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남편의 귀환-64화 (64/71)

64화 마지막 촬영

“결혼식?”

촬영을 대기하던 중, 도희는 소스라치게 놀라는 나영의 입을 급하게 틀어막았다. 나영의 격앙된 외침에 멀리 있던 지섭의 시선이 두 사람에 꽂혔다. 도희는 나영에게 주의를 주며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작게 할 거야. 비공식으로 아는 사람 몇 명만 초대해서.”

“그래, 뭐…… 걱정은 된다만 둘이 좋다면.”

나영 역시 도희가 처음 생각했던 것처럼 세간의 이목을 신경 쓰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곰곰이 생각에 잠긴 나영을 보던 도희가 담담하게 말했다.

“괜찮을 거야.”

도희 역시 불안감을 완전히 떨쳐 낸 건 아니지만, 어차피 주완과 재결합을 한다면 세간의 이목을 받는 건 반드시 거쳐야 할 과정이었다. 도희는 주완의 말처럼 그와 함께할 수 있는 모든 추억을 새롭게 쌓고 싶었다. 게다가 아직 완치라고 확정 지을 수 없는 주완의 상태에 도희는 그와 후회를 더 남기고 싶지 않았다.

“그래도 설마 차주승 감독 영화를 선택할 줄은 몰랐는데.”

며칠 전, 나영이 전달한 대본엔 주승의 대본도 함께 끼어 있었다. 그 전엔 주완의 형이란 이유로 주승의 영화는 피했었는데, 도희가 나영에게 주승의 영화를 하겠다고 한 데에는 주완의 귀여운 부탁이 함께 있었다.

‘형이 몇 달 전에 캐스팅 문제로 촬영이 올 스톱됐다고 했어.’

‘어? 그럼 이거 그 대본인 거예요?’

‘네가 맡아 주면 영광일 것 같아. 우리 도희 연기 잘하잖아.’

‘그 말…… 뭔가 치사한 것 같은데.’

‘형 영화 맡아 주면 아무래도 내가 촬영장 가기도 쉽고.’

‘그게 목적이구나?’

도희는 그날 밤 주완의 귀여운 표정을 떠올리며 싱긋 웃었다.

“좋아 죽네, 좋아 죽어. 알겠는데, 너 반년 쉬고 싶다며. 이거 촬영 내년 초엔 들어가야 할 텐데?”

“하지 뭐.”

이미 주완에게 대략적인 영화 스케줄까지 들었던 도희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태연한 도희의 반응에 나영의 눈이 가늘어졌다.

반년은 쉬고 싶다더니. 내년 초라면 길어 봐야 두 달 정도 남았는데. 자세한 내막을 듣지 않아도 도희의 선택에 있어 주완이 큰 영향을 끼친 게 분명했다. 나영은 혀를 끌끌 차며 고개를 저었지만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이유가 뭐든 제2의 전성기를 코앞에 두고, 도희가 쉬지 않는다는 건 나영으로선 다행인 일이었다.

“감독님! 저 어땠어요?”

그때 라일의 낭랑한 목소리가 두 사람의 시선을 앗아 갔다. 지섭과의 마지막 신을 마친 라일은 교태스러운 몸동작으로 김 감독에게 바짝 붙었다. 모니터링을 하던 김 감독은 뭔가 못마땅한 듯했지만 라일에게 쓴소리를 못 하겠다는 듯 털털하게 웃으며 말했다.

“한 번만 더 해 볼까? 마지막이니까.”

“네, 좋아요!”

라일은 평소보다 활기찬 모습이었다. 본드 사건 이후로는 도희에게 시비를 걸지 않을뿐더러 촬영장에서도 조용했는데, 마지막 촬영이라 그런지 그녀의 몸동작이 굉장히 과장되게 느껴졌다. 평소와 다르게 느껴지는 라일의 행동에 도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착각인가.’

대수롭지 않게 시선을 돌리려던 도희는 문득 라일을 살벌하게 노려보고 있는 스타일리스트를 발견했다. 그녀는 악에 받친 얼굴로 라일을 노려보다가 이내 라일의 매니저에게 무언가를 쏘아붙였다. 매니저는 당황하며 스타일리스트의 팔을 붙잡고 매달리듯 그녀를 달랬다.

