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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선일과 선월.
두 쌍둥이는 지금 그들의 가주인 천검의 문 앞에 서있었다.
과거 조선시대의 한옥문과 같은 형태에 최상단엔 거대한 붓글씨로 적힌 두 글자가 압도적인 위용을 뽐내었다.
천검(天劍).
하늘에 다다른 검.
둘이 평생을 자라온 가문의 이명에서 느껴지는 마력을 보니 평범한 붓글씨는 아닌 것 같았다.
옷가지를 바르게 만든 선일은 가주의 방으로 들어가기 직전 곧바로 스킬을 확인했다.
[표정숨기기(B)가 발동 중입니다.]
무의식적으로 안면근육이 평소의 이선일이 자주 지었던 부드러운 미소를 유지했다.
확실히 마력을 사용하지 않는 표정숨기기는 매우 편리했다.
말만 표정을 숨기는 것이지 감정을 들어나지 않게 한다는 점은 소설 속으로 떨어진 선일에겐 매우 적절한 스킬이나 다름 없었다.
그의 옆에 있던 선월이 곧바로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입을 열었다.
“아버지 저희 왔습니다.”
“들어오너라.”
방 안에서 대답이 들려온 이후 자동문처럼 천천히 열리는 거대한 한지문.
스르륵.
기계장치는커녕 문 주위에 느껴지는 인기척은 없었지만 둘은 이 문이 어떻게 열리는지 알고 있었다.
피부를 바늘로 찌르는 듯한 통증으로 감각이 조금씩 깨어났다.
안쪽에서 책장이 가득한 고풍스러운 집무실이 서서히 드러났다.
현실 속 드라마에 나오는 재벌집 안에 존재하는 서재와 비슷한 형태에 선일이 속으로 헛웃음을 지었다.
‘이런 것도 구현되어 있네.’
“거기 앉거라.”
서류뭉치가 쌓여있는 책상에 앉아있는 한 남자가 둘을 보며 말했다.
선일의 검은 눈동자와 선월의 흑발을 가지고, 이란성쌍둥이인 두 사람의 외모를 반반씩 닮은 듯한 중년남자.
그가 바로 천검이가의 가주이자 현시대의 천검인 이천야였다.
이천야는 아들들이 책상 앞에 있는 소파에 앉는 걸 보고나서야 서류에 서명을 하기 위해 앉았던 의자에서 일어났다.
곧이어 그는 나란히 앉은 아들들의 앞에 있는 소파에 마주앉아 이야기를 시작했다.
“벌써 너희들이 태어난 지 17년이 지났구나.”
이천야의 말투는 무뚝뚝하기 그지없었지만, 선일과 선월은 아버지의 목소리에서 대견함이 묻어나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선월은 평소 감정을 잘 느낄 수 없었기에 담담하게 반응했지만, 현실에서도 보지 못했던 아버지란 존재가 어색했던 선일은 심장 언저리가 간질거려 표정관리가 힘들었다.
분명 표정숨기기가 없었다면 금방 들켰겠지.
그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이천야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원래는 그냥 본가에서 계속해서 남으라고 말하고 싶으나, 열일곱이나 먹었으면 너희들의 의견을 존중할 때도 됐다고 생각한다. 물론 대한도 좋은 곳이지만 그래도 집이 최고라고 생각했으니.”
이천야는 무언가를 생각하는 것처럼 눈을 지그시 감았고, 선일과 선월은 조용히 그의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1분 정도의 짧은 침묵이 지나간 뒤, 이천야 스스로가 결정한 생각을 입으로 뱉었다.
그리고 그의 말은 선일이 과거에 썼던 문장이고, 생존하기 위한 첫 번째 초석이다.
“가문의 자식은 원래 열일곱이 되면 각자 손에 맞는 무구를 얻을 수 있다는 가칙을 알고 있을 것이다. 물론 원칙대로라면 생일이 지나야하지만 너네들은 본가에 없을 예정이니 바로 지금 가문의 비고에서 한 가지씩 가져갈 수 있게 해주겠다.”
