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화 청첩장
“어떠세요?”
도희는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며 만족한 듯 웃었다. 도희는 쇄골이 매끄럽게 드러나는 오픈 숄더에 허리 라인을 꽉 조이며 고급스럽게 퍼지는 치맛단을 이리저리 살펴봤다. 드레스는 무늬도 장식도 없이 실크 원단만 강조한 웨딩드레스였다. 가슴과 허리 라인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아래로 넓게 펼쳐진 모양이 심플하면서도 우아해 보였다. 게다가 임시로 머리를 단아하게 올린 데에 면사포를 씌워 놓으니 심플한 디자인 오히려 도희의 이목구비를 돋보이게 했다.
“딱 좋아요.”
드레스는 주완이 고른 것이었다. 특출나게 화려하지 않지만, 도희는 그 점이 더욱 마음에 들었다. 비공식으로 작게 진행되는 결혼이니만큼 드레스에 힘을 주고 싶지 않았다.
“그럼, 커튼 열겠습니다.”
도희는 직원들의 도움을 받아 뒤돌아섰다. 처음도 아닌데, 커튼 너머에 주완의 반응이 기대됐다. 도희는 주책이라고 생각하며 수줍은 미소를 머금었다.
커튼이 열리고, 턱시도를 입은 채 소파에 앉아 있는 주완의 표정이 눈에 들어왔다. 주완은 도희를 바라보는 순간, 넋을 잃고 벙어리가 된 것처럼 입을 벌리고 멍하니 있었다.
“어때요?”
도희가 먼저 주완에게 묻자 그제야 정신을 차린 그가 일어섰다. 주완은 감격에 겨운 표정으로 도희에게 천천히 다가왔다. 주완의 반응에 옆에 있던 직원들이 눈치 있게 슬금슬금 자리를 피했다.
“너무 예뻐. 훌륭해.”
주완은 도희의 고아한 자태를 다시 한번 훑으며 감탄했다. 주완의 감탄사에 도희는 처음 드레스를 골랐을 때 주완의 반응을 떠올렸다.
‘너무 화려한 것 같은데……. 괜찮아요?’
‘괜찮은 정도가 아니야. 훌륭해.’
처음 올린 결혼식은 무척 성대했다. 그리고 그에 걸맞게 드레스 또한 유명한 브랜드의 디자이너를 섭외해 직접 제작한 단 하나뿐인 드레스였다. 그에 비하면 지금 드레스는 무척 간소했지만, 주완의 반응이 그때와 같다는 게 도희를 새삼 들뜨게 했다.
“한 달을 어떻게 참지?”
도희의 바쁜 스케줄 때문에 두 사람의 결혼식은 연말 시상식이 끝나고 연초에 치르기로 했다. ‘스위트 셰어 하우스’는 여러 구설에도 불구하고 시청률 33%까지 고공행진 했으며, 내일은 드디어 마지막 회를 다 같이 시청하는 종방연이었다. 종방연이 끝나면 몇 개의 CF 촬영도 예정되어 있었다. 바쁜 도희를 위해 주완이 양보할 수 있는 최대 시간은 고작 한 달이었다. 주완은 하루빨리 도희를 공식적으로 옆에 두고 싶어 안달이 난 상태였다.
“금방 가요.”
“같이 살자. 결혼까지 못 기다리겠어.”
도희가 주완을 달래듯 말하자 주완이 진지한 얼굴로 투덜거렸다.
퇴원한 뒤 주완은 곧장 도희에게 펜트하우스로 짐을 옮겨 오라고 권했지만, 도희가 이를 마다했다. 도희는 결혼과 동시에 공식적인 기사를 내고, 공식적인 사이가 되면 그때부터 정식으로 부부 생활을 시작하고 싶다고 했다. 하는 수 없이 도희의 의견을 따르기로 했지만, 그날 이후 주완은 시시때때로 불만을 토로하는 중이었다.
“한 달만 참아요. 응?”
“…… 그래. 내가 무슨 힘이 있어.”
단 한 번의 애교에 무참히 무너진 주완이 시무룩하게 중얼거렸다. 주완의 모습을 보며 도희는 조금 미안한 마음도 들었지만, 그녀의 생각은 확고했다. 도희는 애써 사랑스러운 그의 투정을 모르는 척한 채 다시 옷을 갈아입는다며 커튼을 닫았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도희는 조수석에서 주완이 받아 온 청첩장을 확인했다. 청첩장은 어린아이가 크레파스로 그린 듯 알록달록 다양한 색깔로 어수룩한 손 그림 몇 개가 그려져 있었다. 게다가 손 편지를 연상시키듯 삐뚤빼뚤한 글씨는 마치 반성문을 보고 있는 듯한 느낌을 주기도 했다.
[미숙했던 백도희와 차주완, 두 사람의 두 번째 결혼식입니다. 실수했던 만큼 더 열심히 아끼며 살겠습니다. 한 번 더 소중한 시간 내주시면 평생 그 은혜 잊지 않겠습니다.]
“헤헤, 잘 나왔다.”