도희가 그들에게서 눈을 떼지 않자, 나영도 덩달아 도희의 시선 끝을 쫓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스타일리스트는 목에 건 스태프 명찰을 집어던지곤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당황한 매니저는 다급하게 그녀의 뒤꽁무니를 쫓았다.

“분위기 왜 저래?”

“그러게. 관두려나.”

나영의 물음에 도희가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이번엔 오래가나 했다.”

나영의 말에 도희가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전에도 라일의 스타일리스트가 바뀐 게 한두 번이 아니었기에 도희는 이번에도 그런 것 중 하나라고 생각하며 이를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마침내 진짜 마지막 촬영이었다. 해가 뉘엿뉘엿 저물어 갈 무렵, 한강 벤치에 앉은 도희는 지섭과의 마지막 신을 준비하고 있었다. 마지막 신은 노을 아래 두 사람이 평생을 약속하며 입을 맞추는 장면이었다. 스태프들과 배우들은 모두 긴장한 채로 두 사람을 지켜봤다. 보통 때라면 자신의 촬영분이 끝나면 퇴근했겠지만, 마지막 촬영이니만큼 대부분의 배우들이 나와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조감독은 촬영이 끝남과 동시에 샴페인을 터트리려고 만발의 준비를 한 채 대기 중이었다.

“이런 거 질투하나?”

촬영이 시작되기 전, 나란히 앉아 있던 지섭이 도희에게 나직이 물었다. 분명 주완에 관한 얘기였다. 도희는 주완을 떠올리며 수줍은 미소를 머금었다.

“아마도.”

“와, 그 표정. 너무하네. 불행히 남겨진 짝남한테.”

“짝남?”

“짝사랑 남자. 나 아직 선배 좋아하잖아.”

지섭의 돌발 발언에 도희가 화들짝 놀라 주변을 둘러봤다. 다행히 마지막 신 촬영을 앞두고 스태프나 배우들 모두 들떠 있어 두 사람의 대화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사람은 없는 듯했다.

“말조심해!”

“마지막인데 조심은 무슨.”

지섭의 마음을 알고 있는 상태에서 키스 신을 하게 됐기 때문인지 도희는 지섭과의 키스 신이 괜스레 마음에 걸렸다. 이건 일일 뿐인데. 좋아한다는 지섭의 말이 도희를 부담스럽게 했다. 그러자 안절부절못하는 도희의 모습을 지켜보던 지섭이 퉁명스레 말을 흘렸다.

“정 힘들 것 같으면 하는 척만 하던가. 미리 각도 맞춰 보면 되잖아요.”

“어?”

지섭은 아무래도 도희가 주완이 질투할까 봐 걱정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조금 전까지 좋아한다고 고백한 누구 때문인데.

어쨌거나 일은 일이었다. 도희는 자신의 사적인 감정 때문에 후배의 연기를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이럴 때일수록 중심을 잡고 후배를 이끌어 줘야 하는 건 선배가 해야 할 일이었다. 도희는 마음을 굳게 다잡고 총명한 눈빛을 빛내며 지섭에게 말했다.

“안 그럴 거야. 일이잖아.”

똑 부러진 도희의 말에 지섭이 시원섭섭한 듯 비죽 입꼬리를 올렸다.

촬영은 신속하게 진행됐다. 노을이 지는 풍경 아래서 찍어야 하는 신이기에 허락된 시간이 많지 않았다. 만일 몇 번의 NG가 나서 촬영이 지연된다면 마지막이라고 생각했던 스태프들이 내일 다시 이 자리에서 모여야 할 수도 있었다. 사람들은 모두 두 주연 배우의 부담감에 대해 떠들어 댔지만, 정작 도희와 지섭은 아무 걱정이 없었다. 시간 내에 끝낼 수 있다는 자신감에 찬 두 사람은 감독의 사인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리며 마지막으로 대본을 훑었다.

“레디, 액션!”

