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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이천야와의 면담을 끝내고 곧장 밖으로 나온 선일은 그의 뒤에 위치한 천검이가의 본가 건물을 보았다.
천무궁(天武宮).
조선시대를 그대로 옮겨온 것만 같은 거대한 건축물에 원작자인 선일은 오랜만에 감상에 빠졌다.
‘확실히 경복궁이랑 닮았네.’
유일하게 좋은 기억인 중학교 시절, 소풍으로 갔던 경복궁을 보고 영감이 떠오른 선일이 썼던 천검이가의 본가는 묘사대로 웅장했다.
본가 건물을 바라보는 선일을 보며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은 선월이 입을 열었다.
“어머니가 기다리신다.”
선월의 말에 정신을 차리고 다시 앞으로 눈을 돌린 선일.
그는 딱 봐도 고급스러운 세단 앞에 서있는 한 여성을 보았다.
그녀 역시 차를 향해 다가오는 두 소년을 본 듯, 앞에서 반갑게 손을 휘저으며 소리쳤다.
“얼른 오렴!”
차에 가까이 다가가자 아름다운 외모의 여성이 있었다.
40대가 넘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30대 초반, 화장을 한다면 20대로도 볼 수 있는 그 여성은 다름 아닌 선일과 선월의 어머니인 백설.
백설은 차 앞에서 선일과 선월이 입고 있는 교복의 셔츠깃을 제대로 펴주면서 잔소리를 퍼붓기 시작했다.
“너무 늦게 일어난 거 아니야?”
“저희 일찍 일어났습니다, 어머니.”
백설의 다정한 손길에 감정표현이 적은 선월의 입가에도 희미한 미소가 들려있는 것 같았다.
누군가가 챙겨주는 기분이 오랜만이었던 선일은 어머니라는 존재가 처음임에도 불구하고 백설의 손길이 이상하게 익숙했다.
그리고 그녀가 왜 이렇게 익숙한지 선일은 금세 기억할 수 있었다.
‘원장님, 아니 어머니랑 닮았네.’
성인 전까지 살았던 고아원과 그 안에서 아이들을 성벽처럼 지켰던 고아원의 원장님.
그녀는 아이들을 대하면서 원장님이라는 딱딱한 호칭보다는 어머니라고 부르라고 했었기에 잊을 수 없었다.
백설은 선일이 중학교 시절에 썼던 소설 속의 인물인 만큼 아마 어머니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 같았다.
오랜만에 느껴지는 따스한 기분에 선일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건 그렇고 너무 많이 챙겨주신 거 아니에요, 어머니?”
“어라?”
백설은 선일의 입에서 나온 말에 놀란 듯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녀의 표정이 눈에 띄게 변하는 순간, 그는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
원작에서 선월만이 백설을 어머니라 부를 뿐, 이선일은 계속해서 엄마라는 호칭을 고집한다.
다행히도 자신의 둘째 아들의 입에서 나온 어색한 호칭에도 의심하지 않은 백설이 호호 웃으며 물었다.
“웬일로 어머니라고 부르니?”
“이제 고등학생이니까 엄마라는 말보다는 어머니가 나을 것 같아서요 하하.”
다행히도 표정숨기기를 유지하고 있었기에 얼굴은 평소와 같았지만, 속으로는 살짝 당황했던 선일이었다.
백설은 얌전하게 미소 짓는 선일을 보면서 대견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우리 아들들이랑 이제부터는 떨어져있어야 된다니 이 엄마는 슬프구나 흑..”
“하하..”
그녀는 눈물을 훔치는 시늉을 하며 아들들을 바라보았고 그에 맞춰 선일은 웃음으로 선월은 특유의 곧은 눈매로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직후 따스한 웃음을 입가에 올려둔 백설은 팔을 뻗어 두 아들의 머리를 각각 한 손으로 쓰다듬으며 말했다.
“너희들이 무슨 일을 하든지 나는 언제나 너희의 편이란다. 물론 천검의 모든 일원들도 마찬가지고.”
‘네가 무슨 일을 하든지 나는 언제나 우리 아들의 편이란다. 물론 천검의 모든 일원들도 마찬가지고.’
빙의하기 전, 백설의 말을 먼저 출발하던 원작의 이선일은 어째서인지 듣지 못했다.
그렇기에 선일은 느낄 수 있었다.
조금씩 이 세상이 변화하고 있다는 것을.
아니, 변화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세상일 수도 있다는 느낌.
그 순간, 평소에 잘 웃지 않는 선월이 확실한 미소를 띠며 어머니의 손을 부드럽게 내렸다.
“어머니 들어가세요. 아직 날이 춥습니다.”
