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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화
삐빅.
손목에 매여 있는 서 9시를 알리는 알람이 울렸다.
아파트와 흡사한 거대한 건물의 입구 앞에 놓인 책상.
그 앞에서 서류와 펜을 들고 앉아있는 남학생의 교복에는 3학년이라는 것을 의미하는 붉은 명찰이 박혀있었다.
남학생은 책상에 팔을 묻고 엎드리면서 하품을 크게 내쉬었다.
“하암.. 아침부터 일하는 거 싫어...”
오전 8시부터 시작된 기숙사 배정에 피곤함을 감추지 못하는 남학생의 옆에서 같은 작업을 하고 있던 여학생이 툭 하고 쏘아붙였다.
“졸지 말고 일이나 해. 학생회장이 그 정도는 해야지.”
“야, 슬아야, 좀만 쉬자... 지금까지 받은 신입생들이 몇 십 명인데!”
학생들이 오지 않는 틈을 타 티격 대는 두 학생.
그 순간.
“쟤지..?”
“맞는 것 같은데? 천검이가의 후계.”
“X나 잘생겼네.. 분위기 지린다.”
그들의 앞을 지나가는 많은 인파에서 속삭이는 말들이었으나, 한 사람이 아닌 여러 명이 동시에 떠들어대니 코앞에 있는 두 사람이 못 들을 리가 없었다.
한울은 말했다.
“그 친구 왔나 보네.”
“아 걔? 이선월인가 뭔가?”
“사람한테 뭐가 뭐냐.”
입학하기도 전부터 선월은 이미 그들 또래 사이에선 이미 유명 인사나 다름없었다.
유명한 헌터들의 자녀나 명문가 자제들이 어린 나이에 넘치는 재능을 마음껏 펼친 천검이가의 후계를 모를 리가 없었다.
저 멀리서 보여 지는 잘생긴 소년을 보며 책상에 앉아있던 학생회장, 서한울이 순간 허탈한 웃음을 터트렸다.
“대단하긴 해.”
“응? 뭐가?”
“그냥 예전 생각나서.”
천검의 쌍둥이가 15살을 맞았을 때.
많은 유명인들이 모인 연회장에서 15년이라는 세월 속에서 익혔던 무술을 선보인 선월을 본 손님들은 전부 하나같이 경악을 감출 수 없었다.
한울도 그 연회에 있었기에 자신보다 2살이나 어리면서도 그 나이에 걸맞지 않은 압도적인 무위를 보인 선월을 잊을 수는 없었다.
현 천검의 어린 시절을 빼다 박았다고 이야기가 나올 정도.
“충격 많이 받았었지. 나보다 더 대단한 애거든, 그 친구.”
한울도 천부적인 재능을 가졌다고 주변에서 떠받들었지만 이선월은 천재라는 말도 부족했다.
그의 말을 들은 원슬아는 그 말을 듣더니 차가운 웃음을 지었다.
“3학년이 되는 동안 내내 1위만 했던 너보다 대단한 괴물? 진짜 어이가 없네.”
“아마 쟤가 나보다 더할걸?”
허탈하게 웃는 한울.
그를 보며 자신의 동그란 안경을 치켜 올리며 슬아가 계속해서 말했다.
“그럼 너 동생도 알고 있겠네?”
“아 동생? 이선일인가?”
“응응. 걔는 어때?”
“흐음...”
머리로 선일을 떠올리며 서한울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고민했다.
천검의 후계로써 강렬한 기억을 남겼던 선월과는 달리 선일은 연회에서 되게 조용했다.
다만 뭔가 숨기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은 들긴 하지만..
아마 그게 무엇인지는 모르겠으나 자신이 기억하기에 그리 인상적인 특징은 아니었다.
한울은 잠시 고민한 후 대답했다.
“그냥 평범해. 잘난 것도 아니고 못난 것도 아닌 그냥 보통.”
“그래?”
“기숙사 배정받으러 왔는데.”
둘이 평소처럼 대화를 하는 동안 한울의 앞으로 키 큰 소년이 찾아왔다.
흑발과 갈색의 눈동자, 이선월이였다.
한울은 여전히 차가운 선월을 보고 접대용 미소를 지었다.
물론 변한 것은 있었다.
따끔!
피부를 바늘로 콕콕 쑤시는 듯한 기세.
마력을 다루는 기척은 하나도 없었건만, 그저 풍기는 분위기만으로도 이 정도의 기운을 뿜어낸다.
‘더 강해졌네. 나 1학년 때보다 훨씬 강한 것 같은데?’
속으로는 이런 생각을 하면서도 한울은 서류를 뒤적거렸다.
곧바로 서류를 찾은 한울은 그것들을 슬아에게 건넸다.
익숙한 눈길로 종이를 확인한 그녀가 선월에게 서류를 건네주며 입을 열었다.
“A동으로 가서 문에다가 마력으로 각인하면 등록이 완료되니 가시면 되요.”
꾸벅.
말없이 고개만 까딱거리고 뒤를 돌아가는 선월을 보며 살짝 얼굴이 붉어진 슬아였지만 한울은 그저 평소처럼 웃고 있었다.