이것이 이천야가 아침 일찍부터 아들을 부른 이유였다.
역시 원작 소설대로 선월과 이천야의 면담을 나누며 들어가는 가문의 비고.
물론 선일과 선월이 같이 들어간다는 것은 생각하지 못했던 일이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어차피 지금 시점에서 그 물건의 정체는 선일을 제외하고 아무도 모르니까.
“따라오너라.”
말을 마친 이천야를 따라 일어나는 선일과 선월.
이천야는 그대로 선일이 들어왔던 문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거대한 이천야를 작아보이게 만드는 거대한 문.
문과 직접 마주한 이천야의 어깨 위로 검은 기운이 일렁였다.
하늘의 밤(天夜)이라는 이름대로 광활한 느낌을 주는 마력.
흑색의 마력 위로 아름다운 은하수의 별빛이 반짝였다.
온몸에 마력을 두른 그가 문손잡이를 강하게 쥐었다.
“흐읍!”
짧은 기합소리를 뱉은 이천야가 문을 열었고, 그 뒤에 보이는 공간은 더 이상 천검이가가 아니었다.
밝았다.
아침에 타오르는 태양보다도 훨씬.
원작을 썼던 대로 비고의 인상은 그러했다.
밝은 빛을 내뿜는 차원문에 놀랄 만도 했지만 선일은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비고 안에서 느껴지는 엄청난 기운에 눈이 커다래졌다.
감정표현이 극도로 적은 선월 또한 마찬가지인지 눈썹이 조금 올라가있었다.
고대부터 이어진 무구와 수많은 영약들, 유실된 비급서까지!
온갖 보물들이 존재하는 비고에서 선일이 가져갈 수 있는 것은 단 하나뿐이었다.
그러나 선일은 전혀 아쉬워하지 않았다.
‘나중에 다시 들어갈 수 있으니까.’
비고는 역대 가주에게만 전승되어왔기에 이천야만 출입하는 법을 알고 있었지만 원작자인 선일은 이 거대한 보물창고에 들어갈 다른 방법을 알고 있었다.
물론 제약이 있기도 하고 원작에서는 이선월이 알아내지만 뭐 어쩌겠는가.
‘살아남으려면 전부 다 써야지.’
선일이 웃음으로 감춘 생각을 모르는 이천야가 말했다.
가볍게 숨을 뱉은 그는 커다란 손으로 선월을 가리켰다.
“선월이부터 들어가거라.”
“예.”
선월은 이천야의 명에 짧은 대답과 함께 빛이 쏟아져 나오는 차원문을 망설임 없이 들어갔다.
약간의 시간이 지날 동안 선일은 머릿속에 각인된 원작을 빠르게 읽는 중이었다.
잠시 후.
일렁..
들어간 지 5분도 되지 않았지만 선월은 차원문을 통해 되돌아서 나왔다.
아무것도 없었던 선월의 교복 허리춤에는 한 자루의 푸른빛 환도가 매어져있었다.
‘역시 달미르를 골랐네.’
원작에서 이선월의 첫 번째 무기가 되는 달미르는 명칭대로 월룡(月龍)의 힘을 지닌 검이다.
무뚝뚝한 성격과 어울리는 음속성의 마력을 다루는 선월로써는 더없이 좋을 무기였다.
그 말대로 선월의 얼굴은 여전히 무표정이었지만 아주 살짝 올라간 눈썹을 통해 충분히 만족한다는 것을 선일은 알 수 있었다.
“다음은 선일이.”
“네.”
돌아온 순서에 따라 차원문을 향해 걸어간 선일.
문 앞에 다다르자 끊임없이 웅웅거리는 소리가 들려 조금은 긴장을 했지만 그 표정조차 스킬이 감춰주었다.
한두번 심호흡을 한 선일이 곧장 문 안으로 발을 내딛었다.
웅웅웅웅!
몸이 전부 들어가자마자 귓가에서 거대한 벌레 수십 마리가 우는 듯한 소리가 맴돌았다.