“그래.. 내려올 수 있을 때마다 얼굴이나 보러오렴.”
“자주 내려올게요 어머니.”
대화의 처음은 선월이었고, 대화의 끝은 선일이었다.
쌍둥이임에도 말투부터 모든 것이 완전히 달랐던 두 아들이 나란히 서있는 모습을 보니 백설의 입에서는 즐거운 웃음이 나왔다.
백설은 어린 시절의 모습을 남몰래 추억하며 둘에게 손짓했다.
“너네 가는 것만 보고 들어갈게.”
백설의 말에 피식 웃고 마는 선일.
원장님이 생각났던 그는 선월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입을 열었다.
“형, 얼른 가자. 이러다가는 어머니 안 들어가실 것 같은데?”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한 선월을 데리고 차에 탄 선일은 뒷자석의 창문을 내려 마지막 인사를 하기로 했다.
“자주 올 테니까 너무 걱정 안 하셔도 돼요. 저도 형도 다 잘 지낼 거니까요.”
“그래. 연락 자주 하고!”
과거 원장님에게도 똑같이 들었던 말에 오묘한 기분을 느끼며 선일이 웃었다.
무뚝뚝한 선월도 꼿꼿하던 눈매가 약간은 휘어들어간 것 같았다.
부우웅-!
차가 출발하는 것을 보며 백설은 아들들을 봤을 때처럼 뒤에서 손을 흔들어 배웅했다.
***
꽤 빠른 속도로 달리는 중임에도 편안한 승차감을 주는 차 안에서는 백설과 대화할 때와는 달리 불편한 침묵만이 가득했다.
오죽하면 경력이 20년이 넘어가는 천검이가의 운전기사의 목덜미에서 식은땀이 주륵 흐를 정도.
뒷자석에 앉아있는 선일은 스마트폰만 바라보고 있었고, 선월은 명상 중인 건지 눈을 감고 있었다.
‘흐음... 뭐 쓸만한 소식 없나.’
자기가 쓴 소설들이 설계자를 통해 머리에 입력됐다 하더라도 후에 살아남기 위해 더욱 많은 정보가 필요했다.
그러기위해서 선일은 인터넷을 이용해 여러가지 뉴스를 보고 있었다.
이때는 이랬구나, 저 때는 저랬구나하며 속으로 정보들을 정리하던 선일의 귀로 선월의 목소리가 나지막하게 들려왔다.
“왜 달라진 거냐.”
“응?”
그가 물어보는 것은 선일이 백설을 부르던 호칭이라는 것을 금세 깨달을 수 있었다.
원작 속의 이선일은 자신이 천검이가의 직계임에도 검의 재능이 없다는 것에 실망했고, 반대로 쌍둥이형인 이선월이 가진 검의 재능은 천부적인 것을 깨닫자마자 그는 어린 나이부터 절망이란 감정을 깨달았다.
그리고 절망이 욕망이 되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가문의 어른들에게 비교대상이 되는게 너무나도 싫었으며 아버지에게 실망시켜드리기 싫었던 어린아이의 작은 욕망.
뭐든지 ‘형과는 다른 아이라는 것을 보여줘야 된다’라는 생각을 각인시키며 살아왔기에 선일은 선월과 길을 다르게 나갔다.
선월은 백설을 어머니라고 불렀고, 선일은 엄마라고 불렀다.
선월은 검을 배웠고, 선일은 마력술을 배웠다.
그리고 선월도 그런 동생의 삶을 알고 있었기에 지금 이 질문을 하는 것이었다.
“으흠...”
고민하는 것처럼 말을 끌었지만, 이미 그가 이렇게 물어볼 것은 예상하고 있었다.
자기가 설계한 주인공의 눈치 빠른 성격을 모를 리가 있겠는가?
선일은 이미 생각해둔 대답을 뱉기로 했고, 만약 뭔가 이상하게 느껴지더라도 선일의 얼굴은 표정숨기기가 감춰줄 것이었다.
‘아무리 주인공이라지만 절대 알 수가 없지.’
“그냥 고등학생이나 됐는데 엄마는 너무 안 어울리는 것 같아서 말이야.”
속을 알 수 없는 자신의 동생이 태연스럽게 대꾸하는 모습을 보면서도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는 선월.
짐짓 여유로운 척을 하는 선일의 등에 순간 차가운 오한이 들었다.
오직 선일에게만 향하는 기세를 발산하며 선월의 뜨인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알고는 있었지만...’
역시 대단하네.
속으로 생각을 넘긴 선일은 짐짓 여유로움을 가장했다.
하지만 주인공은 주인공인지, 가볍게 물어보는 것 같으면서도 강렬한 기세가 선일의 몸을 조이기 시작했다.