반성문 같은 귀여운 청첩장은 다름 아닌 도희의 생각이었다. 주완은 아무리 측근에게 돌리는 청첩장이라지만 형식적이지 않은 청첩장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마음에 든다는 듯 히죽거리는 도희의 해맑은 모습을 보고 있자니 주완의 작은 불만이 말끔하게 녹아내렸다.
“네가 좋다니까 좋다.”
무미건조하게 툭 내뱉는 주완의 말에 도희가 감격스러운 얼굴로 그를 쳐다봤다. 주완이 청첩장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던 도희는 자신을 배려해 주는 주완이 새삼 고마웠다. 그녀는 힘껏 엉덩이를 떼어 내 운전하고 있는 그의 뺨에 쪽 소리가 나도록 뽀뽀했다.
“뭐야?”
갑작스러운 기습 뽀뽀에 입꼬리가 말려 올라간 주완이 물었다.
“고마워서요. 멋진 내 남자.”
도희가 그렇게 말하자 주완이 참기 힘들다는 듯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고속 도로야. 차 세울 수가 없다고.”
“피이, 누가 세우랬나.”
“하여튼, 백도희. 들었다 놨다 아주.”
주완이 도희를 핀잔하자 도희가 기분 좋게 배시시 웃었다.
도희는 어느새 주완의 퇴원과 동시에 가졌던 불안감을 서서히 잊어 가고 있었다. 마치 도희에게 누군가 이제 행복해도 된다는 허락을 해 준 것 같았다. 주완만 곁에 있다면 앞으로 어떤 어려움도 두렵지 않을 것 같았다. 도희는 다시금 아기자기한 청첩장을 이리저리 살펴보며 청첩장 보낼 명단에 대해 고민했다.
* * *
종방연 당일, 일이 터졌다. 라일이 김 감독에게 뇌물을 준 혐의를 밝혀낸 한 언론사의 보도에 세간이 발칵 뒤집혔다. 성공리에 종영한 드라마의 여파가 가시지 않은 상황에서 김 감독과 라일의 캐스팅 비리는 사람들의 질타를 피할 수 없었다. 뇌물 혐의가 터지고 몇 시간 되지 않아, 노을 엔터테인먼트는 뇌물은 라일의 단독 행동이었고 소속사 측에선 이 사실을 전혀 몰랐으며, 이번 사건으로 실망한 라일과는 계약 해지하기로 했다는 공식 입장을 밝혔다.
도희는 기사를 보자마자 주완에게 전화를 걸었다.
- 응, 도희야.
“류라일, 당신이 한 거예요?”
- 응. 드라마 끝났으니까.
“혹시 영상 문제도…….”
- 그건 묻기로 했어. 우리 사인 공식적으로 밝히고 싶다고 했잖아.
주완의 말에 도희가 안심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몰래 영상을 찍은 라일이 괘씸하긴 했지만, 도희는 구설에 휘말리며 떠밀리듯 두 사람의 재회를 알리고 싶지 않았다.
“응. 고마워요.”
- 그래, 종방연 조심히 다녀오고. 술 많이 마시지 말고.
전화를 끊은 도희는 종방연에 가기 위해 체크 무늬 재킷에 흰 티, 그리고 일자 청바지를 꺼내 입었다. 종방연은 꾸민 듯 안 꾸민, 일명 꾸안꾸 스타일로 가는 게 관행처럼 굳어지기도 했고, 캐주얼한 차림은 극 중 설수향의 캐릭터와 어울리는 복장이기도 했다.
나영은 시간에 맞춰 도희의 앞에서 차를 대기하고 있었다. 밴에 오르자마자 나영은 도희를 돌아보며 걱정스레 말했다.
“기사 봤지?”
“응. 종방연…… 괜찮겠지.”
“아마 김 감독이랑 류라일은 못 올 거라고 하더라.”
“연락받았어?”
“조감독이.”
“평소보다 기자들 더 많겠네.”
성공리에 종영한 드라마의 종방연이라면 활기찬 분위기에서 진행되야 할 텐데. 도희는 차라리 종방연이라도 끝나고 일을 터트렸어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일말의 죄책감도 들었다.
“그래도 우리 도희 오늘 예쁘다! 너무 해맑게 말고 적당히 미소만. 오케이?”
시무룩한 도희를 달래 주려 애쓰는 나영의 말에 도희가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해가 어둑어둑 질 무렵, 종방연은 여의도에 위치한 은빛회관 고깃집에서 진행됐다. 3층 건물을 대관한 그 앞에는 이미 많은 기자들과 팬들이 줄지어 출연진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도희는 추운 날씨에 생각보다 많이 몰려든 인파에 놀라며 심호흡을 크게 했다.
“문 연다?”
도희가 고개를 끄덕이자, 밴 문이 열렸다. 도희는 경호원의 안내에 따라 펼쳐진 레드 카펫 끝자락에 섰다. 그러곤 정신없이 터지는 플래시를 향해 손가락 하트를 그리고, 손바닥이 보이게 손을 흔들었다. 플래시가 어찌나 많이 터지는지 눈이 다 시릴 정도였다.
“언니! 그동안 너무 고생하셨어요!”
“언니가 복귀해서 너무 좋아요!”
