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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편의 귀환-70화 (70/71)

70화 사랑할게, 평생

라일은 정체를 들키고 싶지 않아 하는 사람처럼 검은색 야구 모자를 눌러 쓴 채, 스태프들이 입고 있는 커다란 패딩 하나를 걸치고 있었다. 도희는 화장실에 돌연 등장한 라일을 보며 싸늘한 말투로 말했다.

“네가 왜 여깄어?”

물의를 일으킨 대가로 라일은 SBC 연말 시상식조차 초대받지 못했다. 류라일은 소속사와 계약 해지 이후 어디에서도 받아 주지 않아 홀로 프로필을 돌리고 다닌다고 전해 들은 적이 있었는데, 라일의 손에 프로필이 들려 있지 않은 거로 보아 라일이 이곳에 나타난 이유는 도희 때문인 듯했다.

“차주완 씨랑 있는 모습, 나한테 영상까지 있는데 딴 남자랑 열애설이나 나고. 은지섭이랑은 비즈니스죠? 돈 주기라고 했어요? 아니면 은지섭이 뭐가 아쉬워서 선배한테 그래요? 애초에 드라마 캐스팅도 그래서 된 거잖아요.”

라일은 어떻게든 도희의 성질을 긁고 싶은 듯 목에 핏대를 세우며 빠르게 말했다. 하지만 도희의 눈에 라일의 조급함은 그저 가엾게 여겨질 뿐이었다. 라일은 무척 여유가 없는 모습이었다. 도희는 이미 붉으락푸르락해진 라일의 얼굴을 보며 여유롭게 입매를 올렸다.

“뭐 눈엔 뭐만 보인다더니.”

“……!!”

“김 감독이 뇌물 많이 받는 건 알고 있었고. 네가 리딩 날 갑자기 들어왔을 때도 난 설마 했다.”

“무, 무슨!! 내가 당하고 있을 줄 알아요? 영상 퍼트릴 거예요! 당신 양다리잖아!”

“해. 상관없어. 너야말로 내가 가만히 당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니? 본드 사건, 나한테 아무 증거도 없을 것 같아?”

사실 증거는 없었다. 하지만 도희는 라일에게 당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그녀를 자극하기 위한 말이었는데, 도희의 예상이 적중한 듯 라일의 동공이 세차게 흔들렸다. 결국 라일이 제 성질을 못 이기고 도희에게 달려들었다. 도희는 흥분한 라일을 가뿐히 피했고, 라일은 화장실 바닥의 물기에 미끄러지며 그대로 앞으로 고꾸라졌다.

“아아악!! 진짜 백도희 재수 없어!!! 내 인생의 걸림돌이야!!!”

라일은 딱딱한 타일 바닥을 손바닥으로 탕탕 내리치며 소리를 질렀다. 도희는 그런 라일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덤덤하게 말했다.

“말은 바로 하자. 네가 나한테 걸림돌이지.”

“……!!”

도희는 그간 라일에게 하지 않았던, 그녀를 싫어하게 된 명확한 이유를 조곤조곤 설명하기 시작했다.

“닮은 꼴 이미지로 나한테 묻어갔으면 그만큼 제대로 연기라도 했어야 네 개성을 만들지. 매번 감독, 배우, 스태프한테 아양 떨기 바쁜데 연기에 진지하게 임할 시간이나 있겠어?”

“나, 나도 연기 수업 열심히 받았어요!”

“그것만 해서 문제지. 늘질 않잖아. 넌 대체 왜 배우가 하고 싶어? 딱히 연기하는 걸 좋아하는 것도 아니잖아. 단순히 주목받는 삶이 좋으면 그냥 예능 프로 나가서 그쪽 재능 키워 봐. 뒤에서 뇌물 주고받지 말고.”

도희의 차분한 조언에 라일이 손을 부들부들 떨며 몸을 일으켰다.

“당신이…… 당신이 너무 싫어요. 항상 당신만 모든 게 잘 풀려. 난 그게 너무 화가 나.”

도희는 그 말을 듣자마자 기가 찼다. 잘 풀려? 내가 잘 풀린다고?

“하! 최근 들은 소리 중 제일 웃기다.”

“…… 맞잖아요?”

