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11화
따가운 파열음이 교실에서 울려 퍼진 순간.
싸아아...
더없이 차가운 정적이 흘렀다.
나지막한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불편한 침묵 속에서 하윤은 놀란 눈빛으로 앞에 선 선일을 바라봤다.
세기의 미남이라고 말할 만큼 잘생기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은은한 분위기를 풍기던 훈훈한 소년의 입가는 평소에 맴돌던 부드러운 웃음이 아니었다.
떨림도 비웃음도 아닌.
감정 한 톨 느껴지지 않는 싸한 무표정.
그를 안 지 고작 이틀 밖에 되지 않았지만, 하윤의 눈에는 지금 선일이 다른 사람으로 보일만 큼 이질적이었다.
그렇기에 지금 그가 한 행동은 침착함을 애써 가장하던 하윤에게는 너무나 당황스러운 일이었다.
갑자기 왜 그랬는지.
하윤이 차가운 분위기의 선일을 보며 물으려던 찰나, 고개가 돌아갔던 황신영이 먼저 입을 열었다.
“뭐하...”
“뭐하는 짓이야?”
“뭐긴 뭐야.”
원작자 강선일이 느낀 답답함과 지금까지 조롱당한 이선일의 답답함을 뚫어버리다 못해 온몸을 시원하게 만드는 사이다에 그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지만, 겉으로 티를 내지 않았다.
‘속 시원하네.’
물론 그런 감정을 알아본 건지 황신영은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우러나오는 분노를 담은 눈으로 선일을 바라보았다.
선일은 살기를 띄운 황신영을 똑바로 바라보며 담담한 어투로 말했다.
그 말을 하는 동시에 선일은 자신의 손바닥을 짝 마주치면서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싱긋.
“요즘 시대에 말도 안 되는 학교폭력이 일어날 것 같아서?”
아무 일 없었다는 것처럼 조곤조곤 들려오는 앳된 목소리.
마치 오늘 날씨 좋다는 것처럼 평범한 말투로 들렸지만.
“후우...”
황신영은 그런 선일의 말투에 활화산 같은 분노 아니, 살의가 미친 듯이 터질 것만 같았다.
그러나 이미 추종자가 많은 교실 내에서 우악스럽게 화를 내 우아함을 깨는 추태를 보이기 싫었던 황신영은 분노하기는 커녕 오히려 선일을 보며 부드럽게 웃음 짓기 시작했다.
“무슨 학교폭력이야. 친구를 도와주려 하는 건데.”
[‘황신영’이 ‘이선일’에게 살의를 가집니다.]
그녀가 말하자마자 떠오르는 푸른 창을 본 선일의 등에서 소름이 돋았다.
그 말은 즉슨.
‘어우, 소름 끼쳐.’
입가의 피를 닦는 모습도, 저렇게 웃는 표정도 우아하기 그지없는데 저 가면 속에는 선일을 죽이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는 말.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사기적인 설정을 가진 주연들의 관심은 최대한 피하고 싶었던 그에겐 매우 안 좋은 소식.
허나 후회하기에 이미 시기는 늦어버렸다.
선일이 내가 왜 나섰을까 라며 자신을 몰아세우던 중 이상한 소리가 귀에 울려 퍼졌다.
...쩌적!
마치 따뜻한 온천의 온도가 한순간에 얼어버린 소리가 이런 걸까.
따끔!
선일은 황신영이 지어낸 표정을 보며 돋은 소름과는 달리 수많은 가시가 피부를 꿰뚫는 차가운 불쾌함을 느꼈다.
한 마디로 정의하면 뭐랄까.
마치 자신이 맨몸으로 북극 한가운데에 덩그러니 서 있는 것 같은 한기였다.
“조금 쌀쌀해지지 않았어?”
“그러게? 봄인데 이상하게 춥다.”
다른 학생들도 이 한기를 느꼈는지 팔을 감싸 쥔 것을 보면 착각이 아닌 게 분명했다.
살짝 숨을 내쉬어보니 흐릿하지만 입김이 새어나왔다.
학기 초라 아직 꽃샘추위가 올 시기도 아닌데다가 교실의 창문은 모조리 닫혀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춥다고 느낀 이유는 무엇일까.
‘설마..?’
설마 하는 눈빛으로 황신영을 바라본 선일은 직후 헛웃음을 뱉었다.
감정을 감춰버리는 사기적인 표정숨기기도 지우지 못한 진심 어린 감정에 이끌려 그는 나지막이 욕설을 뱉었다.
“미친 X..”
황신영의 발끝부터 천천히 피어오르는 청백색의 꽃.