그렇게 천검의 후계 한 명을 보낸 그들은 직후 또 다른 유명인사와 만나게 되었다.
“저기요.”
소녀의 높은 목소리.
잠시 고개를 숙이고 있던 한울이 소리가 난 쪽을 올려다보았을 때는 한 명이 아니었다.
진한 갈색 머리와 검은 눈동자를 지닌 소년과 뺨에 긴 상처가 있는 소녀.
두 사람 모두 파란색 명찰을 가진 것 보아하니 이번년도에 입학하는 신입생이 분명했다.
어딘가 익숙한 얼굴에 한울은 곧바로 명찰을 보더니 금방 두 학생이 누군지 금방 떠올렸다.
‘한 사람은 이선월의 동생, 또 한명은...’
2년 전 한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를 공포로 물들었던 사건을 일으킨 한 남자.
저기 저 소녀는 그 배신자의 딸이었다.
‘이 친구가 있을 줄은 몰랐는데.’
어떻게 들어 온건지 대충 감이 잡혔다.
학생회에 들어온 신입생들의 정보에는 없었으니 아마 대한고 교사 중 한 명의 특례로 입학한 것이 분명하다.
한울은 사람 좋게 웃으며 재빠르게 서류를 찾아 둘에게 각각 하나씩 건넸다.
“이선일, 신하윤 맞지? 두 사람 다 B동이네.”
“아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첫 번째 목소리는 하윤이었고, 그 뒤에 이어지는 목소리는 선일이었다.
신입생들의 귀여운 모습에 한울은 흐뭇한 웃음을 지었지만, 속에서는 안타까움을 감출 수 없었다.
2년 전에 한창 떠들썩하던 사건이 메스컴에 거의 1년 내내 나온데다가 주동자의 자식인 하윤의 얼굴도 몇 번이나 노출되었다.
그렇기에 배신자의 자식이 이 학교에 입학했다는 것은 금방 학생들에게 알려져 부모의 귀에까지 소식이 들어갈 것이 뻔했다.
그렇게 된다면 저 소녀는 이 생활이 지옥이겠지.
게다가 사람들은 가해자를 물어뜯을 줄만 알지.
피해자의 상처는 절대 보듬어주지 않으니까.
‘불쌍하네.’
동정은 하지만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그 말대로 학년마다 독립되어있는 시스템이 확실한 대한고라 한울이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원슬아가 두 사람에게 기숙사에 대해 설명하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한울은 뭔가 이상한 점을 느꼈다.
‘기운이 느껴지지 않잖아...?’
신체에 마력을 쌓고 있는 인간이라면 당연히 느껴져야 할 기세 또는 기운.
오며 가며 그들을 스쳐 간 많은 학생 중에서 한울이 기운을 못 느낀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다.
그렇기에 그는 당혹스러움을 감출 수 없었다.
대한고의 학생회장인 서한울은 현장에서 일하는 베테랑 B급 헌터와 비교해도 전혀 밀리지 않는다.
그런 그가 기운을 느끼지 못한다?
딱 두 가지 경우.
신체에 마력이 없는 일반인이거나.
자신 따위는 한 톨의 먼지로도 느껴지지 않는 강자.
‘이선월이 문제가 아니었어. 저 자식..’
어느새 그의 눈은 선일을 향해있었다.
그리고 선일이 한울의 시선을 읽은 순간.
씨익.
표정숨기기가 주인에게 도움이 되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거부할 수 없는 스킬의 의지에 그의 입가가 고정시켰다.
분명 평범하기 그지없는 웃음이었지만.
섬짓!
한울의 날카로운 감각에서 시작된 경종이 목에 소름 돋게 만들었다.
‘위험해.’
[‘서한울’이 당황합니다.]
‘이런 것도 보여주네? 되게 편하다.’
사실 선일은 한울이 아닌 설정창의 알림에 시선을 두고 있었다.
동시에 그는 저 앞에서 자신을 보며 당황한 선배를 보고 살짝 감흥에 빠져있었다.
등장인물 서한울.
선일이 [악당보다 사악한 영웅님]을 연중하기 전까지 선월의 조력자 포지션이었다.
이선월급은 아니지만 아마 지금 시점에서 꽤나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을 게 분명하다.
그러나.
‘서한울이 당황한 이유는 아마 내가 가진 힘 때문이라는 게 웃기네.’
물론 지금 선일의 힘은 매우 미약했으나 이렇게 착각을 하게 되는 이유는 바로 그가 가진 표정숨기기 때문이었다.
스킬창엔 분명 등급이 B였지만 아무리 봐도 그 이상의 효율을 내는 중이었다.
표정을 감추는 것뿐 아니라 감정마저 가려버리는 효과.
악사영에서 스킬은 성장하면 새로운 효과가 더해지는 만큼 만약 표정숨기기가 성장한다면 어떤 효과를 가지게 될지 궁금했다.
한편으론 이선일은 진짜 얼마나 속을 숨기면서 살아온 것인지 조금씩 안쓰러운 느낌도 들었다.
아마 원작자인 자신이기에 느끼는 감정이겠지.
