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남편의 귀환-69화 (69/71)

69화 올해의 키스 신

첫눈이 내렸다. 이번 겨울은 많이 춥지 않다고 했는데, 며칠간 갑자기 기온이 내려가더니 12월 끝자락에 사람들은 연말을 앞두고 첫눈을 맞았다.

오늘은 SBC 연말 시상식이었다. 도희는 빨간 드레스를 입고 밴에 앉아 레드 카펫 밟을 준비에 한창이었다. 드레스는 쇄골 라인과 팔 부근이 꽃 레이스로 이루어져 있고, 허리만 강조한 실크 원단은 크게 퍼지지 않은 채 규칙적으로 주름 잡힌 모양으로 도희의 발끝까지 떨어졌다. 헤어는 굵은 웨이브를 넣어 허리까지 늘어트리기만 해서 연말 시상식치고 수수한 느낌이었지만, 오히려 파격적인 드레스보다 단출한 드레스가 도희의 우아한 분위기를 한층 더 뽐내 주었다.

밴이 레드 카펫 앞에 섰다. 도희는 마지막으로 거울을 한 번 더 본 뒤 걸치고 있던 검은색 재킷을 나영에게 건네주었다. 재킷을 벗자마자 몸이 으슬으슬 떨려 왔다. 도희는 추위를 최대한 의식하지 않으려고 애쓰며 허리를 꼿꼿하게 폈다. 시상식인 만큼 오늘은 로드 매니저가 따로 있었다. 나영은 도희의 옆자리에 앉아 그녀에게 응원을 보내듯 초롱초롱한 눈빛을 보냈다.

“여기까지 오느라 고생 많았다, 백도희!”

나영의 위로에 도희가 살포시 미소를 머금고 밴 문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문 열겠습니다.”

로드 매니저의 말이 떨어지고, 밴 문이 열렸다. 평소의 거의 10배쯤 되는 플래시가 도희에게 쏟아졌다. 흰 눈송이는 사방에서 터지는 플래시 빛을 받곤 예쁘게 반짝였다. 팬들의 환호성은 검은 밤하늘을 뚫을 것처럼 거셌다.

도희는 주름 잡힌 원피스를 살포시 들어 올리고 한 마리의 백조처럼 사뿐하게 차에서 내렸다. 영하로 떨어진 날씨에 온몸이 삽시간에 굳어지는 것 같았지만, 도희는 치아를 드러내고 카메라를 향해 밝게 웃었다. 하도 많은 플래시가 터지는 탓에 도희는 정신이 하나도 없어 앞이 잘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도희는 몇 분간 포즈를 취하다가 경호원의 안내에 따라 천천히 발을 옮겼다.

“도희 언니 너무 예뻐요!!”

“설수향 최고다!!”

“연예 대상 언니 거예요!”

도희는 많은 팬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다 확인할 수 없었지만, 소리 나는 쪽을 향해 연신 고개를 숙이고 아름다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렇게 추운데 얼굴 한 번 보겠다고 이곳에 있는 팬들에게 인사밖에 해 줄 수 없는 게 아쉬웠다. 도희는 분분히 흩날리는 눈 속을 걸으며 이곳이 시상식임을 새삼 실감했다.

‘이게 얼마만의 시상식이지.’

성공적인 드라마 복귀, 최우수 연기상 후보까지 올라 시상식을 찾은 도희는 감회가 새로웠다. 보상을 받기 위해 일한 건 아니지만, 들끓는 분위기의 중심에 서 있는 도희는 그간의 힘든 일을 모두 위로받는 느낌이었다. 도희는 최선을 다해 포토 존 촬영까지 모두 마쳤다. 추위에 손가락의 감각이 거의 사라졌을 즈음 도희는 겨우 시상식장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도희는 무대와 멀지 않은 곳에 제 이름표가 붙은 자리를 확인하곤 앉았다. 그 옆자린 아직 오지 않은 ‘은지섭’의 이름표가 붙어 있었다.

‘오랜만에 보겠네.’

종방연이 끝나고 벌써 한 달이 넘은 시간이었다. 도희는 순자 일을 겪은 후로 정신없이 일에만 매진하며 살았다. CF는 이미지만 맞는다면 들어오는 대로 찍었고, 쉴 때는 틈틈이 대본을 읽었다. 모든 건 암울한 생각을 잊기 위해서였다.

도희는 순자를 구치소에 보내고 단 한 번도 찾아가지 않았다. 생방송 인터뷰까지 나와 소란을 일으켰던 순자의 공판 결과를 기다리는 사람들도 몇 없었다. 교통사고로 재판이 밀렸다는 기사가 나왔을 때도 사람들의 무관심에 순자 일은 큰 이슈 없이 조용히 지나갔다. 순자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점차 잊혀 가고 있었다.

어린아이로 되돌아가 버린 순자의 심신과 가난한 재정 상태는 재판에서 무척 불리했다. 도희는 주완에게 순자를 지켜보더라도 그녀의 형을 덜어 주기 위해 애쓰진 말아 달라고 했다. 도희는 순자가 어떠한 편법도 없이 진심으로 죗값을 치르길 바랐다.

