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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편의 귀환-61화 (61/71)

61화 다 얘기해

다음 날, 도희는 활기찬 걸음으로 병실을 나섰다. 이른 아침 주완이 깨지 않도록 조심조심 나오면서도 그의 이마에 모닝 키스를 남기는 것도 잊지 않았다.

검사 결과가 내심 두렵기도 했지만 도희는 막연한 긍정만 떠올리는 중이었다. 하늘이 무심하지 않다면 두 사람에게 또다시 이별을 경험하게 할 것 같지 않았다. 도희는 굳은 믿음을 가슴 속 깊은 곳에서 끄집어내고, 그 믿음은 도희의 앞날을 희미하게 밝은 빛으로 비춰 주고 있었다.

그런데, 병원문을 나서려던 그녀의 걸음이 우뚝 멎었다. 이른 시간이라 아직 닫혀 있는 접수처 앞 의자에 낯익은 실루엣이 보였다. 도희는 몇 발자국 더 걸어갔다. 그리곤 그대로 숨을 참을 수밖에 없었다.

순자는 길게 늘어진 의자에 몸을 새우처럼 웅크리고 잠을 자고 있었다. 도희는 그녀가 순자임을 확인하자마자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그리곤 주완의 병실까지 냅다 뛰기 시작했다. 병원 복도를 가로질러 달리는 동안 도희의 머릿속엔 밀어 두었던 불안감이 스멀스멀 몰려왔다.

‘또다시 스트레스를 주면 안 돼.’

순자와 효주가 거래한 걸 알고, 그 얘길 들은 뒤에 쓰러진 주완이었다. 각종 언론에서 떠들고 있으니 조만간 알게 되기야 하겠지만 적어도 안정을 취할 때까진 주완이 순자 일을 피하길 바랐다. 최대한 그를 괴롭히는 요인들은 모두 없애고 싶었다. 도희는 주완을 다른 병실로 옮겨야 할지, 순자가 먼저 찾아와 행패를 부리기 전에 말을 꺼내 놓아야 할지 고민하며 병실 문을 세게 열어젖혔다.

병실 문을 열자마자 주완이 잠에서 부스스 깨어났다. 그는 문 앞에서 헐떡이는 도희를 보고는 화들짝 놀라 상체를 다급하게 일으켰다.

“무슨 일 있어?”

놀란 주완의 얼굴을 보며 도희가 천천히 그에게 다가갔다. 그리곤 아직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순진무구한 얼굴의 주완을 그대로 끌어안았다. 도희의 가슴에 얼굴을 묻은 주완이 영문도 모른 채 팔을 뻗어 도희의 등을 토닥였다. 도희는 파랗게 질려 있었다.

“왜 그래. 무슨 일인데.”

불안한 주완이 재차 물었다. 도희는 대답하기를 망설였다. 다른 변명을 만들어, 어떻게든 순자를 피하게 할까 다방면으로 머리를 굴려 봤지만, 결국 언제까지고 피할 수 없다는 쪽으로 결론 지어졌다.

“엄마가…… 찾아왔어요.”

도희가 힘겹게 입을 떼자 주완은 안고 있던 도희를 놓고, 그녀를 제 옆에 앉혔다. 나란히 앉아 주완은 도희의 손을 살포시 말아 쥐었다. 계속 얘기하란 뜻이었다.

“다신 안 보기로 했어요. 주완 씨 쓰러진 이후로 더는 엄마로 인정하지 않으려고 했어요, 근데…….”

도희가 생방송 얘기를 머뭇거리자, 이를 듣고 있던 주완이 그녀를 다시금 당겨 안았다.

“괜찮아. 힘든 결심했어.”

“……끊어지질 않아요. 이젠 방송에서도 날-.”

“알고 있어.”

“네?”

고민 끝에 입을 뗀 도희의 말을 주완이 가로막았다. 말을 꺼내기도 전, 이미 다 알고 있다는 주완의 말에 도희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떻게…… 뭘요?”

주완을 밀어내고 도희가 다시 묻자 주완은 그녀의 머리칼을 찬찬히 쓰다듬으며 나직이 말했다.

“실검에 내 여자 이름이 올라와 있는데 안 볼 수가 있어야지.”

그제야 도희는 자신이 공인이라는 점과 그동안 얼마나 터무니없는 시도를 했는지 깨닫고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히 이 사실을 알고 나서도 주완이 특별한 이상 증세를 보이지 않았으니 도희는 한숨 놓을 수 있었다.

“또 아픈 데는 없어요? 머리도 괜찮고?”

“괜찮아. 검사 결과 나오면 바로 말해 줄게. 그나저나 도희야.”

