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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화
..덜컥!
호텔에서나 볼 법한 철문이 열리자 기숙사 안으로 한 소녀가 들어왔다.
파란 명찰에 검은 실로 수놓아진 신하윤이라는 이름.
그녀는 오랜만에 느껴보는 듯한 안락한 공간 속에서도 어딘가 불편한 느낌이 들었다.
아니, 느낌이 아니었다.
“윽!”
참기 힘든 듯 그녀의 입에서 고통 어린 소리가 들쑥 튀어나왔다.
하윤은 명찰이 있는 왼쪽 가슴을 쥐어짜듯이 잡아당겼다.
손톱에서 피부가 조금 찢어지는 느낌이 느껴졌다.
원래 고통은 다른 고통으로 잊어야 하는데 신하윤에게는 두 고통이 모두 다 사라지지 않아 힘들었다.
그때 심장 언저리에서 느껴지는 불쾌한 이물감이 꿈틀댔다.
욱씬욱씬...!
마치 그녀가 무슨 짓을 하든 상관없다는 것처럼 강렬한 이물감을 향해 하윤은 그 존재를 거부한다는 의지를 강하게 표현했다.
하지만 돌아오는 것은 심장을 가시덩굴로 감싸 조이는 것 같은 극심한 고통이다.
“으윽....”
그 사건이 분명 2년이나 지났는데도 단 하루도 느껴지지 않았던 적이 없었던 심장의 통증은 오늘따라 더욱 심한 것 같았다.
“...후.”
잠시 후, 조금씩 통증이 사그라들어가자 하윤은 목덜미에 맺힌 식은땀을 닦고 침대에 누웠다.
원래 살았던 집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부드러움이었지만, 자신의 편의를 신경 쓸 만큼 여유롭지는 않았다.
힘겨움이 그대로 느껴지는 한숨을 내쉰 하윤은 셔츠를 살짝 들어 안쪽을 보았다.
꿈틀.
자신의 쇄골 아래로 뚜렷하게 보이는 상처 주위로 한 뼘짜리 검붉은 상처에서 아주 미약한 기운이 흘러나왔다.
그녀가 가진 원소의 마력을 가볍게 누르는 마기.
아버지가 죽으며 남긴 상처를 얻은 후부터 하윤의 정신과 몸은 조금씩 죽어가고 있었다.
“하아...”
그녀가 이 학교에 온 이유도 살아남기 위함이었다.
남은 기간은 자신의 직감으로는 1년 정도.
그전까지 이 상처를 치료하지 못한다면 자신은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이대로 짧은 삶을 끝내야만 했다.
그건 싫다.
꽈악...!
가녀린 손에 힘이 들어갔다.
짧은 손톱이 손바닥을 뚫어 피가 흘러나왔지만 그녀는 멈추지 않았다.
고통에 익숙해진 하윤이 지그시 눈을 감자마자 머릿속에 순간 한 소년이 떠올랐다.
분명 처음 본 얼굴임에도 이상하게도 낯이 익던 소년.
첫 만남은 약간의 사고였지만, 이후 자연스럽게 웃으며 다가온 그를 내치지 못한 이유가 뭐였을까.
고통 때문에 예민한 성격을 가지게 된 하윤은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의 마음을 알지 못했다.
다만 딱 한 가지는 기억이 난다.
부딪히는 순간부터 헤어지기 직전까지.
“아프지 않았어.”
하윤은 무의식적으로 셔츠 위로 상처를 쓰다듬었다.
여전히 상처 속에서 사악한 존재감을 내뿜는 검은 씨앗.
그러나 평범한 갈색 머리의 선일과 있을 때만은 어째서인지 씨앗이 얌전했다.
씨앗이 자신의 의지를 느낄 수 있는 만큼 자신도 씨앗의 의지를 느낄 수 있다면 좋겠건만.
일방통행이라는 것이 너무나 불합리했으나 하윤은 단 하나 씨앗이 본능적으로 선일을 거부하고 있다는 사실만 알 수 있었다.
“..근데 남은 시간 동안 뭐하지.”
가볍게 기지개를 켜며 하윤이 몸을 일으켰다.
입학식까지 남은 시간은 3시간.
그녀는 대충 의자에 걸쳐놓았던 가방을 열어 짐을 풀기 시작했다.
검은 눈동자의 소년을 기다리면서.
***
선일은 그에게 향한 푸른 창에서 눈을 돌릴 수 없었다.
입까지 버린 상태로.
“미친.. 이게 뭐야?”
얼마나 당황했는지 말까지 더듬는 선일.
첫 번째 특전인 설정창에 대해서는 이미 어떤 능력인지 한번 보았다.
김선일이 아닌 다른 등장인물들에 대한 스테이터스창.
게다가 그것만으로 끝나지 않았는지 원작에서는 적어두지 않았던 세세한 설정들도 알려줄뿐더러 등장인물들이 지금 가지고 있는 감정들도 보여주는 것 같다.
신하윤이 가지고 있는 씨앗의 발아 속도라던가, 서한울이 선일에게 순간적으로 느낀 감정이라던가.