‘물론 아직까지는 많이 불쌍하지는 않지만 말이야. 그건 그렇고 서한울이라.. 유의해둬야겠네.’
“당신은 몇 반이에요?”
허공에 떠 있는 설계자를 바라보는 선일에게 하윤이 물었다.
원작에서는 하윤은 선월과 같은 A반이었고, 선일은 B반이었다.
그렇기에 접점은 거의 없었지만 자신이 이선일이 된 이상 원작은 바뀌어야 했다.
그는 질문에 대답하면서 그녀에게 모르는 척 물어봤다.
“난 B반. 너는?”
그녀는 선일의 질문에 들고 있던 핸드폰을 가냘픈 손으로 터치하고 입을 열었다.
“저도 B반이네요.”
“B반이라고?”
분명 내가 썼을 땐 A였을 텐데?
처음 들은 소식에 선일은 잠시 당황했지만 금방 납득할 수 있었다.
자신이 빙의한 이후부터 세계가 조금씩 변화했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는 점이었으니까.
하윤은 눈에 띄게 당황스러워하는 선일을 보며 이상하다는 눈빛으로 쳐다봤다.
“네. 그게 왜요?”
대답을 들은 순간부터 선일은 머릿속에 있던 계획을 수정하기 시작했다.
그는 눈웃음을 지으며 친근함이 물씬 묻어나는 말투로 대답했다.
“아냐. 같은 반인 게 반가워서 하하.”
대답하면서도 선일은 사고를 멈추지 않았다.
신하윤이 폭주하게 되는 에피소드는 1학기 중간고사.
A와 B.
학생들이 각자 소속된 반에서 마음이 맞는 사람끼리 페어를 맺는 방식은 대학교의 조별 과제 형식과 비슷했다.
원작에는 같은 A반인 신하윤과 이선월이 조원을 구할 수 없어 어쩔 수 없이 맺게 되었었고 그 평가에서 씨앗을 제거하게 된다.
이외에도 자잘한 것이 있었지만 하윤이 B반으로 바뀐 이상 전개가 달라질 것이 분명했다.
선일은 이어서 급하게 핸드폰을 꺼냈다.
발신자는 다름 아닌 이선월.
혹시 모를 변수들을 최대한 파악해야 했었기에 선일은 망설임 없이 타자를 눌렀다.
-형 몇반이야?
이선월의 성격으로 바로 답장이 오지 않을 것 같았기에 주머니에 다시 핸드폰을 집어넣으려 했지만, 손에서 가벼운 진동이 느껴졌다.
-A.
남을 잘 신경 쓰지 않는 성격대로 짧은 답장.
다행인지 불행인지 선월은 원작과 동일하게 A반이었다.
가볍게 한숨을 쉰 선일은 빠르게 알겠다는 답장을 보내고 하윤과 함께 아파트와 흡사한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B동의 갈림길에 도착한 선일이 하윤을 향해 생각했던 제안을 건넸다.
“좀 있다가 입학식 같이 갈래?”
“흐음...”
그녀는 잠시 고민하는 것 같더니 결정했다는 듯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죠, 뭐.”
“그럼 내가 있다가 연락할게.”
대화가 끝남과 동시에 갈림길에서 하윤과 헤어진 선일은 곧이어 배정받은 방앞에 도착했다.
아까 선배한테 들은 것처럼 문에 손을 갖다 대자 약간의 탈력감과 함께 아주 미미한 마력이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우우웅.
차가운 철문에 맞닿은 손바닥에서 살짝 열이 나기 시작했다.
마치 손바닥에서 해파리의 촉수가 살랑대는 느낌.
말로 설명하기 힘든 이상한 느낌에 조금씩 익숙해지려던 순간, 더 이상 마력이 빠져나가지 않았다.
철컥!
이어서 자물쇠가 열리는 것 같은 소리와 함께 문이 자동으로 열렸고, 선일은 신발을 벗으며 안으로 들어갔다.
기숙사 방이 눈에 들어오자 그의 입가에서 멈출 수 없는 소리가 튀어나왔다.
“와... 무슨 호텔보다 더 좋은 것 같네...”
물론 빙의하기 전엔 가본 적이 없었던 선일이었지만 사진으로 봤던 호텔보다 더욱 고급진 방에 탄성을 터뜨렸다.
물론 이선일의 방보다는 좀 떨어지는 것 같았지만 둘 다 현실에서는 한 번도 느낀 적 없던 편안함이 분명했다.
선일은 자신의 방을 얼른 만끽하고 싶었지만 그럴 시간은 없었다.
널찍한 방 한구석에 대충 캐리어를 던져놓은 선일은 먼저 비고에서 가져온 상자를 책상 위에 올려두었다.
“후우... 긴장되네.”
입학식은 오후 1시에 시작하니 3시간 정도 시간이 남았다.
마력 대신 정신력이 소모되는 표정숨기기를 풀은 선일은 먼저 설계자를 확인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가 특전의 내용을 확인한 순간, 올라간 입꼬리에서 멈출 수 없는 웃음이 터져 나왔다.
“대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