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18화
저 멀리 나무에서 숨어 선일을 지켜보는 한 학생이 있었다.
그러나 소년이 나무에 가려지기는커녕 그의 외모가 너무나 튀는 탓에 과수원에서 찍는 화보마냥 아름다웠다.
마치 한낮의 햇빛처럼 따스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백금발과 소년이라고 보기에는 너무나 여린 체구.
그럼에도 입체감이 살아있는 뚜렷한 이목구비와 수체화로 그린 것처럼 고귀한 몸놀림까지.
이 모든 찬사조차 표현하기 부족할 정도로 아름다운 외모의 소유자를 선일이 모를 수가 없었다.
“유리 펜드래건.”
소년의 이름을 조용히 뇌까린 그의 머릿속에 자연스레 설정들이 생각났다.
물론 자신의 최애캐였던 만큼 설정들을 잊을 수 없었겠지만 말이다.
‘영국의 마탑인 고귀한 왕국(Noble Kingdom)을 지탱하는 13명의 마탑주인 위대한 13좌.’
위대한 좌의 핏줄은 세계 어느 곳을 가든 미래가 보장되지만 그 중에서도 유리는 왕국 내에서 최고의 권력과 실력을 가진 제1좌[아서]를 차지한 마탑주의 아들이었다.
‘라는 설정이지만 사실은 여자아이.’
태어남과 동시에 정령들이 주위로 스스로 모여드는 축복과 동시에 하늘에서 내린 검의 재능인 이선월과는 반대로 신하윤과 같은 마법의 재능.
이 모든 것을 가지고 있어 앞으로의 미에는 빛으로만 이루어져 찬란했겠지만 빛에는 반드시 어둠이 존재하는 법.
최고의 재능을 이어받은 만큼 후계로써 모든 것을 이어나가야했었던 그녀는 아버지인 아서의 명에 따라서 지금까지 남자를 연기했다.
‘사춘기가 오기 직전까지 명을 따랐지만 점점 나이를 먹어가며 또래 소녀들을 동경하던 그녀가 아서를 거역하는 것은 2학기. 물론 히로인이 되는 것은 그 이후지만 꽤 중요한 스토리 중 하나였지.’
유리에 대한 설정은 안 보고도 줄줄 뱉을 수 있을 정도로 자세했다.
잠시 추억에 빠졌던 선일은 곧이어 제정신을 차리고 그녀가 있는 쪽으로 곧장 걸어갔다.
흠칫!
바라보고만 있던 소년이 자신을 향해 다가오자 유리가 뒷걸음칠 쳤다.
곧이어 선일이 열 발자국 정도면 마주칠 수 있을 만큼 가까워지자 그녀는 도리어 몸을 돌려 도망치기 시작했다.
갑작스러운 유리의 행동에 선일은 당황했지만 이어서 그도 똑같이 그녀의 뒤를 따라가기 시작했다.
‘갑자기 왜 뛰는 거야!’
[‘유리 펜드래건’이 당신에게 당황해합니다.]
‘나도 눈 있어!’
옆에서 태연하게 텍스트를 띄우는 설계자.
설계자의 말투가 마치 선일을 놀리는 듯 약 올리는 것 같은 느낌이 맘에 들지 않아 소리치고 싶었지만, 대련 직후라 완벽하게 회복되지 않은 몸 상태로는 뛰기도 벅찼다.
‘아까 전에 자연체를 쓰고 나니까 더 아프네!’
저 멀리서 달려가는 유리는 자연스럽게 신체에 마력을 운용하는 것인지 노란빛의 오오라가 그녀의 몸을 뒤덮고 있었다.
등장인물 중에서도 최저의 스텟을 가지고 있는데다가 대련으로 인해 지친 그가 아무리 무인이어도 마력으로 강화한 신체를 따라잡을 수 없었기에 선일은 아픈 단전을 애써 굴렸다.
키이잉!
마치 칼날이 그의 아랫배를 조금씩 긁는 듯한 불쾌한 고통에 선일은 이를 악물었지만 멈출 수는 없었다.