수정처럼 티 없이 투명한 청화(靑花)의 정체는 다름 아닌.
‘고작 자기가 화났다고 속성마력을 써?!’
마력.
선일은 질린다는 표정을 지은 채 한기가 가장 짙게 느껴지는 하반신을 향해 고개를 내렸다.
지금 시야에는 황신영의 발에서부터 피어나는 푸른 장미 덩굴이 대리석 바닥으로 전달되며 다리를 감싸고 있었다.
바라보기만 했는데도 온몸이 시려오는 한기가 몸을 감쌌다.
황신영의 외모처럼 현실성 없는 우아함을 자아내는 저 꽃들은 모두 마력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도 조금씩 몸을 타고 올라오는 꽃에게 저항하기 위해, 자신의 마력을 일으킨 선일이 황신영의 설정창을 확인하였다.
[설정]
-명칭:황신영
-칭호:악귀사냥꾼의 후예(희귀), 얼음꽃의 주인(유일)
-근력:LV4
-마력:LV7
-민첩:LV7
-체력:LV4
-지능:LV5
-스킬
악귀살해(A),만년설의 후계(S),궁신의 피(A)
상급 헌터와 하급 헌터의 차이점이자 세계관 내에서 강자로 분류되는 기준인 속성마력.
헌터들은 모두 세계를 자신의 기준으로 덮어 쓸 수 있는 힘인 마력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속성마력은 다르다.
아무런 성질도 가지고 있지 않은 마력 중 형형색색으로 밝게 빛나는 속성마력은 가장 원초적이고 강렬한 힘인 원소를 다룬다.
그러나 원소의 힘을 다루려면 제일 먼저 사용자의 적성에 맞아야 하고, 또 그만큼 원소와 가까워야만 한다.
아카데미물인 원작에서도 이런 속성마력을 개화한 인물은 주연 중에서도 그리 많은 편이 아니었지만, 그중 한 명이 저 황신영이었다.
‘만년설의 후계...’
악사영 내에서 강력한 편에 속하는 속성마력인 얼음.
수많은 스킬 중에서도 최상위권에 속하는 만년설의 후계는 그 뿌리와도 같은 스킬이었다.
마력을 일으키며 최대한 억제를 하고는 있지만 곧 있으면 허리부터 상반신까지 꼼짝없이 침투할 것이다.
물론 매우 위험한 상황까지 온다면 불꽃의 힘을 다루는 홍염권을 사용할 거지만, 마력량도 낮은데다가 스킬 등급도 만년설의 후계보다 낮다 보니 얼마나 영향을 줄지는 알 수 없었다.
선일은 표정숨기기로 감정을 숨기며 평정심을 유지하기 시작했다.
“신영아, 너 감당돼?”
“뭐가?”
그 말처럼 황신영은 그 말이 이해되지 않는 것처럼 싸늘하게 웃었다.
선일은 뻔뻔한 표정을 연기하는 황신영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말을 이었다.
“나 건드리면 감당되냐고.”
“흐음... 물론 천검이가의 직계한테 이러면 안되지만 지금의 넌 아니잖아.”
입가를 싱긋거리며 선일의 말에 계속해서 반박하는 황신영.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주변 학생들이 다시 한 번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쟤가 그 천검이가의 이선월이야?”
“근데 분명 교사가 이선일이라고 불렀잖아. 게다가 만약 저 자식이 그 천검이가의 천재였으면 신영이 마력에서 이미 벗어났을 걸?”
“그럼 쟤는 뭐야?”
“아! 나 예전에 아빠한테 들은 적 있어. 현 천검의 자식이 쌍둥인데 동생은 재능 하나 없는 쓰레기라고 하던데?”
다 들린다 이 새끼들아.
그러나 저 말들이 모두 맞는 말이라 반박할 수가 없다.
반박할 시간도 없고.
선일은 다시 한 번 황신영을 노려보았다.
손으로 감춘 저 얼굴에서 도도한 얼굴에서 구역질 나오는 감정이 스멀스멀 기어 나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진짜 내가 설정했지만 진짜 영악한 년이네.’
지금 황신영은 그를 이곳에서 공개적으로 묻어버리려는 생각인 것이 분명했다.
천검이가는 세간에 정의라는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지만, 다른 쪽으로는 그만큼 가혹하다고 알려져 있다.
강자를 경험하기 위해 세계를 유랑하거나, 천검이가를 나와 출가를 하는 것처럼 일시적이나마 천검이라는 수식어를 떼게 된다면 본가로부터 지원은 물론 약간의 관심도 받지 못한다.