그는 걱정스레 도희의 얼굴을 안쓰럽게 바라보며 그녀의 뺨을 어루만졌다.

“이런 거 있으면 다 얘기해. 난 괜찮으니까.”

“그래도…… 혹시 모르잖아요.”

“네가 있으니까, 네가 그랬듯 나도 다 극복할 거야. 걱정하지 마.”

도희를 안심시키는 주완의 다부진 다짐에 도희가 순순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어머니 일도, 네가 그렇게 결정했다면 네 결정에 따를게. 내가 잘할 테니까 걱정 말고 촬영 가.”

불안이 완전히 가신 건 아니었지만, 그의 말 한마디에 쿵쿵 울리던 가슴이 거짓말처럼 진정됐다. 주완의 말은 마치 주문과도 같아서 그가 한 말이라면 뭐든 그대로 이루어질 것만 같고, 복잡하고 해답을 찾지 못한 일 또한 머지않아 의혹 속에서 손쉽게 모습을 드러낼 것 같았다. 도희는 주완의 말만 믿고 순자의 눈을 피해 무사히 병원을 빠져나갈 수 있었다.

* * *

촬영장 분위기는 무척 어수선했다. 이번 주가 마지막 촬영인 탓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도희의 일로 이틀간 떠들썩했던 탓이었다. 순자의 인터뷰가 전파를 타기 전, ‘스위트 셰어 하우스’ 12화 시청률이 이미 28%를 찍은 뒤라 다행이었지만 스태프들의 시선은 여전히 따가웠다. 도희는 빡빡한 공기를 헤치듯 촬영장 안으로 천천히 걸음했다. 도희가 걷는 걸음마다 시선이 따라와 뒤꿈치에 대롱대롱 달려 있는 것 같았지만, 최대한 허리를 곧게 펴고 고개를 빳빳하게 들었다.

“안녕하세요!”

“어, 네.”

활기찬 도희의 인사에도 김 감독은 여전히 본체만체했고, 조감독도 감독의 눈치를 보며 도희를 피하긴 마찬가지였다. 시무룩한 도희가 뒤를 돌자, 거의 동시에 도착한 종선이 천천히 도희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도희는 종선을 향해서도 공손하게 허리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괜찮은 거야?”

종선은 인사 대신 특유의 너그럽고 퉁명스러운 말투로 그녀의 안부를 물었다.

“네? 아, 네.”

“그래, 힘든 거 있으면 얘기하고. 무슨 일인진 몰라도 어미가 그러면 안 되는 거야.”

그렇게 말한 종선은 더 자세한 건 묻지 않고 도희의 곁에서 멀어졌다. 도희는 종선의 배려에 감사하며 그녀의 뒤통수에 대고 고개를 살짝 숙였다.

뒤이어 지섭이 모습을 드러냈다. 지섭은 도희를 발견하자마자 강아지처럼 반색하는 얼굴로 달려와 그녀의 안색을 살폈다. 그 모습에 도희가 기분 좋은 실소를 터트렸다.

‘아무래도 쟤가 한 짓 같은데.’

도희는 동창생이라고 올라온 글쓴이의 정체를 아직까지 의심하고 있었다.

“이제 걱정 안 해도 되겠네.”

지섭이 도희의 얼굴을 관찰하다 말고 털털하게 말했다. 생각보다 평온한 얼굴을 하고 있는 도희를 보며 대놓고 안도를 하는 지섭의 모습에 도희가 장난스레 웃었다.

“내 걱정 때문에 아무것도 못 했단 말처럼 들린다?”

“그걸 이제 알았어? 눈치도 드럽게 없고.”

지섭의 너스레에 촬영장 분위기에 압도당했던 도희의 긴장감이 조금 풀어졌다. 든든한 종선의 위로, 그리고 친구처럼 편안한 지섭의 장난. 도희는 얼마 남지 않은 촬영을 마지막까지 잘 마무리해야겠다고 다시금 굳게 다짐했다.

* * *

도희가 나가고 정오가 다가왔다. 주완은 순자가 찾아온다면 큰 소란 없이 그녀에게 대응할 생각으로 병실 앞을 지키고 있던 경호원들을 일부러 물린 상태였다. 만발의 준비를 하고 주완이 환자복 위에 카디건을 걸쳤을 때, 먼저 모습을 드러낸 건 뜻밖에도 순자가 아닌 효주였다. 주완은 쭈뼛거리며 병실을 들어오는 효주를 보곤 사람 좋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잘 있었어?”

