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12화.
침식율...?
원작자인 그가 단 한 번도 사용한 적 없는 새로운 단어에 선일이 설계자에게 물어보려고 했지만 그럴 겨를이 없었다.
사락.
중학교 때 자주 들었던 종이가 부드럽게 넘어가는 소리와 함께 그의 자리까지 시험지가 넘어왔다.
신임교사인 자신의 반에서 일어난 자그마한 싸움에 의해 스트레스가 솟구쳤던 정호찬은 아직도 화가 풀리지 않은 건지 학생들을 바라보는 눈가에 힘이 빡 들어간 것이 보였다.
곧이어 종이 울리기 직전이 되자 정호찬은 시험에 대해 간단하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시험은 여러분들이라면 기본적으로 알고 있는 내용으로 되어있으니 부담 갖지 마. 그렇다 해서 부정행위는 안 되는 건 알지? 만약 걸리면 그대로 0점 처리할거야.”
정호찬이 말을 마치자 몸에서 피어나온 진한 은색의 마력이 교실을 가득 채우기 시작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많은 학생들이 당황했지만 선일은 이 행동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경지에 이른 헌터들이 공간을 마력으로 감싸면 그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모든 것을 파악할 수 있는 공간장악.
지금 정호찬은 스스로 교실의 공간을 자신의 마력으로 둘러싸 부정행위를 직접 감시하려는 것이었다.
“그럼 시작하자.”
-시험 시작.
정호찬의 시작 소리와 동시에 스피커에서 튄 노이즈가 끝나자마자 펜이 종이 위를 걸어다니는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저 멀리에 있는 황신영도, 신하윤도, 다른 학생들도 모두 시험지에 집중하고 있었지만 선일의 손은 유독 조용하다.
그 이유는 매우 간단했다.
‘하나도 모르겠네, 진짜.’
무지.
일반인이었던 그가 악사영의 이선일에게 빙의하기 직전까지 평범한, 아니 그닥 평범하지는 않았지만 헌터도 몬스터도 각성자도 없는 삶을 살아왔다.
게다가 학창 시절에 딱히 공부를 좋아하지도 잘하지도 않았던 그에게는 중학교 과목들도 어려웠지만 지금 시험지에 쓰여 있는 것은 그런 평범한 문제들과는 궤를 달리했다.
‘지하(地下)급 던전에서 가장 흔한 몬스터의 신체에 대해 세세히 그려 설명하라고? 이런 미친..’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라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던 선일은 하염없이 한숨을 쉬었다.
시험지를 가득 채운 괴랄한 문제들.
원작자인 그가 악사영을 썼었기에 이런 자잘한 문제들에 대해 알지 못한다는 사실이 웃겼지만, 그가 짠 설정들의 대부분은 원작의 등장인물이나 기연의 내용이었다.
‘아무리 원작자라도 이런 설정은 안 만들었다고...’
에휴.
한숨을 내쉬는 소리가 집중을 방해한 것일까.
몇몇 학생들이 있는 방향에서 날카로운 눈초리가 느껴졌지, 그는 신경 쓰지 않았다.
선일은 허공을 바라보며 속으로 설계자에게 말을 걸었다.
‘꼭 이런 웹소설 보면 상태창이 다 알려 주던데.. 설계자 넌 그런 거 없냐?’
[...]
설계자는 저번의 대답과 똑같이 침묵으로만 일관할 뿐, 다른 반응은 아무것도 없었다.
이상하게 자존심이 상해 보이는 느낌은 기분 탓일까.
결국 선일은 어딘가 침울해 보이는 설계자를 아주 가볍게 무시한 뒤, 다시 시험지로 눈을 돌렸다.
대충 원작 어딘가에 적혀져 있기를 바라며 다시 시험지를 바라보았을 때, 본능적으로 펜을 쥔 손이 수려하게 움직였다.
스스로도 의식하지 못할 정도로 자연스럽게 움직이는 펜은 문제에 대한 답을 매우 정확하게 적어내기 시작했고 동시에 문제들을 한 번쯤 봤던 것처럼 익숙해졌다.
마치 상황과 어울리지 않는 생각들을 다른 시각으로 지켜보는 듯한 느낌에 위화감을 눈치챈 선일의 눈이 순간적으로 멍해졌다.
직후.
일렁...
그의 눈이 인식하는 세계가 흑백으로 변하고 평범한 사람이 느낄만한 오감과는 다른 새로운 여섯 번째 감각이 그의 몸을 가득 채웠다.
그 사실을 자각하자 뇌에서부터 불에 데이는 듯한 격통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머리가 타는 것만 같은 고통 속에서 선일은 심장이 먹먹해졌다.
분명 악사영의 세상에 막 들어왔던 자신이 동기화를 하면서 느꼈던 느낌과 같았다.
“윽!”
동시에 이질적인 감정이 느껴졌다.
