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화 몰락
다음 날, 도희는 주완의 옆에서 나른한 시간을 보내다가 나영에게 온 전화를 받고는 다급하게 인터넷을 켰다.
정오부터 검색어에 오르기 시작한 [류라일], [류라일 인성], [류라일 싸대기], [류라일 욕설 논란]은 검색어 10위 안에 모두 들어가 있었고, 그 속에는 [백도희] 이름도 포함되어 있었다. 도희는 이미 지울 수 없을 정도로 포털에 퍼지고 있는 영상을 즉시 확인했다.
영상은 몰래 찍어서 라일의 얼굴이 전부 다 보이진 않았지만, 밑에서 찍은 탓에 표독스럽게 웃고 있는 라일의 얼굴을 확인할 정도는 되었다. 영상 속엔 평소 상냥한 이미지를 유지하던 라일은 온데간데없고, 독기를 가득 품은 라일의 신경질적인 모습이 담겨 있었다.
[- 다시 말해 봐. 뭐라고?
- 네? 아, 아니 그게…… 마지막 촬영이고 백도희 씨가 우니까 저도 모르게…….]
“어머.”
도희는 가차 없이 스타일리스트의 뺨을 때리는 라일의 모습을 보곤 입을 틀어막았다. 그 모습을 본 주완이 책을 읽다 말고 도희 옆에 바짝 붙었다.
[- 씨발, 내가 백도희 년 싫어하는 거 빤히 알면서 그딴 말을 해? 야. 그럴 거면 저 언니한테 스타일리스트 시켜 달라고 해. 너 왜 내 밑에 있니?
- 아…… 아니, 저는 그게 아니라…….
- 왜. 못 하겠어? 내가 말해 줘? 그냥 가라고, X년아.]
‘이래서 내 이름까지 검색어에 올랐구나.’
라일이 자신을 싫어한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상상치도 못한 그녀의 욕설에 도희는 혀를 내둘렀다. 라일은 스타일리스트의 뺨을 때린 거로도 모자라 욕설을 내뱉으며 검지로 그녀의 이마를 툭툭 밀었고, 스타일리스트는 울먹이며 고개를 푹 숙이고 있을 뿐이었다. 매니저가 사람들이 본다며 그녀를 한사코 몸으로 막자 그제야 라일이 악랄한 미소를 지으며 돌아섰다. 그런데, 영상 마지막에 라일이 화면을 빠져나가면서 매니저에게 하는 말은 더욱 가관이었다.
[- 아, 속 시원해. 쟤 자르고 딴 애 쓰자.]
이걸로 끝이 아니었다. 해당 영상이 올라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 사건과 아무 관련 없는 전 스타일리스트의 글이 커뮤니티에 올라왔다.
[안녕하세요, 전 스타일리스트입니다. 영상이 터지고, 이렇게 속이 시원할 수 없네요. 그녀는 촬영 팀에는 무척 잘하고, 정작 자신의 팀에게 본성을 드러냅니다. 이미지 관리하느라 스태프한테도 잘하고 감독한테는 더 잘합니다. 촬영장에 늦거나 펑크 내는 일은 없어서 사람들은 그녀가 굉장히 성실하고 상냥한 줄 아는데, 그것도 다 ㅂㄷㅎ 따라 하는 겁니다. 애초에 닮은 꼴로 뜬 거라 그런지 ㅂㄷㅎ에게 자격지심이 대단합니다. 그걸 소모품보다도 못한 대우를 받던 스타일리스트가 건드렸으니, 어찌 보면 그녀의 행동은 당연하네요.]
전 스타일리스트라고 주장한 사람은 글에서 자신의 신분을 증명하지 않았지만, 영상이 일파만파로 퍼지자 그 글도 덩달아 신뢰도가 높아졌는지 캡처본이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아직 라일의 소속사에선 공식 입장을 내지 않고 있는 상태였다.
“괜찮아?”
병실 침대에 나란히 앉아 기사를 훑어보던 주완이 도희에게 물었다. 도희는 잠자코 기사를 훑어보다가 이내 주완을 바라보며 엷은 미소를 지었다.
“안 괜찮을 게 뭐 있어요.”
“이런 일로 이름 언급되는 거, 안 좋아하잖아.”
“괜찮아요. 나보다 못하다는 걸 스스로 증명한 꼴이잖아요.”
도희가 의미심장하게 빈정대자 주완이 마음을 놓은 듯 피식 웃었다. 그러곤 기다렸다는 듯 그가 비장한 투로 말을 이었다.
“일전에 류라일에 대해 좀 알아봤어. 김 감독과 뇌물 거래한 사실이랑 네 영상을 퍼트리려고 시도한 정황, 증인들을 모아 놨는데 드라마 끝나면 터트리려고 기다리던 중이었어.”
“영상이요?”