그만큼 유리는 빙의한 선일에게 중요한 인물이었다.
‘A반의 학생들이 원작과는 달라진 만큼 나도 그쪽에 대해 자세하게 알아야해.’
물론 선일 혼자서도 언젠가는 알 수 있겠지만, 적어도 A반 학생에게 직접 듣는 것보다는 느렸다.
원래 그런 속담이 있지 않았던가?
로마에 가면 로마법에 따르라고.
‘아 이 속담이 아닌가?’
그건 그렇다 치고.
‘저 녀석 분명 내가 기억하기로 민첩이랑 체력 둘 다 1일 텐데 왜 이렇게 빨라! 아무리 마력을 써도 그렇지!’
고통을 참으면서 달리는 선일은 알지 못했다.
유리는 지금.
그 어느 때보다 필사적으로 달리고 있다는 것을.
‘왜 이렇게 따라오는 거야..’
뒤를 흘끔 돌아본 그녀의 눈이 선일과 마주쳤다.
그는 매우 지친 듯 얼굴이 붉어져 있어 걱정되었지만, 유리는 멈추지 않았다.
어느새 한 바퀴를 돌았는지 저 멀리서 다시금 아파트처럼 생긴 기숙사 건물이 보였다.
마력을 운용한 덕에 빨리 퍼지지 않았던 유리도 따스한 봄 날씨에 몸이 뜨거워져 조금씩 지쳐갔을 때,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유리!”
멈칫.
‘갑자기 왜 멈춘 거지?’
자신이 고작 한 것은 그녀의 이름을 부른 것.
물론 대한고의 학생 대부분이 세계에서도 강력한 영향력을 가진 인간들의 자녀인 만큼 평범하게 자신들의 이름을 부르는 것조차 기분 상해할 자존심 높은 학생들이 많을 테지만 선일은 그들 중에서도 천검이가라는 격이 다른 가문이었다.
‘유리가 그런 성격도 아닐 테고... 아니, 근데 애초에 왜 도망친 거야?’
생각해보니 갑자기 목구멍에서 짜증이 울컥 솟아오른다.
선일은 A반이고 뭐고 그냥 기숙사로 돌아가 어제 밀린 잠을 자고 싶어졌지만 애써 해야 할 일을 상기시켰다.
‘후우.. 일단 참자.’
여러 가지 의문을 가지면서 우뚝 멈춰있는 유리에게 다가간 선일은 단전에 무리가 가지 않도록 천천히 마력을 회수했다.
저릿거리던 날카로운 통증은 사라지자 이제야 좀 살 것 같았다.
이어 한 발자국만 더 내딛는다면 유리의 얼굴을 볼 수 있을 만큼 다가가자 갑자기 그녀가 고개를 돌렸다.
드디어 유리를 똑바로 마주할 수 있게 된 선일의 얼굴이 순간 저 땅바닥에 굴러가는 돌처럼 굳어졌다.
‘미친...’
미쳤다.
머리에서는 이 말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과거에 썼던 그녀의 외모에 대한 표현도.
저 멀리서 보며 그저 아름답다는 말로만 판단했던 자신의 생각들도.
모조리 잘못되었다.
‘...이 정도면 원작 초월 아니냐?’
불편한 남학생 교복을 입고도.
분명 마법으로 가렸을 짧은 단발도.
그 모든 것들이 한데 어우러져 평범한 일반인은 다가가지도 못할 아우라를 내뿜고 있었다.
현실적인 예쁨이라고 생각했던 황신영이랑 비교하기도 힘들만큼 아름다운 자태에 선일이 말을 잃은 순간, 유리가 입을 열었다.
“내 이름을 어떻게 알아?”
왠지 모르게 떨리는 목소리.
마치 새가 노래하는 것처럼 아름다운 하이톤에 선일이 말을 더듬었다.
“어..어?”
“너 내 이름 어떻게 아냐고?”
이상하게 대답을 재촉하는 유리의 모습은 어딘가 불만스러워 보였다.