시야가 살짝 어지러워져 속이 메스꺼웠다.
‘주인공놈은 이걸 어떻게 버틴 거지?’
여러 생각을 하며 악착같이 참고 있던 순간, 빛이 튀었다.
화악!
어질거리던 시야가 바로잡히자 확 머리가 맑아져왔다.
동시에 주변에서 느껴지는 강렬한 기운에 몸이 자신도 모르게 흥분되는 것 같았다.
아니, 확실히 몸이 후끈거렸다.
“이게 마력인가보네.”
선일은 자신의 몸 안을 가득 채운 충만감을 느꼈다.
이게 마력이라는 걸까.
아마 비고 안에 존재하는 강대한 힘을 지닌 물건들에 의해 감각이 예민해져 쥐꼬리만한 마력이 활발해진 것이 분명했다.
“후우.”
이어서 선일은 지금 그의 앞에 있는 모든 것들을 눈에 담았다.
비고 안은 옛 고서가 가득한 도서관 같은 분위기를 풍겼다.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정갈함에 가슴이 떨리는 그런 웅장한 분위기.
물론 도서관과는 달리 각 선반에 위치한 물건들은 거의 대부분이 유명한 무구나 영약들이었지만, 간간히 고대에서 남겨진 희귀한 비급들도 간간히 보였다.
그러나 선일은 그런 물건들이 놓여 있는 선반들은 지나쳐갔다.
저벅저벅...
한참을 걸은 선일이 발걸음을 멈춘 곳은 골동품이라고 부를 수 있을 정도로 먼지가 자욱한 물건들이 가득한 공간이었다.
선일은 잠시 고개를 두리번거리더니 뭔가를 발견한 듯 허리를 숙였다.
“이건가?”
선일은 그의 왼쪽에 있는 선반에서 제일 아래에 놓여있는 낡은 상자를 꺼냈다.
먼지가 가득 껴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매우 고급지다는 느낌이 드는 상자였다.
선일이 손으로 상자의 윗면에 쌓인 먼지를 가볍게 쓸어내리자 그제서야 위에 적혀있는 문양이 들어났다.
武器識別其所有者[무기는 주인을 인정한다.]
“찾았다.”
문장을 보자마자 선일은 입가에 맺히는 웃음을 주체할 수 없었다.
비고 안에서 찾아야할 첫 번째 물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하나의 초석을 찾은 선일이 상자를 조심스럽게 안아들고 들어왔던 길목을 돌아가기 시작했다.
***
“좀 오래 걸렸구나.”
천검이가의 비고는 다른 차원에 존재하기에 시간의 흐름이 현실보다는 3배는 더 느렸다.
비고에 들어갔다 원하는 물건을 찾고나올 때까지 20분 가까이 지났다는 점에서 선일이 꽤나 신중하게 결정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런가요...?”
읍..!
물론 귀를 울리는 시끄러운 소리들과 어지러움 때문에 헛구역질을 하지만 말이다.
이천야는 선일이 가져온 물건을 보더니 눈이 미세하게 커졌다.
놀라움이나 당황이 아닌 흥미.
이천야의 감정표현이 적은 것을 보며 정신을 차린 선일이 속으로 헛웃음을 지었다.
‘참,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네.’
물론 두 사람의 성격은 다르지만.
이천야는 각자 원하는 물건들을 비고에서 가져온 아들들을 보며 묵직하게 입을 열었다.
“다들 꽤 괜찮은 것들을 가져온 모양이구나. 가져온 물건들의 이름을 알려주마. 먼저 선월.”
이천야는 선월이 허리춤에 달고 있는 은은한 푸른빛이 도는 환도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을 이어갔다.
“그 검의 이름은 달미르. 달의 용이라는 뜻이지. 잘 어울리는구나.
그는 이어서 선일이 들고 있는 상자를 향해 기이한 눈빛을 보냈다.
“그리고 선일이가 가져온 것은..”
마치 그 안에 존재하는 물건을 꿰뚫어보는 듯한 날카로운 눈빛이었다.
