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남편의 귀환-67화 (67/71)

67화 두 번째 열애설

“결혼식에 엄마 안 필요해?”

“네?”

도희는 뜬금없는 종선의 말에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내가 비주얼이 할머니긴 하다만. 그래도 부모 자리 두 개나 비어 있으면 좀 그렇지 않겠어?”

진실된 걱정이 묻어나는 종선의 제안에 울컥 눈물이 치밀어 올랐다. 그제야 종선의 의도를 깨달은 도희의 눈동자에 그렁그렁 눈물이 고였다.

“선생님…….”

“부담 갖지 말고. 혹시나 필요하면 얘기하란 소리야.”

종선은 도희가 부담을 갖지 않도록 청첩장을 제 백에 넣고, 도희의 등을 퉁명스레 툭툭 두들겼다. 주름이 깊게 팬 종선의 그 손이 어찌나 따뜻한지 도희는 끝내 고개를 떨구고 말았다.

“어? 도희 씨 울어? 이 좋은 날 왜 울어!”

맞은편에 앉아 있던 배우들은 막 이야기가 끝났는지, 정수리를 보이는 도희를 보며 쾌활하게 말을 걸었다. 도희는 배우들의 너스레에 얼른 눈물을 슥슥 닦았다.

“그냥…… 마지막이라 싱숭생숭한가 봐요.”

“어이구, 가만 보면 도희 씨는 선생님만 좋아하는 것 같다니까? 그날도 선생님이랑 마지막 신 찍을 때 엉엉 울었잖아! 지섭 씨랑 찍을 땐 한 번에 턱 오케이 받더니!”

“어? 제 욕하고 계셨어요?”

그때 돌연 지섭이 뒤에서 등장했다. 지섭은 눈물 맺힌 도희의 얼굴을 보고 잠시 표정을 굳혔다가 이내 태연한 척 다른 중년 배우들에게 공손하게 인사를 건네며 자리를 비집고 앉았다.

“지섭 씨 의외로 인기 없단 얘기하고 있었어!”

한 배우가 그렇게 말하자 배우들이 깔깔 웃음을 터트렸다. 오랜만에 만났기 때문인지 다들 평소보다 들뜬 모습이었다. 도희는 금세 감정을 추스르고 눈앞에 놓인 고기를 몇 점 집어먹으며 화기애애하게 배우들과 담소를 이어 갔다.

잠시 후 도희가 화장실에서 나왔을 때, 그 앞엔 지섭이 벽에 기댄 채 팔짱을 끼고 서 있었다. 도희가 나오자 지섭은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으며 그녀 앞을 가로막았다.

“무슨 일 있는 건 아니죠?”

“있으면. 축하해 주려고?”

“축하요?”

도희의 뜬금없는 말에 지섭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도희는 지섭에게 청첩장을 줄지 말지 무척 고민했다. 몇 개월간 함께 드라마를 찍으며 동고동락했던 파트너기에 청첩장을 주고 싶은 마음이 들면서도 마지막 촬영 날 보였던 그의 진심이 못내 마음에 걸렸다. 그렇지만 지섭에게만큼은 결혼 사실을 기사로 접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오늘 가져온 청첩장은 달랑 두 개였다. 도희는 종선에게 건네고 남은 청첩장 한 개를 조심스레 그에게 내밀었다.

“…….”

지섭은 청첩장을 받아 드는 동시에 표정이 굳어졌다. 그는 그게 무엇인지 잘 알고 있는 듯 긴장한 얼굴로 청첩장을 펼쳤다. 도희는 지섭의 눈치를 살피다가 말했다.

“오고 안 오고는 네 자유야. 절대 부담 주는 거 아니니까 오해하지 말고.”

“…… 나한테 진짜 너무한 거 알지.”

“…… 그래도 너한텐 직접 말해야 할 것 같아서.”

“그 말은 참 치사하고.”