게다가 이후 본가로 다시 돌아간다 해도 출가했을 때 있었던 일들은 모두 없는 일이 되었다.
선월과 선일이 대한고로 입학한 것도 어찌 보면 출가로 볼 수 있었기에 어제부터 천검이가의 지원은 전혀 받을 수 없다.
황신영도 그걸 알았기에 지금 이렇게 말을 건네는 척하면서 선일을 다른 학생들의 앞에서 자연스럽게 까 내리고 있었다.
또각또각.
교실엔 분명 다른 학생들도 많을 텐데.
구두 소리는 교실에 그녀 혼자 있는 것처럼 넓게 퍼졌다.
움직이지 못하는 선일에게 아주 천천히 다가온 황신영이 그의 귀에 대고 조용히 속삭였다.
“그러니까 왜 깝쳤어 쓰레기야.”
선일을 우아한 얼굴로 비웃는 황신영.
짐짓 빈틈을 보이는 것처럼 보였지만 다리를 묶은 얼음꽃은 여전히 단단하고, 더더욱 차가워지고 있었다.
결국 이 이상 버티기 힘들었던 선일이 홍염권을 운용하려던 순간, 뒤쪽에서 뜨거운 열기가 피어났다.
화륵!
이어서 불편했던 다리가 조금씩 움직이자 이상함을 느낀 선일이 황신영의 얼굴부터 급하게 확인했다.
도도한 여왕처럼 우아한 웃음을 지어내던 그녀의 표정은 조금씩 무너져 내려갔고 그녀의 눈은 선일을, 아니.
그 뒤를 노려보고 있었다.
선일도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뒤를 바라보려던 찰나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만해요.”
고개를 돌리자 선일의 시선에서 하윤의 작은 양손에서는 불꽃이 피어나고 있었다.
그녀의 불꽃은 그의 다리까지 스멀스멀 기어 올라왔고 동시에 우아한 얼음의 꽃을 게걸스럽게 먹어 치우고 있었다.
패도의 불.
주로 악마들이 주로 사용하는 검붉은 화염은 황신영의 발아래에서 피어오르던 얼음까지 녹이기 시작했다.
얼음이 처음과 비교도 못할 정도로 약해졌다는 것을 깨달은 선일이 조용히 홍염권을 운용했다.
하윤이 일으킨 지옥불과는 달리 살아있는 생명이 가진 열정을 그대로 표현하는 것 같은 황금빛에 가까운 홍염(紅炎).
화르륵!
그가 순간적으로 폭발시킨 불꽃은 순식간에 얼음꽃을 녹이다 못해 태우고 사라졌지만, 다른 학생들은 눈치 채지 못했다.
이 사실을 알고 있는 것은 단 두 명.
홍염을 일으킨 이선일.
이미 허공으로 사라진 얼음의 주인인 황신영.
이번엔 거꾸로 선일이 이겼다는 표정을 지으며 황신영을 조용히 바라보았다.
물론 대부분 신하윤이 태우긴 했지만 그래도 마지막은 자신의 손으로 풀었으니까 이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꼬우면 더 강한걸로 가져오던가.”
“이 쓰레기가...”
생각지도 못한 광경에 어느새 썩어버린 미소 그대로 굳어버린 그녀의 몸에서 곤충의 피처럼 비릿한 얼음들이 터지려던 순간 남자의 목소리가 사자후처럼 터져 나왔다.
“그만!”
딱!
정호찬은 묵직하게 손가락을 튕기더니 신하윤과 황신영의 마력이 한순간에 증발했다.
선일이 한순간만 일으켰던 홍염은 곧바로 사라졌기에 그에게 걸리지 않았다.
이어서 시험지들을 말아쥔 채 강하게 내려친 그가 소리쳤다.
“너네 미쳤어? 아무리 학기 초라고 그렇지 교실에서 마력을 쓰다니 제정신이야?”
시험지 뭉치를 끼고 들어온 그는 짐짓 소심해 보이던 인상과는 다르게 격렬하게 화를 내고 있었다.
‘호오...’
썩어도 준치라더니.
물론 준치가 세계 3대 마탑의 제자이긴 하지만 말이다.
정호찬이 순간 분출한 기세에 마력을 일으킨 두 주동자의 표정이 하얗게 질렸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그는 화를 삭이며 손으로 눈가를 가렸다.
“후우 너네는 시험 끝나자마자 따라와.”
그 말과 동시에 일어나있던 학생들은 모조리 자리로 돌아갔다.
정호찬이 들어옴으로써 해프닝이 일단락되는 줄 알았던 선일의 눈앞에 이제껏 보지 못했던 알림이 새로 갱신되었다.
[침식율이 상승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