도희는 일에만 몰두하면서 혼란스러운 감정들을 점차 정리해 나갔다. 바쁘게 지내다 보니 나중에는 결코 끊어 낼 수 없을 것 같던 순자의 존재가 무의미하게 느껴지는 것 같기도 했다. 결코 해결할 수 없을 일들도 시간이 지나면 다 정리되는 걸까. 도희는 순자 일에 어느덧 의연해진 저 자신이 어쩔 땐 낯설게 느껴지기도 했다.

“오랜만이네요?”

지섭의 장난스러운 목소리가 갑자기 날아들었다. 도희가 옆을 돌아보자, 지섭은 멋진 검은색 턱시도를 차려입고 이마가 훤히 보이도록 머리를 올린 깔끔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지섭은 도희의 드레스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장난스레 고개를 갸웃거렸다.

“지나치게 수수한데?”

“뭐어?”

“근데도 지나치게 예쁘네.”

도희를 칭찬하는 지섭의 눈이 매혹적으로 휘어졌다. 그러자 별안간 도희가 당황한 듯 그의 어깨를 툭 때렸다.

“야!”

“걱정 마요. 나 맘 다 접었거든?”

지섭의 단호한 말에 도희가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종선slakpwkjmdm도 도희 옆을 차지하고 앉았다. 도희는 종선을 보자마자 반가운 마음에 그녀를 덥석 끌어안았다.

“선생님, 결혼식…… 정말 감사합니다.”

도희는 결국 재성과 종선을 함께 부모님 자리에 앉히기로 했다. 두 분께는 사정을 다 말씀드렸고, 사정을 들은 두 분 모두 함께 앉는 것에 동의한다고 했다. 도희는 얼마 후에 있게 될 결혼식이 무척 기대되었다.

SBC 연말 시상식은 약 세 시간가량 진행됐다. 앞에는 이벤트성으로 SBC 측에서 준비한 드라마의 명장면이 차례로 나왔다. 그 안에는 인기를 증명하기라도 하듯 ‘스위트 셰어 하우스’의 장면들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자, 그럼 이번에는 뭐가 준비되어 있죠?”

“이번에는 여러분이 다 기대하고 계실 올해의 키스 신! 상을 뽑는 시간입니다. 후보부터 보실까요?”

사회자의 말에 영상을 보기도 전 도희의 얼굴에 열기가 훅 올랐다. 여태까지 영상 비중을 보아, 세간을 뜨겁게 했던 지섭과의 ‘취중 키스’가 후보에 오를 게 분명했다.

“후보 1번은 바로 스위트 셰어 하우스의 취중 키스!”

역시나. 커다란 화면에는 드라마 장면의 일부인 수향과 지환의 얼굴이 비쳤다. 두 사람의 얼굴이 화면에 가득 차자마자 뒤쪽에선 팬들의 환호성 소리가 들려왔다. 화면에는 수향이 지환을 유혹하는 듯하더니, 결국 지환이 먼저 그녀를 당겨 충동적으로 키스하는 장면이 지나갔다. 그 후로 2번, 3번 후보의 키스 신 역시 순식간에 흘러갔다.

그걸로 끝인 줄 알았는데. 사회자들은 다른 후보들의 영상이 모두 끝나자마자 멘트를 이어 갔다.

“키스 신 하면 비하인드 스토리! 빠질 수 없죠? 후보 1번 취중 키스엔 아주 어마어마한 비하인드가 숨어 있다는데요. 자 현장에서 배우들에게 직접! 물어보겠습니다.”

“꺄아아아아악!!”

도희는 별안간 제 옆에 리포터와 카메라가 함께 나타난 걸 보곤 화들짝 놀랐다. 리포터는 자신의 소개를 간단하게 한 뒤 곧장 도희에게 마이크를 들이밀었다.

“저희가 직접 스태프들에게 증언을 들었어요. 빠져나갈 생각 마시구요. 솔직담백하게! 말씀 부탁드립니다.”

“아……. 네.”

도희가 어쩔 줄 몰라 하며 지섭에게 도움을 눈길을 보냈지만, 지섭은 이 상황이 재밌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대본에는 원래 수향 씨가 먼저 충동적으로 키스하게 되어 있었다는데요. 맞나요?”

“아하하…… 그렇죠.”

“그런데 지섭 씨가 갑자기 도희 씨의 얼굴을 덥석! 이렇게! 끌어당겼어요! 왜 그러신 것 같아요?”

“네?”

리포터는 몸소 손동작으로 시범까지 보이며 촐싹맞게 질문했다. 리포터를 보고 있던 도희는 손으로 입을 막고 수줍게 웃었다. 곤란하다는 듯 미소만 유지하고 있자 리포터가 끈질기게 마이크를 들이밀었다.

“솔직담백하게! 어서요.”

“글쎄요…… 그건 본인이 알고 있겠죠?”

“아, 제 생각엔 본인도 알고 있을 것 같은데. 네, 여배우시니까 지켜드리겠습니다. 그렇다면 지섭 씨에게 묻겠습니다!”

