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화 경고
순자의 눈이 희번득 빛났다. 효주는 물불 안 가리고 덤비는 순자의 거친 모습에 겁을 먹고 주완의 등 뒤로 잽싸게 숨었다. 주완은 몸을 일으켜 빠른 속도로 달려드는 순자를 막아섰다. 하지만 순식간에 허리를 숙인 순자가 효주를 향해 냉큼 팔을 뻗었다.
“요년! 내 너 언젠가 만날 줄 알았지!”
“으앗! 효주는 만나기 싫었는데!”
허공을 마구잡이로 찔러 대는 순자의 팔을 피해 효주가 요리조리 얄밉게 허리를 비틀었다. 왔다 갔다 실랑이를 벌이던 효주는 끝내 병실 구석으로 도망쳤다. 주완이 뒤늦게 순자를 붙잡으려고 했으나 주완의 손도 한발 늦게 허공만 갈랐다.
“요 쥐새끼 같은 년!”
순자는 주완이 보이지 않는 듯 혈안이 되어 효주만 쫓았다.
병실 이곳저곳을 날뛰고 도망 다니던 두 사람은 곧 주완을 가운데 두고 대치했다. 효주는 도로 주완을 방패 삼아 그의 등 뒤로 숨었다. 주완은 순자가 제 앞으로 오자마자 이때다 싶어 순자의 두 어깨를 꽉 잡았다.
“하아, 진정하세요.”
아직 체력이 다 회복되지 않은 탓에 주완의 손엔 절로 힘이 스르륵 빠졌다. 그때 주완을 믿고 효주가 순자를 향해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아줌마가 준 정보 안 썼잖아요! 그럼 돈 안 줘도 되잖아요!”
“저년이! 넌 물건 사 놓고 안 쓰면 환불받냐?!”
효주의 얼토당토않는 주장에 약이 오른 순자는 악에 받쳐 아등바등 몸을 빼냈다. 두 여자는 어느새 주완을 중심에 두고 빙글빙글 돌았다. 정신없이 쏘다니는 두 여자 때문에 주완은 눈이 다 돌 지경이었다.
“그만, 효주야!”
당황한 주완이 두 사람 중 하나라도 잡아 보려고 했으나 주완에겐 그만한 힘이 남아 있질 않았고, 발에 속력이 붙은 두 사람을 혼자 막기엔 역부족이었다.
“아악!”
결국 순자는 효주의 머리칼 끄트머리를 잡아채는 데 성공했다. 순자는 이때다 싶어 잡힌 머리칼을 힘껏 아래로 당겼다. 효주는 단숨에 중심을 잃고 바닥에 그대로 철퍼덕 엎어졌다. 놀란 주완이 젖 먹던 힘을 내 순자를 간신히 붙잡았다.
“그만하세요!”
“차 서방! 우리 도희랑 잘해 보는 거 아니었어? 약혼녀랑 파혼했다며!”
순자는 자신을 막아서는 주완을 거의 때리다시피 힘껏 밀치며 소리쳤다. 그러자 효주가 주저앉은 채로 몸을 웅크리며 뜯겨나갈 뻔했던 머리를 문질렀다.
“우씨, 감히 효주 머리채를 잡아?”
효주가 울먹이며 씩씩거리자 주완이 순자의 두 팔을 단단히 붙든 채 여느 때보다 냉엄한 표정으로 효주에게 말했다.
“이만 가.”
효주는 분한 듯 눈에 힘을 주어 순자를 째려봤다.
“아줌마 짜증 나!”
“장효주!”
머리채를 잡힌 게 분했는지 웅크리고 있던 몸을 벌떡 일으킨 효주는 허리에 손까지 얹으며 순자를 위아래로 흘겨봤다.
“아니꼬우면 내 돈 내놔!”
“꺄악!”
효주는 다시금 손을 뻗는 순자를 보곤 그제야 경기를 일으키며 몸을 피했다. 꽁무니를 내빼듯 요란하게 병실을 빠져나가는 효주의 뒷모습을 순자는 끝까지 살벌하게 노려봤다.
“저, 저……! 놔 봐! 차 서방이 내 돈 대신 줄 거야?!”
순자는 주완에게 꼼짝없이 붙들려 발을 쾅쾅 굴렀다. 그러나 주완은 효주가 도망갈 시간을 벌기 위해서라도, 아침부터 마음의 준비를 해 둔 말을 하기 위해서라도 잡고 있는 손을 놓아줄 생각이 없었다. 한바탕 소란을 마치고 난 주완의 이마엔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주완은 간신히 호흡을 가다듬고 냉정함을 되찾았다.