물론 이 능력의 경계가 어디까지인지는 확실하게 알아봐야 할 것 같았지만 그럼에도 이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도움이 될 만한 능력인 것은 확실하다.
선일은 방에 들어오자마자 이미 알고 있는 설정창 이외에 남은 특전들을 확인했다.
[특전: 인벤토리-‘이선일’에게 아공간을 부여합니다.]
이 세상에는 마력이 담긴 물건인 통칭 아티팩트가 존재한다.
그것들은 가지고 있는 효과와 위험도에 따라 등급이 나눠지는데 공간계열의 아티팩트는 대다수가 이선월이 가지고 있는 달미르보다 높은 등급인 A+부터 시작이었다.
게다가 공간계열 아티팩트는 효과가 그리 강력한 물건들은 아니지만 매우 유용하고 희귀한 만큼 5대 가문인 천검이가의 창고 안에서도 양이 그리 많은 편이 아니었다.
선일에겐 공간계열 아티팩트를 언젠가는 얻어야 했기에 지금 얻은 인벤토리는 설정창 이상의 수확일 수도 있었다.
본능적으로 아공간을 여닫는 방법이 동기화처럼 각인된 선일이 곧바로 인벤토리를 확인하자마자 입가가 벌어졌다.
“와 뭐야? 되게 넓네?”
가장 대중적으로 알려진 A+급 아티팩트 아공간가방.
제작한 공방에 따라 성능은 달랐지만 기본적으로 5㎡의 크기를 가졌다고 알려졌다.
그러나 지금 얻은 인벤토리는 RPG게임에 나오는 것처럼 5X10의 크기의 칸으로 나누어져있었다.
만약 한 칸당 1㎡의 크기를 가졌다고 쳐도 평범한 A+급 아티팩트의 두 배에 달하는 공간을 확보한 것이다.
그러나 운이 좋게도 그게 끝이 아니었다.
[특전:인벤토리는 에피소드를 끝낼 때마다 10칸씩 증가합니다.]
이어지는 설계자의 말.
주인공인 이선월이 중반부의 기연만 해도 수십 개가 넘어간다.
과거의 자신이 그렇게 많은 기연을 만들었는지 모르지만 어쨌든 이건 좋은 기회다.
물론 전부 가져갈 생각은 없지만, 획득한 히든피스들의 출처를 숨기는 데 도움이 될 것이 분명했다.
“후후...”
선일은 흥분으로 흔들리는 손을 천천히 설계자가 띄운 창에 가져다 대었다.
재능충.
오늘 얻은 세 가지 특전 중에서 가장 기대되는 능력.
설계자를 통해 재능충에 대한 설명을 확인하는 순간, 선일은 자신의 기대가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니, 오히려 기대 이상이었다.
“지리는데..?”
[특전: 재능충-등장인물의 스킬을 선택해 영구적으로 습득합니다(최대 3개 한정)]
특전 중 유일한 스킬.
선일이 썼던 악사영에는 주인공인 이선월 급은 아니지만 비등한 재능을 가진 학생들도 존재했다.
악사영의 빌런인 마인에게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인물, 수수께끼의 능력을 가진 인간들 등등.
수도 없이 많다.
그런 등장인물들의 스킬을 익힐 수 있다는 것은 확실히 선일의 성장에 부스터를 단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한계가 3개이긴 하지만 그게 뭐 어떤가!
“그것들을 커버할만한 사기 스킬들을 가져오면 되지.”
띠링!
그 말에 대답하듯 설계자는 경쾌한 소리와 함께 선일의 기대를 무참히 짓밟았다.
[특전:재능충으로 획득할 수 있는 스킬은 최대 A급까지입니다.]
“참 친절하시네...”
선일은 힘이 빠진 한숨을 쉬었다.
최대 S+급까지 있는 스킬 중에서 A급만 획득할 수 있다는 말은 아쉬웠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사기적인 특전인 것은 사실이었다.
“원래라면 하늘이 내린 재능을 얻고 싶었지만 안 되니까 어쩔 수 없네.”
선일이 제일 먼저 생각했던 이선월이 가지고 있는 S+급 스킬인 [하늘이 내린 재능]은 스텟에 성장 속도와 보정이 최대로 붙는 스킬이었다.
아쉬움이 느껴지는 쓴웃음과 함께 입맛을 다신 선일의 눈앞에 그가 가질 수 있는 수많은 스킬들이 나열되기 시작했다.
딱 봐도 수백, 아니 수천 개가 넘어가는 스킬들을 보고 있자 시야가 어지러웠다.
보아하니 원작에서는 등장하지 않았던 것들도 존재하는 걸 보니 하나하나 효과를 확인하면서 찾아가기엔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릴 것 같았다.
하나하나 내려가며 효과를 확인하던 선일이 뭔가 생각났다는 것처럼 설계자에게 물었다.
“혹시 이거 내가 원하는 효과만 검색할 수 있나?”
[가능합니다.]
설계자의 즉답에 선일은 곧바로 바쁘게 움직이던 손가락을 멈췄다.
