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화 평범한 가족
촬영이 쉬는 날이었던 도희는 주완의 검사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검사가 끝날 때까지 한참 기다려야 한다기에 병원 복도 한가운데서 모자와 마스크를 쓴 채로 지섭에게 전화를 건 것이었다.
“누구야?”
한 번 더 그렇게 묻는 주완의 물음에 도희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긴장이 되지.’
도희가 지섭이라고 말하려던 순간, 수화기 너머로 지섭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 촬영 중이라. 다음에 통화해요.
설명할 틈도 없이 전화가 끊기자, 도희는 주완을 올려다봤다. 그녀의 주눅 든 표정에 주완의 눈이 가늘어졌다.
“은지섭?”
“네, 일이 좀 있어서요.”
주완은 최대한 불쾌감을 감추려는 것 같았지만, 이미 반가움으로 빛났던 그의 표정이 단숨에 그늘지는 게 느껴졌다. 그는 잠시간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하더니 시무룩한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쉬는 날까지 일하지 마.”
도희는 고심 끝에 질투를 숨기려는 주완의 얼굴이 무척이나 사랑스러웠다. 그와 어울리지 않는 의기소침한 표정에 몹시 입을 맞추고 싶어졌다. 도희는 몸을 완전히 돌려, 까치발을 들고 그의 입술 위에 제 입술 도장을 찍었다. 그러자 부루퉁하게 튀어나왔던 주완의 입매가 기분 좋게 포물선을 그렸다.
“봐준다.”
그렇게 말한 주완은 도희의 머리칼을 다정하게 흐트러트렸다.
한편 광고 촬영장, 한구석에서 전화를 받은 지섭은 옆에 들려오는 남자 목소리에 가슴이 답답해졌다.
“나 촬영 중이라. 다음에 통화해요.”
눈치껏 전화를 끊은 지섭은 착잡한 얼굴로 핸드폰을 내려놨다.
지섭은 어젯밤 나영에게 전해 들어 도희의 사정을 모두 알고 있었다. 어젯밤 도희가 전화를 받지 않아 지섭은 실례를 무릅쓰고 나영에게까지 전화를 걸었던 것이다.
주완이 깨어났단 얘길 들었을 때 지섭은 기분이 묘했다. 한 달이 넘는 시간 동안 깨어나지 않는 사람 곁에서 희망없이 기다린 도희를 볼 때면 항상 안타까움이 그득했었는데. 다행이란 생각을 하면서도 마음 한편에 쓸쓸한 기분이 밀려들었다.
지섭은 그간 도희가 제게 기대길 바라며 ‘편한 후배’로서 그녀 곁을 지켰다. 아무리 편하게 해 줘도 늘 적당한 곳에서 선을 긋는 도희였지만 지섭은 그거라도 하고 싶었다. 그러다 보면 혹시나, 만에 하나 자신에게도 기회가 오지 않을까 싶었다. 하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지섭의 자리는 없었다.
그때 진동이 울리고, 지섭은 내려놓았던 핸드폰을 다시 들었다.
“어.”
-밥값은 충분히 한 것 같은데?
여자의 걸걸한 목소리가 들려오자마자 지섭이 곤란한 듯 입꼬리를 올렸다.
“알았다니까. 촬영 끝나면 바로 사 줄게. 재촉은.”
그녀는 다름 아닌 지섭과 함께 연극을 했던 세동 고등학교 선배, 도희의 동정론에 박차를 가해 주었던 글쓴이의 정체였다.
-없는 사실 지어낸 것도 아니고, 나도 좋은 일 한 것 같아서 좋긴 하다만. 너무 유명해져서 신상 털리는 거 아닌가 몰라.
여자의 핀잔 사이로 아이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생명력 넘치는 우렁찬 소리에 지섭이 따뜻한 미소를 지었다.
“걱정 마. 누나한테 피해 없게 할게. 누나한테 뭐라고 하면 내가 했다고 하면 돼.”
-어머, 그래도 돼? 그래도 넌 이름이 있는데.
“괜찮아. 만에 하나 그런 일 있으면.”
-그래, 네가 그렇게까지 말하니까 든든하다. 하여튼 멋있다니까! 도희가 이걸 몰라주니 아쉽네.
“……됐어.”
지섭은 제 마음을 관철한 선배의 아부 섞인 위로를 애써 부정하며 전화를 끊었다. 착잡한 지섭은 핸드폰을 쥔 채로 잠시 멎어 있었다.
‘괜찮은지 알고 싶다.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싶다. 보고 싶다. 속내를 다 드러낼 정도로 좋았던 사람인데 이대로 포기할 수밖에 없는 건가. 이게 끝인가. 병문안을 핑계로 찾아가면 안 될까. 그럼 그녀가 불행해질까. 아쉽다. 그러나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
지섭은 저도 모르게 아쉬움을 꺼내 보고, 못다 한 사랑에 미련을 놓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체념을 위한 여러 현실적인 상념들을 일부러 끄집어냈다.