“너 좋으라고 내 불행을 나열할 필요는 없지. 근데 이것만 알아 둬.”

“…….”

“남의 행복도 불행도 함부로 추측하지 마. 본인이 아닌 이상 보이는 게 다가 아니니까.”

도희의 말에 라일이 이해가 안 된다는 듯 의문스러운 눈동자로 도희를 바라봤다. 도희는 깊게 한숨을 내뱉곤 그녀에게 마지막으로 해 줄 수 있는 말을 했다.

“정말 배우가 하고 싶은 거면 목숨 걸고 연기해 봐. 그럼 나도, 대중 시선도 달라지겠지.”

그 말을 마지막으로 도희는 화장실에서 또각또각 걸어 나왔다.

시상식 2부엔 드디어 도희가 고대하던 최우수 연기상 발표가 있었다. 쉴 새 없이 돌아가는 카메라에 언제 자신의 표정이 담길지 몰라 도희는 내내 긴장한 상태였다. 최우수 연기상 발표를 앞두고 도희는 몸이 좀 더 빳빳하게 굳어졌다. 나영은 도희에게 최우수 연기상을 받게 될 테니 소감을 미리 생각해 두라고 귀띔해 주었지만, 도희로선 직접 호명이 되기 전까진 그 말을 완전히 믿을 수가 없었다.

“자, 그럼 올해의 최우수 연기상 발표하겠습니다. 총 두 분이시네요.”

“네, 우리도 잘 아는 그분이시죠? 축하드립니다, 스위트 셰어 하우스의 백도희, 은지섭! 앞으로 나와 주세요.”

도희는 제 이름이 호명되자마자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것 같았다. 도희가 얼떨떨한 얼굴로 앉아 있자 지섭이 그녀를 툭 건드렸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도희가 드레스를 말아 쥐며 일어나고, 지섭과 종선, 다른 배우들과 가볍게 포옹한 뒤 함께 무대 위로 올라갔다. 지섭은 도희에게 먼저 소감을 발표하라고 손짓했다. 도희는 지섭의 양보에 천천히 스탠딩 마이크 앞으로 걸어갔다.

“네, 백도희 씨. 수상 소감 부탁드립니다.”

무대 위에서 배우들과 팬들을 둘러본 도희는 감정이 북받쳐 올랐다. 화장실에서 들었던 라일의 말이 문득 떠오르기도 했다. 잘 풀린다라. 누군가에게 자신의 인생이 그렇게 보일 수도 있을까.

이혼한 뒤 도희는 자신에게 이런 행운이 다시금 찾아오리라곤 상상도 못 했었다. 제게 연기할 기회만 주어져도 다행이라고 생각하던 시절이 있었는데. 어느새 도희는 연말 시상식에서 트로피를 손에 움켜쥐고 있었다.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는 인생이었지만 도희는 추락한 만큼 엉금엉금 기어올라 이 자리까지 올라왔다. 새삼 고난과 역경을 딛고 일어난 저 자신이 기특하고, 무대에 서 있는 이 순간이 기쁘고 감격스러웠다. 그리고 그 감정만큼 주완이 보고 싶었다.

“공백기가 길었던 제가…… 다시 이 자리에 설 수 있게 된 건 주변 분들의 도움이 컸습니다. 황재성 대표님, 진종선 선배님, 매니저 나영이, 파트너였던 지섭 후배, 그리고 저를 기다려 주신 팬 여러분들까지.”

말을 할수록 도희의 목소리가 가냘프게 떨렸다. 그러자 저 먼 곳에서 팬들의 응원하는 소리가 크게 들렸다. 괜찮아, 잘했다, 고생했다는 외침이 귓가에 또렷하게 들리자 도희는 울컥 터져 나오려는 울음을 참기 위해 입술을 짓이겼다. 동시에 이 뭉클함을 함께 나누고 싶은 주완의 얼굴이 더 크게 떠올랐다.

“그 외 도움 주신 많은 분들 다 너무 감사드리구요. 무엇보다…… 힘든 시간 견뎌 주고, 이제는 제 옆을 묵묵히 지켜 주고 있는 그 사람에게도 이 자리를 빌려 무척 고맙다는 말 전하고 싶습니다. 조만간 팬분들께 기쁜 소식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앞으로 더 열심히 연구하는 배우 되겠습니다.”

