는 말.
유리의 눈에 위치한 사파이어가 황금이 덧칠하며 또렷해진 시야는 이상한 공간을 낮처럼 볼 수 있었다.
순간, 얼굴이 하얗게 질린 그녀가 물었다.
“…이게 뭐야?”
유리는 느꼈을 것이다.
저 안에서 느껴지는 짙은 죽음의 기운을.
선일은 무표정을 유지한 채 유리를 되돌아보았다.
“던전의 보스.”
그리고.
그는 마지막 말을 삼키며 속으로 환하게 웃었다.
내 밥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