그제야 도희는 자신이 길거리에서 울고 있을 때, 주완이 저를 태우고 택시에서 사라지는 영상이 라일의 손에 있다는 사실을 전해 들었다. 그 시각 라일이 그 자리에 있었다는 것도 놀라운데 영상을 찍어 사이트에 올리는 시도까지 했단 말이 도희는 기가 찼다. 도희 역시 심증만 있던 ‘본드 사건’과 관련된 라일의 의심스러운 행동에 관해 자연스레 말을 꺼냈다.
“그걸 놔뒀어?”
주완은 예상대로 분노했고, 이번 일은 결코 그냥 넘어갈 수 없다고 했다.
“하지만 경찰 조사도 끝났어요. 증거가 없거든요.”
“할 수 없지. 숟가락만 얹자.”
주완의 나직한 목소리에 도희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때, 병실 문이 열리고 간호사가 두 사람을 불러냈다.
“검사 결과 나왔습니다. 진료실로 이동하실게요.”
검사 결과가 나왔다는 말에 주완과 도희의 동공이 흔들렸다. 두 사람은 두 손을 굳게 맞잡은 채 병실을 나섰다.
* * *
국선 변호사가 불안한 듯 다리를 떨었다. 순자와 미팅하기로 한 시간이 이미 삼십 분을 넘어가고 있는 채였다. 변호사는 괜스레 순자의 섬뜩하고 괴이한 표정이 자꾸만 마음에 걸렸다. 직원을 시켜 순자에게 전화를 해 보라고 했지만, 순자의 전화기가 꺼져 있다는 답변만 돌아올 뿐이었다.
“진짜 튄 건가.”
제정신이라면 그럴 리가 없는데. 변호사는 재판을 받지 않고 도망가면 어떻게 되냐는 순자의 어처구니없는 질문에 구속 영장이 발부될 수도 있으니 행여나 허튼짓은 하지 말라고 경고했다. 그런데 순자는 마치 작정이라도 한 듯 변호사의 연락을 피하고 있었다.
“설마요. 다른 변호사를 알아보는 게 아닐까요?”
순자에게 계속해서 전화를 걸던 직원이 조심스레 말했다. 사무실에서 징역 얘기를 듣자마자 난리를 피웠던 순자의 행동을 생각하면 그쪽도 충분히 가능성 있는 얘기였다.
“그랬으면 좋겠는데 말이야.”
재판이 얼마 남지 않은 시점에 당장 형을 줄일 방법을 함께 강구해도 모자랄 시간이었다. 변호사는 혀를 차며 들고 있던 자료들을 책상에 던져 버렸다. 이대로 연락이 쭉 되지 않는다면 아무리 변호사가 열심히 재판을 준비한다고 한들 다 소용없는 짓이었다. 변호사는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다른 사건 파일을 훑어보기 시작했다.
* * *
윤선의 앞에 앉은 도희와 주완은 긴장한 채로 침을 꿀꺽 삼켰다. 윤선은 프로답게 침착한 얼굴로 모니터만 바라보고 있어, 검사 결과를 도통 예측할 수 없었다. 진료실에 숨 막히는 침묵이 흐르고, 그 사이로 마우스 클릭하는 소리만 달칵달칵 울려 퍼졌다.
“결과만 놓고 말하면…….”
윤선이 말을 늘어트리며 한숨을 푹 쉬자, 도희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문제없어요. 재발한 것도 아니고, 수술한 곳도 깨끗해요. 이상 없단 말이에요.”
윤선의 말에 도희의 얼굴에 다시 화색이 돌았다. 주완은 그제야 마음을 놓았는지 눈을 지그시 감으며 숨을 정돈했다.
“한 가지 의아한 점은 그런데도 혼수상태가 길었다는 점이에요. 앞으로도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조심해야 된단 얘기고.”
“조심할게.”
윤선이 덧붙인 말에 도희가 행여 겁을 낼까 싶어 주완은 빠르게 말을 가로챘다.
“말만 조심하지 말고. 어차피 이젠 도희 씨가 옆에 있으니까 안심이긴 하다만.”
이제 허튼짓은 안 하겠지. 윤선이 작게 구시렁거리자 도희가 그제야 살포시 미소를 머금었다.
“제가 잘 보살필게요.”
십 년 묵은 체증이 쑥 내려가는 느낌이었다. 비록 아주 안심할 순 없지만, 당장 이상이 없다는 말은 도희를 구원하는 말처럼 느껴졌다. 얼떨떨하면서 기뻤다. 새로 하는 결혼식이 추억을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라 새 출발을 위한 도약이 될 것 같았다.
“걱정하지 마. 너보다 오래 살게.”
주완이 잡고 있던 손에 악력을 더하며 말했다. 침착한 듯했지만, 그의 손바닥이 땀으로 미끌미끌했다. 도희는 그런 주완의 손에 제 마디를 얽어 넣었다. 깍지를 낀 두 사람의 손이 폭 겹쳐졌다.
‘이젠 정말 행복한 일만 남았겠지.’