지섭이 착잡한 얼굴로 청첩장을 주머니에 넣었다. 그 모습에 도희가 안절부절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지섭의 표정을 살폈다. 그러자 지섭이 한쪽 입꼬리를 매혹적으로 끌어 올렸다.

“표정 뭔데.”

“미안해서. 나도 고민 진짜 많이 했단 말이야.”

도희가 억울한 듯 미간을 찌푸리며 심정을 토로하자 지섭이 그녀의 표정을 지우듯 정수리를 마구 헝클어트렸다.

“그 표정은 반칙이야. 간다.”

도희는 뒤돌아서 다시 홀로 들어가려는 지섭에게 소리쳐 물었다.

“그래서, 올 거야 말 거야!”

“봐서요.”

심드렁한 그의 대답에 도희가 어깨를 축 늘어트리고 그의 뒤를 따랐다.

한편, 종방연 입구에서 진을 치고 있던 기자 하나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모습을 드러냈다. 기자는 ㄷ자로 되어 있는 건물 구조에 감사했다. 맞은편에서 두 사람의 대화를 엿듣진 못했지만, 창가에 서 있는 두 사람의 얼굴은 또렷하게 카메라에 찍혔다. 특히 지섭이 도희를 바라보는 애틋한 눈빛, 그리고 그가 다정하게 도희의 머리를 헝크는 모습은 두 사람을 열애설로 몰아가기에 충분했다. 한창 특종에 목말랐던 기자는 소속사에 전화도 넣지 않기로 했다. 이걸로 잠시나마 이슈를 끌 수 있다면 어떻게 되든 상관없었다. 기자는 선명하게 찍힌 두 사람의 사진을 보며 음흉하게 웃었다.

‘내일 당장 터트린다!’

* * *

다음 날, 도희는 소속사에 들러 황재성 대표를 만나곤 곧장 주완의 펜트하우스로 향했다. 도희는 하루빨리 주완을 만나 전해 주고 싶은 이야기가 한두 개가 아니었다. 도희는 어제오늘, 주변 사람들에게 가슴 따뜻한 감동을 받는 중이었다.

‘내가 아버지 자리에 있을까? 아무리 스몰 웨딩이어도 나라도 앉아 있어야 네 면이 서지 않겠어?’

‘대표님…….’

‘저번 결혼식 때야 네 어머니가 계셨지만, 이번엔 아니니까……. 마음은. 좀 괜찮은 거지? 어머니께 연락은 왔고?’

그동안 순자에게 사랑받지 못해 서러웠던 도희는 제 곁에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좋은 사람들인지 다시금 느꼈다. 대표와 종선을 비롯해 나영, 주완, 그리고 추운 날 도희를 기다려 주던 팬들까지. 비록 친엄마의 사랑을 받진 못 했으나, 도희는 혼자가 아니었다. 되레 넘치는 사랑을 받고 있었다. 이 벅찬 감동을 어서 주완에게 전달하기 위해 도희는 보기 드문 유쾌한 미소를 지으며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마자 한낮의 경치를 바라보고 있는 주완이 보였다. 주완은 따뜻한 차 한 잔을 손에 들고 화보를 찍어도 좋을 만큼 멋진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도희는 멀뚱히 서 있는 그에게 달려들다시피 뛰어갔다.

“주완 씨!”

반가운 마음에 그를 불러 봤지만, 그의 반응이 어쩐지 시큰둥했다. 그는 냉랭하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차가운 시선으로 도희를 내려다봤다.

“무슨 일 있어요?”

주완의 분위기가 심상찮음을 느낀 그녀가 물었다. 주완은 무언가 골똘히 고민하는 듯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은 채 옆 테이블로 걸어갔다. 도희는 불안한 마음으로 주완의 뒤를 졸래졸래 쫓았다.

두 사람은 테이블 사이에 두고 마주 봤다. 무슨 일이냐고 재차 묻는 도희의 말에 주완이 핸드폰을 주섬주섬 꺼내 들었다.

“질투 난다고 했잖아.”