수향과 지환은 데이트다운 데이트를 마치고, 서로에게 몸을 기대 저물어 가는 노을을 바라본다. 별안간 지환이 고개를 돌려 수향을 응시하면, 수향이 “왜?”냐며 묻는다.

“보고 싶어서.”

“보고 있잖아.”

수향은 다 알면서도 모르는 척 애교스럽게 시치미를 뗀다. 그 모습에 지환은 못 참겠다는 듯 그녀의 이마 위에 입술 도장을 남긴다. 두 사람의 얼굴이 다시 서로를 향했을 때, 수향의 눈빛은 이제 막 사랑을 시작한 사람처럼 달달하고 사랑스러웠다.

“…… 행복하다.”

수향을, 아니 도희를 바라보며 그렇게 말하는 지섭은 자신이 뱉은 말에 묵직한 진심이 담겼음을 느꼈다. 도희의 이마에 입을 맞추는 순간 손끝이 떨리고, 자신을 소중하게 여기는 듯한 그 눈빛에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이 눈빛이 나를 향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잊자고 다짐했는데. 많이 괜찮아진 줄 알았는데. 그간의 노력을 비웃기라도 하듯 도희와 애정 신을 이어 가려는 지섭의 마음이 세차게 흔들렸다. 그런 지섭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완벽하게 수향을 연기하는 도희의 눈동자는 여전히 지섭을 향해 있었다.

“나도. 우리 싸우지 말고 오래오래 행복하자.”

수향이 그렇게 말하고, 지환은 여느 때보다 사랑스러운 수향의 머리를 소중히 끌어안는다. 천천히, 느릿하게 그녀를 쓰다듬는 지환의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행복해야 하는데, 벅차올라야 하는데. 지섭은 그녀를 끌어안을 수 있는 이 순간이 너무 애틋해서 울컥 눈물이 차올랐다. 지섭은 카메라에 자신의 눈물이 잡히지 않도록 고개를 살짝 숙이고 애써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사랑해.”

“나도 사랑해.”

이 신이 끝남과 동시에 꿈에서도 듣지 못할 그녀의 생생한 고백이 지섭의 가슴을 저릿하게 했다. 애정으로 가득 찬 도희의 고백이 지섭의 귓가에 은은하게 번졌다.

그 뒤는 곧장 키스 신이었다. 대사 없이 노을을 뒤로하고 두 사람의 실루엣이 겹쳐지는 장면. 지섭은 커다란 손으로 그녀의 두 뺨을 고이 감싸고, 대본에 없던 애드리브를 했다.

“…… 평생 내 옆에 있어 줘.”

애원과도 같은 고백을 끝으로 두 사람의 입술이 맞닿았다. 지섭은 이전처럼 진한 키스를 하지 않았다. 그저 입술을 맞대고 두 눈을 꼭 감고 있을 뿐이었다.

이게 끝이겠지. 오늘 보고 나면 더는 보고 싶을 때 볼 수 없겠지. 매일 같이 얼굴을 맞대고 함께 호흡하던 도희와 언제 또다시 볼 수 있을지 모른단 사실이 끝내 지섭을 절망하게 했다. 결국 지섭의 눈동자에선 눈물 한줄기가 또르륵 흘러내렸다.

“컷! 오케이!”

단 한 번의 NG 없이 오케이 사인이 떨어졌다. 감독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조감독이 세차게 흔든 샴페인을 터트렸다.

뻥! 뚜껑이 열린 샴페인이 하늘로 기세 좋게 솟구쳤다. 사람들은 저마다 기쁜 마음에 손뼉을 치고 얼굴로 쏟아진 샴페인을 요리조리 피하며 기분 좋게 웃었다.

“수고하셨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서로를 다독이는 인사말이 소란스럽게 오고 갔다. 주변이 분주해진 사이, 지섭은 재빨리 감정을 추스르고 뺨 위로 흘러내린 눈물을 닦아 냈다. 도희는 그런 지섭의 초라한 얼굴을 집요하게 훑어봤다. 지섭은 자신에게서 눈을 떼지 않는 도희의 동정 어린 시선을 장난스레 손으로 가렸다.