행복이 찾아올 땐 언제나 갑자기 닥칠 불행이 두려워진다. 주완이 있어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도희는 어김없이 음침한 기분이 스멀스멀 몰려들었다. 그러나 도희는 자신을 향해 미소 짓고 있는 주완을 바라보며 여느 때보다 환한 미소를 띠었다.
* * *
“이거 말곤 없는 거지? 확실하지?”
노을 엔터테인먼트 대표는 다리를 꼬고, 고고한 자세로 고개를 치켜들고 있는 라일을 다그쳤다. 그러자 아직도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한 라일이 제 성질을 못 이기고 소리쳤다.
“모르죠! 저것도 찍히는 줄 모르고 있었는데!”
라일은 데뷔 초, 노을 엔터테인먼트와 계약해 쭉 그 관계를 이어 오고 있던 터라 대표와는 오빠 동생을 한다고 알려져 있을 정도로 사이가 좋았다. 물론 이 사건이 있기 전까진 말이다.
“싸대기…… 때릴 수 있지. 욕도 할 수 있어. 네가 중요하지, 그깟 스타일리스트가 중요하냐?”
노을 엔터테인먼트 대표는 라일을 달래듯 그녀의 편을 들어주었다. 그 말에 신경질적이던 라일의 표정이 조금 누그러졌을 때였다.
“근데 찍히질 말았어야지.”
살벌하게 굳어지는 대표의 표정에 라일이 흠칫 몸을 떨었다. 그러자 라일 옆에 앉아 있던 매니저가 조심스레 말을 거들었다.
“오, 오히려 저런 역할 같은 게 들어오진 않을까요? 이번 드라마도 잘 됐고, 계속 연기력 논란 있었는데 아예 센 캐릭터를 맡아 버리면…….”
어처구니없는 제안에 대표가 매니저를 홱 노려봤다. 매니저는 대표의 눈초리에 죄인처럼 고개를 푹 숙였다. 매니저를 간단히 제압한 대표는 무섭게 눈을 치켜뜨며 라일을 응시했다.
“자숙해.”
“오빠!”
라일은 손을 부들부들 떨며 소리쳤다. 그러자 대표의 표정이 굳어졌다.
“누가 오빠야? 공과 사 구분 못 해?”
대표는 평소 사람들 앞에서조차 오빠라고 불러도 아무 말 안 하던 사람이었다. 확연히 달라진 대표의 반응에 분위기가 심상찮음을 느낀 라일이 입을 다물었다.
“옛정 생각해서 그나마 자숙하라는 거야. 너 지금 광고고, 드라마고 다 잘렸어. 알아?”
“……다, 다시 할 수 있을 거예요.”
주눅 든 라일의 말에 대표가 코웃음을 쳤다.
“백도희 짝퉁이라고 지 입으로 떠들고 다닌 애를 누가 써? 이제 잘 나가는 백도희 쓰지. 그나마 백도희 닮은 꼴로 순수하게 컨셉 잡아 줬더니…… 쯧, 그러게 주제 파악은 좀 하고 살아야지. 예쁘다 예쁘다 해 줬더니 이렇게까지 착각에 빠져 살 줄 몰랐네. ……넌 이 새꺄, 얘 이런 거 왜 보고 안 했어?”
라일을 끊임없이 깎아내리던 대표는 이내 매니저를 향해 언성을 높였다. 매니저는 최대한 대표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으려는 자세로 잠자코 고개를 숙이고 있을 뿐이었다.
“그럼 저…… 어떡해요?”
“일단 상황을 지켜보자고. 계약 해지할지 말지.”
“네? 계약 해지요? 오빠, 아니 대표님! 아무리 그래도 그건 아니죠! 우리가 함께한 세월이 얼만데!”
라일이 배신감에 치를 떨며 말하자 대표가 비뚜름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언제 복귀할 수 있을지 모르는 널 내가 왜 데리고 있어야 돼? 말해 봐.”
“네?”
“이번 일 터지고 위약금 문 것만 얼만 줄 알아?”
“…….”
“너 데리고 있어 봤자 그거 못 메꿔. 네가 연기를 기깔나게 하냐, 비주얼이 튀길 하냐.”
“……!!”
“여기서 여론 더 나빠지면 덩달아 회사 이미지만 망친다고. 어?”
노을 엔터테인먼트 대표는 칼 같기로 유명한 사람이었다. 라일 역시 대표가 사고 친 배우들을 매정하게 잘라 내는 걸 몇 번 보기는 했지만, 설마 그게 자신이 될 거라곤 상상도 못 했던 터였다. 라일은 눈앞이 캄캄했다.
‘어쩌다 이렇게 된 거지.’
난 백도희만 치워 버리면 됐는데. 라일은 제 입술에서 피가 나도록 짓이겼다.
“최대한 어디 나돌아다니지 말고, 눈에 띄지 말고. 얌전히 집에나 있어. 남은 계약이라도 유지하고 싶으면.”
대표의 말에 라일은 한마디도 대꾸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