남의 스킬을 얻는다는 생각을 안 한 것은 아니었다.
악사영에는 남의 힘을 강탈하는 인물도 있었으니까.
그렇기에 선일이 가정했을 때 1순위가 [하늘이 내린 재능]이긴 했지만 대체할 스킬들도 생각해 놨다.
선일은 자신의 스텟창을 확인하고 설계자를 바라봤다.
“흐음.. 격투술에 관련된 스킬 좀 보여줘.”
악사영이 판타지 웹소설인 만큼 검이나 창, 같은 무기를 쓰는 달인들은 이 세계 안에 수많이 많았다.
그렇지만 선일은 빙의 전에는 그런 무기들은 한 번도 다뤄본 적 없었고 기본적으로 살벌한 날붙이에는 정이 가지도 않았다.
결국 선일이 생각했던 스킬은 바로 격투술.
“분명 원작에서 이선일이 천검이가에서 배운 기술들은 모계쪽과 연결된 마력술과 지식밖에 없었어.”
하지만 오늘 처음 본 이선일의 스킬창에는 분명히 격투술이 존재했다.
그것도 최하급인 F급이 아니라 D급.
그 의미는 즉.
“주인공급은 아니어도 기본적으로 무술의 재능이 있다는 거지.”
독백을 하는 동안 수많은 스킬들이 끊임없이 사라지고 있었다.
수천 가지의 스킬들 중 선일이 말한 조건에 부합하는 것들은 1분 정도의 시간이 더 지난 뒤에나 확인할 수 있었다.
[검색결과: 권투(E),절권도(E),카포에라(E),파쇄권(D),....]
그렇게나 줄였어도 아직도 스킬의 수는 백 가지도 넘었다.
이렇게나 많을 줄 몰랐던 선일은 번거롭겠지만 한 번 더 설계자에게 말했다.
“A급만 남기고 다 지워줘.”
스슥!
다시 한번 삭제되는 목록들을 보며 선일이 웃음 지었다.
최상급 무술은 아니지만, 확실히 생존하기에는 쓸 만한 등급이 A였다.
[검색결과:천류권(A),이천강권(A),천암쇄권(A)...]
그렇게 남은 것은 고작 10개 남짓이었다.
그중 대부분이 천검이가의 무술이었다.
“확실히 천검이가가 대단하긴 하네.”
천검의 피를 이은데다가 격투술의 재능이 있는 만큼 천검이가의 무술은 그의 몸에 매우 잘 어울릴 것이 분명했지만 선택할 생각은 없었다.
원작의 이선일은 단 한 번도 이천야나 다른 스승들에게 가문의 무술을 배운 적이 없다.
만약 배우지도 않은 천검이가의 무술을 그가 쓴다면 감이 좋은 이선월이나 가주인 이천야에게 걸려 주목을 받을 수도 있었다.
물론 천재라고 칭송받을 수도 있겠지만 그건 그것대로 귀찮아진다.
“절대 그렇게 되면 안 되지.”
선일은 천검이가의 무술에는 관심도 주지 않고 넘어갔다.
하지만 남은 격투술들의 설명을 하나하나 확인해봤을 때, 딱히 맘에 드는 것이 없었다.
정 안되면 그냥 대충 찍어서 고를 생각으로 마지막 남은 스킬을 확인했을 때, 선일은 뜻밖의 스킬을 찾을 수 있었다.
[홍염권(A)- 타오르는 생명의 염(炎)을 다룹니다. 소유자는 화염저항을 가집니다.]
“찾았다!”
잭팟.
그 말이 가장 잘 어울리는 만큼 그가 첫 번째로 해결하게 될 신하윤의 악마화에 대비할 수 있는 스킬이었다.
어쩜 이렇게 필요하던 스킬과 겹치는지 마지막에라도 눈에 띈 홍염권이 너무나 고마웠다.
그렇게 선일은 망설임 없이 손가락으로 설계자를 눌렀다.
[홍염권(A)를 획득합니다! 추가로 격투술(D)가 홍염권과 융합합니다!]
홍염권을 얻자마자 신체가 불타오르는 것처럼 열기를 품었다.
그러나 절대 불쾌한 기분은 아니었다.
오히려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온천에 몸을 담근 것 같은 편안한 기분에 그의 입에서 자연스레 웃음이 새어 나왔다.
열기를 이용해 몸의 기세를 갈무리한 선일이 홍염권을 습득할 때 자신도 모르게 감았던 눈을 떴다.
화륵..!
심장에서 불꽃이 일렁이는 것을 느끼며 화염저항도 자연스레 습득했다는 것을 알았다.
첫 번째 에피소드를 넘기기 위해서는 무조건 화염 저항과 관련된 스킬이나 아이템이 필요해 두 번째 스킬은 화염 저항이나 관련 스킬을 선택하려 했었는데, 홍염권을 얻은 이상 다른 스킬을 가져와도 될 것 같았다.
“흐흐.. 다음 건 뭘로 하지?”
기분 좋은 웃음을 낮게 흘리며 선일은 계속해서 설계자의 창을 꾸준히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