“뭘 그렇게 봐.”

퉁명스러운 지섭의 말에 도희가 그의 손을 치웠다. 두 사람의 시야를 잠시 가렸던 손이 치워지자, 언제 슬펐냐는 듯 빙글빙글 웃고 있는 지섭이 보였다.

“수고 많았어요, 선배.”

“…… 너도. 많이 고마웠어, 지섭아.”

어떤 마음인지 빤히 보이는 지섭에게 도희는 별다른 위로를 할 수 없었다. 착잡한 마음에 도희가 나직이 고마움만 전했다. 그러자 지섭은 처음 봤던 그때처럼 산뜻하고 맑은 미소를 띠며 말했다.

“저도요. 선배랑 연기할 수 있어서 영광이었어요.”

“기회가 있다면 또 보자.”

“그렇게 말하면 나 기회 또 만들어요?”

“어쭈, 자만하지 마. 나 이제 예전 백도희 아니거든?”

도희의 자신만만함이 싫지 않은 지섭은 드라마를 시작할 때, 어두웠던 도희를 떠올리며 싱긋 웃었다.

“보기 좋아요. 선배 지금 모습.”

“고마워. 우린 종방연 때 또 보자.”

두 사람이 서로를 마주 보고 웃고 있자, 별안간 김 감독이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우리 두 배우도 수고했어요!”

그제야 벤치에서 일어난 도희와 지섭은 다른 배우들과 인사를 나누기 위해 각자 다른 방향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 * *

재판을 앞두고 국선 변호사와 대면한 순자는 기분이 몹시 좋지 않았다. 한두 명의 고소만 있었더라면 빠져나갈 구멍이 어떻게든 생겼겠지만, 여러 명의 증거가 한데 모아진 단체 고소엔 징역을 피할 방법이 달리 없다는 게 변호사의 판단이었다. 국선 변호사는 재판에서 이기는 것보단 징역을 줄이는 데 초점을 맞추자고 했다. 그는 징역을 줄이는 방법을 이것저것 제안했지만, 징역을 살아야 한단 말에 순자에게 그런 말들은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지금 돈 없다고 무시하는 거야? 돈 많이 주면 징역도 없애 주겠다고 할 거면서! 이래서 공짜 변호사들은……!”

그 말을 들은 국선 변호사는 열심히 늘어놓았던 자료들을 도로 차곡차곡 정리하기 시작했다. 뭐 하는 거냐고 소리치는 순자의 말에 변호사는 무미건조한 투로 말했다.

“싫으시면 법무법인 가셔서 변호사 선임하시면 됩니다.”

“아니, 내 말은 그게 아니라…….”

“제가 말씀드릴 수 있는 건 여기까지인 것 같네요. 잘 생각해 보고 결정하세요.”

순자는 자신이 이토록 무력하게 느껴지기는 처음이었다. 아무것도 없는 순자에게 도박꾼도 사채업자도 돈을 내어 주지 않았다. 그들은 재판만 끝나면 값을 다 치르겠다는 순자의 말도 믿지 않았다. 생방송 인터뷰까지 나와 딸을 모욕했는데, 아무리 딸이라도 그 돈을 주겠냐며 되레 순자를 조롱했다.

빈털터리인 순자가 마지막으로 찾은 곳이 바로 이곳이었다. 여기서까지 변호사의 미움을 사 일을 그르치기라도 한다면 순자는 그야말로 끝장이었다.

“미, 미안합니다. 나도 모르게 흥분을 해서.”

속이 뒤틀리는 것 같았지만, 순자는 더 이상 국선 변호사에게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순자는 하는 수 없이 냉랭한 변호사를 두고 그의 기분이 풀릴 때까지 비굴하게 형량을 줄이는 방법에 대해 묻고 또 물었다.

그러다 문득, 비상식적인 방안 하나가 순자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혹시 재판 안 받고 도망가면 어떻게 되나?”

“예??”

변호사는 제 귀를 의심하며 되물었고, 순자는 그런 변호사를 보며 누런 이를 드러내고 씩 웃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