“제가 왜 그래야 합니까?”
“뭐, 뭐?”
그리고 얼음장처럼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주완은 끝까지 추태를 보이는 순자에게 오만 정이 다 떨어졌다. 한때 장모님이었지만, 지금도 그럴지 모르지만, 주완은 인터넷에 올라온 생방송 인터뷰를 보고는 도저히 순자를 도희의 어머니로 인정할 수가 없었다. 딸의 아픈 과거를 팔아 효주와 거래를 한 것도 모자라 전국적으로 도희를 망신시키다니. 주완의 서늘한 눈동자가 순자의 너부데데한 얼굴을 흘겨보았다.
“얘기 좀 하시죠.”
효주는 병원을 나와 심장을 쓸어내렸다. 아직까지 순자가 잡아챘던 머리 주변이 욱신거렸다. 효주는 헝클어진 머리칼을 정돈하며 뒤늦게 씩씩거리기 시작했다. 오늘 일은 부모님에게도 한 번 맞아 본 적 없는 효주에게 인생 최대 굴욕이었다.
“못된 아줌마! 배로 돌려줄 거야.”
효주가 부들거리며 꺼낸 건 찾은 건 바로 핸드폰에 저장되어 있던 녹음 파일이었다.
[-우선 절반 드릴게요. 나머지는 약점을 듣고 드리고요.]
효주는 멀지만 또렷하게 들려오는 대화 내용을 침착하게 확인했다. 어떻게든 복수를 해야겠다는 오기가 효주의 열정을 이글이글 태웠다. 효주는 최근 순자가 벌인 터무니없는 인터뷰를 떠올리며 순자의 약점이 될 만한 말을 찾았다.
며칠째 실검을 장악하고 있는 순자에 대해 네티즌들은 이러쿵저러쿵 말이 많았다. 순자의 얼토당토않은 연기에 속거나 당장엔 증거 없는 사기와 도박 혐의를 언론 플레이라며 우기는 사람들 때문이었다.
[-당시에 그렇게 돈이 필요했으면…… 아이는 왜 낳았죠?
-돈이 없었어요. 수술할 돈이. 도박으로 다 써서.]
‘이 정도면 자수한 거지?’
효주는 자신과 암암리에 거래한 내용은 싹 지우고, 도박한 혐의를 인정하는 내용만 잘라 언론에 익명으로 보도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또 뭐가 있더라.”
효주는 핸드폰에 순자 관련 기사를 찾아보다가 재판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사기 혐의를 극구 부인하고 있지만, 순자라면 충분히 사기를 치고도 남을 인간이었다. 재판만 열린다면 순자가 징역을 받는 일도 시간문제였다. 하지만 지은 죗값을 치르는 일만으론 효주의 성에 차지 않았다. 분노를 해소하려면 자신이 직접 나서 해를 끼칠 필요가 있었다. 효주는 끙끙거리며 머리를 열심히 굴리다 번뜩 좋은 생각이 떠올라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
“백순자 아줌마 사건 담당 판사랑 검사 좀 알려 줘. 중앙지검 청장님이랑 우리 아빠 친하댔지?”
-네? 갑자기 그건 왜…….
“이왕이면 확실하게 이겨야지! 징역도 최대한 세게 주고!”
-네??
비서의 불안한 되물음 사이로 효주가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효주가 직접 벌줄 거야.”
효주는 감히 누구도 잡은 적 없는 자신의 머리채를 잡은 대가를 톡톡히 치르게 할 생각이었다.
한편 순자는 주완의 냉랭한 분위기에 압도당했다. 주완이 마침내 제 어깨를 놓았을 때도 더는 효주에 관한 생각을 떠올릴 수가 없었다. 순자는 주완이 먼저 말을 꺼내기 전까지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며 그의 눈치만 살폈다.
“각서는 기억하십니까.”
오랜만에 듣는 ‘각서’ 이야기에 순자의 낯빛이 굳어졌다. 각서 얘길 듣자마자 순자는 효주 때문에 잠시 잃어버린 정신이 번쩍 차려지는 것 같았다. 순자는 이미 거슬렀을지도 모르는 주완의 심기를 최대한 더 건드리지 않기 위해 노력하며 사근사근하게 말했다.
“에이, 차 서방. 옛날 일을 왜 또 꺼내고 그래. 내가 오늘 여기 온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앞으로 도희 앞에 얼씬도 하지 마세요.”