뒤쪽에서 들려오는 외침에 도희가 뒤돌아섰다. 도희가 뒤를 돌자마자 뒤쪽에 서 있던 팬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그 중엔 도희의 찐팬이라고 부를 수 있는, 예전에 팬 미팅에서 자주 봤던 얼굴도 있었다. 그들은 도희에게 무언가 건네고 싶은지 손에 꽃다발과 선물 포장이 되어 있는 작은 상자를 필사적으로 내밀었다. 도희는 저도 모르게 그들 쪽으로 다가갔다.
“기다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열심히 할게요.”
“꺄악! 언니! 이거 받아 주세요!!!”
도희가 건네받은 건 꽃다발 몇 개와 종이 가방이었다. 소란 속에서 받는 선물 하나에 도희 가슴이 뭉클해졌다. 그간 워낙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 있었고, 드라마의 열기를 제대로 가늠할 수 없었는데 현장에 나와 보니 그 인기를 실감할 수 있었다. 긴 공백기를 가졌던 도희에게 이토록 열정적인 광경은 참으로 오랜만에 겪는 것이었다.
“정말 감사합니다. 추운데 감기 조심하세요.”
도희의 걱정에 팬들은 감격에 겨운 듯 울먹이며 흥분해서 소리쳤다.
“언니! 다 잘 되실 거예요!! 항상 응원할게요!”
“안 좋은 일 다 잊어버리고 힘내세요!!”
“언니가 최고예요!!”
도희는 뜨거운 응원을 받으며 몇 개의 선물만 손에 쥔 채 다시 기자들이 있는 곳을 향해 걸어갔다.
“설수향 씨, 오른쪽이요!”
“왼쪽도 봐 주세요!”
아직 드라마의 여파가 가시지 않았는지 기자들은 드라마 극 중인 이름으로 도희를 불렀다. 그 이름을 듣자마자 도희는 배우답게 수향이 지을 법한 활기찬 표정을 지었다. 기자들을 향해 프로답게 포즈를 취하면서도 도희는 귀가 먹먹해질 정도의 큰 응원에 기분이 얼떨떨했다.
은빛회관에 들어서자마자 도희는 생각보다 쾌활한 분위기에 놀랐다. 김 감독도 류라일도 참석하지 않은 종방연이었지만, 누구도 그들의 일을 안타까워하지 않는 것 같았다.
도희는 스태프와 배우들에게 대충 인사를 건넨 뒤 주변을 둘러봤다. 그러곤 가장 구석진 곳에 중년 배우들과 함께 앉아 있는 종선을 발견했다. 다행히 종선의 옆자리는 비어 있었다. 도희는 빈자리를 보자마자 반갑게 그녀 쪽으로 걸어갔다. 마침내 도희가 종선 옆에 가서 찰싹 붙어 앉자 종선이 그녀를 나무라듯 말했다.
“너는 젊은 애들이랑 같이 있지, 왜 여기로 와?”
종선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도희의 알은체가 싫지 않은 듯 비스듬히 웃었다.
“전 선생님 옆에 좋아요. 그리고…… 드릴 것도 있구요.”
도희는 주변을 둘러보곤 주머니에 들어 있는 청첩장을 만지작거렸다. 같은 테이블에 앉아 있는 사람들은 각자 이야기꽃을 피우느라 정신없는 모습이었다. 그 모습에 도희가 안심하며 청첩장을 슬쩍 꺼내 테이블 밑으로 종선 손에 쥐여 주었다.
“뭐야?”
눈이 휘둥그레진 종선이 반으로 접힌 청첩장을 펼쳤다. 청첩장엔 도희가 준비했던 반성문과 같은 멘트와 날짜, 시간, 장소가 나와 있었다. 도희가 비밀리에 종선에게 넘긴 것을 보고 종선 역시 다른 사람들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나직이 물었다.
“다시 해? 같은 사람이랑?”
“네. 비공식으로 조용히 진행될 건데…… 시간 내주시면 정말 감사할 것 같아요.”
도희가 수줍게 웃자 종선이 그녀의 등허리를 툭 쳤다.
“한 번 살아 봤으면 됐지, 뭘 또 다시 해?”
종선의 타박이 진심이 아님을 알고 있는 도희가 배시시 웃었다. 그런 도희의 얼굴을 보자마자 종선이 입꼬리를 올렸다.
“그래, 좋으면 됐지. 그래서 지섭일 찼구나?”
“아, 아뇨. 그건…….”
“됐어. 그나저나 결혼식이면……. 흠, 묻고 싶은 게 있는데.”
종선은 질문에 앞서 잠시 생각하며 뜸을 들였다.
무슨 말씀을 하려고 저러시지. 도희는 종선을 재촉하지 않고 얌전히 그녀의 말을 기다렸다.
“어머니는. 연락은 하고?”
“아.”
종선의 말에 도희가 입을 다물었다. 도희는 잠시 대답을 망설이다가 이내 바로 앞에 놓인 술잔을 빈속에 털어 넣었다. 그 모습을 본 종선은 알 만하다는 듯 심각한 얼굴로 고민하다가 조심스레 입을 뗐다.
“결혼식에 엄마 안 필요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