도희의 폭탄 발언에 시상식장은 잠시 술렁였다. 하지만 도희의 소감을 들은 지섭이 재빨리 마이크를 잡아, 그 소란도 단숨에 정리됐다.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소감을 잇는 지섭은 사람들의 시선을 단숨에 끌었다.

열애를 암시하는 듯한 도희의 소감이 다소 급작스럽긴 했지만, 도희는 주완을 언급한 걸 후회하지 않았다. 호명되기 전까진 열심히 고민했지만, 막상 무대에 올라가니 도희는 누구보다 자신을 지탱해 주던 주완의 이름을 빠트릴 수 없다고 생각했다. 도희는 자신의 돌발 선언으로 인해 예정보다 빨리 공식 입장을 내야겠다고 다짐하며 카메라를 향해 빙긋 웃었다.

* * *

도희가 주완의 펜트하우스에 도착한 시간은 무려 새벽 두 시였다. 도희는 주완이 기다리고 있다는 생각에 옷도 갈아입지 않은 채 바로 그의 펜트하우스로 향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기다렸다는 듯 편한 차림의 주완이 도희를 맞이했다. 도희의 아름다운 드레스 차림을 본 주완은 놀란 듯 그녀를 훑어보고는 이내 팔을 벌리고 다가와 그녀를 살포시 끌어안았다.

“고생했어. 너무 예쁘다.”

도희는 그의 허리를 꽉 끌어안으면서 배시시 웃었다.

“옷 갈아입고 싶어요.”

도희의 말에 주완은 그녀에게 자신의 티셔츠와 7부 추리닝 바지를 건네주었다. 이 정도면 맞겠다 싶어 준 건데 도희가 샤워를 마치고 화장실에서 나왔을 때, 주완은 그만 크게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그게 그렇게 커?”

“기럭지 자랑하는 거예요?”

주완이 건넨 티셔츠는 도희의 허벅지까지 내려왔고, 헐렁한 추리닝 바지는 도희의 골반도 그대로 통과해 버려 도희가 잡고 있지 않으면 그대로 스르륵 벗겨지고 말았다.

“이거 말고 다른 거.”

도희가 바지 고무줄을 붙잡고 앙탈 부리자 주완이 웃으며 그녀에게 다가왔다. 그러더니 곧 도희의 두 손을 결박하듯 붙들었다. 도희의 손이 떨어지자마자 그녀가 입고 있던 추리닝 바지가 힘없이 툭 떨어졌다.

“뭐, 뭐 하는 거예요!”

주완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도희를 번쩍 들어 올렸다. 그녀는 주완의 한쪽 어깨 위에 포대 자루처럼 걸쳐졌다. 도희는 다리를 동동거리며 그의 품에서 벗어나려고 아등바등했다. 주완이 마침내 도희를 놓아준 건 다름 아닌 침대 위에서였다.

“피곤했을 텐데, 자야지.”

주완은 능구렁이처럼 입꼬리를 슬쩍 올리며 말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티셔츠 한 장만 걸치고 누워 있는 도희 위에 무릎을 꿇고 선 주완은 전혀 잘 생각이 없어 보였다. 매만지지 않은 머리를 아무렇게나 늘어트린 주완은 아래에서 위로 쳐다보는데도 일말의 굴욕 없이 지나칠 정도로 고혹적이었다. 도희는 잠시 감상하듯 그의 선명한 이목구비를 훑어봤다. 도희의 뜨거운 시선을 느낀 주완은 요사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음탕함으로 빛나는 그녀의 눈동자에 입을 맞췄다.

“자기 싫은 눈빛인데.”

“그, 그게…….”

“사실 나도 그래.”

“네?”

“많이 참았잖아.”

그 말을 끝으로 주완이 도희의 입술을 머금었다. 주완의 입술이 도희와 포개어지는 순간, 그의 두꺼운 손이 도희의 허벅지를 더듬었다. 벗겨진 추리닝 때문에 여실히 드러난 도희의 매끈한 다리를 주완이 마음껏 훑었다.