주완이 화면에 무언가를 띄우더니 도희에게 내밀었다. 도희는 영문도 모른 채 순수한 얼굴로 핸드폰을 받아 들었다.

[도희 지섭 열애설 재기, 다정한 스킨십 포착!]

[종방연까지 달달한 ㅎㅎ커플 현실에서도? 아직 소속사 대응 무.]

‘ㅎㅎ커플’이란 극 중 설수향의 향과 이지환의 환을 따서 지어진 별명이었다. 도희는 불길한 마음에 천천히 기사 하나를 클릭했다. 그곳에는 화장실 앞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는 두 사람이 찍혀 있는 사진이 올라와 있었다. 한 장은 지섭이 도희를 사랑스럽게 바라보는 모습이었고, 한 장은 쓴 미소를 지으며 도희의 머리를 헝클고 있는 사진이었다.

결혼식을 앞둔 상황에 열애설이라니. 최악이었다. 언론도 언론이었지만, 도희는 살벌한 눈동자로 자신을 응시하고 있는 주완이 훨씬 더 신경 쓰였다. 어찌할 바를 모르던 도희는 당황해서 떠듬떠듬 변명을 했다.

“이, 이때 내가 청첩장 준 거예요! 그래도 파트너였는데 공식 기사로 알게 하는 게 마음에 걸려서.”

“청첩장을 그 남자한테 왜 주지?”

주완의 말에 도희가 잠시 말을 잃었다. 지섭의 마음을 주완이 알고 있고, 지섭일 경계한다는 건 알지만. 그걸 떠나 지섭은 같은 소속사 후배이자 반년이 넘도록 함께 호흡을 맞춘 동료 배우였다. 도희는 그조차 이해 못 해 주는 주완이 야속했다. 도희를 다시 세상에 나올 수 있게 해 준 그 어느 것보다 특별한 드라마였는데, 이 작품에서 초대하는 사람이 고작 둘 뿐인데.

“당연히 파트너였고, 그동안 지섭이한테 받은 게 많아서 고맙기도 하고…….”

“뭘 받았는데.”

도희는 어쩐지 말이 자꾸 꼬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이게 아닌데. 설명을 하고 싶은데 얼음장처럼 차가운 주완을 보고 있자니 말이 일목요연하게 나오질 않았다. 도희는 그를 풀어 주고 싶으면서도 서운한 감정이 스멀스멀 차올랐다.

“…… 지섭이한테 청첩장 준 게 잘못이에요?”

“뭐?”

“친한 동료예요. 몇 개월간 호흡을 맞췄다구요. 게다가 이 드라마로 복귀했고 난…….”

도희는 차마 말을 끝까지 잇지 못했다. 결혼식을 앞두고 스캔들이 나서 속상한 건 도희도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고작 하루 못 본 주완이 보고 싶어 달려온 도희는 원치 않는 싸움을 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지섭을 초대한 청첩장을 도로 거두어들이고 싶지도 않았다.

“내가 초대하고 싶은 지인인데 그 이유를 왜 당신한테 설명해야 하는지 모르겠어요.”

숨을 가다듬은 도희가 차분하게 말을 뱉자, 주완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럼 효주도 초대해도 괜찮아?”

“뭐라구요?”

도희는 전 약혼녀의 이름을 언급하는 주완의 말에 갑자기 불같이 화가 났다.

“그게 지금 이 상황이랑 같아요?”

“나에겐 같아. 그 남자 마음이 어떤지 아니까.”

주완은 한 치도 양보할 마음이 없다는 듯 완고한 투로 말했다.

“당신은 약혼자였고, 난 아무 사이도 아니었어요!”

“열애설은 났잖아. 그것도 두 번이나.”

“그건 오해로……!”

“나는 정략 약혼이었어. 그사이 얼굴 본 건 한두 번이고.”

도희의 말에 지지 않고 대꾸하는 주완 때문에 그녀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변했다. 그때, 때마침 진동이 울렸다. 발신자는 다름 아닌 황재성 대표였다. 도희는 설움이 북받친 얼굴로 무언가를 말하려다 말고 전화를 받았다.