동시에 한편으로는 무언가 기대를 하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왜지?’
아무리 원작을 둘러보아도.
빙의 전부터 지금까지 잊지 않고 있었던 그녀의 설정을 다시 기억해봐도.
알 수가 없었다.
원작에 집중하느라 순간 멍해진 선일을 보며 유리는 한숨을 쉬었다.
그녀는 가볍게 손가락을 튕겼다.
팅.
분명 중지와 엄지를 마주쳤을 뿐인데 맑은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청명한 울림이 그들을 감싸며 울렸을 때, 선일은 자신의 사고 속에서 벗어났다.
일부러 마력을 사용해 스스로에게 신경을 집중시킨 유리.
그런 유리를 보고 선일은 표정숨기기를 운용했다.
다행히 표정숨기기는 정신력밖에 소모가 되지 않아 몸의 피로는 없었다.
[스킬: 표정숨기기가 발동됩니다.]
감정까지 가라앉히는 표정숨기기 덕분에 잡생각을 잠시 떨쳐낸 선일이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그의 입에서 자연스러운 멘트가 나왔다.
“미안. 잠깐 생각 좀 하느라. 근데 유리 널 모를 리가 있겠어?”
“어?”
선일의 대답에 은근히 밝아진 그녀.
뭔가를 기대하는 것 같은 얼굴이었지만 이어지는 선일의 대답에서 유리의 얼굴은 조용히 썩어 들어갔다.
“고귀한 왕국 첫 번째 좌인 아서님의 후계자잖아!”
“...”
이후 대답은 없었다.
은근히 이상해진 분위기를 느낀 선일.
‘뭐지 분위기가 왜 이렇게...’
싸늘하지?
분명 그녀가 기대하는 대답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자연스럽게 넘어갔다고 생각했다.
이어서 유리가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하는 것이 선일의 귀에 걸렸다.
“...기억할거라고 믿었었는데.”
무술가의 특성 상 신체 감각이 매우 예민했기에 똑똑히 들었다.
분명히 그랬을 텐데..
‘도대체 무슨 말이야.’
기억할 거라니.
마치 선일을 과거부터 알고 있었다는 말투에 그는 당황했지만 티를 낼 수는 없었다.
자신은 이선일이 아니었으니까.
선일이 조용해진 분위기에 어떻게든 대화를 이끌어내려고 말을 걸려던 순간, 유리는 아주 작은 미소로 그를 마주했다.
“근데 왜 따라온 거야?”
정곡을 찌르는 질문에 선일이 대답했다.
“누가 날 쳐다보고 있길래. 근데 갑자기 도망치더라고. 그래서 왜 그런 건지 궁금해서.”
“아 그래?”
어딘가 실망한 것 같은 말투였다.
계속해서 그녀가 보이는 이상한 모습에 선일의 머릿속은 여전히 의문투성이였지만 직접적으로 물을 수는 없었다.
아마 이선일과 무언가 관련이 있어 보이는데 자신이 썼던 악사영에서는 단 한 번도 그런 장면이 나오지 않았었다.
그 순간, 바지 주머니에서 진동이 느껴졌다.
부르르..
주머니에 들어가 있던 핸드폰을 꺼내니 메세지가 와있었다.
선일은 하윤이 발신인이라는 것만 확인하고 다시 주머니에 넣으려던 찰나, 유리가 말했다.
“연락 온 것 같은데 받아도 돼. 나도 어차피 가야해서.”
그녀는 들고 있던 에코백에서 작은 종이를 한 장 꺼내고 마력을 일으켰다.
손가락에 아주 얇은 빛으로 종이에 숫자를 적는 유리.
이어서 그 종이를 선일에게 건넸다.
“이거 내 번호야. 나중에 궁금한 거 있으면 문자로 해.”
“어..?”
그녀는 완전히 할 말을 마친 듯 처음처럼 몸을 기숙사 안으로 들어갔다.
갑자기 어떻게 된 것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선일은 주머니에 종이를 집어넣고 유리가 사라질 때까지 그 모습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