다행히 리포터는 선을 넘지 않고 곧장 지섭에게 넘어갔다. 지섭은 평소와 다름없는 해맑은 미소를 지으며 카메라를 바라봤다. 그러자 지섭의 인기를 증명하듯 팬들의 환호성이 더욱 거칠어졌다. 그리고 리포터는 지섭에게 같은 질문을 던졌다. 지섭은 잠시 망설이는 듯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지환의 캐릭터가 열정적이기 때문에 수향일 볼 때…….”

“에이! 솔직하게!”

지섭이 형식적인 대답을 하려고 하자 리포터가 냉큼 마이크를 빼앗으며 지섭의 다른 대답을 재촉했다. 그러자 지섭이 특유의 맑은 미소를 지으며 뒷머리를 긁적였다.

“자, 다시 대답할 기회 드릴게요.”

“…… 예뻐 보여서요.”

“백도희 씨 예쁜 건 온 국민이 다 아는데! 단순히 그것 때문입니까?”

“많이…… 예쁘시잖아요. 참을 수가 있어야죠.”

“꺄아아아아악!!”

지섭은 해사하게 웃으며 카메라를 향해 끼를 부리듯 대답했고, 그 순간 팬들의 환호성이 폭발하듯 터져 나왔다. 한 건 해냈다는 리포터의 만족스러운 얼굴과 도희가 부끄러운 듯 고개를 푹 숙이는 모습이 연달아 카메라에 담겼다. 도희는 연신 손부채질을 하며 카메라가 빨리 이 자리를 뜨기만을 바랐다.

“올해의 키스 신 상은! 후보 1번, ‘스위트 셰어 하우스’의 취중 키스!”

이벤트 같은 시상식 1부가 끝나고 쉬는 시간이 다가왔다. 배우들은 각자 흡연을 하거나 볼일을 보거나 전화를 하는 등 카메라가 도는 동안 하지 못했던 일들을 하나씩 처리했다. 도희는 화장실에 가기 위해 몸을 일으켜 복도로 나왔다.

화장실에 들러 손을 씻는 동안, 도희는 ‘올해의 키스 신’을 봤을 주완의 반응에 대해 떠올렸다. 질투하면 안 될 텐데. 도희는 걱정스러운 마음에 돌연 주완에게 전화를 걸었다.

- 여보세요.

“주완 씨!”

- 걱정돼서 전화했어?

도희는 주완의 돌직구에 그만, 그를 풀어 주기 위해 여러 가지 생각해 두었던 할 말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게…… 네.”

-잘했어. 키스 신 잘해서 상도 받고. 우리 도희 연기를 아주 잘해?

도희는 주완의 그 말이 장난스러운 비아냥처럼 들렸다. 도희는 입을 비죽 내밀고 구시렁거렸다.

“그땐 상황이…….”

- 인터뷰도 장난 아니던데. 은지섭, 결혼식 온다고?

끝을 어색하게 올리는 주완의 질투 어린 물음에 도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는 마치 지섭이 오면 그에게 단단히 복수하겠다는 말투였다.

“그, 그건 왜요.”

- …… 아니야. 마지막까지 잘해. 최우수 연기상 트로피 잘 가져오고.

“그거 아직 모른다니까요.”

- 나영 씨가 소감 준비하라고 했다며. 그럼 확정이지. 소감 멋지게 얘기하고 와.

도희는 주완의 그 말에 돌연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수상 소감에서 감사한 사람들의 나열하는 건 이미 필수적인 관문이 되어 버렸는데, 도희는 현재 가장 버팀목이 되어 주고 있는 주완의 이름을 말하지 못한다는 게 문득 마음에 걸렸다.

- 왜 그래?

“네? 아, 아니에요. 딴생각 좀 하느라.”

- 아무리 정신없어도 오늘 나랑 같이 있기로 한 거 잊지 말고. 끝나는 대로 이리로 와.

“알았어요. 당연히 안 잊었죠. 이따 봐요.”

도희는 올해의 마지막을 그와 함께 오롯이 보내기로 약속했다. 덕분에 주완은 회사에도 휴가를 쓰고 펜트하우스에서 도희를 기다리고 있었다. 도희는 그와의 밤샘 데이트에 설레며 기분 좋게 전화를 끊었다.

하지만 전화를 끊은 도희의 표정이 곧장 심각해졌다. 그간 별생각 없던 도희는 수상 소감을 어떻게 말해야 할지 한참을 고뇌했다. ‘주완의 이름을 말하고 싶지만, 수상 소감에서 갑자기 그의 이름을 말했다간 난리 나지 않을까. 존재만 알릴까. 귀띔하는 정돈 괜찮지 않을까.’ 하는 여러 가지 생각이 뒤죽박죽 얽혔다.

그때, 도희의 상념을 한순간에 흩어 버릴 만큼 표독스러운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그 사람이죠? 전남편 차주완.”

주완의 이름을 언급하는 소리에 도희가 홱 뒤돌아봤다. 그리고 그곳에는 시상식에 초청받지 않은 류라일이 팔짱을 끼고 비딱하게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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