‘처음부터 내 자린 없었지. 선배가 곁을 내준 적도 없었고. 혼자 힘이 되겠다고 나선 건 나였고, 그걸 알아주길 바란 건 아니었다. 어차피 내게 올 게 아니라면, 선배가 내 정성을 알고 모르고는 중요하지 않다. 선배는 행복한 결말을 맞이했으니까, 이제 나만 마음을 다잡으면 된다.’
머리론 모든 결론이 명확했지만, 가슴이 그 방향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렇게 지섭이 우울감에 빠져들려는 순간, 뒤쪽에서 매니저가 그를 불렀다.
“지섭아, 촬영 준비!”
지섭은 새삼 자신의 사색을 깨 준 매니저에게 감사하며 특유의 맑은 미소를 손쉽게 되찾고 촬영장으로 달려갔다. 복잡하고 장황한 생각들이 한순간 깨져 버리자 지섭의 머릿속엔 한 문장만이 쓸쓸하게 남았다.
‘그래, 잊자.’
* * *
검사를 모두 마치고 주완이 겨우 한 끼를 먹게 되었을 때, 병원에선 간단한 저녁을 전달했다. 속에 무리가 가지 않는 흰죽과 장조림, 부드러운 두부와 계란찜이 식단의 전부였다. 주완은 침대를 세우고 앉아, 제 앞에 반찬 뚜껑을 차례차례 여는 도희의 손만 물끄러미 바라봤다. 도희는 그런 주완의 뜨거운 시선을 느끼면서 미소를 머금고 주완에게 수저를 내밀었다.
“응?”
그런데 무슨 일인지 주완은 수저를 받지 않았다. 도희가 의아한 듯 그를 보자, 주완은 기대에 찬 눈동자로 음흉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설마…….”
먹여 달라는 건 아니겠지?
주완은 어리광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죽을병에 걸렸을 때도 도희에게 말 한마디 없이 홀연히 떠나 버린 그였다. 그런데 똘망똘망한 눈을 하고 있는 주완을 보고 있자니 도희는 좌우간 자신이 짐작하고 있는 일을 그가 바라고 있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진짜?”
그렇게 물으며 도희는 들고 있던 수저로 떠먹이는 시늉을 했다. 그러자 주완은 의심의 여지 없이 고개를 단숨에 끄덕였다.
죽을 고비를 넘기면 사람이 변한다더니, 그런 건가. 도희는 그의 낯선 어리광이 싫지 않으면서도 어색해서 온몸이 간지러웠다. 그녀는 낯간지러운 감각을 애써 외면하며 수저로 평평한 흰죽을 한술 떴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주완의 입이 살짝 벌어졌다. 아기 새가 먹이를 받아먹듯 입을 벌리는 모양새에 도희는 수저를 그의 입안으로 밀어 넣으면서 그만 웃음을 터트렸다.
“맛있다.”
도희가 웃거나 말거나 주완은 만족스러운 듯 입을 오물거렸다. 주완의 해맑은 모습에 도희는 다시 한번 흰죽을 떠먹일 수밖에 없었다. 처음엔 흰죽만 떠먹이던 도희도 점차 장조림을 얹고, 계란찜과 두부를 번갈아 가며 입에 넣어 주었다.
‘주완 씨를 닮은 아이를 낳는다면 이런 기분일까.’
특별한 불만 없이 주는 대로 받아먹는 주완의 순순한 모습에 도희는 뜬금없는 뭉클함과 애처로움이 동시에 밀려들었다.
“진짜 이상하다.”
“뭐가?”
“그냥…… 아이 같아서요.”
그를 아프게 할 의도는 아니었지만, ‘아이’라는 말이 나오자 주완이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는 얼굴로 눈동자를 황황히 굴렸다. 그 모습에 도희가 주완을 가볍게 툭 쳤다.
“이제 괜찮아요. 아니, 당신이랑 함께하면 다 극복할 수 있어요.”
“……아이, 낳고 싶어?”
주완의 조심스러운 질문에 도희가 잠시 망설였다. 그동안은 남편도, 아이도, 평범한 가정도 도희에겐 모두 아픈 단어일 뿐이었다. 하지만 더 이상 ‘남편’은 실패가 아니었고, ‘아이’ 또한 도희에게 새로운 기대감을 안겨 주고 있었다. 품어 보지 못한 생명의 지나간 아픔은 여전히 안타깝고 슬프지만, 앞이 캄캄하기만 했던 예전과 지금은 분명 달랐다.
“네가 원하지 않으면 난 낳지 않아도 상관없어.”
머뭇거리는 도희의 모습에 주완이 위로하듯 말을 덧붙였다. 그제야 도희는 또렷하고 확신에 찬 눈동자로 그를 바라봤다.
“난 다시 평범한 가족을 꿈꾸게 됐어요.”
주완은 도희의 허락을 단숨에 이해했다. 그리곤 진심으로 고마운 마음을 담아 도희의 손을 굳세게 쥐었다. 주완의 악력에 도희는 손이 저릿해졌지만, 도희는 이를 티 내지 않고 웃으며 그의 손을 맞잡았다.