뜻밖의 다정함에 효주는 제 발을 저린 듯 흠칫 몸을 떨었다. 효주는 주완에게 다가오길 시종 주춤거리면서도 꾸역꾸kjmdm역 걸어왔다. 그리고는 뒷짐 지고 있던 한 손을 내밀어 그의 손바닥 위로 사과 한 개를 떨어트렸다.

“……효주 사과야.”

“왜?”

“효주가…… 도망가서 미안해. 스트레스 준 것도 미안하구 또…….”

효주는 의기소침해 보이기도 하고 주눅 들어 보이는 얼굴로 몸을 배배 꼬았다. 사과를 건네고도 갈 곳 없는 시선을 이리저리 움직이는 효주의 모습을 보고 주완이 그녀의 정수리를 마구 헝클었다.

“괜찮아. 몰랐잖아.”

산뜻한 미소를 짓는 주완의 너그러움에 돌연 효주의 눈이 반짝였다.

“그럼 다시 효주랑 잘 해 볼 거야?”

“그건 안 돼.”

그녀의 해맑은 질문에 주완의 단호한 대답이 떨어졌다. 그 말을 듣자마자 효주의 입이 부루퉁하게 튀어나왔다.

“쳇. 효주도 알아.”

의외로 체념이 빠른 효주를 보며 주완이 다행이라고 생각하던 찰나였다.

“그 언니가 맨날 병실 오는 거 봤어. 언니는 겁도 없나 봐. 효주는 무서웠는데…….”

효주도 주완이 쓰러지고 아주 발길을 끊은 건 아니었다. 열흘에 한 번 정도였지만, 하루는 로비에 한참을 앉아 있기도 하고, 하루는 병실에 들어가지 않고 누워 있는 주완을 보다가 도망가기도 했었다. 효주는 그때마다 병실이 제집인 양 생활하는 도희를 봤었다. 한창 드라마를 찍고 있어서 바쁠 텐데, 도희는 처음보다 더 야윈 모습으로 꿋꿋하게 주완의 곁을 지키고 있었다.

“……그랬어? 힘들어하진 않았고?”

주완은 처음 듣는 도희의 고생을 좀 더 자세히 알고 싶어 물었다. 효주는 잠시 당시의 상황을 회상하듯 미간을 찌푸리고 심각하게 눈을 위로 치켜떴다.

“음…… 좀 야위고, 가끔 우는 거 보긴 했는데 그래도 씩씩했어.”

“그래? 다행이네.”

주완은 어쩔 땐 금세 부서질 것 같은 유리 같으면서도 어쩔 땐 누구보다 강해 보이는 도희의 단단한 모습을 마음속에 생생하게 그려 봤다. 결코 움직이지 않을 것 같은 부현의 허락을 받아 낸 도희기에 힘겨운 싸움을 했으리라고는 생각했지만, 효주의 입에서 듣는 도희는 좀 더 새롭게 느껴졌다. 주완은 홀로 힘든 시간을 견딘 도희가 내심 자랑스럽고 기특했다. 그렇게 주완이 잠시 도희 생각에 잠겨 있을 때였다. 별안간 효주가 그의 상념을 흩어 놓았다.

“효주는 악역 아니니까 이쯤에서 물러날게!”

“뭐?”

효주의 뜬금없는 선언이 하도 우스워서 주완은 그만 어처구니없는 웃음을 터트렸다.

“진짜야! 효주가 깔끔하게 포기할게!”

주완이 왜 웃는지 모르는 효주는 한 번 더 자신의 결백을 강조했다. 그러자 주완이 효주를 타이르듯 말했다.

“그래, 앞으로도 종종 보자.”

“응! 효주 미련 없으니까 가능해!”

티 없이 맑은 효주의 우렁찬 대답에 주완이 다시 한번 웃었다.

그때, 바깥쪽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뒤를 돌아보니 병실 문 바깥에 실루엣 하나가 아른거리고 있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문 쪽에 꽂혀 떨어지지 않고 있을 때였다.

“여긴가?”

문은 노크도 없이 무례하게 열렸다. 그곳에는 순자가 허름하고 부스스한 차림으로 서 있었다. 순자는 방금 자다 깬 사람처럼 머리는 사방으로 뻗쳐 있었고 옷은 다 구겨져 있는 너절한 몰골이었다.

“맞네! 차 서방!”

주완의 얼굴을 확인하자마자 순자가 누런 이를 드러내고 활짝 웃었다. 그러자 그제야 순자를 알아본 효주가 저도 모르게 순자를 알은체했다.

“어? 못된 아줌마……?”

뒤늦게 효주를 발견한 순자의 인상이 와락 구겨졌다.

“너! 너 잘 만났다! 내 돈 내놔, 이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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