도희는 주완의 손끝이 피부를 스칠 때마다 몸을 흠칠 떨었다. 오랜만에 살갗을 훑는 그의 손은 여전히 능숙했고, 몹시 뜨거웠다. 도희는 수줍음과 강렬한 욕망 사이에서 갈등했다. 그에게 더 대담하게 굴고 싶으면서도 긴장한 몸이 유연하게 움직이지 못했다.

도희는 용기 내어 가느다란 팔로 주완의 목을 휘감았다. 그러곤 입술 사이로 터져 나오는 그의 더운 숨결을 목마른 듯 삼켰다. 행여 떨어질세라 그와 가슴을 꽉 맞대고 있는 심장이 크게 요동쳤다. 쿵쿵 뛰고 있는 심장이 누구 것인지 알 길이 없었다.

눈을 감은 채 서로를 탐하던 두 사람이 눈을 마주쳤다. 총명함을 잃어버린 주완의 눈동자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단숨에 느껴졌다. 그는 갈급하게 자신의 상의를 위로 끌어 올리더니, 이내 도희 몸의 절반 이상을 가리고 있던 헐렁한 제 티셔츠까지 벗겨 냈다. 두 사람은 금세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몸이 되었다.

도희는 이전만큼이나 다부진 주완의 몸을 찬찬히 훑으며 주완의 얼굴을 지그시 올려다봤다. 주완 역시 그런 도희의 뺨을 어루만졌다. 처음엔 이성을 잃어버린 듯한 모습이었지만, 막상 서로의 나체를 오랜만에 감상하니 주완 역시 그 모습이 상당히 이질적으로 느껴진 듯 손끝에 망설임이 묻어났다.

“신기하다.”

“뭐가요?”

“떨려. 미친 듯이.”

주완의 나직하고 수줍은 고백에 도희가 살포시 미소를 머금었다.

“저도 그래요.”

도희의 말이 떨어지자 주완이 다시 그녀의 붉은 입술에 제 입술을 가져다 댔다. 그는 선이 아름다운 도희의 가냘픈 목덜미에, 달아오른 귓바퀴에 연달아 끈적한 키스를 퍼부었다. 도희는 주완의 입술이 제 위에서 움직일 때마다 그를 느끼듯 허리를 들썩였다.

그의 입술의 궤적을 따라 열꽃이 피어났다. 온몸의 신경 세포가 주완의 움직임을 따라다니는 것처럼 눈을 감고도 주완의 움직임을 적나라하게 느꼈다. 솜털이 곤두서고, 손끝에 힘이 들어갔다. 온몸에 힘이 들어가다 못해 저릿저릿할 지경이었다. 도희가 어쩔 줄 몰라 하자 별안간 주완이 도희에게 손깍지를 껴 왔다.

“긴장하지 마.”

주완의 부드러운 음성에 도희가 수줍게 고개를 끄덕였다.

도희의 대답이 끝나기 무섭게 주완이 도희의 몸을 파고들었다. 그 순간 긴장하고 있던 도희가 신음을 내질렀다. 도희의 신음에도 주완은 움직임을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의 신음에 자극을 받은 듯 착실하게 그녀를 치받았다.

도희가 참을 수 없다는 듯 주완에게 매달렸다. 눈을 질끈 감은 채 제 어깨 위에서 흔들리는 도희를 본 주완은 그녀가 힘들지 않도록 등을 받쳐 주었다. 도희는 바람에 흔들리는 깃발처럼 그의 아래서 맥없이 넘실거렸다. 주완은 점점 더 거칠게 움직이며 성마른 숨을 뱉어 냈다.

그의 묵직한 몸의 무게를 견디던 도희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많은 길을 돌아왔지만, 결국 그의 옆자리라는 게 눈물이 날 만큼 좋았다.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 같던 그간의 원망과 미움이 사랑으로 녹아내렸다. 믿었던 그의 사랑이 자신을 배신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주완과의 새로운 앞날을 다시금 기대하게 만들었다.

“사랑해. 사랑할게, 평생.”

“…… 나도요. 정말 사랑해요.”

앞으론 죽음이 갈라놓지 않는 한 두 사람이 다시 헤어지는 일은 없을 것이었다. 이제 도희에게 남은 건 굳건한 신뢰뿐이었다. 도희는 기대감으로 다져진 앞날의 다짐을 마치고, 행복에 겨워 그의 입술 위에 제 입술을 뜨겁게 부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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