“자, 마저 먹어요.”
도희가 수저를 다시 그의 앞으로 들이밀 때였다. 별안간 문이 벌컥 열리더니 정 비서가 발을 들이곤 그대로 굳어졌다. 그의 손에는 커다란 꽃다발이 하나 들려 있었다.
분명 병문안을 온 것 같은데, 정 비서는 어쩐 일인지 두 사람을 보곤 그대로 굳어져 미동도 하지 않았다. 도희와 주완은 그런 정 비서의 모습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뭐 해?”
참다못한 주완이 묻자, 넋을 놓은 정 비서가 삐걱거리며 두 사람을 향해 걸어왔다. 정 비서는 엄청난 감정의 파동을 느낀 사람처럼 입술을 씰룩이고 있었다.
“정 비서님……? 우세요?”
자세히 보니 그의 눈엔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었다. 놀란 도희가 그렇게 묻자, 정 비서는 무언가에 북받친 사람처럼 오른팔을 들고 씩씩하게 눈물을 닦아 냈다.
“그게, 그게 아니라, 두 분이 같이 계시는 모습을 보니까…… 좋아서…….”
정 비서는 눈가가 빨개지도록 소매로 눈을 벅벅 닦아댔다. 도희와 주완은 정 비서의 반응에 서로를 마주 보며 웃었다.
“정 비서 때문 아니라니까.”
정 비서는 지금껏 두 사람의 이혼을 자신이 부추slakpw겼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혼 직전, 자신이 결혼기념일에 몰래 보낸 꽃다발 때문에 두 사람이 크게 다툰 사실 때문이었다. 그 일이 있고 난 뒤 두 사람이 별거를 하게 되었고, 별거가 곧 이혼으로 이어진 탓에 정 비서는 주완의 위로에도 일말의 죄책감을 내려놓을 수가 없었다.
“정말 다행입니다. 두 분 정말…….”
누구보다도 주완과 도희가 다시 맺어지길 강하게 바랐던 정 비서는 감격에 겨워 끝내 말을 잇지 못했다. 그때, 병실엔 또 한 명이 커다란 꽃다발을 안고 들어왔다.
“나영아!”
순자 인터뷰 때문에 바쁜 줄 알았던 나영은 시간을 쪼개어 병원에 왔다고 답했다. 그녀는 병실에 들어오자마자 퉁명스럽게 주완에게 꽃다발을 내밀었다.
“축하해요. 이번에도 도희 상처 주면 진짜 가만 안 둘 거예요.”
주완의 곁엔 벌써 두 개의 꽃다발이 화려하게 놓였다. 병실은 두 사람의 등장만으로도 온기가 꽉 찬 듯했다.
* * *
전날 인터뷰를 마치고 온 순자는 밤새 술을 마시다가 모텔에서 겨우 잠을 청하고 느지막이 일어났다. 순자는 오후가 되면서 부침개 뒤집히듯 바뀐 언론 상황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느럭느럭 움직여 겨우 TV를 켠 순자는 ‘연예가 X 파일’ 에서 마침 제 이름이 언급되는 걸 보고 입꼬리를 올렸다. 그런데 TV에서 흘러나온 영상들은 순자가 생각했던 방향이 아니었다.
[돈만 투자하면 수익이 나는 비즈니스 모델이라고 했어요. 처음엔 사람이 워낙 살갑고 그래서 사기일 거라곤 전혀 생각하지 못했죠. 몇 달 동안 동네 이웃이었다니까요. 근데 가명까지 쓰면서 피해자가 여럿인 걸 알고…….]
“저, 저게 뭐야?”
피해자의 인터뷰는 모자이크 처리와 음성 변조로 이루어졌다. 사기 행각이 언론에 알려짐과 동시에 자신이 소속사를 고소한 일이 무용지물이 될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때 핸드폰에 진동이 울렸고, 순자는 다급함에 허둥지둥 핸드폰을 확인했다. 긴장하고 메시지를 확인한 순자는 마치 도박에서 돈을 따기라도 한 것처럼 큰 소리로 쾌재를 불렀다.
“그렇지!! 이거지!!”
순자의 핸드폰에 들어온 건 다름 아닌 도희와 주완이 병실 복도에서 포옹하고 있는 사진이었다. 멀리서 찍어 흐릿하게 보이는 두 사람의 실루엣은 한눈에 보기에도 애인처럼 보였다. 순자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최근 도희에게 사람 붙인 일을 뿌듯하게 여겼다.
순자는 부랴부랴 짐을 챙겼다. 상황이 어떻게 흘러가든 도희가 주완만 잡았다면 더는 이런 구질구질한 모텔에서 썩고 있을 이유가 없었다. 예전처럼 주완만 잘 구슬린다면 가장 값비싼 변호사를 선임할 수 있고, 도희와의 일은 화해했다며 대충 둘러대면 그만이었다. 순자는 룰루랄라 노래를 부르며 서둘러 방을 나섰다.