“뭐, 뭐?”
순자의 말은 들어 볼 필요도 없었다. 주완은 더는 순자를 상대할 마음조차 없었다.
“당신이 뭘 말하든 앞으로 어떤 지원도 없을 겁니다. 죗값 그대로 받으시고, 저한테든 도희한테든 아무런 도움도 기대하지 마세요.”
“아, 아니! 차 서방! 자네가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나?! 어? 지금 저 사기꾼 같은 년한테 돈 떼먹힌 것도 억울해 죽겠는데!”
순자는 설움을 토로하며 펄쩍 뛰자 주완의 표정이 더 딱딱하게 굳어졌다.
“듣자 하니 사기 친 사람은 따로 있는 것 같은데요.”
완고한 주완의 태도에 순자는 노여움이 치받는지 숨을 거칠게 헐떡거렸다.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진 순자는 몇 번의 복식 호흡 끝에 안정을 되찾고, 언제 화를 냈냐는 듯 가식적으로 사근사근 굴었다.
“차 서방! 알 만한 사람이 왜 이래? 이번에 자네가 나 좀만 도와주면 내가 진짜 손 싹 닦을게! 도희랑도 화해했다고 할게! 응? 그러면 서로 깔끔하고 좋잖아. 안 그래?”
깔끔하다라. 어떤 사고 회로를 통해 도출된 결론인지 알 수 없는 터무니없는 제안에 주완이 얕잡는 듯한 조소를 터트렸다. 하지만 순자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응? 어때. 차 서방, 우리 옛정을 생각해서라도 좋게좋게 가는 게 좋잖아. 그치?”
주완은 사업을 하는 동안, 여러 사람을 상대하며 순자같이 돈에 목숨을 거는 사람들을 수도 없이 봐 왔다. 그리고 그들에게 가장 두려워하는 게 뭔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동안 옛정을 생각해서 많이 봐드렸습니다.”
“……차 서방! 서운하게 자꾸 그러면 나도 가만히 못 있지!”
“못 있으면요?”
순자의 경박한 협박에 주완이 매섭게 을렀다. 순자는 자신의 시커먼 속내를 꿰뚫어 보는 듯한 주완의 날카로운 시선을 차마 피하지 못하다가 이내 발악하듯 외쳤다.
“그, 그야 그럼 나도 뭐라도 하겠지!”
“뭐라도 해 보시죠, 그럼.”
“뭐, 뭐?”
주완의 인정 없는 목소리에 순자가 말을 더듬었다.
이쯤 되면 물러날 때도 됐는데. 순자는 그간과는 다른 주완의 강건한 태도가 당황스럽기 그지없었다. 한술 더 떠 주완은 느긋하게 창가 쪽에 등을 기대고 순자를 정면으로 노려보고 있었다. 햇볕을 등진 그의 얼굴에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어둠 속에서 비스듬히 올라가는 그의 입꼬리는 심지어 사악해 보이기까지 했다.
“저 이길 자신 있으십니까?”
“……!!”
얼음장보다 차가운 목소리가 병실에 나지막이 가라앉았다. 처음 듣는 냉철한 목소리에 기시감이 든 순자의 팔엔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무슨 일을 벌이시려는 순간,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게 가장 좋은 방향이었다는 걸 곧장 깨닫게 될 겁니다.”
돈에 목숨을 거는 사람들이 가장 무서워하는 건, 바로 돈 많은 사람이었다. 막무가내인 순자가 주완에게만큼은 살갑게 굴었던 건 다른 이유가 아니었다. 재벌인 그의 힘이 두려웠던 것이다.
“차, 차 서방! 나 도희 엄마야!”
“그 말씀도 이제 조심해 주시고요. 엄마라기엔 당신이 한 행동이 너무 야만적이라서요.”
“아니, 자네!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가 있어!”
순자는 작전을 바꿔 동정심을 유발하기 위해 하소연도 시도해 봤지만, 주완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더는 볼 일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도희 흔들지 마시고요. 여기까지가 제가 할 수 있는 최대 예우입니다.”
“아무리 그래도……!”
“다음엔 경고로 끝나지 않을 겁니다. 이만 나가 주시죠.”
그 말을 끝으로 주완이 문 쪽으로 시선을 두자, 순자는 억울한 표정으로 문까지 꾸역꾸역 걸어갔다. 순자는 문을 열고도 미련을 버리지 못한 채 불쌍한 눈으로 주완을 쳐다봤지만, 주완은 순자가 완전히 나갈 때까지 매몰차게 노려볼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