아마 무인에게 발달한 육감 또는 직감을 통해 확인하는 중이겠지.
그렇지만 알아낼 수 없을 것이다.
‘이 물건의 정체는 원작에서도 중반부 이후에 풀어지니까.’
그 생각대로 이천야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여섯 번째 감각을 거둬들였다.
“그 상자의 정체는 알지 못하지만 확실한 것은 1대 천검께서 가져오신 물건이라고만 알고 있다. 너희들이 비고에서 꺼내온 물건들은 더 이상 가문의 것이 아닌 각각의 물건이니 더 이상의 정보는 알려주지 않겠다.”
“예.”
“네.”
이천야가 말을 마치자마자 거의 동시에 쌍둥이의 대답이 겹쳤다.
두 아들들의 자란 모습을 보며 이천야는 오랜만에 천검이가의 가주가 아닌 아버지의 눈빛으로 쌍둥이를 바라보았다.
단단한 검처럼 날카로웠던 눈빛이 가벼운 분위기로 변하며 이천야는 아직까지도 자신의 목 정도밖에 안 오는 선일과 선월을 품으로 끌어안았다.
무뚝뚝한 모습과 다른 모습에 선월은 떨떠름하면서도 오랜만에 아버지의 힘을 느꼈다.
소설 밖에서 고아였던 선일은 아버지의 품에 안기며 심장 언저리가 또다시 시큰거렸다.
오랜만에 안은 두 아들을 놓으면서 비고로 가는 문을 닫은 이천야가 마지막으로 입을 열었다.
“너희들은 가문의 바깥에 있더라도 언제나 천검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한다. 이제 나가보거라. 부인이 기다린다.”
선일과 선월은 말을 마치자마자 뒤로 돌아버린 아버지를 보며 가볍게 목례하며 소리쳤다.
“하늘에 달한 검이 되어서 오겠습니다.”
“하늘에 달한 검이 되어서 오겠습니다!”
하늘에 달한 검이 되겠다.
가언을 외친 두 소년들이 밖을 향해 나갔다.
스르륵..
아들들이 문밖으로 나가는 것을 느끼자 이천야는 눈에 묘한 이채를 띄었다.
천부적인 재능을 가지고 태어나는 천검이가의 피를 이었음에도 전혀 다른 선택을 한 쌍둥이를 생각하며 이천야는 지긋이 눈을 감았다.
그 중 피를 더 많이 받은 선월은 자신처럼 검을 집었다.
반대로 둘째인 선일은 무의 재능이 선월보다 조금 떨어지긴 했지만 대신 그걸 보완하는 뛰어난 머리가 존재했다.
그렇기에 둘째아들의 선택은 천야에게 은근한 기대감을 받게 했고, 결국 그의 기대감은 성공적이었다.
‘성장한 것 같긴 하군.’
선일이 마음이라는 수면 아래에서 가지고 있던 자신의 형보다 덜떨어진다는 마음에서 비롯한 나약함이 지금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천야는 평소의 선일에게서는 느껴지지 않았던 다른 분위기를 받았다.
화륵..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는 느낌과 어떤 목표에 대한 열망.
웃음 속에 감춘 기이한 감정들이 선일에게서 느껴졌다.
물론 자신이 눈치 챘다는 것은 알지 못한 것 같았지만.
“뭐.. 나중에 말해주는 날이 있을 테지. 게다가 그 상자를 들고 오다니.”
이어서 천야는 아들이 가져온 상자에 대해 떠올렸다.
열일곱의 그도 단 한번 봤던 물건.
이상하게 상자에 손이 닿지 않았기에 가져온 상자의 내용물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알 수는 없었지만, 전대 가주인 자신의 아버지에게서 대충은 들어본 적 있었다.
“주인을 가리는 물건이라... 재미있군.”
말 그대로 주인이 아니라면 손을 대지도 못한다는 그 물건.
꽤 흥미로운 선택을 한 둘째아들에게 은근한 재미를 느끼면서 이천야는 멈췄던 서류작업을 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