과거로 돌아가고 싶은 엄청나게 그리운 감정.
지금 자신이 미쳐버렸나 생각하며 헛웃음을 지은 선일.
다시 시험문제에 집중하기 위해 눈을 돌렸을 때, 그의 귀에서 작은 기계음이 툭하고 걸렸다.
...띠링!
[침식율 상승에 따른 동화가 시작합니다.]
‘동화..?’
매우 흐릿한 글씨임에도 통증으로 인해 사고가 느려진 선일은 볼 수 있었다.
언뜻 보면 동기화와 비슷한 단어처럼 보였지만 그는 본능적으로 완전히 다른 의미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설명은커녕 아무런 증거도 없었는데 왜 그렇다고 생각했을까.
그것을 깨달은 순간 고통의 잔상들은 어느새 사라져 있었고.
동시에 시야가 다른 차원으로 반전하기 시작했다.
***
다른 학생들이 시험에 집중하고 있었을 때, 집중하지 못하는 학생은 적지만 분명히 존재했다.
그중 한 명이 바로 하윤, 그녀였다.
앙하며 귀엽게 펜을 물은 하윤은 끙끙대며 시험문제와 싸우고 있었다.
‘이게... 뭐지?’
도대체 어디가 기본이라는 거지?
정호찬의 말을 듣고 안심한 자신이 바보 같았다.
분명 한국어로 쓰여 있지만 외계어처럼 이해할 수 없는 문제들로 수두룩한 시험지.
입학하기 전, 최소한의 공부를 하기 위해 몬스터학이나 마력학, 정령학 등 필수 과목들 정도는 모두 마치고 온 하윤이었지만 지금 배치고사는 그런 상식들을 모조리 부숴버리는 문제가 가득했다.
아니, 그런 문제들로만 만들어진 시험인 것 같았다.
“하아..”
이곳에서의 생활을 잘 따라갈 수는 있을지 아니면 내가 죽기 전까지 씨앗을 없앨 수 있는지.
이런 걱정을 하기도 전에 자신의 머리부터 걱정을 해할 것 같았다.
“후우...”
작은 소리로 깊게 숨을 내쉰 하윤의 펜은 여전히 멈춰있었다.
그래도 아주 약간은 건드려 보겠다는 생각으로 잘 펼쳐지지 않는 지식들을 다시 돌아보려던 순간.
“윽.”
하윤의 귓속에 신음같은 아주 거슬리는 소리가 뒤에서 나지막하게 감돌았다.
배신자의 자식이라고 전부가 기피 하던 자신의 자리.
그러나 유일하게 앉은 뒤에는 분명 그 소년이 있었다.
스륵.
갑자기 목을 스친 불안한 느낌.
하윤은 시험시간임에도 불구하고 급히 뒤를 돌아보려던 찰나.
터엉!
갑자기 정호찬이 크게 뜬 눈과 함께 앉아있던 교사용 의자에서 일어났다.
급하게 일어나면서 넘어진 의자가 바닥에 부딪히며 자아낸 거친 소음에 황신영을 비롯한 몇몇 학생들이 눈가를 찌푸렸지만, 그에게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놀란 표정을 가라앉힌 정호찬은 곧바로 하윤이 있는 방향으로 급하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자신이 뒤를 돌아보려 한 행동이 부정행위로 걸린 것일까?
아까 전의 작은 싸움을 떠올린 하윤은 불길한 느낌에 급하게 손을 들었지만.
쓰윽.
그는 하윤의 행동에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으며 그대로 다가왔다.
문득 커진 불안감에 하윤이 이번엔 입을 열려고 했으나 정호찬은 이미 그런 하윤을 무시하고 옆을 빠르게 지나갔다.
멈칫.
갑작스러운 교사의 행동에 당황한 하윤은 지금이 시험 중인 것도 잊어버리고 뒤, 당황한 눈빛으로 선일이 앉아있던 책상으로 시야를 돌리려던 순간.
“이선일!”
정호찬이 소리쳤다.
“너 괜찮니?”
덜컹!
하윤은 이게 무슨 상황인지도 모르지만 사고보다도 빠르게 움직였다.
그들이 일으킨 소음은 다른 학생들의 시험을 방해하는데 충분했다.
“무슨 일이야?”
“몰라.”
“야 쟤 쓰러진 거 아니야?”
“그냥 자는 거 아닌가?”
“아닌 것 같은데?”
한 소년이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을 보니 눈을 감고 얼굴을 책상에 박은 선일이 있었다.
뒤에서는 정호찬이 그의 몸을 급하게 흔들고 있었지만 움직이지 않았다.
당황할 새도 없이 일어난 급격한 상황에 순식간에 B반은 어수선해졌고, 정호찬은 그걸 제재할 겨를이 없었다.
다급하게 일어나 선일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는 하윤의 눈동자가 떨렸다.
그녀는 이 상황이 익숙했다.