“네, 대표님.”

도희가 전화를 받자마자 주완은 답답한 듯 잠시 창가 쪽으로 가서 섰다. 도희는 그런 주완의 뒷모습을 보며 전화를 이어갔다.

- 기사 봤지? 아닌 건 알고 있으니까 극구 부인으로 간다.

“네, 대표님. 감사해요. 또 죄송하고요.”

- 괜찮아. 따로 만난 것도 아니고, 저 정도 스킨십이야 친한 선후배 사이로 정리하면 된다. 지섭이도 알았다고 했고.

“네, 감사합니다.”

- 결혼 발표는 언제 할래? 결혼식 끝나고?

“……아무래도 그게 좋을 것 같아요.”

전화를 끊고 도희는 주완의 뒤쪽에 가서 섰다. 주완은 팔짱을 끼고 먼 산을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주완은 도희의 인기척을 느꼈음에도 뒤돌지 않았다. 잠깐의 침묵이 흐르는 사이, 생각할 시간이 생긴 도희는 주완이 했던 말을 찬찬히 되짚었다.

‘만일 주완 씨가 직장 동료와 열애설이 났다면? 그리고 그 동료가 주완 씰 좋아한다면 결혼식에 초대하는 게 기분 나쁠까?’

효주와 지섭을 동등하게 비교한 게 화가 나긴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니 주완 입장에선 열애설이 난 상대이니 그럴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지섭의 깊었던 감정을 주완이 대충이나마 짐작하고 있다면 신경이 쓰일 법도 했다. 감정을 추스른 도희는 조금 누그러진 얼굴로 주완을 바라봤다. 때마침 주완이 뒤를 돌아 도희를 응시했다.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잠시 맞닿았다.

주완이 먼저 도희에게 한 발 다가왔다. 그녀 앞에 선 주완의 표정은 여전히 의문이 풀리지 않은 듯했지만, 그는 팔을 뻗어 천천히 도희를 끌어안았다.

“내가 속이 좁았어.”

“…….”

“네 입장에서 그럴 수 있겠다. 나만 생각해서 미안해. 두 번째 열애설 보니까 질투가 나서…… 잠시 눈이 돌았나 봐.”

도희가 주완을 이해하려고 했던 것처럼 주완도 도희를 이해했던 걸까. 아직은 딱딱하지만 한풀 꺾인 그의 말에 도희가 주완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나도 미안해요. 당신이 내 마음 몰라주는 게 서운해서 큰 소리 냈어요. 당신 마음…… 알 것 같아요.”

도희가 주완에게 안긴 채 사근사근한 투로 말하자 그제야 그의 목소리도 좀 더 풀어졌다.

“이해해 줘서 고마워. 초대는 너 좋을 대로 해. 네 말대로 네 지인이니까.”

“그럼 장효주 씨도…….”

“그건 그냥 한 소리야. 초대 안 할 거고, 오라고 해도 안 와.”

주완의 단호한 대답에 도희가 내심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도희는 그런 자신의 마음이 이기적이라고 생각하며 자조적인 미소를 띠려는 찰나였다.

“잠깐만요.”

다시금 요란하게 울리는 진동에 도희가 주완에게서 떨어졌다. 발신자를 보니 이번에는 [02]로 시작되는 번호였다. 그냥 넘기려고 했으나 열애설이 터진 상황에 전화를 피할 수 없었던 도희는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 혹시 백순자 씨 따님 되십니까?

순자의 이름을 듣자마자 도희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러나 그 즉시 순자가 또다시 무언가 일을 꾸미고 있다는 의심이 일었다. 도희는 마음을 다잡고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아닙니다.”

- 아…… 핸드폰에 따님으로 적혀 있길래. 혹시 다른 연락처 아시는 분 없나요? 당장 응급 수술을 해야 하는데 보호자 동의가 필요해서요.

“…… 뭐라구요?”

그 순간, 도희의 머릿속이 새하얗게 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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