선월은 평온해 보이는 선일을 보면서 눈을 꿈틀거리며 당황스러움을 감출 수 없었다.
‘뭐지.’
자신과 극명한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알기에 많은 힘을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일반인과 비슷한 신체를 가진 선일이 받는다면 숨이 턱턱 막힐만한 기세였다.
어느 정도의 경지에 이른 검사의 기세를 마력술사가 버티려면 마력을 사용해야 하는데 그런 기미는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선일에게 아침부터 느꼈던 이질감.
마치 자신의 힘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지는 기이한 느낌에 선월은 경계할 수밖에 없었다.
‘아까 그 상자 때문인가.’
선일이 가져온 그 기이한 상자.
마찬가지로 비고의 안쪽까지 갔다 왔는데도 자신은 분명 발견하지 못했던 물건이었다.
머릿속에서 의문이 점점 커져가던 선월은 더더욱 강렬한 기세를 내뿜었지만, 아쉽게도 그는 금세 기세를 거둘 수밖에 없었다.
끼익!
“도련님들 도착했습니다.”
운전기사의 목소리에 선일이 부드러운 웃음기가 머금은 목소리와 함께 선월을 바라보았다.
“그만하고 내리지, 형?”
“...그래.”
기세를 가라앉힌 선월이 먼저 차에서 내리고 곧장 자신의 짐을 들고 먼저 사라지자마자 선일은 곧바로 스킬을 풀었다.
마력은 빠져나가지 않았지만 마치 기가 빨린 것처럼 정신력이 소모됐다.
아침부터 머리가 아파진 선일이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후우..”
“작은 도련님 괜찮으십니까?”
아마 이선월이 일반인인 운전기사에게 영향이 가지 않도록 기세를 조절했기에 그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지만, 둘 사이의 대화를 듣고 있으면서도 조금 싸해졌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선일은 익숙한 노인의 걱정 어린 표정에 피곤한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표정관리를 아무리 잘한다한들 저 먼치킨 주인공의 기세를 정면에서 받는 것은 솔직히 말하자면 버거웠다.
마력을 순환시켜 살짝 축축해진 등을 순식간에 말린 선일이 차에서 내리자 앞에 거대한 문이 보였다.
“와아.. 대박이네.”
대한헌터고등학교 통칭 대한고.
악사영의 대한민국에서 상급헌터를 수없이 많이 배출한 명문고등학교라고 설정해둔만큼 원래 선일이 있었던 세상의 대학교와 비슷한 형태라고 묘사는 해뒀다.
그래서 평범한 대학교의 크기로 생각했건만.
“검색해서 사진이라도 보고 올 걸 그랬나?
대저택에 있을 것 같은 거대한 정문, 그 안쪽으로 보이는 수많은 건물들과 그 곳을 거니는 수많은 학생들.
아까 전부터 들었던 생각이지만 악사영의 세계는 선일의 추억 속에서 그의 과거를 툭툭 건들고 있었다.
물론 그만큼 힘든 기억들도 되살아났지만.
순간 대한고의 외형에 잠시 눈을 뗄 수 없던 선일이 정문 위에 메여있는 거대한 현수막을 보았다.
-2020년 신입생 여러분의 입학을 환영합니다!-
대한헌터고등학교장
2020년 03월 02일
매년 입학식 때마다 볼 수 있는 흔한 고등학교 현수막이었지만 선일은 긴장감을 감출 수 없었다.
악사영이 아카데미물인 만큼 대한고 내에서 목숨을 위협할만한 에피소드들이 대부분이다.
물론 우리의 주인공님이 대부분 해결하니 상관은 없지만, 원작이 조금씩 바뀐다는 것을 알고 있는 선일은 절대 마음을 편하게 먹을 수 없었다.
게다가..
‘그 녀석들도 이곳에 있으니까.’
지금 내가 빙의한 이선일을 빌런으로 만든 조직.
그 자식들의 제안을 받아들인 게 빌어먹을 이선일이었지만, 미래를 바꾸기 위해서 이제는 가까이 해서는 안 된다.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서라면.
“가자.”
굳게 입을 다문 선일이 대한고의 정문 안쪽을 통과하는 순간, 그는 새로운 변화를 느꼈다.
아니 보았다.
띠링!
이게 갑자기 왜 울리지?
선일의 귓가로 익숙한 기계음이 맴돌았고, 동시에 생존을 도와줄 설계자가 그의 시야를 푸른 텍스트로 채웠다.
[프롤로그가 종료되었습니다.]
설계자가 알려줄 때까지도 그는 알지 못했다.
이곳에 도착한 순간.
이미 원작과는 달라졌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