사람이 쓰러진 상황이 익숙하다는 사실에 목구멍에서 구토감이 치밀었고, 머릿속에서는 지옥 같았던 과거의 일들이 떠올랐다.
‘우리 딸... 아빠 없어도 꼭 씩씩하게 살아야 돼. 할 수 있지?’
‘웅!’
머리 깊은 곳에 박아 두었던 트라우마가 재생되는 패닉에 빠져 그녀의 손이 덜덜 떨렸지만 다른 사람들은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학기 초부터 일어난 긴급상황에 정호찬은 눈을 깊게 감고 있던 선일을 등에 업은 후 교실 밖을 나가면서 소리쳤다.
그가 작게 뜬 눈에는 단호한 눈빛이 자리 잡고 있었다.
“잠깐 시험 중지다. 다른 선생이 올 때까지 기다리고 있어.”
처음 봤을 때와는 달리 다정한 말투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정호찬은 현역 시절처럼 냉정한 이성으로 학생들을 바라보았다.
선일을 업은 그는 나가면서 손목에 위치한 스마트폰 대용 헌터워치를 안정적으로 조작했다.
정호찬이 빠른 속도로 달려 나가자마자 스피커에서 시험 중지라는 알림이 곧바로 들려왔고 덕분에 교실은 어지러워졌다.
당황한 학생들 사이에서 한 남학생이 웃음소리를 내었다.
“무슨 시험 보다가 쓰러지냐?”
“그러니까. 근데 아까 걔 신영이한테 당한 애잖아. 신영이가 X나 쎄서 그런 거 아님?”
“그럴지도? X나 약골이다 진짜 크크크.”
남의 일이라는 듯 사람이 쓰러진 일에 대해 편안하게 말하는 그들을 보며 하윤의 이성으로 순간적으로 참을 수 없는 화가 뻗쳐왔다.
감정에 이끌려 마력을 일으킨 그녀가 그들을 향해 불꽃을 터트리려 했지만.
“그만 떠들고 앉아!”
그녀보다 먼저 황신영이 계속해서 떠드는 학생들을 먼저 제지했다.
“뭐야?”
떠들어대던 두 사람은 자신들을 말린 사람이 누군지 바라보았고 그들은 곧장 조용히 자리에 앉았다.
다른 학생들은 그 광경을 익숙하다는 눈빛으로 쳐다봤지만 유일하게 신하윤은 의문을 가질 수 있었다.
‘...당신이 왜?’
아까까지만 해도 죽이려 달려들었을 텐데.
그녀는 푸른 머리를 찰랑거리는 황신영이 갑자기 태도를 바꾼 이유를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녀는 한순간 볼 수 있었다.
‘뭐지.’
그녀의 목에서 흘러내리던 식은땀.
저 여자가 긴장하는 이유를 알 수 없었지만 아마 좋은 감정 때문이 아닐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한 하윤은 자리에 앉았다.
그것보다 갑자기 쓰러진 소년에게 마음이 쓰였다.
하윤은 다른 선생이 들어오고 나서도 여전히 잡생각들을 지울 수 없었다.
대한고의 처음을 정하게 될 시험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
그 시각.
치직...
선일은 노이즈로 이루어진 공간 속에서 아래를 향해 계속해서 떨어지고 있었다.
슈욱.
도대체 언제까지 떨어지는 건지 또 이곳이 어디인지.
알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지만, 이 공간 자체가 이상하게 편안했던 선일은 허공에서 누웠다.
직후.
퐁.
마치 거대한 물웅덩이에 물방울 하나가 떨어진 듯한 귀여운 소리와 함께 바다처럼 출렁거리는 곳에 도착했다.
거대한 파도에 들어온 것 같은 느낌에 무의식적으로 눈을 감은 채 숨을 멈춘 선일이었지만.
쓰으...
그는 곧이어 이 안에서 생명 활동이 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도 아직은 익숙하지 않았기에 눈을 뜨는 것도 조심스러운 선일.
움찔.
힘겹게 뜬 소년의 검은 눈동자에 기이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이질적인 무채색의 바다가 가득 채웠다.
동시에 선일은 자신이 회색 바다에 물든 것 마냥 온 세상이 무채색으로 변했다는 것을 눈치챘다.
자신이 썼던 악사영에서 이런 공간은 존재하지 않았던 선일은 주변을 확인하기 위해 두리번대었다.
‘어라?’
곧이어 사람의 형체가 새하얗게 발광하는 모습을 발견한 선일은 다가가기 위해 바다 안에서 허우적대었고 금세 그 형체가 자세히 보일 정도의 거리까지 다가갈 수 있었다.
어느새 자신이 봤던 사람의 코앞까지 다가간 선일.
사람의 정체를 확인하자 선일은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너 뭐야?”
사람의 형태를 한 무언가.
그 존재가 선일을 향해 웃었다.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